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감영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4가 1-6
관람시간 : [하절기 3월 1일-10월 31일] 09:00-21:00 [동절기 11월 1일-2월 28일] 09:00-18:00
무료 관람
전주 전라감영(全羅監營)은 조선시대의 8개 도(道) 가운데 하나인 전라도의 행정, 사법을 담당하던 관찰사가 근무하던 곳이다.
오늘날의 도청(道廳) 소재지 및 도청 건물에 해당한다.
1392년(태조 1년) 조선왕조 성립과 동시에 전주에 전라감영이 설치되었으며,
1895년(고종 32년)에 23부제가 실시될 때까지 약 500년간 존속하였다.
1895년에 23부제가 시행되자 전주부 관찰부로 개편되고
1896년에 13도제가 시행되자 전라북도의 최고 관청으로 활용되었으며,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도청(道廳)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중심 건물인 선화당은 도청의 부속 건물 용도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위키백과]
내삼문(內三門)은 전라감영 선화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전라감영의 정문 포정루로 들어와 중삼문을 거쳐 내삼문을 지나면 전라감사의 집무처 선화당이다.
내삼문은 솟을삼문 형태로 어칸에서 협칸, 퇴칸으로 가면서 지붕의 높이가 낮아지는 형태이다.
1884년 11월 11일에 전주를 방문한 미국 임시 대리공사 George Clayton Foulk(1856-1893)는
"포정루에서 150피트 정도에 첫 번째 대문(중삼문으로 추정)과
직각으로 100피트 정도에 두 번째 대문(내삼문으로 추정)이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國家軍儲皆靠湖南(국가군저 개고호남) 若無湖南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
'국가 군량, 군사, 군비를 호남에 의지했으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右載在李忠武公全書下卷(우재재이충무공전서하권) 後學剛庵宋成鏞謹書(후학강암송성용근서)
내삼문에서 바라본 선화당(宣化堂, 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곳)의 모습
전라감영의 중심 건물은 전라감사의 집무실인 선화당(宣化堂)이다.
그리고 가석(嘉石)과 폐석(肺石)의 모습이 보인다.
가석(嘉石)은 섬돌 아래 왼쪽(동편)에 설치하여 죄인들로 하여금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표석이고,
폐석(肺石)은 오른쪽(서편)에 설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억울함을 하소연하게 하는 신문고 같은 표석이다.
가석과 폐석은 감영의 사법적 기능을 보여주는 것으로, 감사로 하여금 백성들을 덕으로 교화하여 깨우치게 하고
재판을 공정히 하여 억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법을 다루는 형조의 섬돌 아래에도 가석과 페석이 있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가석은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돌로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이를 보고 뉘우치고,
폐석은 붉은 돌로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이 돌 옆에 서 있으면 억울한 일을 해결해 준다고 하였다.
벽돌모양의 검은 돌인 사진 오른쪽의 돌이 가석(嘉石)이고
뾰족한 기둥 모양의 사진 왼쪽의 돌이 폐석(肺石)이다.
선화당이라는 당호는 "왕명을 받들어 교화를 펼친다"는 "승류선화(承流宣化)"에서 나온 말이다.
宣上德而化下民(선상덕이화하민) "임금이 덕을 베풂으로써 백성을 교화한다."
비장청(裨將廳)은 전라감사의 사적 보좌관인 비장들의 집무소이다.
비장은 그 업무상 감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비장청은 감사의 영역과 가깝게 배치되었다.
<완산부지도>에 비장청은 감영의 내아 평면과 유사한 'ㄷ'자형으로 그려져 있다.
발굴조사 결과 비장청과 관련된 적심시설이 남아 있지 않아 복원하지 않고 터만 표기하였다.
선화당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그 이듬해 1598년 전라감사 황신(黃愼)이 중건하였으며,
1771년에 전라감사 윤동승(尹東昇)이 개건하였다.
이후 1792년(정조 16)에 화재로 소실되어 전라감사 정민시(鄭民始)가 다시 중건하였다.
선화당은 광복후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한국전쟁 중 1951년 경찰청 무기로로 쓰이던 도청 문서고에서 로케트탄이 폭발하여
도청 본관과 함께 소실되었다.
선화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로 약 78평에 달하는 큰 건물이며, 전주부성내에서 객사 다음으로 컸다.
전라감영의 중심에 선화당이 있고 선화당 동쪽에는 감영 누각인 관풍각이, 뒤쪽으로는 내아와 연신당이 있다.
선화당 앞쪽에는 내삼문과 비장청이 있다.
