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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숭산, 화산, 운대산 산행기
인천공항-정주공항-등봉시-소림사-숭산-
화인시-화산객잔호텔(1박)-화산-낙양시-
낙양대주점(2박)-초작시-운대산-
홍석협-정주시-정주중주호텔(3박)-
정주공항-인천공항
태실산에 있는 영태사
숭산의 큰 마누라인 태실산
첫째 날...소림사와 숭산을 거쳐
화산객잔호텔까지...
이른 새벽이라 그랬는지
인천공항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공항에 도착해서도 여유가 있었다.
그런 덕에 모처럼 만난 지인들과도
느긋하게 한담을 나눌 수가 있었다.
출국도 순조로웠다.
그리고는 비몽사몽간에 도착한 정주공항...
새롭게 단장을 했다는 정주공항도
적막이 흐를 정도로 한가했다.
하지만 중국인 특유의 여유는 여전했다.
도착을 해서도 제법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우리는 공항 밖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중국에서의 첫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공항 밖으로 나가자
후끈한 공기가 육신을 급습했다.
하늘은 쾌청했으나
미세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7월의 하늘을 보는 듯 했다.
순식간에 콧잔등에 땀이 맺히고
등줄기에서도 땀이 흘러 내렸다.
소림사 입구
그런 몰골이 안타까웠는지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눈치 빠른 기사님이 에어컨을 틀어주었다.
인상은 양산박의 노지심이었지만
심성은 관세음이었다.
입담 좋은 가이드도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우리를 중원의 역사 속으로 안내했다.
그동안 "중원을 잡으면 천하를 얻는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가이드는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중원이 바로 이곳 하남성이라 했다.
황하 문명도 이곳에서 태동했다고 한다.
정주는 그런 하남성의 성도였다.
버스는 정주의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하는 듯 했다.
도심의 빌딩 숲보다는
널따란 밀밭과 버드나무 숲이
연신 차창을 스쳐갔다.
그리고는 등봉시가 아스라이 보일 즈음...
소림사 안내판도 홀연히 다가왔다.
소림사 입구와 태실산
소림사 입구
소림사
소림사가 위치한 숭산은
태실산과 소실산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가이드는 태실산은 큰마누라산을,
소실산은 작은마누라산을 뜻한다고 했다.
등봉을 지난 버스는
태실산과 소실산 사이를 가로질러
잠시 더 달려갔다.
버스가 멈춘 곳은
태실산 기슭에 있는 영태사 주차장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허기를 달래고는
다시 버스에 올라
지척에 있는 소림사로 향했다.
소림사는
북위의 효문제가
496년에 발타선사를 위해
창건했다고 한다.
중국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대사가
530년부터 9년간
면벽 수도한 것으로도 유명한 소림사는
소실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입구에는 제법 널따란 주차장이 있었고,
주차장과 매표소를 지나
잠시 더 걸어간 곳에 소림사가 있었다.
가이드는 현재의 소림사는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던 것을
1985년에 복원한 것이라 했다.
일주문 현판에 새겨진 소림사란 글자도
소림은 예전의 것이지만
사자는 파손되었던 것을
최근에 다시 새겨 넣은 것이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일주문과
대웅전 및 장경각 등을 둘러보았는데
사찰 규모는 예상보다 초라했다.
TV에서 보았던
무술을 하는 스님들도 볼 수가 없었다.
가끔씩 졸고 있는 스님들만
스쳐봤을 뿐이었다.
아쉬움이 많았다.
소림사
탑림
소림삭도
소림사하면 태극권, 팔괘장과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권법 중에 하나인
소림권법으로 유명한 곳이고,
그런 소림 권법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는데,
그저 졸고 있는 스님들만
스쳐봤을 뿐이라 실망이 컸다.
가이드가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하더니
이래서 그런 모양이었다.
소림사를 나온 후에는
본격적인 트레킹을 위해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올라갔다.
