좀처럼 말이 없던 아버지였기 때문에 여간 당혹해하면서도 정인은 항상 모든 것이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도 얼굴에 새겨진 어두운 그림자도 정인에게는 부모로서의
한낱 기우에 불과한 것으로 흐려버렸다.
그랬구나.그래서 그렇게 어두운 얼굴이었구나.
"지금은 저 분들도 조금씩 이해를 하고 있단다."목소리를 낮추면서 조용히 일렀다.
"충장로 M양장점 꼬마 엄마를 찾아가서 네가 좀 부탁해 봐라..그 아줌마만 물러서면 다들 따를 눈치다"
정인은 슬품과 분노의 감정이 교체되면서도 빨리 실마리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M양장점으로 찾아 갔다.
매섭고 매몰찬 인상만을 연상했던 정인은 눈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은 이 세련된 부인을 대하자
정중히 호소하듯 말했다.
"제가 정인인데요"
"동명동 아줌마 아들?"
"네.맞아요.드릴 말씀이 좀 있어서..."
그리고는 머뭇거렸다.
"드릴 말씀이라고?"
"아주머니,저희 좀 도와 주세요.네~~"
"글쎄.내가 뭐 도와줄 게 있을라고?"그녀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아주머니만 물러서면 다들 이해하겠답니다.
"자네는 아직 세상 물정 몰라."
"네~에?"
"자네 아버지가 가게 하고 집까지 팔아 도망가려는 걸 내가 눈치챘지.
사람이 그렇게 살면 못써요.순리대로 살아야지.순리대로..."
"아주머니,그게 아니구요.부채가 많아서 모두를 같이 정리하려고 했던 거래요."
"부모와는 다르다 생각했더니,이제 보니까 자네도 부모하고 별 다른 게 없구만.
삼백년 묵은 여우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속여." 정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대들었다.
"그래서 아주머니가 제 어머니 결혼반지까지 가져 가셨나요,?"
"누가 그러던가?.그건 말이야.자네 어머니가 미안하다면서 손수 준 거라구.
나도 안받으려 했지만 사정이 워낙 딱하길래 받았지.이 일이 있기전까지만 해도
자네 어머니하고 그런 사이가 아니였네"
그녀의 본색을 보는 것 같아 정인은 서러웠다.
고양이가 쥐 다루듯 차갑고도 침착한 이 부인앞에 치욕을 느끼면서도
또,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부탁했다.
"아주머니 조금만 봐 주세요.우리는 충분히 갚을 수 있어요.시골에 땅도 많이 있고
산도 많아요.우리는 재기할 수 있어요"
"그게 몇푼 될라구?"
"아주머니만 한발 물러선다면 다들 빛 갚을 때까지 도와준다지 않아요."
"어린 사람이 아무 것도 모르고 계속 저러니...참 딱하구만..."
"엄마 안녕!"
"간지 얼마됐다고 또 왔니?
"엄마 보고 싶어서 왔어 "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인은 이 쾌활하고 명랑한 음성에 고개를 처들었다.
순간 비참한 표정이 되어 스프링에서 튀듯 도망처 나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무작정 충장로를 걸었다.문득 경은이와 만나기로 약속한 일이 생각나자
남양제과점으로 발길은 돌렸다.아직도 한시간이상 남아 있었다.
제과점 구석에 앉아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민 정아! 정아를 여기서 만나다니?
방학의 기쁨에 들 뜬 귀향길,즐거운 기차여행의 동반자였던 그리고 자신을 여유있게 과시했던 그녀를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마주치다니!
정인은 미칠듯이 머리를 쥐어 짰다.세상이 너무 좁은 게 원망스러웠다.
불과 2주전,광주행 새마을호를 아슬아슬하게 탔다.
"어휴~~또 늦을 뻔 했네."
가방을 선반위에 올려놓고 털썩 주저 앉았다.8호차 55번.
정인은 이마에 흐른 식은 땀을 닦으며 담배를 입에 문다.
"후~~~훗"
흩어지는 담배연기를 손바닥으로 저을 때였다.
"어머!"깜짝 놀라는 앳띤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자리를 잘못 앉았나요?"
정인은 차표를 찾으려고 손을 넣으며 물었다.
"8호차 55번 맞죠?"
"네.왜 그러세요?"
"아니예요.아무것도 아니예요.제가 56번이거든요.죄송해요"
정인은 훔치기라도 하다가 들킨 듯그녀를 흘낏 처다보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약간 작은 체격에 탄력있는 얼굴은 천진난만하면서도 세련미가 넘쳤다.
또렷하고 둥근 눈망울이 구김없이 쾌활하다.
영영 이별이라도 하는 듯 애처러운 눈물을 흘리는 갓스물의 처녀의 전송을 뒤로 한 채
열차는 플랫홈을 빠져 나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