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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과 문화사회학
최종렬
이 글은 포스트모던과 문화사회학의 관계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모던 사회학은 주로 전통과 모던이라는 이분법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정의함으로써 그 지평을 좁혀왔다.
그 결과 포스트모던을 모던과의단절이나 연속성의 관계를 통해서만 정의하는 좁은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좁은 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통과 모던의 이분법 대신에, 고대-중세-모던의 삼분법을 채택해야 한다.
인간의 질서가 그 근본적인 차원에서 상징적이라 할 때, 고대는 주술, 중세는 세계종교, 모던은 과학이라는 상징체계를
통해 그 질서를 구성하였다.
모던 사회학은 과학이 사회세계에서 초월성, 도덕, 정서를 축출하고 오로지 인지적으로만 작동하는 사회세계를 만들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이론과 연구를 수행해왔다.
하지만 포스트모던은 이러한 근본적인 가정에 도전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은 축출되었던 초월적 차원과, 가치 평가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이 물상화된 것처럼 보였던 사회세계에 되돌아
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구적 차원으로만 사회적 행위를 설명하려는 모던 사회학의 기획은 심각한 한계에 처했다.
이제 의미와 상징이 사회적 행위를 구성하는 방식을 탐구하기 위해 사회학은 문화적 전환을 이루어 문화사회학이
되어야 한다.
1) 이 글은 원래 2006년 4월 15일에 있었던 한국문화사회학회 창립학술대회에서 발표되었다.
당시 유익한 논평을 해준 박창호 교수께 감사드린다.
또한 문화와 사회의 논평자들께도 고마움을 표한다.
I. 머리말
포스트모더니즘의 광풍이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다.
지금은 대중매체의 주된 관심에서는 멀어져버렸지만, 문학을 비롯하여 미술, 건축, 영화, 철학 등 인문학 전반에 미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은 각 영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할 정도로 지대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논의는 아주 적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를 주로 인문학자들이 이끌어간 이유도 있지만, 아마 보다 중요한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기존
사회학의 근본적인 가정들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도전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대학제도 내에서 독자적인 분과 학문으로 누려왔던 사회학의 기존 정체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을 것이라는 우려가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인문학만의 일이라거나 또는 유행을 따라 수입된 여러 사조들 중의 하나로 폄하하는 경향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 글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학적 함의를 살펴보려고 한다.
포스트모던2)은 ‘문화’와 ‘사회’라는 모던 사회학의 근본적인 이분법에 도전하여 사회학을 문화사회학으로 전환하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의미의 문제’와 씨름한 맑스, 뒤르케임, 베버와 같은 ‘고전 사회학’(최종렬, 2005a; 2005b)과 달리 ‘모던 사회학’에서는
의미의 문제를 핵으로하는 문화가 주된 연구 대상이 아니었다.3)
그 주된 이유는 모던 사회2) 이 글에서 포스트모던(the postmodern)은 postmodernism으로 불리는 문화적 차원과
postmodernity라 불리는 제도적/시대구분적 차원 모두를 포괄하는 용어로 쓰일것이다.
3) 여기서 말하는 모던 사회학은 실증주의적이고 신실증주의적인 사회학을 주로 지칭한다.
실증주의적 사회학은 뉴턴의 수학적 물리학을 모델로 하여 사회와 인간에 대해 보편적 법칙을 찾고, 그러한 소수의 보편적 법칙을 통해 사회와 인간 모두를 설명하려 한다.
신실증주의적 사회학은 실증주의의 절대 법칙 대신에 통계학을 모델로 한 경험적 일반화를 추구한다(Hinkle, 1980, 1994).
물론 모던 사회학이 포스트모던과 문화사회학은 근대 세계에 새롭게 출현한 (시장)사회를 핵심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때 ‘사회’ 또는 ‘사회구조’는 뉴턴의 수학적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과학혁명을 인간세계에 적용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사회는 무한한 인과관계의 연쇄이며, 이 연쇄는 엄밀한 수학적 법칙을 따라 작동한다.
이렇게 기계적으로 정의된 사회에서 ‘의미’는 그 설 자리를 잃는다.
모던 사회학의 핵심적 주제들인 ‘합리화,’ ‘세속화,’ ‘탈주술화,’ ‘아노미,’ ‘소외’ 등은 모두 사회세계에서 의미 또는 상징의
중요성이 감퇴됨을 가정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을 창출한 맑스, 베버, 뒤르케임은 정작 이러한 과정이 일방적으로 진행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최종렬, 2006b), 모던 사회학은 문화를 사회학의 지평에서 몰아내거나 주변화시켰다.
모던 사회학이 이렇게 의미의 문제로부터 후퇴하여 ‘사회’를 탐구하는 동안, 인류학을 비롯한 인문학은 ‘문화’를 탐구의
핵심 주제로 삼아왔다.
‘문화’와 ‘사회’ 또는 ‘문화’와 ‘사회구조’의 이분법이 지배적인 동안 사회학은 독자적인 의미론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하지만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이 일어나면서 이러한 이분법은 심각하게 도전받기 시작하였다(최종렬, 2005a).
이러한 문화적 전환을 이끌어 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포스트모던에 관한 논의이다.
II장에서는 지금까지 포스트모던에 대한 한국 사회학자들의 논의의 지형을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III장에서는 포스트모던을 바라보는 한 이념형적 틀인 고대-주술, 중세-세계종교, 모던-과학의 삼부작을 제시할 것이다.
IV장에서는 포스트모던을 모던 과학에 의해 축출되고 주변화되었던 초월성, 도덕, 정서가 카이로스적으로 되돌아온 것
으로 정이러한 (신)실증주의적 경향만이 존재한 것은 아니다. 상징적 상호작용론 학파와 비판적 사회학도 존재한 것이
틀림지만, 사회학 내에서는 물론 모던 기획 전체에서 이들이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 V장에서는 사회적 행위를 도구적 차원에서만 설명하는 모던 사회학을 넘어서기 위해 사회학이 문화적 전환을
이루어 문화사회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II. 포스트모던에 대한 한국 사회학의 입장
90년대 초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사회과학으로 소개(김성기, 1991)한 이후, 포스트모던에 대한 논의는 한국 사회학 내에서 한동안 잠복되어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영문학과 철학을 필두로 한 인문학이 포스트모던에 대한 논의를 주도해 갔다(정정호‧강내희, 1991; 김욱동,
1992; 윤평중, 1992; 이진우, 1993). 하지만 90년대 후반부터, 포스트모던에 대한 외국 사회학자들의 입장이 한국 사회학학자들의 시각으로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바우먼에 대한 소개(박창호, 1999; 2000; 송재룡,2000; 강수택, 2001), 기든스와 벡과 같은 성찰적 근대화론자들에 대한 소개(송재룡, 1998; 2001; 박창호, 2000; 정태석, 2002)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소개와 더불어, 포스트모던에 대한 한국 사회학자들 나름의 시각도 제출되기에 이르렀는데, 크게 보면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입장이 있다.
1) 모던 사회학이 상정한 사회와 자아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바뀌고있다는 포스트모던 사회학자들의 입장을 수용하고,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새로운 포스트모던 사회성과 자아를 탐구하는 연구(박창호, 2001;2002; 2005a; 2005b).
2) 포스트모던 논의 일반과 사이버 공동체에서 실현되고 있는 포스트모던 공동체를 신공동체주의를 통해 비판하는 입장
(송재룡, 1997;포스트모던과 문화사회학 2032001; 2004; 2005).
3) 근대와 탈근대의 대립을 통해 지식인의 위상과 사회적 연대의 성격을 이론적으로 탐구하고, 이것이 한국 사회에 가지는 함의를 탐색하는 입장(강수택, 2000; 2004).
4) 포스트모던을 모던의 병폐가 해결된 이상적 미래상으로 설정하고, 그 내용을 유교 등 동양의 사회사상에서 찾으려는
입장(이영찬,2001; 홍승표, 2005).
5)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의가 한국의 구체적 현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오리엔탈리즘에 불과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입장(우실하, 2005).
6) 포스트모던을 모던에 대한 미학적 도전으로 보고 그 도전의 과정과 결과인 사회적인 것의 미학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회학이 문화적전환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최종렬, 2003a; 2003b; 2004a;2004b; 2004c; 2005a).
첫 번째로 박창호는 성찰적 근대성론자인 기든스와 포스트모더니티의 사회학자인 바우먼에 주로 기대어 포스트모던을
정의한다. 박창호(2000: 105)는 양자의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강조하면서, 사회의 양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 모습을 애매함, 불확실성,우연성 등을 동반한 다원성, 복잡성, 분화 등으로 그리고 있다.