가는 도중에는 246개의 탑이 있다는
탑림도 곁눈질 했다.
탑림에 있는 탑의 상당수는
명나라 때 만든 것이라 한다.
소림삭도는 탑림을 지나
잠시 더 올라간 곳에 있었다.
우리는 삭도 입구에서 표를 구한 후,
케이블카를 타고
소실산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도중에
케이블카가 멈춰서는
황당함을 겪었지만
제자구로 이어지는 소림삭도는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소실산도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우람한 바위들이
이곳이 중악이란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험공잔도
숭산은 오악 중에 하나인 중악으로
등봉시에서 북쪽으로
약 15km 지점에 있다.
태실산에 24개의 봉우리가,
소실산에 36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한다.
숭산은 예로부터 신성시 했던 산이고,
측천무후가 신악으로 삼았던 곳이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사진 속의 숭산은
소림사를 기준으로
촬영한 것이라
바위산이란 느낌이 덜한 편이다.
그러나 실제 숭산은
거대한 바위들이 모여 있는 악산으로,
월출산을 몇 배로
확대해 놓았다고 보면 된다.
덩치가 상상을 초월한다.
제자구에 도착한 다음에는
곧바로 배낭을 둘러메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케이블카 탑승장을 빠져나가자
돌계단이 나왔고,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험공잔도가 나타났다.
층층이 쌓여 있는 화강암 암벽이
눈을 시리게 했다.
잔도는 소실산 중턱을 따라 이어졌다.
숭산
정상으로 올라가
숭산의 전모를 보고 싶었지만
험공잔도만이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라 했다.
아쉬움이 컸다.
중국 사람들의 상술은
대게가 이렇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런 길을 따라가자
휴게소가 나왔고,
휴게소를 지난 다음부터는
돌계단이 이어졌다.
이곳의 잔도는
다른 산의 잔도보다
거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날씨가 무더워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짜증스러울 정도였다.
수건을 꺼내 연신 땀을 닦았지만
그 때뿐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마치 한여름에 가시넝쿨이 즐비한
마루금 능선을 걷는 듯 했다.
그러나 눈은 즐거웠다.
경치만큼은 빼어났다.
기대 이상이었다.
바위벼랑 사이에는
제법 높다란 바위기둥도 보였다.
그리고는 연천조교가 나왔다.
파란색의 구름다리는
길이는 짧았으나
고도감이 있어 또 다른 그림이었다.
연천조교와 숭산
연천조교를 지나서도
돌계단은 계속되었다.
심장의 고동도 점점 더 빨라졌다.
돌계단을 따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자 相寶라고 적혀 있는
석문이 나왔다.
석문 바로 아래에 삼황채가 있었다.
천황씨, 인황씨, 지황씨
또는 복희씨, 신농씨, 황제씨를
삼황이라고 하는데,
삼황채는 아마도 그들을 모시는
사당인 듯 했다.
삼황채는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해서 겉모습만 구경하고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삼황채를 마지막으로
숭산의 바위벼랑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햇살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돌계단만이 못마땅한 듯
마지막 텃세를 부렸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태산이나 노산에서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후들거림이었다.
그만큼 날씨가 더웠다는 뜻이다.
숭산에서의 모든 산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비
록 2시간 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임팩트는 강한 산행이었다.
숭산
삼황채
둘째 날...
화산을 거쳐 낙양으로...
숭산 트레킹을 끝내고
4시간 정도를 버스로 이동한 후에
도착한 화산...
화산 입구에 있는 화산객잔호텔에
여장을 풀었지만
화산은 실루엣조차
보여주지 않는 콧대 높은 산이었다.
약간의 실망감과 설레는 기대감...
그리움도 있었다.
그런 상태로 수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귓전을 때리는 전화벨소리...
피곤에 찌들어 아우성을 쳤던 육신은
모닝콜이 울리자마자
마치 내가 언제 그랬냐.며
침대를 벗어났다.
