楊州 天寶山 檜巖寺址-檜巖寺
경기 楊州市檜巖洞 天寶山 자락에 있는 檜巖寺址는 고려 忠肅王 15년(1328) 元나라를 거쳐
들어 온 印度의 승려 指空이 처음 지었다는(이전에도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檜巖寺가
있던 자리로 1964년 史蹟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禑王 2년(1376) 지공의 제자 懶翁이 크게 佛事를 일으키고 제자 覺田 등이 262칸의 寺刹
조성공사를 마쳤으며 고려 말에는 전국 사찰의 本山으로 승려의 수가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도 전국 最大의 寺刹이었다.
조선 초 太祖 李成桂는 나옹의 제자이며 자신의 스승인 無學大師를 회암사에 머물게 하고
재정기반을 마련해 주었으며 王位를 물려준 뒤에 咸興과 이곳에도 居處하여 太宗이 太上王을
朝謁하러 회암사에 자주 오게 되어 국가최고 議決機構인 議政府도 楊州 땅에서 열리게 되어
지금의 ‘議政府’라는 地名이 생기게 되었다.
이후 抑佛崇儒政策으로 회암사는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나 成宗 3년(1472) 世祖妃 貞熹王后가
河城府院君 鄭顯祖에게 명하여 절을 重創하게 하고 승려 處安이 工役을 담당했는데 지금
절터에 남아 있는 石壇과 石壁, 基壇階石들은 이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明宗 때 文定王后의 신임을 얻은 普雨가 이곳을 중심으로 佛敎 中興策을 펴 회암사는
전국제일의 修禪道場이 되었으나 王后 死後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明宗 20년(1565) 보우가
귀양가고 濟州牧使에게 誅殺되었으며 절은 불태워졌다.
이후 純祖 21년(1821) 경기지방 승려들이 힘을 모아 指空·懶翁·無學 등 세 和尙의 浮屠와 碑를
重修하고 옛터 위에 작은 절을 짓고 '檜巖寺'라고 하여 절 이름을 계승한 지금의 회암사는
大韓佛敎曹溪宗 제25교구 本寺 奉先寺의 末寺이다.
주요 文化財로는 보물로 지정된 楊州 檜巖寺址 禪覺王師碑, 無學大師塔 및 雙獅子 石燈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指空禪師 僧塔 및 石燈, 無學大師碑, 檜巖寺址 浮屠塔, 指空禪師浮屠,
懶翁禪師浮屠 등이 있다.
2012년 10월 楊州市에서는 회암사지에서 발굴 조사하여 출토된 遺物들을 보관∙연구∙전시하기
위하여 입구에 檜巖寺址博物館을 개관하였다.
갈 때는 회암사 홈페이지에 ‘전철 1호선 의정부북부 역에서 30번 버스를 타고 율정삼거리
하차’를 믿고 佳陵驛(전 의정부북부역)에서 하차, 버스 정류소에서 30번 버스가 없어
의정부 버스터미널까지 한참 헤매다가 헛발질만 하고 다시 가능역으로 돌아와 양주역까지 가
정류소에서 버스기사에게 물어 보아도 회암사 입구에 가지 않는다고 해 택시를 타고
회암사지박물관까지 갔다.
회암사 홈페이지의 정보를 그대로 믿고 갔다가 1시간을 헛걸음하고 택시비 14,000원만
투자했다.
올 때는 회암사지 입구에서 78번 마을버스로 덕정역으로 나와 전철을 탔다.
회암사와 회암사지는 2002년 2월과 3월 두 번이나 七峰山-天寶山을 종주하면서 가보았으나
사진을 찍지 않을 때여서 지난 9.18(수) 혼자 답사하면서 찍은 사진을 (2-1)회암사지박물관-
회암사지와 (2-2)회암사 2회로 나누어 올린다.
2013. 09. 25 孤 山 朴 春 慶
(2-1) 檜巖寺址博物館-檜巖寺址 사진
檜巖寺址博物館
(01) 檜巖寺址-檜巖寺 입구
56번 지방도로를 따라 계속 가면 檜巖嶺을 넘어 抱川 蘇屹邑에 이른다.
(02) 檜巖二橋를 건너면 회암사지박물관이다. 뒤로 七峰山-天寶山(오른쪽)이 보인다.
(03) 檜巖寺址博物館 前景. 1층은 로비, 常設展示室, 影像室이고 2층은 常設展示室Ⅱ,
文化體驗室, 企劃展示室로 구성되었다.
(04) 龍頭[용머리]. 용마루 또는 귀마루에 올려놓은 용머리 모양의 장식 기와.
추녀 끝에 끼워 넣는 吐首도 있는데 이 같은 기와는 주로 宮殿이나 官衙 건물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檜巖寺가 朝鮮 최대의 王室寺刹로서의 位相을 보여준다고 한다.