박창호는 이러한 사회의 양상의 변화는 주로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탈근대적 사회성과 자아를 탐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 핵심은 유동성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사회성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를 허무는 유연한 공간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자아 역시 유동적이고 다면적이다(박창호, 2001).
이 모든 것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전환함으로써 삶이 탈맥락화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타자 지향적인 어울림(‘타자와의 함께하는 나의 문화’)을 기초로 하는 사회적 맥락이 자기 지향적인 어울림(‘나와
함께하는 나의 문화’)을 그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적 맥락으로 전회가 이루어졌다(박창호, 2005a).
이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인간의 실천적 행위가 미학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합리화를 종교로부터 윤리, 과학, 예술 등이 분화되어가는 과정으로 본다면, 사이버공간의 미학화 역시 인간의 자유주의와 탈신비화를 통해 근대성이 주체에 가한 제약을 벗어나는 합리화 과정의 연장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이것이 진정한 자유의 확대인지 아닌지는 더 지켜보아야 한다(박창호,2005b).
두 번째로 송재룡은 성찰적 근대성론자와 바우먼과 같은 포스트모던 사회학자들이 제시하는 공동체주의 및 일종의 그것의 실현이라 할 수 있는 사이버 공동체가 추상적이고 탈맥락화되어 있음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테일러(Charles Taylor)로 대표되는 신공동체주의를 제시한다.
송재룡은 성찰성의 근대론자의 핵심적 개념인 ‘성찰성’이 자아의 내성에만 고착되어 있어 문화적‧윤리적 차원을 향한 전환의 가능성을 막아버리고 있다고 비판한다(송재룡, 1998).
그는 또한 바우먼의“‘선천적 도덕 본능’이라는 개념과 이로부터 추론되고 있는 개인과 사회에 관한 공리들이 특정의 규범적 전통과 역사,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 맥락으로부터 탈맥락화된 추상화된 개념”(송재룡, 2000: 31)이라고 비판한다.
사이버 공동체는 구성적 특성과 문화적 특성을 포괄하고 있다.
구성적 특성에는 가상현실에 대한 체험의 급속한 증대, 유동적인 자아 정체성, 위계 구조 쇄신이 포함된다.
문화적 특성에는 이미지라는 비문자적 언어 체계의 영향력의 증대로 실재에 대한 비진정성의 증대가 꼽힌다.
이러한 특성의 긍정적 성격을 중시하면, 물리적 공동체에서포스트모던과 문화사회학 주체의 삶을 구속해왔던 시‧공간의
한계와 정치적‧도덕적‧문화적 제한과 규제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사이버-자유해방주의가 나타난다.
송재룡은 이러한 사이버 공동체가 공동체와 주체의 개념을 탈맥락화시키고 추상화된 단위로 만들어버린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인간을 언어‧문화적이며 역사‧공동체적 존재로 보는 신공동체주의를 제시한다(송재룡, 2004).
그는 더 나아가 제도, 조직, 체계 등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사회학이 문화적 전환을 이루어 모더니티의 지배적 서사에 의해 여백으로 남겨져 있던 문화 차원을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송재룡, 2005).
세 번째로 강수택은 근대와 탈근대의 관계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구 학자들의 논의를 검토하고,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함의를 끌어내는 데 주력한다.
그는 근대적상황(제한적 자유주의 근대성과 조직화된 근대성)이냐 탈근대적 상황(조직화된 근대성의 위기)이냐에 따라
지식인의 역할이 달라진다는 역사적인 관점을 채택한다.
근대적 상황에서는 만하임의 자유 부동하는 지식인론,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지식인론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
탈근대적 상황에서는 푸코의 특수적 지식인론, 바우먼의 탈근대적 지식인론, 리오타르의 지식인 종언론이 그 역할을 다한다.
전근대성, 근대성, 탈근대성, 반주변적 근대성 등 상이한 시공간적 특성이 공존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는 ‘역사적 개념’
으로서 주체적 역할, 해석적 역할, 비판적 역할을 하는 일상생활에 뿌리박은 ‘시민적 지식인’이 필요하다(강수택, 2000; 2001). 강수택은 사회적 연대의 문제에서도 철저히 역사적 관점을 택한다.
고전적인 연대론은 전근대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전환하면서 전근대적인 사회적 결속력이 약화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왔다. 뒤르케임과 파슨즈의 통합론적 접근, 셀러의 인격론적 접근, 헥터의 합리적 선택론적 접근, 하버마스의 소통이론적 접근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작금에는 전통적 결속력은 물론 근대적 결속력도 현저히 약화되어가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벡의 능동적 연대론, 기든스의 탈전통적 연대론과 같은 후기근대주의적 접근과 리오타르의 다원적 사회연대론, 바우먼의
탈관용적 사회연대론과 같은 탈근대주의적 접근이그래서 나온 것이다.
이들은 모두 차이(혹은 개인화 경향)와 연대 사이에 특별한 관심을 표하면서, 동시에 책임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압축적 근대화를 겪었을 뿐만 아니라 지구화와 민주화 등 강한 원심력이 존재하는 한국에서는, 안정되고 폐쇄적인 사회적 연대가 아닌 타인에 대한 자발적인 관심과 책임감을 겸비한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사회의 연대를 약화시키고 있는 시장주의의 지배가 가속화되고 있는 시점이기에 더욱 그러하다(강수택, 2004).
네 번째로 이영찬과 홍승표는 포스트모던을 모던의 병폐가 해결되는 일종의 이상적 미래상으로 설정하고, 그 모습을 동양 사상을 통해 구체화하려고 시도한다. 먼저 이영찬은 근대 서구가 수학과 기하학을 모델로 하여 사회세계를 구성하려 하였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 한계점을 이성주의, 개인주의, 과학주의로 규정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이영찬은 유교에서 발견되는 대대주의, 도덕적 개인주의, 생명주의를 제시한다.
이 세 가지 대안은 모두 음과 양, 개인과 공동체, 맥락성과 보편성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을 가정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유교의 합리성에서는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가 동일한 리(理)를 공유함으로써 동질성과 연속성을 갖기 때문에 행위의
주체와 객체,사실과 당위가 분리되지 않”(이영찬, 2001: 43)기에 가능한 것이다.
홍승표는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인간소외, 환경 악화, 인간/집단 관계의 악화 등으로 명시하고, 그 근본적인
원인이 근대적 세계관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적 세계관은 “‘모든 존재가 근원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과 자기 이익의 극대화라는 보편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욕망의 주체’와 이러한 욕망의 충족을 위한 ‘도구로서의 의미’만을 지니는 대상으로서의 세계(홍승표, 2005: 18)를 보는 관점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홍승표는 통일체적 세계관, 즉 천도(天道), 지도(地道), 인도(人道)가 모두 동일한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는 관점, 다시 말해 모든 존재들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근원적으로 통일체임을 전제로 하는 관점을 제시한다.
줄여 말하면, 이영찬과 홍승표 모두 근대의 수학적 물리학이 제거한 리(理)를 되살려 그 우주적 질서원리에 의해 최종적인 의미가 규정되는 인지적/도덕적/정서적 분류 체계를 탈현대라 불리는 사회세계에 실현하려 한다.
다섯 번째로 우실하(2005)는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나름대로 근대의 기획을 완성했다고 믿는 서구 사회의 특수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한국에서 이루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의는 한국의 구체적 현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오리엔탈리즘에 불과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 구체적인 특성으로는, ‘지금, 이곳’을 벗어난 서구 추수적인 학문 태도, ‘중심’을 해체하자면서 ‘학문적 중심’에 복종하는 자가당착,철학적 논의로 들어가지 못하는 학문의 천박성과 유행성, 우리의 ‘뒤틀린 근대’를 보지 못하는 ‘탈근대 논의,’
또 다른 거대 담론 등이 지적된다.
우실하가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 뛰어든 것은 그에 대한 사회학적인 함의를 따져보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로 대표되는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보편적 현상으로서 문화 방면의 인간소외 문제, 이데올로기, 권력 작용을 분석하고 비판한다.
둘째, 서구 문화에 의한 문화 종속의 문제를 비판한다. 셋째, 근대화=서구화 과정을 통해 서구적 시각에서 비하되고 폄하되어온 한국의 전통을 재평가하고, 미래를 위해 되살릴 가치가 있는 것을 되살려 문화의 다양성을 보존하고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실하의 논의는 주로 철학과 영문학 등 인문학에서 이루어져온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우실하가 사회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의 전통에서 신화를 포함하는 인문학쪽으로 이동해가면서 상대적으로 제도 학문
으로서의 사회학으로부터 멀어진 이유도 있지만, 그만큼 사회학 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적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최종렬은 과학, 도덕학, 미학이라는 지식의 이념형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정의한다.