채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창을 열었을 때는
향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그리고는 화산의 산정이
이제는 보여줄 수 있다며
고개를 내밀었다.
화산은 산서성과 섬서성 남쪽의
진령산맥에 위치해 있고,
중국 오악 중에 하나인
서악에 해당하는 산이다.
산 이름은 산정을 이루고 있는
다섯 봉우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북봉삭도 승강장
북봉으로 올라가면서...
동봉(조양봉),
남봉(낙안봉),
서봉(연화봉),
북봉(운대봉),
옥녀봉 등의
다섯 봉우리가
산 정상부에 우뚝 솟아 있으며,
최고봉은 높이 2,160m의 남봉이다.
아울러 오악 중에서
가장 거대한 암벽을 품고
있는 산이 바로 화산이다.
다른 산을 압도할 정도로
험준한 산길과 가파른 계단을
품고 있는 화산은
서안에서 동쪽으로 약 120 km
떨어진 화인시에 위치한다.
서안에서는
차량으로 약 1시간 30분 정도면
갈 수가 있다.
아침을 먹은 우리는
본격적인 화산 탐방을 위해
곧바로 버스에 올라
지척에 있는 매표소로 향했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매한 다음에는
다른 버스를 이용하여
북봉삭도로 올라갔다.
버스는 굽이치는 협곡을 따라
한동안 달려갔다.
케이블카 탑승장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엄청난 거벽이
협곡을 가로막고 있었다.
도로는 설마하는 그런 곳을
따라 줄기차게 이어졌다.
북봉으로 올라가면서...
북봉삭도 하차장
협곡은 예상대로 거칠었다.
그러나 비경이었고 절경이었다.
장엄했다. 짓누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도로가 끝나는 곳에는
제법 반듯한 상가가
길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좌측 계곡에는 작은 폭포가 보였고,
상가 가운데는
연꽃 받침대 위에
불상을 올려놓은 조각상도 보였다.
전방에는 또 하나의 거벽과
북봉삭도가 손짓을 했다.
상가를 지나 잠시 더 올라가자
케이블카 탑승장이 나왔다.
우리는 여기서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북봉으로 올라갔다.
마음 같아서는 걸어서 올라가고 싶었지만
이미 정해진 일정이라
도리가 없었다.
중국산에 올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이었다.
북봉삭도는 숭산의 소림삭도보다
훨씬 더 가팔랐다.
거대한 거벽과 거벽 사이에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어
위압감이나 고도감이 상당했다.
북봉으로 올라가면서...
북봉삭도와 북봉
흔들거림도 대단했다.
삭도 바로 아래에는 폭포와 소가 보였고,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산꾼도 보였다.
바위협곡을 따라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어
풍경만큼은 최고였다.
케이블카가 도착한 곳은
북봉 바로 아래였다.
우리는 케이블카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트레킹을 시작했다.
여기서는 천가를 이용하여
북봉 방향으로 올라갔다.
올라가자 갈림길이 나왔는데,
우측에는 북봉으로 이어지는 암릉이,
좌측에는 서봉의 엄청난 거벽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며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화산은 명성 그대로였다.
엄청나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갈림길에서는
북봉을 잠시 뒤로 미루고
남봉 방향으로 올라갔다.
천가와 북봉
일월암으로 올라가면서...
북봉
올라가자 석문 하나를 지나
물고기가 드러누워 있는 모양의
기암이 나오고,
기암을 지난 곳에는
철사다리가 있는 암벽이 나타났다.
여기서는 철사다리를 타고
암릉으로 올라갔다.
올라가자 기괴한 모습의
일월암이 나왔다.
바위 하단부에 도교사당이 있다는
석굴이 보였지만
문이 잠겨 있어 안을 볼 수는 없었다.
안내판에는 '일월암은 두 개의 원형 돌무늬가
해와 달처럼 보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는 글귀가 보였다.