이밖에 감사 심부름꾼인 통인들의 대기소인 통인청, 약재를 다루는 심약당, 법률을 다루는 검률당, 한지를 만드는 지소,
책을 출간하는 인출방 등이 선화당 주변에 배치돼 있었다.
아전들의 근무처인 영리청과 작청, 진상품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도 있었다.
상석에 앉아 기념사진을 한 방 남기고...
조선시대 지방통치체제는 8도와 도 아래에 주, 부, 군, 현 등으로 편성되었다.
도에는 감사(관찰사), 그 아래의 군현에는 수령이 파견되어 지방통치행정을 수행하였다.
수령은 군형의 대소에 따라 주에는 부윤, 대도호부에는 대도호부사, 목에는 목사, 도호부에는 도호부사,
군에는 군수, 현에는 현령, 현감이 각각 임용되었다.
조선건국 후 전라도는 제주도 3개 군현을 포함해 총 57개 군현이었으나, 1660년에 진원현이 장성부에 편입되어
조선후기에는 전라도가 총 56개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전라감사(관찰사)는 종2품의 관리로 오늘날 도지사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육조판서가 정2품이고, 그 아래 육조참판이 종2품이므로
감사(관찰사)는 직급 상으로 참판급이다.
하지만 직급상 드러할 뿐, 행정 군사 사법을 총괄하는 막대한 권한의 소유자였다.
군현 수령의 불법을 규찰하고 성적을 평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내의 모든 민정 군정 등의 통치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래서 감사의 임기를 1년 또는 2년으로 짧게 하여 그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견제하였다.
전라감사는 전주부윤과 직급이 같았다. 즉 전주부윤도 전라감사처럼 종2품직이었다.
조선전기에는 대체로 감사와 부윤이 따로 임명되었지만,
임진왜란 후에는 주로 겸직제로 운영되었다.
전라감사가 전주부윤을 겸할 경우 감사가 전주부의 실무들까지 일일이 다 챙겨볼 수 없으므로
종5품의 판관이 파견되어 실질적인 전주부윤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측우기와 측우대가 선화당앞에 놓여 있다.
측우기는 비가 내린 양을 측정하는 기구로 세종 때 처음 만들었다.
각 도의 감영과 군현에 측우기를 설치하여 강우량을 재고 농사에 활용하였다.
이 측우기는 충청감영에서 사용했던 측우기를 재현한 것이다.
측우기를 받치고 있는 측우대는 경상감영의 것을 본떠 만들었다.
감영 누각인 관풍각으로 가는 도중에 우물이 있다.
1928년 및 1937년 일제강점기 도청사 도면에 표기된 우물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우물의 평면은 원형이며, 20~30cm 내외의 석재로 쌓아올렸다.
우물의 규모는 직경 150cm 내외로 확인되었다.
감영 누각인 관풍각에 올라가 본다.
관풍각(觀風閣)은 선화당에 이어 감사(관찰사)가 정무를 처리하는 제2의 정청이며,
감사가 쉬기도 하고 연회의 장소로도 사용했다.
관풍각이라는 이름은 감사의 직무인 "풍속과 민정을 살핀다"는 "관풍찰속(觀風察俗)"에서 유래하였다.
선화당과 관풍각 당호는 감사의 직무를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대구 달성공원 경상감영의 감영 누각은 "관풍루(觀風楼)"하고 하고
전주 전라감영의 누각은 "관풍각(觀風閣)"이라 한다.
왜 관풍루와 관풍각으로 달리 부르는 것일까?
실은 용도의 차이다.
여흥공간의 의미일때 보통 루를 붙이고...
거주공간의 의미일때 보통 각을 붙인다.
관풍각 천정 상량문(上樑文)
"서기 2018년 7월 25일 복원상량"
전주는 출판의 도시였다.
전라감영에서 출판된 책은 완영본(完營本), 인쇄를 하기 위해 판각한 목판을 완영책판(完營冊板)이라 했다.
춘향가, 열녀춘향 수절가, 심청전, 화룡도 등과 같은 판소리계 소설과
조웅전, 구운몽, 삼국지, 소대성전, 유충렬전 등과 같은 소설도 출판되었다.
전주는 수많은 책을 찍어낸 출판의 도시이다. 완영은 전라감영을 말한다.
전라감영 안에 종이를 만드는 지소와 책을 찍는 인출방이 있었으며 책판은 객사 서편 책판고에 보관하였다.
전라감영 책판은 조선말 이후 전주향교에 보관하였는데 현재 5059장이 남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되어 있다.
감영 목판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동학혁명 후 목판을 모두 모아 향교에 보관하도록 한 전라감사 조한국의 공이 크다.
지금은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전주는 부채의 고장이다.
