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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사람<5>: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은, 조영남
오랜만에 글을 쓴다. 그동안 노느라 바빴다. 그런 중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빨리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야 하는데’ 하는 부담이 없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마뜩치 않아 ‘도대체 나에게 글이 무엇이관데 스스로를 이렇게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왜 글을 쓰는 것일까? 나도 한 때는 글을 써서 돈을 벌고자 한 적도 있었다. 결국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쉽기보다 다행스럽다. 출판한 책이 판매 부진을 겪은 후에도 계속 글을 썼는데 그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그나마 인생을 견디기에 더 낫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가끔은 글을 부탁하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니나 모두 거절하고 있다. 글빚을 지기 싫기 때문이다. 고인 것도 없는데 억지로 쥐어짜서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야 하는 글쓰기는 삶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힘들게 한다.
글쓰기에 있어 그런 태도를 견지해온 내가 요즘 홈페이지에 글을 못 올리고 있다는 것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자기 모순적인 일이다. 속상하고 부끄럽다. 그렇게 ‘글 부담’을 느끼고 있는 나에게 ‘글 자신감’까지도 앗아간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가수 조영남이다. 대한민국 유일의 화수(화가 + 가수)라고 자칭하면서 여러 방송에서 사회자나 게스트 역할도 하고 있는 그가 실은 우리나라 최고의 글쟁이 중 한 명이다.
나도 물론 처음에는 그를 그저 히트곡도 없이 장수하는 희한한 가수로만 알고 있었다.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한다고 했을 때도 ‘노래로 안 되니까 별 짓을 다 하네’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던 중 내가 재미있게 본 어떤 책의 서문에서 저자가 그를 ‘가수로 알려졌지만 르네상스적 인물로서 장자에 나오는 뭇사람의 연인 애태타를 연상케 해주는 인물’로 묘사한 것을 보고는 호기심을 조금 느꼈다. 그래서 그에 관해 조금 더 알아보다가 결국 그가 오래 전 어떤 매체에 연재한 글을 찾아 읽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기가 죽어버렸다. 놀랄만한 솔직함, 높은 식견, 정확하면서도 위트가 넘치는 문장은 나로 하여금 감탄을 넘어 질투심에 불타오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남들은 한 가지도 제대로 못 해 쩔쩔매는데 이 사람은 무슨 재주가 이리도 많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하느님도 공평하신 분은 아닌 듯하다. 어쨌든 그의 주옥같은 명문(名文) 중에서 두 개만 소개해보자.
<핸드폰과 아이스크림>(2001. 4.20.)
애석하다. 지난 주 나는 대한민국의 그저 보통 아버지로 전락했다. 그저 그런 학부형으로 밀렸다. 그동안 나는 심지가 있는 아버지, 그러니까, 정도를 가는 학부형을 자임했었다. 그러나 지난 주 나는 세상사는 게 그게 아니란 사실을 실감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간단하다. 나한텐 열세 살짜리 초등학교 6학년 딸이 있는데 글쎄 어이없게도 이 인간한테 핸드폰을 사주고야 만 것이다. 그것도 내 손으로 말이다. 핸드폰인지 핸디폰인지 쎌루러폰인지 난 그것도 모른다.
믿거나 말거나 딸은 2년 전부터 핸드폰에 대해서 연기를 살금살금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다음에 사줄께.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사줄께. 내년에 사줄게” 하면서 두리뭉실 넘어가다가 딸의 올 생일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이건 참 기가 차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도대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가수인 아버지도 이제껏 단 한번 삐삐나 카폰이나 소위 핸드폰 같은 걸 소유해 본 적이 없는데 하물며 초등학교, (이건 말이 초등학교지 잔챙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무슨 학교인가. 그건 그냥 핵꾜다. 아이구, 야단 맞을라!) 어쨌거나 초등학교 다니는 겨우 열세 살 난 어린애가 무슨 놈의 손 전화 혹은 손바닥 전화가 필요하다는 거냐?
물론 나는 늘 그런 주장을 펴왔다.
“아버지도 없이 사는데 너한테 전화가 왜 필요하냐? 전화를 걸 데가 어딨냐? 뭔 용무가 있어서 그런 거냐?”
그런데 내가 그럴 때마다 매번 딸의 답변이 매우 유치했지만 일관성이 있었다.