서구의 ‘모던’은 계몽주의와 대항계몽주의의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계몽주의는 ‘과학’을 대항계몽주의는 ‘도덕학’을
각각 지식의 전범으로 채택하였다.
하지만 ‘미학’을 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사회가 출현하여 기존의 사회구성의 원리의 두 축인 과학과 도덕학에 도전하게
되었다.
사회의 미학화는 과학과 도덕학의 지식 모델에 의존했던 모던 전반을 흔들어놓는다.
이는 미학으로서의 포스트모던 사회이론의 도래를 정당화한다(최종렬, 2003a; 2003b).
최종렬은 이러한 변화를 의미의 문제를 제거하고 체계와 구조만을 강조해왔던 기존의 모던 사회학은 적절하게 탐구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사회학이 문화적 전환을 이루어 포스트모던문화사회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최종렬, 2005a).
위의 연구들은 한결같이 포스트모던이 문화와 매우 관련이 깊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입장’에서 이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지 명확한 틀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해 문화와 결합되어 있는 포스트모던을 사회학이 어떻게 문명사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또 포스트모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탐구해야 하는지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 글은 위의 여섯 가지 입장중에서 최종렬의 입장을 보다 명확히 하여, 포스트모던과 문화사회학의 관계를 밝히고, 사회학이 문화사회학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이유를 정당화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
III. 주술, 세계종교, 과학
모던 사회학, 특히 계몽주의에 기반을 둔 모던 사회학은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수립할 때 전통과 모던의 이분법을 통해
정의해왔다.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게젤샤프트의 이분법이 대표적이다.
이를 이어 성/속, 사회/개인, 지위/사회 계급, 공동체/결사체 등의 이분법이 이어진다.
그 핵심은 현대사회는 이전의 사회적 질서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질서라는 것이다.
현대 산업사회는 필요와 결핍을 전통적인 자연적 공동체와 완전히 다른 혁명적이고 독특한 방식으로 충족시킨다.
‘사회’, 즉 새로 출현한 시민사회는 부르주아의 ‘공리주의적 질서’에 터하고 있다(Turner, 1996: 4~5).
이 공리주의적 질서는 이전의 귀족의 기독교라는 ‘종교적 질서’로부터 근본적으로 단절된 것이라고 계몽주의자들은 주장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현대의 공리주의적 질서의 ‘새로움(novelty)’을 강조하기 위해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이분법이지만, 그럼
에도 그 결과 전통은 물론 현대의 성격까지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오류를 낳는다.
우선 현대는 이렇게 계몽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항계몽주의와 더 나아가 반계몽주의까지 포괄하고 있는 매우 복합적
이고 역동적인 것이다(최종렬, 2004b).
맑스, 뒤르케임, 베버와 같은 근대성의 위대한 이론가들은 이러한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그래서 계몽주의의 독단을 대항계몽주의를 통해 비판하고 보완하려 하였다(최종렬, 2005b).
또한 전통도 기독교라는 세계종교로 환원되지 않는 고대적 요소까지 포괄하는 복합적인 것이다.
그래서 맑스, 뒤르케임, 베버는 모두 전통이라 불리는 유럽의 중세사회에만 시선을 가두지 않고, 그 이전까지 시야를 넓혔다.
맑스의 역사 유물론은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을 넘어 원시 공산주의와 고대사회까지 논의의 틀 안으로 끌어들였다.
베버 역시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을 넘는 철학적 인류학, 즉 주술, 세계종교, 과학의 계기적 발전이라는 삼부작을 제출하였다.
뒤르케임은 비록 기계적 연대와 유기적 연대라는 이분법을 사용하였지만, 그의 기계적 연대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소위 원시사회까지 포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던 사회학은 고전 사회학과 달리 전통과 현대의 대립을 통해서만 자신을 정의함으로써 사회학의 지평을 좁혔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기든스(Giddens, 1990)와 벡(Beck, 1992)같은 성찰적 근대성론자는 물론 바우먼(Bauman, 1992) 같은 포스트모던 사회학자마저도 포스트모던을 정의할 때 고대와 주술을 거의 고려하지 않고 전근대성(전통)과 근대성의 이분법의 틀을 유지한다.
고대는 원시사회(primitive societies)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인류학자들만이 탐구할 주제로 간주되어왔다. 사회학자에게 고대는 그저 ‘전통’ 아니면 ‘전근대’라는 이름으로 묻혀 있는 ‘암흑의 대륙’과 같은 것이다.
나는 포스트모던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고대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중세와 함께 묶어버리는 대신 고대를 따로 떼어내어 그 독특한 주술적성격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4)
그래서 나는 포스트모던을 고대, 중세, 모던의 삼분법적 관계를 통해 정의함으로써 사회학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다.5)
4) 이 점에서 포스트모던에서 고대적 요소를 지적하는 마페졸리(Maffesoli, 1996)는 독보적이다.
5) 래쉬(Lash, 1993) 역시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학을 논의하면서, 근대화를 ‘원시적단계,’ ‘종교적-형이상학적 단계,’ ‘근대적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는데 이는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는 결코 뜬금없는 주장이 아니며, 오히려 고전 사회학의 전통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중세, 모던은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가?
나는 베버의 철학적 인류학, 즉 주술(magic), 세계종교(worldreligion), 과학(science)을 고대, 중세, 모던과 짝지을 때 가장
잘 이해 될 수 있다고 믿는다.6)
나는 또한 뒤르케임(Durkheim, 1995)을 따라 인간의 ‘사회적 질서(social order)’는 자연적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성(the sacred)과 속(the profane)의 이분법적 상징적 분류 체계를 통해 유의미한 질서(a meaningful order)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상징적 분류 체계는 인간의 행위를 안내하는 나침반과 같다.
인간의 행위를 안내하는 내재적 정보 자원인 유전자 프로그램 또는 모델은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볼 때 엄밀하지 않기에
인간의 행위를 광범하게만 통제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이 효과적인 형태를 가지기 위해서 반드시 유전자 프로그램 이외의 외재적 정보 자원에 의해서 상당한 정도로 통제되어야 하는데, 상징적 분류 체계가 바로 이 일을 떠맡는다(Geertz, 1973).
이러한 분류 체계는 수학적/기하학적 분류 체계와 같이 인지적[眞]인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善]이고, 정서적[美]이기도
하다(최종렬, 2004a).
인지적 분류 체계(과학)는 참과 거짓을 구분하고, 도덕적 분류 체계(도덕학)는 선과 악을 구분하며, 정서적 분류체계(미학)는 미와 추를 구분한다. 이러한 분류 체계가 없다면 이 세계는 무정형의 혼란 상태일 뿐이다.
상징적 분류 체계가 구조화되는 중심적인 방식들 중의 하나는 성과 속으로 구조화되는 것이다.
6) 베버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는 베버(Weber, 1948, 1968)를 볼 것.
그리고 베버의 철학적 인류학에 대한 좋은 연구서로는 슈레더(Schroeder, 1992)를 볼 것.
베버는 인류의 역사가 주술, 세계종교, 과학으로 계기적으로 발전한다는 진화론적 관점을 취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 단계가 이전의 단계와 완전히 단절된다고는 보지 않았다. 오히려 중첩되어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각 역사적 단계에서 지배적인 경향이 주술이냐, 세계종교냐, 과학이냐는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상징적 이분법에서 성은 성스럽고 선한 것이며, 일상생활로부터 격리되어 있고, 또한 존경받고 숭배받는다.
반면 속은 악한 것이며, 보통 성스러움의 위반으로 나타난다. 위반이란 실체적으로 정의된 성이 조금이라도 변형된 것이다. 인간은 성스러움을 공유해야만, 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 사회는 동물의 군집과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상징적 분류 체계는 무정형의 혼란 상태에 놓여 있는 대상들을 쪼개고 분류하여 서열을 매기고 결국 질서를 만든다.
이렇게 질서가 수립되어야만 인간은 그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여 문제 상황을 정의하고 해결책을 모색한다.
주술, 세계종교, 과학 모두 이 점에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동일하다.
