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5월 14일 부활 제6주일>
파라클리투스(Paraclitus, 보호자, 성령)
사람들은 기도한다. 자기 소망을 위하여 기도하는가 하면 자녀의 앞날을 위해 기도한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도 축복을 기원하고 은퇴를 앞둔 중년들도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도움을 청한다. 모든 기도가 다 이루어지면 좋을까? 우리가 바라는 대로 기도가 이루어지면 과연 좋을까?
우리 삶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실까? 기도하면 이루어주시고 기도하지 않으면 내버려 두실까? 분명하게 말하지만 이런 식의 기도는 기도가 아닌 개인의 욕망일 뿐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기 욕구 표현이요, 결코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좀 더 도움을 받고 좀 더 편하고 안전하게 이루어나가는 데 필요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각자의 삶은 각자에게 주어졌다.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며 스스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신다. 그럼 성령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늘 요한복음 14장 16절 이하의 말씀에는 ‘세상’과 ‘너희’(예수님의 제자, 곧 우리 자신)라는 표현이 나란히 나온다. 요컨대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이어서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성령의 역할이 분명해진다.
성령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파라클리토(보호자)로써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세례성사로 새로 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성령께서는 더욱 진리를 깨닫도록 도와주시고 예수님의 면모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이들의 기도와 자기 방식과 자기 능력만을 고집하는 세상의 기도는 다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 삶의 방편으로 기도를 하는가? 기도 자체가 공번된 일(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며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공번된 일이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가 자신의 안위나 영달을 위해 기도한다. 소위 청원 기도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의 내용을 보면 참으로 내놓고 말하기도 부끄럽다. 옛날 성황당(서낭당) 나무 앞에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하던 토템 신앙과 무슨 차이란 말인가?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다르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달리 개입하지 않으신다. 이미 당신의 일을 다 마치셨다. 사사건건에 개입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속에 당신의 뜻을 열어두셨다. 누구나 선한 의지를 갖추고 양심껏 산다면 이미 그들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셈이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과 양심이라는 자연성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으로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자기 의지로 적극적 선택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로서 진정 기도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파라클리토(성령)를 보내시어 이들이 품은 뜻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시고 더욱 진리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신다. 이들이 품은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요한 14,21)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참된 행복인가?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행복의 길에서 벗어나 ‘세상’이 주는 행복을 좇는다. 우리 아이가 남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가고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행복할 거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서로 ‘세상’의 좋은 조건으로 만나 결혼하면 더 잘살고 행복할 거라고 굳게 믿는 듯하다. ‘세상’에서 남보다 출세하면 더 당당해지고 더 큰 권세를 쥐면 남부럽지 않을 거라고 장담한다. 그래서 기도한다. 대학 시험에만 꼭 붙게 해주신다면, 이번에 꼭 입사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신다면 마치 평생 은인으로 모실 것처럼 온갖 맹세를 늘어놓는다. 하느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주셔야 할까?
그럼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들어주셔야 할까? 병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들어주셔야 할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나 병자들을 위한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자로서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약자를 보호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마음의 자세가 기도로 표현되고 우리의 노력과 희생이 그렇게 실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로 하느님께서는 자연의 섭리 안에 이미 하실 일을 해두셨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신다. 물론 기도해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그 아들은 아직 젊은 나이인데 자신감도 없고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10년 동안 열심히 미사에 가서 기도하고 묵주기도를 매일 바쳤는데 아직도 차도가 없단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이야기는 설정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그 아이의 우울감을 낮춰주고 자신감을 세워주는 것이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일까?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삶을 간섭하시는 하느님은 우리를 노예로 여기는 분일 뿐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시다.
아들의 문제가 기질적인 것이 아니라면 가족 관계의 문제로 의심할 수 있다. 그럼 아들을 통해서 우리 가족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기도’의 자세가 된다. 아들의 문제는 위기이지만 우리 가족에겐 또 하나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진실을 향해 마음을 열면 파라클리토(성령)께서 그 마음을 보호하시어 ‘기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렇게 염원하고 기도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기도는 문제 해결이 아니다. 참된 기도는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주신다. 세상의 일은 우리에게 맡겨주셨다. 세상의 일까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은 아직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태도다. 아버지를 알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삶 안에 ‘자기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다. 세상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늘나라에 사는 사람처럼 자신의 소명(아버지의 뜻)을 살아가는, 곧 사랑의 계명을 살아가는 것, 이를 위해 실천하며 염원하는 것이 바로 참된 기도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이루어가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시작하신 일을 마치실 것이다. 모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기도는 여기에 동참하는 것이고 초대받아 응답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공번된 일이요, 하느님의 일이라 말한 것이다. 우리의 삶이 사적이지만 않고 공번된 측면이 있나 보다.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즐거운 일인가? 내 삶이 ‘세상’에 머무르지 않고 ‘성령’과 함께하기 위해서라도 오늘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기도해야겠다.
첫댓글
가상심덕에
은총가득한
하루였습니다
세상에서 자기삶안의 십자가의 삶이
곧 참된기도이며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기에
축복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