단 한마디 “딴 아이들도 다 가지고 다녀요”. 이걸로 개겼다.
약 2년에 걸쳐, “어린애가 무슨…”과 “딴 아이들도 다…” 이런 형태로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확 달라진 그녀의 답변에 근근이 지켜온 아빠의 민족정기 내지는 대한의 얼을 이어온 굳건한 나의 교육방침이 한큐에 무너져 내렸다.
“아빠,내 친구 강하나는 세 개나 있어.”
이쯤 되면 나의 독자 제위께선 내가 괜히 뻥을 튀긴다고 의심을 할 지 모른다. 내가 이런 사안으로 뻥을 튀길 사람이 아니다. 시간 있으면 내 딸 조은지한테 전화(핸드폰으로 해주시라. 어디서 전화가 걸려오기만 무척 기다린다. 요즘 나는 하루에 한두 번 전화 걸어주는 게 일이다.)를 걸어서 확인해 보시라.
아!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땐 주로 교감 아들 유재평이가 그랬다. 새로 나온 삼강 하드 아이스크림 하나를 떡 하니 사들면 아이들 대여섯 명이 재평이를 삥 둘러싸며 부럽게 쳐다보기만 했다. ‘한 입 안 줄까’하고 말이다.
그런데 재평이가 그걸 금방 안 먹고 괜히 폼 잡는다고 들고만 서 있으면 뜨거운 여름 햇볕에 녹아 아이스크림이 땅에 툭 떨어질 때가 있었다. 그러면 옆에서 입맛만 다시던 녀석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합창을 불렀다.
“떨어졌따아∼ 떨어졌따아∼. 몸 먹는다아∼ 몸 먹는다아∼.”
아! 언젠가 내 딸아이가 원한의 핸드폰을 땅에 떨어 뜨려 박살이 나는 날, 나는 그 옛날 불렀던 똑같은 합창곡을 똑같은 음정 박자로 부를 것이다.
“떨어졌다∼ 떨어졌다∼. 모옷쓴다∼ 모옷쓴다∼.”
P.S: 강하나의 핸드폰이 연속으로 떨어졌으면 더 좋겠다. -
<‘왕건’ 의 신하들>( 2002.1.11.)
TV 뉴스를 보다보면 심심치 않게 우스꽝스런 장면들을 보게 된다. 특히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 장면 같은 것이 방영될 때가 압권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통령 양 옆으로 쭉 앉아 있는 국무위원 어르신들의 자세와 표정이 그렇다는 얘기다. 미리 말해 두거니와 나는 지금 대통령의 권위나 위엄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려는 게 아니다. 바티칸의 교황이나 영국의 여왕 혹은 일본의 천황도 그 지위에 합당한 권위나 위엄을 마땅히 누려야한다는 것이 나의 기본 생각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우리 쪽 어르신들의 자세와 표정이 타국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우스꽝스럽게 보여지냐는 것이다. 글쎄, 하늘같은 임금님 앞이라서 그러했겠지만 그래도 국무회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계시면 옛날 말로 재상들이 아니신가. ‘왕건’ 시대나 ‘여인천하’ 시절에야 그랬다 치더라도 지금 우리는 엄연히 21세기에 살고 있다. 글쎄 아무리 한 분밖에 안 계신 높은 어르신 앞이라도 명색이 장관이고 재상들이신데 어찌 그리 매양 차렷 자세에 매양 얼굴에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경직되어 보이느냐 말이다. 왜 꼭 중․고등학교 때 선생님한테 벌 받던 때의 주눅 든 표정을 짓느냐 말이다.
또 한 번 미리 말해두지만 그것이 내 눈에 그렇게 경직되고 촌스럽고 유치하게 보였던 이유는 내가 오래 전 몇 년간 외국에 체류하면서 그쪽 문화를 엿보고 온 탓이리라. 그쪽이야 생태적으로 위아래의 존댓말 자체가 없으니 공공집단 행동조차도 그렇게 자유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어쨌거나 상대적으로 우리 쪽의 풍경은 하염없이 경직되고 촌스럽게 보였다.