주술과 세계종교는 진/선/미가 그보다 더 궁극적인 ‘신념 체계(a system of beliefs)’안에 배태(embedded)되어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주술의 경우에는 그 신념 체계가 ‘국지적’으로만 힘을 발휘한다면 세계종교의 경우에는 ‘보편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과학의 단계는 진/선/미라는 ‘가치(value)’가 궁극적인 신념 체계의 배태성으로부터 벗어나와 분화되어 자율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또한 사회를 구성하는 지배적 원리로서의 지식의 유형을 통해 보면, 주술의 세계는 ‘정서적인’
성과 속의 이분법적 분류 체계가, 세계종교의 세계에서는 ‘도덕적인’ 성과 속의 이분법적 분류 체계가, 과학의 세계에서는
‘인지적인’성과 속의 이분법적 분류 체계가 지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요약하면 고대에는 주술이, 중세에는 세계종교(기독교, 유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가, 모던에는 과학이 사회세계를 구성하는 핵심적원리가 된다.
고대는 분절된 사회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사회마다 국지적으로 작동하는 주술이 지배한다.
중세 시대는 초월성의 이름으로 주술을 지역적인 물신주의로 몰아붙여 사회세계의 변방으로 몰아내고 세계종교를 구축했다.
모던 시대에는 과학이 객관적인 검증 가능성의 이름으로 세계종교로부터 초월성을 빼앗아버렸다.
더 나아가 인지적 차원에서 세계종교는 과학의 인지적 효율성에 견줄 수 없으므로 그 진리 주장의 우월성을 상실한다.
그 결과 가치 평가적이고 정서적인 면만 남은 초라한 세계종교는 사적 영역으로 후퇴할 운명에 처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은 무엇과 짝을 맺는가? 포스트모던은 사적 영역으로 쫓겨났다고 여겨져온 초월적 차원과, 가치 평가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이 사회세계에 카이로스적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보편적인 세계종교의 형태가 아닌 국지적인 온갖 주술들의 끊임없는 환유적 연쇄의 형태를 띠고 회귀한다(최종렬, 2006b).
나는 이 장에서 주술, 세계종교, 과학의 특징을 초능력의 거주지, 사회의 영역 분화, 의미 작용 양식(mode of signification),7) 사회를 구성하는 지배적 원리,성과 속의 관계라는 다섯 가지 축을 따라 그 특징을 논해볼 것이다.
1. 고대와 주술
고대의 주술의 세계에서는 ‘초능력(extraordinary powers)’, 즉 카리스마가 유형의 구현체(tangible embodiments) 안에 내재한다고 믿어진다.
상징, 비의적 대상(cult objects), 주술사 등이 그 예이다.
이 유형의 구현체들은 스스로에 의해 스스로 성스러워진 것으로 여겨지는 비기호학적 실체이다. 구체적인 존재 안에 체현되어 있는 물신주의인 것이다.
이렇듯 주술적 힘들은 특정의 구체적인 존재 안에 거주하지, 초월적으로 분리된 성스러운 영역에 살지 않는다.
따라서 주술은 특정의7) 의미 작용 양식이란 용어는 래쉬(Lash, 1990)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모든 문화적 대상의 의미 작용은 기표(the signifier), 기의(the signified), 지시 대상(the referent)간의 관계 맺음의 양식에 달려 있다는 걸로 이해하면 된다.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보통이며, 포괄적인 통일된 거대 체계로 발전되는 경우가 드물다.
그렇기에 다신교적인 주술성의 세계가 유지된다.
인간은 초일상적인 힘을 구체화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다양한 주술적 힘들에 둘러싸여 있다.
부엌에 가면 부엌신이, 우물에 가면 우물신이, 마을 어귀에 가면 성황당신이, 산에 가면 산신이, 바다에 가면 용왕신이
존재한다.
이 모든 신들이 사회생활 깊숙이 들어와 인간과 같이 생활한다.
다시 말해 주술적 힘들이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들과 ‘통합’되어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술적 힘들로부터 나오는 규범들은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다.
그때그때 ‘실제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규범들을 맥락적으로 차용하여 따른다.
따라서 주술은 특수한 실제적 또는 세속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초일상적인 힘들을 조작하는 형태, 즉 현세적 기복주의
형태를 띤다.
기복이라는 현세적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인 목적’을 그 효과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비합리적인 수단’을 통해 성취하려고 한다.
부적을 통해 물질적 복리를 추구한다든지, 굿으로 사악한 영을 쫓아낸다든지 하는 것이 그 예이다.
초월성 대신에 특수하고 실제적인 지향, 즉 도구적 지향이 인간존재를 안내한다.
규범은 주술을 믿는 신도의 내적 삶을 안내하도록 내면화되어 있지 않고, 대신 비체계적인 다양성의 형식으로 개인 외부에 남아 있다.
사회의 영역 분화의 차원에서 보면, 정치 영역, 경제 영역, 종교 영역이 서로 긴밀하게 얽혀있는 ‘미분화(undifferentiation)’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보통 카리스마를 지닌 주술가가 이 세 가지 모든 영역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는 입법자요, 경제적 조언자요, 의례의 전문가이다.
주술가가 일단 하나의 독자적인 계층으로 분화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주술적 행위를 독점하고자 한다.
이러한 독점은 주술가가 주술로써 원하는 세속적 목표를 가시적이고도 손에 잡히도록 계속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추종하는 대중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특별히 자격을 갖춘 주술가 집단과 일반 신도들 사이의 간격은 더욱 넓어지게 되어, 일반 신도는 주술의 실천에 단지 때때로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때때로 참여하게 되면 당연히 분절적이게 되고, 성스러움을 조작하는 것에 아무런 통제력도 지니지 않은 일반신도들은 단지 외적으로만 경험할 뿐이다.
그렇다면 주술을 가지고, 주술자는 반드시 신도들의 필요를 직접적으로 수용해야만 하며, 반면 신도들은 손에 잡히는 결과를 요구한다.
이러한 조합이 의미하는 바는,성스러움과 기존의 삶의 방식 사이에 아무런 ‘긴장’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카리스마를 지닌 주술자가, 자기의 추상적 이상을 위해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 신도들의 필요를 달래기위해 기복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기존의 사회질서를 안정화시킬 뿐,이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긴장이 생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긴장이 없다면, 주술은 일상생활에 단지 제한된 효과, 즉 기존 질서를 유지, 강화하는 효과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주술가는 성스러운 규범을 법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의례적 기능에 부여함으로써 전통적인 역할을 승인한다. 각 영역은 이미 그 중요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고, 주술가는 그들의 필요를 가시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주술 행위를 행함으로써 결국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정치 영역의 기능 작용, 경제 영역의 기능 작용, 종교 영역의 기능 작용은 모두 주술적 행위에 의해 정당화되기에, 다시 말해 주술이 여타의 사회 영역들 안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 있기에, 기존의 사회관계를 재강화한다.
이렇게 미분화된 주술의 세계에서는 지적인 삶이 아직 주술로부터 독자적인 영역으로 분화되어 나오지 않는다.
인지적 분류 체계(진), 도덕적 분류 체계(선), 정서적 분류 체계(미)가 미분화된 상태로 뒤얽힌채 주술이라는 국지적 신념
체계 안에 배태되어 있다.
진/선/미가 특정의 국지적인 시공간 안에서 작동하는 주술적 신념 체계 안에서만 유의미하고 힘을 발휘한다.
따라서 그 시공간을 넘어서면 의미와 힘을 잃는다.
이런 점에서 주술의 세계에서는 ‘상징주의(symbolism)’라는 의미 작용 양식이 지배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상징은 상징의 구현체와 독자적으로 구별되는 표상(representation)이 아니다.
표상이 가능하려면, 표상해야 할 실재가 경험적으로 주어진 실재와 분리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그 경우에만 한 실재가 다른 실재를 표상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술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보드리야르(Baudrillard, 1975)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시뮬라크라 이전의’ 상징이다. 기호(sign)와 지시 대상(the referent) 간의 분리 자체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나는 고대의 주술적 사회질서는 바타이유(Bataille, 1985, 1991)의‘무조건적 소모의 원리(the principle of unconditional expenditure)’를 통해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의 질서는 근본적 차원에서는 자의적인 것이다.
이러한 자의적인 질서를 필연적인 질서로 만드는 방식의 핵심은, 성과 속의 이분법적 분류 체계를 만들고 유지시키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 성스러움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고대에서는 무조건적 소모의 원리를 따라 성스러움의 창출과 유지가 이루어진다.
소위 원시사회라 불리는 고대사회에서는,궁극적인 생산 목적 또는 생식 목적과는 상관없는 사치, 장례, 전쟁, 종교 예식,
기념물, 도박, 공연, 예술 등이 온 사회적 삶을 점철한다.
이는고대사회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과잉된 에너지를 해소하는 방식이다.
과잉된 에너지란 축적된 에너지이며, 체계가 이 에너지를 다 쓸 수 없는 상황, 즉 계속해서 성장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이 과잉된 에너지는 파괴, 소모되어야 한다.