아울러 삼원동굴은
일월바위 남쪽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바위로
동쪽으로 깊이가 10여 평방미터이고,
안에는 '천관, 지관, 인관 등
삼관의 신상이 봉양되어 있다'는
글귀도 보였다.
바위 좌측에는
바위상단부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화산 동봉과 서봉이
그림처럼 다가왔다.
바위를 이고 있는 화산의 위성봉도
제각각의 자태를 뽐내며 길손을 유혹했다.
일월암으로 올라가면서...
일월암
화산 서봉
일월암에서 바라 본 화산은
마치 암벽의 전시장 같았다.
미세먼지만 없었다면
영혼까지 뺏길 뻔 했다.
일월바위에서의 조망을 마친 후에는
암릉 상단부를 이용하여
창룡령으로 올라갔다.
가는 도중에는
제법 가파른 철사다리와
눈을 의심케 하는 거벽이
다시금 길손을 유혹했고,
도교사원과 휴게소를 지나가자
용을 닮았다는 창룡령이 나타났다.
창룡령은
구고대부터 오운봉으로 이어지는
칼날 같은 암릉을 말하며,
530개의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김새가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것과 같다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으며,
돌계단이 없었을 때는
대부분의 탐방객들이
기어서 이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아울러 창룡령은
한유라는 사람이
이곳에 구경을 왔다가
너무 무서워서 울면서
구원을 청하는 편지를
산 밑으로 던져,
화인현령이 사람을 보내
구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신애라는 곳에
한유가 편지를 던진 장소가 있다.
창룡령을 따라 지루하게 올라가자
오운봉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나왔다.
안내판에는 창룡령에 위치하여
팔공감 정상에 있다.
창룡령
창룡령 입구에 있는 기암
북봉과 북봉삭도
남북을 주향으로 하는
산등성이의 가장 높은 곳으로,
서쪽 절벽은 험준하여
아래에 깊은 골짜기가 있다.
동쪽 절벽은 상대적으로 평평하며,
화산의 서봉, 동봉, 남봉을
등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길을 지나가야 한다.
봉우리에
푸른 소나무 숲이 우거져
경치가 수려하다.
'늦가을에는 눈부신 꽃들과
석양에 비친 오색 꽃구름 같아
오운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팔공감, 상말석, 장군석, 일인교,
오로송, 부부송, 와호송 금계수옥함 등이
명물이다.'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안내판을 지나가자
장군석 등의 기암이 스치듯이 지나갔고,
마침내 금쇄관이 나타났다.
금쇄관의 鎖나 關은
자물쇠나 잠금을 뜻한다.
금쇄관을 지난 곳에는
빨간 리본과 엄청난 자물쇠가
쇠사슬에 매달려 있었고,
얼마 후에는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 일행 대부분은
우측으로 이어지는 계단 길을 따라
남봉으로 올라갔는데,
가이드가 걸음이 빠르니
동봉을 거쳐 남봉으로 오라고 했다.
모든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는 것이다.
해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는
지체 없이 동봉으로 올라갔다.
올라가자 중봉정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는 좌측에 보이는
돌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올라가자 다시 갈림길이 나타났다.
동봉
동봉에서 바라 본 북봉 방향의 풍경
여기서는 좌측에 있는
인봉정에 들러
잠시 북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구경하고는
동봉으로 향했다.
동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초입에는
오버행의 계단길이 도사리고 있었다.
계단 좌측에는 안전한 길이 보였고,
그 길을 따라 올라가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오버행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갔는데,
나중에는 팔목이 시릴 정도로
경사가 가팔라
진땀을 쏟아야 했다.
괜한 욕심을 부린 모양이었다.
그런 길을 지나가자
동봉 정상부의 칼날 능선이
홀로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렇게 많이 보였던 사람들도
이곳에는 없었다.