그 촌스러움의 결정판은 지난번에 우리 정부 대표단이 평양에 갔을 때였다. 거기서 열리는 공식장면이나 파티장면이 TV로 생생하게 비쳐졌는데 (아! 좋아진 세상이여!) 내가 보기엔 우리 대표단의 어느 누구도 그쪽 김정일 대표만큼 자연스럽질 못했다. 하나같이 궁전에 초대된 삼용이 아저씨처럼 쭈빗쭈빗 대다가 말았다. 경우대로라면 민주국가에서 살아온 우리 대표들이 최악의 독재국가 최악의 폐쇄 문명 속에 살아온 사람보다 월등하게 세련되어 보였어야 한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그쪽이 오히려 세련되어 보였고 온통 그쪽 분위기로 끌려갔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간단하다. 우리의 전통 때문이다. 뻣뻣함과 부자유를 교묘하게 강요하는 그 끔찍스런 권위의식 존중의 위대찬란한 전통 말이다. 내가 자료를 통해서 아는 케네디 대통령이나 내가 직접 만나본 조지 부시, 옐친, 고르바초프, 클린턴 등은 상상을 불허할 만큼 부드러운 사람들이었다.
글로발이 뭔가? 딴 소리하지 마라. 글로발은 곧 부드러움이다. 시대가 그렇게 되었다. 부드러움은 곧 강함이며 부드러움에서만 창의력이나 문화가 발생된다. 지난주 일간 신문에 우리 대통령께서 모처럼 국무위원들께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을 노트에 받아 적지 말라는 실로 역사적인 지시를 내렸대서 나는 지금 눈물을 펑펑 쏟으며 감격한 나머지 한마디 거들어 봤다.
‘아이고! 진작 그런 지시를 내리시지. 쯧쯧!’
(이상 조영남의 글) -
어떤가? 내 말이 틀린 말이 아니지 않는가? 특히 두 번째 글은 13년 전 김대중 정부 때 쓴 것인데 오히려 요즘 상황에 더 잘 맞아 보인다. 그만큼 조영남은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력까지 갖고 있는 것이다. 글쟁이 조영남에게 반하고 또 부러움을 느낀 사람이 나만은 아닌 모양인지, 스포츠조선에 컬럼을 연재한 전여옥 씨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글쟁이 조영남 예찬: 전여옥 씀>(2001.10.24.)
스포츠조선의 칼럼을 쓰면서 내가 참으로 과분하게 여기는 것은 가수 조영남 씨와 함께 쓴다는 점이다. 나는 칼럼니스트 조영남의 열혈독자이다. 나는 그의 거침없는 ‘말 같은 글’에 감탄하곤 했다. 사실 글이라는 것이 그렇다. 뜸 들인다고 잘 써지는 것도 아니고 시간 끈다고 독자들이 좋아하는 글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글쓰기란 ‘내내 생각하기’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 가지 주제를 내내 생각하고 잔머리 굴리는 내공(?)은 만만치가 않다. 나란 사람은 그 장고 끝에 가까스로 컴퓨터 앞에 앉는다. 두두둑 자판을 두들겨 20분에 쓰면서 ‘나 참- 멋있지?’하고 혼자 씩 웃는다. (쪽지에 메모를 해놓고 글을 쓰는 나는 자판을 두드리는 순간은 글을 쓴다기보다는 마무리 단계에 불과하다.) 이 정도면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확실하게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는 셈이다. 적어도 하루는 착실하게 이 칼럼을 위해 머리 터지게 고민하는 평범한 노력형의 현실을 내 기억에서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조영남 씨를 부러워했다. 왜냐면 ‘조영남은 걍- 두두다닥 자판을 두드리면 끝일 거야. 한 칼럼 쓰는데 10분 걸릴까?’ 하고 어림잡고 있었다. 결코 그의 칼럼이 쉽고 만만해서가 아니다. 그가 천재라는 굳은 신념을 초등학교 때부터 아줌마가 된 지금까지 변함없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글 역시 천재처럼 신나게 쉽게 담박에 끝내줄 테니. 그런데 인터뷰를 위해 그의 집을 가보니 컴퓨터가 없었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직도 원고지에 칸을 메우며 글을 쓴다는 것이었다. 인터뷰 시간에 쫓기는 그 바쁜 와중에도 나는 어지간히 놀랐다. 나는 그가 타이핑도 노래하듯 잘 할 것이고 글 역시 순식간에 휘리릭 써갈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치고 지우고 줄 그어가며 쓴 다른 초고들을 보니 ‘참 만만치 않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많이 생각하고 여러 차례 견줘보고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벗기나? 