이 소모는 생산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생산적으로 되려면, 체계 자체가 성장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사회는 성장이 한계에 직면해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잉여가 비생산적으로 소모되어야만 한다.
이 소모의 방식이 잔인하든, 아니면 영광스럽든 그것은 소모의 양식의 차이일 뿐 진정 뜻하는 바는, 체계가 성장의
한계에 직면했다는 것이고, 그래서 남아도는 부를 생산적으로 소비할수 없다는 것이다.
이 소비는 보존과 생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소비이기에 생산의 중간 수단으로 이용되는 소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 소비는 순수한 비생산적 소비로서, 그 손실이 막대한 경우 이를 소모라 부른다.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소모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모이다.
그래야만 그 대가로 성스러움이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합 의례 기간에 이루어지는 무조건적 소모는 온갖 현란한 전시적 ‘의례(rituals)’가 핵심적일 수밖에 없다.
공동체 성원들 전체가 지켜볼 수 있는 전시적 의례 없이 소모를 하는 것은 그저 파괴일 뿐, 성스러움을 만들 수 없다.
이렇게 성스러움을 창출하는 소모 과정은 귀중한 것을 파괴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엄청난 집합적 에너지, 즉 ‘집합흥분(collective effervescence)’을 발생시킨다.
그런 점에서 주술의 성의 세계는 정서, 즉 미학이 지배하는 세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갈수록 더 귀중한 것을 ‘판돈’으로 걸려는 내기가 경쟁적으로 상승한다.
파괴의 강도와 잔혹함이 갈수록 도를 더한다. ‘판돈’이 클수록 그로 인해 창출되는 성스러움도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정말로 지위가 있는 자는,파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소비를 한다. 상대방에게 베푼 대가로 상대방으로부터 뭔가를 되돌려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자신이 뭔가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자신이 아무 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파괴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귀중한 것을 값싸게 여기면 여길수록, 그는 진정으로 지위가 있는 자이다.
태양이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태양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그저 준다. 태양을 닮아 파괴 행위를 일삼는 존재는 결국 자신이 태양신처럼 우월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창출된 성스러움은 ‘나’의 정체성의 원천이 되고, 이러한 정체성은 속된 타자를 차이의 관계를 통해 설정하면서 사회적 범주가 된다. 타자 역시 마찬가지의 시도를 한다.
결국 무조건적 소모의 핵심은, 타자를 속화(경쟁자의 패퇴나 종속)하고 자신을 성화(자신의 명예와 평판 등의 고양)시키기 위해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집합 의례를 통해 파괴하는 것이다.
결국 현세에서 합리적인 목적(위세, 평판, 명예 등)을 얻기 위해 비합리적인 수단(무조건적 소모)을 사용하는 것이다.
주술의 세계에서는 속의 세계, 즉 경험적으로 주어진 현실과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초월적인 성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스러움이 특정의 구체적인 속된 대상들에 체화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세를 벗어난 초월적 세계로 근본적인 지향을 하지 않는다.
대신 성스러움을 체화하고 있는 구체적인 대상들을 ‘조작’함으로써‘지금 당장’ 세속적인 목적을 얻으려고 한다.
그 조작의 대표적인 경우가 귀중한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소모하는 것이다.
집합 의례 기간 중 귀중한 대상을 봉헌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중한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파괴함으로써 보다 큰 성스러움을 창출하고 그것을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것이다. 귀중한 대상은 속의 세계에서 유용성이 큰 대상이다.
하지만 유용성은 그 대상이 지닌 본래의 존재 그 자체를 볼 때 사물의 기능으로 축소된 것이다.
속의 세계는 그 자체로 볼 때 이러한 사물들의 질서, 즉 물상화된 질서를 만드는 공리주의적 생산 활동이 일어나는 세계이다.
생존, 번식, 보존을 위한 공리주의적 활동은, 충족되지 않으면 사회가 고통을 느끼는 진정한 생필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활동이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모든동물들이 행하고 있는 것으로, 전혀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다.
필수품을 생산하기 위한 금욕주의적 노동이 주를 이루는 속의 시공간은 아무런 흥분도 야기하지 않는 상습화된 시공간이다. 이는 인간은 물론 대상마저도 사물의 질서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이러한 사물의 질서는 파괴되어 본연의 질서로 되돌아가야 한다. 성의 시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집합 의례는 바로 이렇게 원래의 질서로 되돌아가기 위해 유용성을 파괴하는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속의 세계는 성의 세계에 비해 부차적이라 할 수 있다.
성의 세계가 들어가 있는 속의 세계, 다시 말해 카리스마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속의 세계만이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속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공리적 활동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집합 의례 기간 동안 파괴될 정도로 귀중한 대상을 만드는 과정일 뿐이며, 결국은 파괴를 통해 그 대상의 소유자에게 사회적 지위를 가져다주는 수단일 뿐이다.
부가 사회적 지위와 연결되려면, 부의 전부 또는 일부가 축제, 연극, 게임 등과 같은 비생산적인 소모에 바쳐져야 한다.
모든 부가 생산적 활동에 다시 투입되기만 하면, 그 부의 소유자에게는 아무런 사회적 지위가 따라붙지 않는다.
2. 중세와 세계종교
중세의 세계종교는 다신교적인 주술들을 몰아내면서 등장하였다.
‘초능력’이 유형의 구현체 안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 세계에 존재한다.
유대-기독교와 이슬람교에는 인격적 신에, 힌두교, 불교, 유교에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익명적 영역에 초월성의 원천이 있다. 그래서 모든 유형의 주술적 신들이 단 하나의 초월적 존재나 영역, 즉 단하나의 포괄적인 신념 체계로 환원된다.
이러한 신념 체계는 세계를 하나의 유의미한 총체로 제시한다.
이것이 주술과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하나의 유의미한 총체적인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 세계종교는 단하나의 보편적인 ‘초월적 기의(the transcendental signified)’라는 토대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나의 포괄적인 신념 체계 안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그 외부에 존재하는 초월적 기의를 만들어야만, 그 신념 체계의 궁극적인 정당성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Derrida, 1978).
세계종교는 보편적 타당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 타당성의 정당성 문제에 시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를 위해 하나의 토대, 즉 관계적 존재가 아닌 스스로에 의해 스스로가 정의되는 비기호학적 실체인 초월적 기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 초월적 기의가 서구의 기독교적 질서의 경우에는 ‘하나님’이고, 동양의 성리학적 질서의 경우에는 ‘리(理)’이다(최종렬, 2006a).
이러한 초월적 기의를 토대로 하여, 하나의 거대한 유의미한 총체적 세계관이 수립된다. 인간은 초일상적인 힘을 구체화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다양한 주술적 힘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초월적 존재에 의해 안내되어진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내면화한 인간은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대신에, 그 존재가 자신에게 부여한 ‘본질’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모든 세계종교는 주술과 달리 현세적 복리를 추구하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초월적 이상의 성취, 즉 구원을 궁극적으로 추구한다.
사회의 영역 분화의 차원에서 보면, 세계종교가 처음 시작될 때는 여전히 막대한 정도로 삶의 상이한 영역들이 중복되어
있었다.
하지만 종교의 영역이 갈수록 경제와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되어져서, 신도들에게 순수하게 종교적인 요구만 하는 영역으로 변해간다.
그래서종교 영역이 정치/경제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중세에는 ‘종교 영역이 독자적으로 분화’되어 나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종교 영역이 독자적인 삶의 영역으로 자신을 구축하는 것을 넘어, 다른 삶의 영역들(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에까지 침입해 들어가 자신의 원리에 따라 조직한다는 점이 더 결정적인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세계종교는 주술과 비슷할 수 있다.
하지만 주술의 경우 성스러움이 독자적인 초월적 영역으로 독자적으로 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적 삶의 다른영역들과 상호 침투되어 있다면, 세계종교의 경우는 성스러움이 독자적인 초월적 이상으로 분화된 후 다시 사회적 삶의 다른 영역들에 침투해 들어간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또한 주술의 경우 그 신념 체계가 단 하나의 정합적이고 총괄적인 세계관으로 통일되지 않은 반면,세계종교는 그렇게 되어 있다.
이렇게 이상화된 종교적 현실은 주어진 경험적 현실과 날카롭게 대립할 수밖에 없다.
세계종교의 진리는 주어진 경험적 현실의 잣대에 의해 평가되지 않는, 초월적인, 그래서 비실제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렇게 이상화된 초월적 질서는 성스러움을 기반으로 해서 주어진 경험적 현실을 일관되고 정합적인 총괄적 세계로
변화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성공할 경우, 경험적 현실은 독자성을 잃고 초월적 이상의 세계에 의해 지배되게 된다.