그래서 잠시나마
바위벼랑에 앉아
화산의 또 다른 모습을 만끽하고는
정상 아래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내려가자 식당도
동봉 정상만큼 한적했다.
종업원들만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남봉
동봉에서 남봉으로 가면서...
장공잔도
식당을 지난 후에는
남봉 갈림길로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남봉으로 올라갔다.
올라가자 남봉과 장공잔도가
갈라지는 갈림길과
휴게소가 나왔다.
여기서는 쉬고 있는 일행에게
짐을 맡겨두고
화산의 상징인
장공잔도로 올라갔다.
장공잔도는
남천문을 지난 곳에 입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헤치고는
잔도가 절벽을 타고
이어지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곳 가이드가
사람들이 많아
제법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갈등이 생겼다.
시간 때문이었다.
하지만 갈등의 순간은 길지가 않았다.
동봉을 다녀오면서
시간을 지체한 터라
욕심을 부린다는 것이 미안했다.
장공잔도에서...
금천궁
서봉
해서 이내 포기를 하고는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남봉으로 올라갔다.
올라가자 피조애라는 석굴이
눈길을 끌었다.
피조애는 절벽 가운데 있었다.
이곳은 송나라 은사
진단이 수도했던 곳으로,
진단은 제가의 학설에 능통하였으며
천문과 지리에도 밝았던 사람이다.
송나라 태조와 태종이
진단을 등용하기 위해
여러 번 조서를 내렸으나
완곡하게 사양했다고 한다.
석굴 위에는 진단이 직접 썼다는
避詔嵓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피조애를 지나자
화려한 문양으로 단장한
금천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천궁은 지금까지 보았던
여느 사원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남봉 바로 아래에 있어
기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화산의 최고봉인 남봉은
금천궁을 지나
잠시 더 올라간 곳에 있었다.
최고봉답게 인파로 넘쳐났다.
남봉에서 바라 본 서봉삭도 방향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정상석이 있는 곳은
사진 찍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접근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빨간 리본과 자물쇠도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산정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봉삭도를 따라 오고가는
케이블카만이 느긋해 보였다.
남봉은 그렇게 다가왔다.
남봉에서 바라 본 화산은
참으로 묘한 곳이었다.
안과 밖이 확연히 달라 보였다.
산봉우리 사이사이에
울창한 숲이 있어
화산의 내부는 유순해 보일 정도였다.
등산로도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산행을 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그동안 방송에서 보았던
위압감도 없었다.
동봉으로 올라갈 때도 그랬고,
남봉으로 올라갈 때도 그랬다.
생각 이상으로 안전한 곳이었다.
돌계단만이 유일한 방해물이었다.
그런 생각을 뒤로하고
아래로 내려가자
연단로라는 곳이 나왔다.
서봉
연단로는 명나라 때의 도사
고전양이 만든 묘우로,
묘우가 무너지면서
화로까지 없어졌으나
1987년에 원래의 위치에
묘우를 다시 세우고
화로를 놓았다고 한다.
묘우는 신주를 모신 집이나
사당을 뜻한다.
주변에 음료를 파는 자판대가 있다.
연단로를 지나가자
서봉삭도가 이어지는 능선에
실낱같은 등산로가 보였다.
그쪽에서 바라보는 화산이
문득 궁금해 졌다.
녹음 짙은 건너편 계곡에는
탄광인 듯한 건물도 보였다.
그리고는 서봉의 하얀 거벽이
고혹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화산은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부러웠다. 명성이 허언은 아니었다.
단풍든 가을에 다시 한번 더 와서
서봉삭도를 타고 올라와야지...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맴돌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화산의 매력에 영혼이 빠져들었다.
서봉으로 가면서...
취운궁
북봉과 북봉삭도
비어령
다가간 서봉도
다른 봉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얀색의 거벽과
연두색의 숲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취운궁이 있었고,
취운궁을 지나가자
정상석이 있는 서봉 정상이 나타났다.