우선 나부터 벗자고 생각하는 드문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누가 내게 묻는다면 ‘조영남’이라고 대답하겠다. 글쓴이라면 그의 글 못지않게 인간의 됨됨이도 나는 중요하다고 본다. 대단한 성인군자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고 사심 없고 밝고 유머러스하고 그리고 쓸데없는 권위에서 일치감치 벗어난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그런 점에서 조영남은 인간으로서의 그릇과 ‘말이 곧 글’인 이 21세기에 뛰어난 글쟁이가 아닌가 싶다. 오랫동안 조영남 표 재능의 편안한 소비자였던 나는 이제 원고지 한칸 한칸을 메우는 ‘천재의 겸손한 생산성’에 깊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상 전여옥의 글) -
이러한 전여옥 씨의 글은 나에게도 적잖은 위로를 주었다. 조영남이 글을 잘 쓰는 것은 그가 그만큼 정성을 쏟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천재여서 남들은 몇 시간씩 끙끙대는 글쓰기를 몇 분만에 휘리릭 끝내는 것이 아니라 원고지를 놓고 또 고치고 또 고쳐서 이런 멋진 글을 써낸다는 것이다. 사실 조영남도 그의 컬럼에서 종종 ‘글쓰기의 부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 지난 주 나는 처음 알았다. 내가 쓰는 스포츠조선의 칼럼을 읽는 사람이 생각보다 진짜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겁이 덜컹 났다. 글을 잘 썼다, 재밌게 썼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관동별곡’ 이후에 이렇게 감칠맛 나는 우리 문장은 처음이었다는 극찬까지 들었는데 하여간 나는 이상하게 겁이 났다. 왜냐하면 그 칭찬이라는 게 곧 쥐약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쥐약의 효능은 막강했다. 나는 서서히 오금이 저려왔다.
‘아이고 다음 주에는 또 뭘 쓰나? 다음엔 무슨 재주로 더 재미있는 소재를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일주일 내내 이런 따위의 조바심에 눌려 지냈다. (2001. 7.20.) -
- 나는 지금 또 글을 쓰고 있다. 내 원고를 목요일 아침 10시마다 꼬박 꼬박 챙겨주는 스포츠조선의 김순희 양으로부터 “조영남 아저씨, 금년에는 글 써 보내지 않아도 돼요” 하는 연락을 받은 바가 없어서 또 쓰는 거다. 나는 넘살스러워서 김양한테 “김양! 새해에도 또 원고 보내야 하니?” 그렇게 못 물어봤다.
하여간 나는 스포츠조선 때문에 고사(枯死)를 해왔는데 이젠 고사에서 압사(壓死) 지경에 이르렀다. (엄살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이건 전부 내가 글을 좀 쓴다는 소문이 제법 돌아서 생긴 일들이다. 덩더꿍이다. 내가 지금 몇 년째 이런 글을 써왔는데 한 가지 확실한 건 글은 많이 쓸수록 더 잘 써지고 자꾸 쓸수록 또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빌어먹을! 내가 써놓고도 헷갈린다.
우선 조물주가 우리에게 준 선물 중에 가장 위대한 선물 축에 드는 ‘말’이라는 것 자체가 그걸 제대로 구사한다는 게 힘든데 그걸 옮긴다는 것, 그런 상황을 글로 써낸다는 게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말이다. (2002.1.4.) -
조영남도 글쓰기가 이렇게 힘들다고 하니, 나 혼자 공연히 기가 죽어서 글쓰기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용기를 내 볼까 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스스로 분명히 해야겠다. 갑자기 글쓰기를 중단하고 홈페이지를 폐쇄하지는 않겠지만 그 대신 앞으로는 좀 더 자유로운 글쓰기, 스스로 만든 틀에서 벗어나는 글쓰기, 쓸거리가 있고 쓸 시간이 있으면 쓰고, 그렇지 못하면 안 쓰는 글쓰기를 할 것이다. 그런다고 누가 뭐랄 사람도 없을 테고..... 앞으로는 더욱 행복한 글쓰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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