정치와 경제 모두 궁극적으로는 초월적 기의를 위해 행해진다.
하지만 이것이 실패할 경우, 오히려 경험적 현실의 요구에 따라 성스러운 질서가 변용된다.
지적 삶의 측면에서 보면, 아직 지적 삶이 종교로부터 분화되어 나와 있지 않다.
인지적 차원, 정서적 차원, 도덕적 차원이 그보다 더 근본적인 ‘유일무이한’ 종교적/코스몰로지적 신념 체계 안에 배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신념을 위해 지성이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술의 경우와 달리, 미분화된 상태에 있는 진/선/미가 특정의 국지적인 시공간들을 넘어 모든 시공간에서 보편적
으로 유의미하고 힘을 발휘한다.
그 이유는 종교 영역이 경험적으로 주어진 실재와 독립해서 초월적 세계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실재로 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종교 영역이 국지적인 경험적 실재들에 묶여 있지 않고 보편성을 띨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의미 작용 양식에서 주술세계의 상징주의와 다른 새로운 양식이 출현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 새로운 의미 작용 양식이 다름 아닌 실재주의 또는 ‘리얼리즘’이다.
이렇게 실재가 둘로 나뉘게 됨에 따라 비로소 한 실재가 다른 실재를 표상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경험적으로 주어진 실재는 모두 진짜 실재인 초월적 실재를 표상해야만 한다.
기호와 지시 대상의 분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중세는 유일신적인 초월성에 의해 궁극적으로 정당화되는 ‘보편적도덕’이 사회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원리이다.
도덕이 보편적인 이유는,국지적인 현세의 복리가 아닌 ‘구원’이라는 초월적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세계는 현세가 아니라 초월적인 이상의 세계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은 초월적 이상의 세계를 획득하는 것을 자신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보편적 도덕은 외적으로 강제된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것이다.
초월적 이상, 즉 특정의 궁극적 삶의 가치와 의미에 항상적이고 내적인 관계를 맺게 될때에만, 인간은 자신의 좁다란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올 수 있다.
초월적이상에 따라 경험적 현실을 보면, 반드시 내적 거리를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초월적 이상을 얻도록 궁극적으로 재정향한다.
러브조이(Lovejoy, 1964)는 서구를 지배해온 형이상학을 논하면서,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모든 실체가 ‘완전성의 정도’에 따라 위계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을 존재의 위대한 연쇄라 부른 바 있다.
이러한 위계적 조직에서 하나님은 최상층에, 천사는 그 바로 밑에, 인간은 그 다음 밑에 있으며, 계속해서 완전성의 정도에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식충류가 맨바닥에 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이라는 지극한 존재에 의해 부여된 형상을 실현하는 과정 중에 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다만 특이점이 있다면 다른 존재들과 달리 영혼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의 세계에 참여하는 정도가 높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은 구원을 추구한다.
이와 유사하게 주희는 모든 생명의 가치를 “자연 안에서 여러 생물학적 조직[氣]의 수준과 이념[理]의 구현 가능성에 따라 등급”(한형조, 1996: 95)을 매긴다. 인간은 만물 중에서 그 순도가 가장 맑고 짜임새의 정밀성이 가장 정교하다.
그 결과 리(理)의 구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인간을 정점으로 하여, 만물은 순도의 청탁과 정밀성의 정조를 따라 리(理)가 어떻게 구현되느냐에 따라 위계의 연쇄를 구성한다.
따라서 만물은 음양오행의 청탁과 정조에 따라 그 도덕적 가치의 서열이 매겨지는, 상징으로 가득 찬 체계 안에 놓여 있다.
리일분수(理一分殊), 즉 리(理)가 기(氣)를 통해 각각의 존재에 독특한 성(性)으로 구체적으로 발현한다.
따라서 개별 존재는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 차원에서 리(理)로 최종 소급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서는 익명적이며 영원불멸한 신성한 질서이다.
이러한 질서에 맞게 사는 것, 즉 시중(時中)이야말로 보편적 도덕이다.
시중은 엄격한 자기통제를 요구한다. 이렇듯 세계종교는, 현세의 입장에서 비합리적인 목적(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합리적인 수단(자기통제를 위한 엄격한 합리적인 방법과 절차)을 사용한다.
세계종교에서는 성의 세계를 초월적 존재나 영역에 구축함으로써 속의 세계로부터 날카롭게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과 속이 뒤섞여 있는 주술과 비교해볼 때, 성의 세계의 초월적 영역에 설정한 세계종교는 경험적으로 주어진 현실인 속의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을 기준으로 해서 속을 변형시키려는 노력이 성공할 경우, 속의 세계는 그 독자성을 잃고 성의 세계에 종속된다. 이렇게 되면, 속의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이 성의 세계에 있는 초월적 기의로 환원되기에 속의 세계는 독자적인 영역이라 할 수 없다.
만물이, 기독교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유교의 경우에는 리(理)로부터 받은 성(性)을 구현하는 것을 존재의 목적으로 삼는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에너지를 생존과 보존을 위한 세속적 공리주의적 생산 활동에 쏟아서도 안 되고, 더 나아가 무조건적인 소모를 통해 낭비해서도 안 된다.
모든 에너지는 남김없이 자신에게 부여된 ‘본질’을 실현하는 데 쏟아야한다.
그렇다고 생존과 보존을 위한 공리주의적 활동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공리주의적 활동을 한다 하더라도, 순전히 효율성의 원리를 따라 이루어질 수 없다.
그보다 더 포괄적인 ‘도덕’에 공리주의적 활동이 배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속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공리주의적 경제활동은 ‘도덕 경제’일 수밖에 없다.
유용성과 효용성의 추구는 그 자체로 이루어질 수 없다. 명예와 도덕이 공리적 이익계산을 제어한다.
그럴 때 받게 될 경제적 피해는, 직접적으로는 공동체내에서의 사회적 평판과 명예로 되갚아진다.
하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초월적 존재에 의해 보상을 받는다.
이것이 보상에 관한 한, 세계종교가 주술과 다른 근본적인 차이이다.
기독교의 경우에는 천국이, 유교의 경우에는 가족의 무궁한 연장[奉祭祀]이 그 초월적 보상이다.
3. 모던과 과학
서구의 근대 기획, 그중에서도 계몽주의의 기획은 초월적 기의를 제거함으로써 세계종교의 상징적 질서를 해체시킨다.
뉴턴의 수학적 물리학은 신의 섭리로 가득 차 있는 코스모스를 파괴하고, 보편적인 수학적 법칙을 따라 합법칙적으로 운동하는 원자적 물질의 무한한 인과연쇄로 구성된 기계적 세계를 구성하였다.
계몽주의 기획은 한마디로 말해 뉴턴의 수학적 물리학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는 것이다.
뉴턴의 수학적 물리학을 사회세계에 적용하여 만든 시장 사회의 핵심은,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 차원을 제거함으로써
‘인지적’ 차원, ‘도덕적’ 차원,‘정서적’ 차원을 분화시키고, 더 나아가 사회세계를 인지적 차원으로만 구성한다는 점이다(최종렬, 2003b; 2004b).
뉴턴의 세계는 특정의 맥락에 배태되어 있는 질적으로 고유한 존재들이 그 맥락으로부터 해방된, 양적으로 측정 가능하고 비교 가능한 원자적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초월적 의지도 개입하지 않으며, 또한 도덕적 의무나 정서적 울림도 따르지 않는다.
오로지 차가운 인지적 계산만이 있을 뿐이다.
선한 자가 벼락 맞아 죽었다 치자.
이 사건에 하나님의 의지가 개입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며, 슬픈 것도 기쁜 것도 아니다.
그저 자연적 현상(인과의 연쇄)에 의해 발생한 ‘객관적 사실’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초능력’이 거주할 국지적인 구현체도 보편적인 초월적 세계도 사라져버렸다.
한마디로 말해, 모던 시대에는 카리스마가 과학의 합리적 계산 가능성 앞에 힘을 잃어버린다.
사회세계의 탈주술화 내지는 탈신비화가 달성된 것이다.
만물은 초능력 또는 카리스마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설명 가능하게 된다.
사회의 영역 분화의 차원에서 보면, 모던 세계에서는 마침내 ‘기능적 분화(functional differentiation)’가 너무나 심대해서, 상이한 영역들이 서로 분리된 요구를 할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종종 양립 불가능한 요구를 행하게 된다.
이러한 기능적 분화 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원자적 개인들이 이윤 동기에 따라 도구적 합리성을 계산하여 행위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자기 조정적인 시장(a self-regulating market)의 출현이다(Polanyi, 2001).