(05) 靑銅金鐸. 작은 종에 錘를 매단 기구로 殿閣의 처마 끝이나 탑의 지붕돌에 매달아 바람에
흔들려 맑은 소리가 나게 한다. (*鐸: 요령 탁, *錘: 저울눈 추)
(06) 太祖 李成桂의 檜巖寺 行次 모형
(07) 태조 이성계의 회암사 행차
(08) 청기와[靑瓦]. 朝鮮前期. -眞品; 國立中央博物館 所藏-
(09) 국내 최고 온돌시설이 있었던 西僧堂 모형.
서승당은 승려들이 參禪하는 禪房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10) 白磁 三足香爐(오른쪽). 朝鮮 前期 작품
(11) 粉靑沙器 덤벙문 자라 병. –진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2) 靑銅 佛像(佛頭)片. 조선 전기 -진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3) ‘天順 庚辰’銘 鳳凰文 수막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天順은 明 天順帝의 年號로 庚辰은 天順 4년(1460), 朝鮮 世祖 6년이다.
(14) ‘檜巖’銘 靑銅 鉢. –복제품, 眞品;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鉢: 바릿대 발)
(15) 太祖 李成桂 御眞. 특별 전시실에 있다.
이성계의 御眞, 日月五峯圖와 宮中 잔치의 모습을 담은 辛丑進饌圖를 결합하여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16) 三和尙(指空, 懶翁, 無學) 眞影. –복제품, 진품: 경북 義城 大谷寺 所藏-
삼베에 채색, 조선 乾隆 47년(1782) 작
(17) 禪覺王師碑 拓本
고려 禑王 3년(1377) 懶翁禪師(1320~1376)를 추모하기 위하여 나옹의 行蹟을
기록한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의 탁본이다. 禪覺王師碑는 1997년 화재로
파손되어 保存處理를 거쳐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禪覺王師: 俗名 牙元惠, 法號 懶翁, 法名 惠勤, 諡號는 禪覺이다.
檜巖寺址
(18) 檜巖寺址 全景. 오른쪽 앞에서 본 모습, 바위가 들어난 봉우리는 天寶山이다.
(19) 檜巖寺址 全景. 왼쪽 앞(남서쪽)에서 본 모습
(20) 基壇階石, 회암사지는 8개 단으로 구성되었다.
(21) 掛佛臺.
괘불대는 祈雨祭 ∙水陸齋 ∙靈山齋 등 佛敎徒들이 야외에서 지내는 대규모 法會나 儀式에서
예배 대상물이 되는 掛佛을 걸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하는 시설물로 幢竿이나 幢竿支柱와
그 형태가 비슷하다.
(22) 檜巖寺址 幢竿支柱. -鄕土遺蹟 제13호-
고려 말기~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며 현 위치에서 좌측으로 15m 떨어진 담장
址臺石 밑에 쓰러져 매몰되어 있던 것을 1981년에 발굴하여 복원한 것이다.
당간 지주는 원래 2柱가 쌍을 이루어 하나로 구성되기 때문에 본래 2쌍으로 모두
4주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1주는 전하지 않는다.
(23) 檜巖寺址 展望臺.
왼쪽 길 건너에는 문화관광해설사가 있는 작은 매표소 같은 건물이 있으나 連休로 인한
休務, 화재로 파손되어 碑身은 보존 처리 후 불교중앙박물관으로 옮긴
檜巖寺址 禪覺王師碑(보물 제387호)의 龜趺를 찾지 못하였다.
(24) 檜巖寺 復元推定圖. [牧隱李穡의 <天寶山檜岩寺修造記>에 기록된 건물]
① ③ 門址 ② 鐘閣 ④ 西僧堂 ⑤ 穿堂(穿廊) ⑥ 普光殿 ⑦ 日字建物 ⑧ 知藏寮 ⑨ 香火寮
⑩ 首座寮 ⑪ 祖師殿 ⑫ 說法殿 ⑬ 影堂 ⑭ 書記寮 ⑮ 侍者寮 (16) 舍利殿 (17) 入室寮
(18) 大藏殿 (19) 西方丈 (20) 正廳 (21) 東方丈 (22) 羅漢殿 (*穿: 통할 천 *寮: 작은 창 료/요)
(25) 檜巖寺址 上段部
(26) 회암사지 中段部
(27) 회암사지 下段部
(28) 회암사지 최상단부(7단~8단)
(29) 檜巖寺址 浮屠塔. 높이 3.36m -京畿有形文化財 제52호-
회암사터의 가장 북쪽에 있는 부도로 조선 전기의 탑으로 추정되나 건립 연대와 주인공을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승려 普雨나 1472년 회암사 重創에 힘쓴 승려 處安의 부도탑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30) 회암사지 부도탑 彫刻
(31) 檜巖寺址 全景. 뒤(북쪽)에서 본 모습, 맨 끝에 박물관이 보인다.
(32) 普光殿址 基壇
(33) 회암사지. 받침대 같은 것은 명칭과 용도가 무엇일까?
(34) 石槽
(35) 회암사지 맷돌 -京畿民俗資料 제1호-
커다란 석조와 함께 놓여 있어 이곳이 庫樓址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36) 檜巖寺址와 天寶山(해발 423m)
- (2-2)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