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금루
- 이제현
이제현(李薺賢 : 1287~1367)은 자가 중사(仲思)요, 호가 익재 (益齋) ․ 실재 (實齋) ․ 역옹 (櫟翁)이다. 1301년 문과에 급제. 연경의 만권당 (萬卷堂)에서 원 (元) 나라 학자들과 고전을 연구하였다. 정당문학 (政堂文學)으로 김해군 (金海君)애 봉해지고, 문라시중에 올랐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정주학 (程朱學)의 기초를 세웠으며 원나라 조맹부의 서체 (書體)를 도입하였다. 저서로 익재난고 (益齋亂藁),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 (櫟翁稗說) 등이 있다.
이 글은 원제가 운금루기 (雲錦樓記)로, 동문선 제69권 기(記)에 실려 있다. 아름다운 경치란 반드시 먼 산 속이나 바닷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까운 우리 주변에도 자리잡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를 뿐이다. 사람이 많은 도화지 속에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를 뿐이다. 사람이 많은 도화지 속에 있던 연못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그곳을 가꾸어 새롭게 단장한 사람만이 능히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음을 이 글은 보여준다. 명예와 이익만을 다툴 때는 오직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조그만 사물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만족할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 하겠다.
산천을 찾아 구경할 만한 명승지가 반드시 궁벽하고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임금이 도읍한 곳으로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도 진실로 구경할 만한 산천은 있다. 그러나 명예를 다투는 자는 조정에 모이고 이익을 다투는 자는 시장에 모이게 되니, 비록 형산(衡山) ․ 여산(廬山) ․ 동정호(洞庭湖) ․ 소상강(瀟湘江)이 반 발자국만 나서면 굽어볼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어서 우연히 만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사슴을 쫓아가면 산(山)이 보이지 않고, 금(金)을 얻게 되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털끝만한 것을 살피면서도 수레에 실은 나뭇짐은 보지 못한다. 이것들은 마음이 쏠리는 곳이 있어 눈이 다른 데를 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일일 벌이기를 좋아하면서 재력이 있는 자는, 관문(關門)이나 나루를 지나 시골 마을을 골라 자리잡고, 산천을 두루 유람하면서 스스로 고상하다고 여긴다.
경성 남쪽에 한 연못이 있는데 백 묘()는 된다. 그 연못가로 빙 둘러 있는 것들은 어염집들로서 고기의 비늘같이 즐비하게 깔렸으며, 짊어지고 이고 말을 타고 걷는 사람들이 그 곁을 왕래하며 줄이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그윽하면서 넓은 경내가 그 사이에 있는 줄을 알 것인가?
그 후 지원(至元) 정축년(丁丑年)1)
이에 그의 부친인 길창공(吉昌公)과 형제와 동서들을 그 누각 위로 청하여 술자리를 베풀어 즐겁게 노느라고, 날이 저물어도 돌아가는 것을 잊을 지경이었다. 그 때 아들 가운데 큰 글씨를 잘 쓰는 자가 있었는데, 운금(雲錦)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이것을 달아 두니ㅡ 이에 누각의 이름으로 삼았다.
내가 시험삼아 가서 보니 붉은 꽃 향기와 푸른 잎 그림자가 넓게 연못 속에 끝없이 비치는데, 어지러이 흩어지는 바람과 이슬이 연파(烟波)에 움직이니, 이름이 헛되지 않다고 할 만하다. 그뿐만 아니라 용산의 여러 봉우리가 청색을 모으고 녹색을 바르고 처마 밑으로 몰려들어, 컴컴할 때와 밝을 때와 아침과 저녁에 따라 늘 각각 다른 모양을 나타낸다.
또 건너편 어염집들이 나타내는 자세한 모습을 누각에 앉아서 하나하나 셀 수도 있다. 그리고 왕래하는 사람, 달리는 사람, 쉬는 사람, 돌아보는 사람, 부르는 사람, 친구를 만나 서서 말하는 사람, 어른을 만나 절하는 사람 등이 모두 형체를 숨길 수 없으니, 바라보며 즐길 만하다, 그러나 저편의 그 사람들은 연못만 있는 것을 보고 누각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니, 어찌 또 누각 안에 사람이 있는 줄을 알겠는가? 구경할 만한 명승지는 반드시 궁벽하고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조정과 시장 사람들이 언제나 보면서도 그것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두어 사람들에게 경솔히 보이지 않았음인가?
권후는 만호의 부절(斧節)을 허리에 차고 외척의 세력을 깔고 앉았으며, 나이는 옛사람의 강사(强仕)할 정도가 되지도 않았다. 으레 부귀에 빠져 취해 있을 때인데, 그는 인자(仁者)와 지자(智者)가 즐기는 바를 즐기되, 백성들을 놀라게 하지도 않고 선비들에게 미움도 받지 않으면서 시장과 조정 사람들이 보지 못한 곳에서 넓은 경내를 차지하여, 그 어버이를 비롯하여 손님까지도 즐겁게 하고,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남에게까지 즐겁게 하니, 이는 실로 가상할 만한 일이다.
1) 지원(至原)은 원나라 순제(順帝) 연간(1335~1340)의 연호로서, 정축년은 고려 충숙왕 6년(1337)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