자기 조정적인 시장 사회는 원래 원격지 무역에서 발전되어 나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점차 지역 단위의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규제로부터 벗어져 나와 오로지 가격의 원리에 따라 수요와 공급이
자기 조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대 시장 사회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자기 조정적 시장은 기존의 지역 단위의 조절 장치를 넘어서기에, 이를 조절할 새로운 장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여, 명확하게 규정된 영토 내에서 합법적인 폭력을 독점적으로 휘두르는 민족국가가 출현한다.
이와 더불어, 시장 사회에서의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충족시켜 가면서 시민사회가 출현한다.
시민사회는 사적 이해관계를 가진 부르주아들이 이제 공적 문제가 되어버린 경제활동을 논의하는 공론장이다.
또한 이 모든 영역으로부터 벗어난 친밀성의 공간으로서 가정도 출현한다(Habermas, 1998).
이러한 각 사회의 영역은 자신만의 고유한 원리에 의해 운영된다.
경제 영역은 효율성의 원리, 정치 영역은 권력의 원리, 시민사회는 담론의 원리,가정은 친밀성의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
이러한 각 원리는 서로 상이한 요구를 하며, 그래서 때로는 조화될 수 없는 요구로 투쟁하기도 한다.
이것이 초기 모던의 특징이다.
하지만 모던 사회가 성숙하면 할수록 경제 영역은 효율성의 원리에 따라 정치 영역, 시민사회 영역, 가정영역을 재구성하기에 이른다.
지적 삶의 측면에서 보면, 여기에서는 과학(지식) 영역이 종교의 전일적인 지배로부터 독자적으로 분화되어 나오는 것이
제일 큰 특징이다.
진(과학), 선(도덕학), 미(미학)가 종교로부터 분화되어 각자 스스로의 토대를 만들어 자기를 정당화한다.
과학은 ‘과학을 위한 과학,’ 도덕은 ‘도덕을 위한 도덕,’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다.
종교도 과학,도덕학, 미학을 꿰뚫는 근본원리의 역할에서, ‘종교를 위한 종교’로 축소된다.
이는 의미 작용 양식에서 ‘모더니즘’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모더니즘에서 의미 작용은 기호와 지시 대상 간의 일치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과학, 도덕, 미학이 각각 종교적 토대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영역 안에서 자신의 가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듯이, 기호는
지시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기표와 기의로 갈리고 지시 대상과 상관없이 기표와 기의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
낸다.
모더니즘은 거추장스러운 지시 대상을 떼어내고, 기표와 기의의 상호작용을 통해 다양한 의미 작용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모던 세계가 무르익으면 익을수록, 과학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와 다른 지적 영역들을 식민화하기 시작한다.
도구적 효율성이 리얼리즘에서 지시 대상이 했던 역할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모더니즘은 이러한 제국주의적 침략에 격렬히
대항한다.
모던은 인지적 차원을 극대화한 ‘도구적 합리성의 원리’(과학)가 사회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원리이다.
도구적 합리성의 원리는, (현세적관점에서) 합리적인 목적을 (동일하게 현세적 관점에서) 합리적인 최선의 수단을 통해 획득하려는 원리이다.
도구적 합리성은 주어진 목적의 근본적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그 성격이 어떠하든 그것을 최고의 효율성으로 성취하려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사회세계를 인지적 세계로 일원화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해 사회세계를 인지적인 분류 체계를 통해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류 체계의 모형은, 뉴턴의 수학적 물리학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물질뿐이다.
물질의 운동은 겉으로 보면 혼돈스럽지만, 경험적으로 관찰하고 합리적으로 추론해보면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는 수학적인 합리적 법칙을 따라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세계는 인과의 철의 법칙에 따라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신의 섭리는 말할 것도 없이, 어떠한 도덕적 가치나 정서적 감흥도 개입되지 않는다.
과학은 우선 세계종교의 ‘존재의 위대한 연쇄’를 해체시킨다.
서구의 경우, 신의 섭리로 가득 찬 존재의 위대한 연쇄에서 각자의 고유한 자리를 지니고 있던 존재들이 풀려나와 아무런 내재적 의미도 지니지 않은 원자적 물질로 되어버린다. 동양의 경우, 리(理)를 나름대로의 기(氣)를 통해 성(性)으로 체화하고 있는 존재의 위대한 연쇄를 해체시켜 만물이 아무런 내재적 의미를 지니지 않은 원자적 물질로 되어버린다.
모든 요소들이 양적으로만 비교 가능한 동질적인 원자적 물질이 되는 것이다.
유교만 보아도 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유교의 기본적인 인간관계인 오륜은 모두 동등한 인간들 간의 관계로 바뀐다.
군신의 관계[義],부자의 관계[親], 부부의 관계[別], 장유의 관계[序], 붕우의 관계[信]도 모두 ‘동무들 간의 계약관계’로
바뀌는 것이다.
결국 원자적 개인들이 사적 이익의 극대화 원리에 따라 서로 계약관계를 맺는 시장 사회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시장 사회의 공리주의적 질서의 핵심은, 만물을 시장에서 사고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변화한다는 것이고, 각 상품의
가격이 시장의 자기 조정적 기능에 의해 결정된다는 데 있다.
맑스와 짐멜이 훌륭하게 분석했듯이, 교환가치가 지배하게 되면, 사용가치는 단순히 교환가치의 알리바이에 불과하게 된다. 교환가치는 만물에서 그 질적 차이를 지우고, 오로지 양적 차이에 의해서만, 즉 화폐의 양에 의해서만 그 가치가 결정되도록 만든다.
질에 수반된 의미는 제거된다.
상징적 교환이 지배하던 세계에서, 공리주의적 교환이 지배하는 세계로 전환한 것이다.
시장 사회에서는 만물이 속화된다.
다시 말해 성의 세계가 독자적인 힘을 잃고 모두 속의 세계로 포섭되는 것이다. 축적을 위한 축적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공리주의적 질서에서는, 모든 에너지가 성장에 투입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금욕주의적 노동이 인간의 재생산을 돕는 최소한의 필요를 소비하는 일 이외의 모든 인간 활동(상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집합적 의례 활동이 대표적)을 비생산성, 더 나아가 낭비란 이름으로 제거한다.
베버가 칼뱅주의에 담긴 세속적 금욕주의를 자본주의 정신과 연결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인간 활동이 공리주의적 생산을 위한 금욕주의적 노동으로 구축됨에 따라, 일상이 기계와 같은 무의미한 상습의 세계로 만들어진다.
이는 속의 세계가 성의 세계에서 독립되어 나오는 것을 뛰어넘어, 오히려 거꾸로 성의 세계까지 공리주의적 질서에 의해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와 중세를 비교하면, 모던은 완전히 뒤집힌 사회이다.
부분사회로 출현했던 시장사회가 사회 전체를 시장 원리에 종속시킴으로써 전체사회로서의 시장 사회로 발전하고, 그 결과 속의 시공간은 물론 성의 시공간마저도 모두 초월적 차원은 물론 정서적/도덕적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일차원적인 기하학적 시공간으로 전화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우려한 세계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근대 세계의 발전이 보여주듯이, 인간 사회는 속의 세계 속에서만 살 수 없다.
일정 정도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는, 성장의 한계에 직면하면 잉여 에너지를 어떻게든 소모해야만 했다.
우선 부르주아는 합리적 소비란 이름으로 잉여 에너지를 소모하려고 한다.
하지만 소비를 합리적으로 한다는 것은 비생산적 소모를 할 수 없다는 무능력을 드러낼 뿐이다.
애초에 명예와 지위가 없던 부르주아에게는 부를 무조건적으로 소모한다는 것 자체가 비합리적 낭비일 뿐이다.
오로지 축적에 복무하는 제한적인 소비만이 합리적이란 이름으로 환영받는다.
명예와 도덕적 의무는 길바닥에 나뒹군다.
하지만 일군의 부르주아는 무조건적 소모를 행하려고 시도한다.
그 모범은 무조건적 소모를 일삼아온 귀족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서조차도 부르주아가 행하는 소비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조건적 소모가 아니다.
부의 과시적 소비, 더 나아가 부의 과시적 소모가 진정으로 권력 있는 자가 행하는 것이라면, 부르주아는 작은 전시의 체계에 빠져든다(Veblen, 1994).
싸구려로 전시를 하려고 하지만, 이는 전혀 스펙터클하지 않다.
진정한 전시는 귀중한 것을 파괴하는 데에 있으며, 그래야 그 전시를 보면서 삶들이 압도될 수 있다.