이곳 역시 탐방객들로 북적거렸다.
취운궁 앞의 거석이
연꽃을 닮았다고 해서
연화봉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서봉은 화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로 알려져 있다.
북봉에서 바라봤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서봉에서는
취운궁으로 다시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하산을 했다.
하산 길은
취운궁 좌측의 산 사면을 따라 이어졌는데,
이 길도 결국에는 올라갈 때 이용했던
등산로와 만나게 되어 있었다.
등산로가 합류하는 곳에서는
우측 돌계단을 이용하여 내려갔다.
내려가자 금천산장을 지나
금쇄관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금쇄관을 지난 후에도
암릉 길을 버리고
우측 사면 길을 따라 내려갔다.
북봉삭도가 이어지는 협곡
서봉
북봉삭도가 지나가는 협곡
내려가자 거대한 암벽을 따라
하산 길이 이어졌고,
길이 끝나는 곳에 천가가 있었다.
천가는 화산에서의
모든 산행이 끝나는 곳이었다.
만남의 장소였고,
이별의 장소였다.
천가에 도착해서는
뒤로 미뤄두었던 북봉으로
곧장 올라갔다.
올라가자 동봉에서
서봉으로 이어지는 산정과
북봉에서 창룡령을 거쳐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등줄기가 다시금 유혹을 했다.
수많은 건폭을 품고 있는
계곡도 건너편에서 손짓을 했다.
북봉을 마지막으로
화산에서의 모든 여정은 끝이 났다.
하지만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첫사랑의 여인을 떠나보낼 때처럼
여운이 오래갈 갈 것 같았다.
화산은 그런 산이었다.
귀품이 있는 산이었고,
거대한 산이었다.
화려했지만 단아함이 있는 산이었다.
하산을 하면서...
천가
셋째 날...운대산과 홍석협을 거쳐
다시 정주로...
생각보다 이른 시각에
낙양에 도착한 덕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여행이든 산행이든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몸과 마음이 맑아지는 법...
비록 구름 짙은 하늘이
길손의 여정에 텃세를 부렸지만
버스를 타고 운대산으로 향했을 때는
가벼워진 육신 덕에
영혼까지 설레었다.
운대산은 그렇게 다가왔다.
버스는 초작시를 지나
잠시 더 달려가다가
우리를 운대산 입구의 주차장에 내려주웠다.
운대산은 거대한 암벽이
산허리를 감싸고 있는 곳이었다.\
태항산맥의 가장자리에 있어
태항산 중심부보다는
감흥이 덜했지만
거벽의 위용은 대단했다.
여기서는 입장권을 구매한 후,
이곳에서 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하여
운대산으로 올라갔다.
운대산
수유봉 직전의 석굴
올라가자 붉은 바위로 이루어진
홍석협이 차장을 스쳐갔다.
협곡을 타고 흐르는 폭포가 눈길을 끌었다.
우리는 홍석협 주차장에서 하차한 후,
다시금 버스를 갈아타고
운대산에서 가장 높다는
수유봉으로 올라갔다.
홍석협에서 수유봉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도로 그 자체가 볼거리였다.
거벽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는
낙차도 상당했지만
굴곡이 심해 수시로 비명이 나올 정도였다.
터널도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중국인들의 뚝심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그런 길을 따라 한동안 올라가자
수유봉의 산행 기점인 주차장이 나타났다.
주차장 주변에는 제법 많은 상가가 보였고,
협곡이 끝나는 산정에는
하얀 암봉이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수유봉 이었다.
주차장에서 바라 본 운대산은
아래에서 보았던 운대산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수유봉으로 올라가면서...
온통 나무로 덮여 있었다.
약간은 실망스러웠다.
운대산은 중국 10대 명산 중에 하나로,
항상 구름이 걸려 있어
이런 이름을 가졌다 한다.