전주부채는 단오날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으로 전라감영에 선자청을 두고 부채를 제작 관리하였다.
전주고지도에서 보면 전라감영 안에 선자청이 매우 크게 자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주에서 최고의 부채가 생산되었던 것은 질 좋은 한지가 이곳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전주는 또한 소리의 고장이다.
전주는 소리꾼들이 모이고, 실력을 뽐내고, 평가받는 곳이었따.
판소리 최고의 등용문인 전주 대사슴놀이는
조선후기 전라감영과 전주부영의 통인들이 동짓날 밤 소리꾼들을 불러 경영을 펼쳤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통인은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의 심부름을 담당하는 자들이다.
이제 관풍각을 내려가서 뒤쪽으로 이동한다.
마치 색종이를 오려놓은 듯한 이쁜 꽃들의 모습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치 산화한 민초들의 아름다운 모습처럼...
1894년 전라도 일원을 석권한 동학농민군은 북상하여 마침내 4월 27일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그 이튿날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이 전주에 도착해 완산에 진을 쳤다.
농민군과 관군은 완산전투를 비롯해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청군과 일본군이 출병하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함에 따라 민족적 위기가 고조되면서
농민군 총대장 전봉준과 전라감사 김학진은 5월 8일 농민군 철수와 폐정개혁을 조건으로 전주화약을 체결하였다.
화약체결에 따라 각 군현에 폐정개혁을 주도할 집강소를 설치하고
전라감영 선화당에 이를 총괄하는 대도소를 설치하였다.
전라감연 선화당은 관과 민이 협력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폐정을 단행하는 관민협치의 새 장이 열린 곳이다.
선정비(善政碑)란 선정을 베푼 관리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그렇지만 조선말에는 선정비들이 으레 세워졌고 억지로 세워지기도 하였다.
조선말에는 전라감영 건너편에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가 다가공원쪽으로 옮겨졌으며,
2020년 감영을 복원하면서 감영 경내로 이전하였다.
관찰사 18기, 판관 5기, 중영장 별장 영의정 암행어사 각 1기로 총 27기의 선정비가 있다.
선정비들이 억지로 세워졌다니까 보고싶지도 않고...
뒤편에 있는 연신당으로 가는 문이 보인다.
연신당(燕申堂)은 전라감사의 처소이다.
1688년(숙종 14)에 전라감사 이유(李濡)가 창건하였다.
연신당이라는 이름은 『논어』「술이편」에
‘공자께서 집에서 쉬고 계실 때는, 마음이 온화하고 너그럽고 즐거우신 듯 보였다'에서 나온 것이다.
子之燕居 申申如也 夭夭如也
감사(관찰사)가 편히 쉬는 처소임을 의미한다.
경상감영은 징청각(澄淸閣)이라고 하였다.
반응형 서책(Interective Books) 이런 것도 있는 모양이네요.
전라감영 VR은 수리중...
연신당에서 내아와 행랑으로 이동할 수 있는 협문이 보인다.
협문쪽으로 이동하다가 오른편에 범상치 않은 오래되어 보이는 수령의 나무가 보인다.
전라감영 회화나무의 모습이다.
회화나무는 흔히 '선비나무', '학자수'라고 부른다.
나무 가지가 선비의 기상처럼 거침없이 자유롭게 뻗어나기 때문이다.
이 회화나무는 수명이 150 여년이 된 나무로 현존하는 전라감영의 유일한 흔적이다.
구 도청사 건물 철거 전에 회화나무가 의회동 건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제 내아와 행랑으로 이동한다. 오른쪽 건물이 내아이고 왼쪽 건물이 행랑이다.
행랑쪽 어떤 방 안에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나름의 포즈를 취해보는 박여사~~
그리고 오른편에 가마 포토존도 있다.
역시 신발벗고 들어가 포즈를 취해보는데...
한켠에 놓여있는 요강이 매우 인상적이다.
관람객들을 위한 배려가 곳곳에서 느껴지는 곳이었다.
내아는 전라감사 가족들이 거쳐하는 안채로 선화당 북쪽에 위치하였다.
19세기 완산부지도에 내아가 'ㄷ'자형 건물로 그려져 있다.
발굴조사에서 3동의 건물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3차례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행랑과 연결되어 있는 출입문이다.
전주 전라감영의 1차로 복원된 건물들을 모두 둘러보고 다시 선화당쪽으로 해서 밖으로 나간다.
선화당의 규모에 새삼 놀라며...
밖으로 나오니 옆의 복원 예정지가 보인다.
전라감영의 완전복원과 전주부성 복원을 통해 전주의 지난 천년을 전주의 현재와 미래를 잇는 뜻깊은 계기가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