제원시에 있는 왕옥산과
초작시에 있는 운대산을 합쳐
1994년에 중국 국가급풍경명승구로
지정되었으며,
왕우산은 愚公移山이란
고사의 배경이 된 곳이다.
주차장에 도착한 후에는
곧바로 수유봉으로 올라갔다.
주차장에서 수유봉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은
생각 이상으로 가팔랐다.
심장이 짜증을 낼 정도였다.
그런 길을 따라 올라가자
갈림길이 나왔고,
우측 사면 길을 따라가자
다시 갈림길이 나타났다.
여기서는 좌측 길을 따라 올라갔다.
올라가자 제법 커다란 석굴이 나왔다.
석굴 내부에는 향을 피워놓은 제단이 있었다.
석굴을 지난 후에도 돌계단은 계속되었다.
그리고는 도교 사원을 지나
수유봉 정상과 산정을 지키고 있는
현제궁이 나타났다.
현제궁
수유봉 정상에서 바라 본 상가지역과
수유봉으로 이어지는 도로
현제궁은 방문객들로 혼잡스러웠다.
수유봉에서 바라 본 운대산은
주차장에서 바라 본 운대산과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태항산맥 특유의 거벽과 협곡이
희뿌연 안개를 머금고 길손을 유혹했다.
굽이치는 도로도 장관이었다.
맑은 날 보았으면 더없이 좋았을 풍경이었다.
수유봉 정상에서 주변을 둘러 본 후에는
올라갈 때와는 다른 길을 이용하여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도 가파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글표지판이 있어 정감이 갔다.
수유봉에서의 짧았던 산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수유봉 산행을 마치고
잠시 상가에 들러 구경을 한 후에는
홍석협을 지난 마을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도착한 식당에는 한식을 곁들인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상가지역으로 내려가면서...
외국 여행을 할 때마다
음식 때문에 고생을 하는 편이라
한식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모처럼 위장을 다독거릴 수가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다시 버스에 올라
이번 여정의 종착지인
홍석협으로 올라갔다.
홍석협은 300만 년 전에
바다 속에 잠겨 있던 땅이
융기하면서 형성된 것이라 한다.
홍석협은
자룡폭, 민룡폭, 환룡폭, 와룡폭,
흑룡폭, 청룡폭, 두룡폭 등의
크고 작은 폭포가
붉은 협곡을 따라 연이어지는 곳으로,
운대산에서 가장 아름답고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홍석협에서...
하지만 휴일에 이곳을 방문할 요량이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탐방로가 비좁고 인파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려 입구를 지나가자
홍석협을 조망할 수 있는 다리가 나왔고,
다리를 지나가자 계곡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홍석협...
비좁은 탐방로를 따라
사람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작정 걸어가야 했다.
사진을 찍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과연 중국이었다.
그런 길을 따라 한동안 걸어가자
폭포와 다리가 나왔고,
다리를 지나가자 옥색의 소가 나타났다.
그 아래에는 작은 폭포가
연신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홍석협에서...
탐방로도 한결 여유가 있었고,
육신을 쉬게 할 공간도 있었다.
협곡이 넓어진 덕분이었다.
그러나 여유는 잠시였다.
앞서가던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잔도로 올라가자
비좁은 통로가 계속되면서
다시금 인파에 파묻혀야 했다.
조금만 지체해도 눈총을 받았고,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곡예를 해야 했다.
그런 길은 또 다른 폭포를 지나고
다리를 지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상태로 한식경이 지나갔을 무렵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홍석협의 마지막 비경인 폭포지대였다.
낙차가 상당해 보이는 폭포수가
거벽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홍석협에서...
폭포 주변은 제법 널따란 암반이 있어
여기서는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둘러볼 수가 있었다.
폭포지대에서 바라 본 홍석협도
용수협지봉이나 운룡하지봉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여유만 있다면
여행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폭포지대를 마지막으로
중국에서의 모든 여정은 끝이 났다.
긴 여운이 남는 여정이었다.
홍석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