하지만 작은 전시에는 싸구려가 파괴되기 때문에, 전혀 압도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들은 민망하고 때로는 저열한 웃음으로 이를 감싸려 할 것이다.
진정한 전시에는 부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이 뒷받침되어 있는 것이며, 이는 왕족이나 귀족에게 적합할 뿐이다.
IV. 포스트모던: 축출되고 주변화된 것의 카이로스적 회귀
포스트모던은 공리주의적 질서에 의해 축출되거나 주변화되었던 초월성, 정서, 도덕이 공리주의적 질서를 해체하면서
나타난다.
인지적 분류 체계로서의 과학은 효율적이지만, 인류 복지의 증대라는 계몽주의 원래의 약속과 달리 삶을 극도의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어놓는다.
확대재생산을 위해 끊임없이 파괴와 재구성을 되풀이하는 자본주의와 결합된 과학의 발전은 작금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보여주듯이 오히려 사회세계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로 만든다.
기계의 운동처럼 상습화된 일상이 파괴되어 일시성과 찰라성으로 변한다.
이러한 자의적 질서는 기계의 운동처럼 상습화된 공리주의적 일상이 만들어낸 ‘무의미’와 차원이 다른 삶의 ‘의미의 문제’를 야기한다.
전자의 ‘무의미’는 세계를 주관하는 초월적 존재의 살해로 생긴 기계적인 공리주의적 일상이 가져오는 권태이며, 이는 “멜랑콜리, 슬픔, 우수(憂愁),공허감 , 피로 등 문화적 모더니티의 주요한 감정 형식들과 맥을 같이한다.”(김홍중, 2006b: 8)
금욕주의적 노동과 짝을 맺고 있는 이러한 권태와 우울증을 뒤집으면 바로 무제한적 소모와 짝을 이루는 집합 흥분과 집단 광기가 나온다는 것이 근대 역사의 가르침이다.
보들레르의 ‘토성적 정조’(김홍중, 2006b)를 뒤집으면, 바로 사드의 광란의 집단 혼음(orgy)이 나온다.
이것이 두 번째 ‘의미의 문제’가 뜻하는 바이다.
부르주아와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져온 프롤레타리아라고 다를 바 없다.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에 의해 노동시장으로부터 퇴출당한 프롤레타리아는 그동안 금욕적 노동과정에서 억눌러왔던 집합 흥분과 집단 광기와 만난다.
이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가져다줄 ‘성스러움’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모던 시대에도 생산/금욕주의적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공리주의적 질서와 소비/쾌락적 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비공리주의적 질서가 서로 공존하며 갈등하기도 하였다.
다니엘 벨(Bell, 1976)이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을 역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이러한 모순은 자본주의가 시작할 때부터 항상적으로 있었던 것이다. 19세기에 생산에서의 산업혁명이 있기 이전에
이미 17, 18세기에 소비의 상업혁명이 있었다.
그때 이미 생산/금욕주의적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공리주의적 질서와 소비/쾌락적 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비공리주의적
질서의 경계가 무너져 진기함(novelty)이란 이름으로 ‘속의 성화’가 특정의 시공간에 구축되었다(MaCracken, 1988).
성스러운 것이 속된 것으로 되는 일상(탈성화, 탈주술화, 상품화)과 달리, 속된 것이 성스러운 것으로 되는 시공간(재성화, 재주술화, 탈상품화)은 엄청난 집합 흥분을 야기한다.
성스러운 것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귀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희생제물로 바쳐야 하기 때문에, 일상에서 겪을 수 없었던 환상, 환각, 집단광기가 휩쓸고 지나간다.
하지만 모던 시대에는 그러한 구축이 전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박람회나 백화점 등 특수한 공간에서만 이루어졌다.
벤야민이 파리의 아케이드에서 이러한 차원의 근대성을 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벤야민, 2005; 2006).
하지만 공리주의적 질서가‘너무나’ 성공하게 되면, 사회세계가 무의미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아니라 그 자체가 일시성과 찰라성으로 변하는 극도의 자의적 상태로 빠진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유의미한 코스모스에 대한 형이상학적욕구(Weber, 1948), 유의미한 코스모폴리스에 대한 도덕적 욕구
(Toulmin, 1990), 정서적 어울림에 대한 미학적 욕구(Maffesoli, 1996)가 더욱 강렬해진다.
그래서 ‘성스러움’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사회세계 전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성스러움이 주술처럼 구체적인 유형의 구현체 안에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초월적인 영역에 설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스러움이 실제 공간과 사이버공간을 가릴 것 없이 출몰하고 있다.
스포츠 경기장, 경정장, 경마장, 경륜장, 도박장, 성인 PC방, 테마파크, 비만 클리닉 등이 일상의 공간과 구분 없이 구축되어 있어 환상, 환각,환락, 집단 광기를 북돋우고 있다. 사이버공간에는 환상, 환각, 환락,집단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온갖 종류의 이미지들이 무한하게 떠돌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스러움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스러움이 아니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을 잠시 정서적으로 고양시킬 수는 있어도, 새로운 성스러운 존재로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순간, 대박이 터져 환상의 세계를 맛볼 순 있어도 곧 다 잃어버리고 말 운명에 처해 있다.
도박에서 보듯, 게임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역성이 극대화된 세계에서 성스러움이란 찰나적인 지속성만을 지닐 뿐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더욱 성스러움과의 찰나적인 만남을 꿈꾼다.
사회의 영역 분화의 차원에서 보면, 정치 영역, 경제 영역, 종교 영역, 지식 영역의 분화가 너무나 세분되다보니 오히려 그
경계가 내파되어버린 ‘탈분화(dedifferentiation)’의 상태에 놓여 있다.
모던 사회의 이상이 분화와 자율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발전에 있어서는 결국에는 정치 영역, 종교 영역, 지식 영역이 모두 경제 영역 안에 배태되어 경제 논리에 따라 작동하도록 변화하였음을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문제는 포스트모던 상황에서는 경제 영역의 공리주의적 생산의 원리가 그렇게 축출하고자 했던 초월성, 도덕, 정서가 되돌아와 오히려 그것을 비공리적 활동으로 침윤시킨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돌아와 침윤시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모든 에너지를 성장에 쏟아 붓고도 남아도는잉여가 낳는 동요 때문이다.
성장을 돕는 데 쓰이고 남은 잉여 에너지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사회 전체도 동요의 상태에 빠트린다.
그것이 극단으로 되어 사회 전체가 폭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조건적 소모를 행해야만 한다(Bataille, 1991).
잘 알다시피, 1970년대에 이르게 되면 자본주의 세계 체제는 화폐와 금융자본의 구조적 과잉 축적의 문제에 직면한다.
조직화된 자본주의의 위기, 포디즘적 축적 체제의 위기 등은 바로 이를 표현한 것이다.
생산에 쓰고도 너무도 많이 남는 잉여 자본인 금융자본의 과잉 축적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 전체를 위기와 동요로몰아넣는다.
이제 어떻게든지 이러한 잉여를 파괴하는 일이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사활을 건 문제가 된다.
물론 모던 시대에도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축적의 위기에 처한 것이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전통적으로 축적의 문제를 외부적으로 시장을 확장하든지 내부적으로는 상품이 아니었던 영역을 상품화시키든지, 아니면 둘 다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해결해왔다.
그 과정에서 모든 존재들을 끊임없는 동요의 상태 속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도구적 합리성으로 세계를 반복적으로 파괴하고 재조직하는 일이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적으로 성장
한다는 신화에 기대어 이루어져왔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바로 이러한 신화가 위기에 처했음을 뜻한다.
성장이 없는 지속적인 발전은 필연적으로 에너지의 과잉 축적을 가져오지만, 그것이 사회의 소수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생산적으로 투입될 수가 없다. 이전 모던 시대에는 복지국가 체제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왔지만, 1990년대 동구권 붕괴 이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살인적인 시장경쟁은 이러한 해결책도 뿌리부터 흔들어놓았다.
한쪽에서는 에너지의 과잉 축적이 다른 쪽에서는 에너지의 과소, 즉 양극화가 가장 큰 화두로 뛰어오른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금융자본의 무조건적 소모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카지노 자본주의, 메뚜기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기승을 부린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새로운 텔레테크놀로지라는 매체이다.
“텔레테크놀로지란 테크노과학, 테크노문화, 테크노자연의 실현, 즉 컴퓨터테크놀로지와 텔레비전의 완전한 접점이다.
텔레테크놀로지는 전자이미지, 전자텍스트, 전자음이 실시간으로 흐르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전 지구화한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있다.”(최종렬, 2004c: 163~164) 텔레테크놀로지를 통한 전 지구적 투자는 시작도 없고 끝도없다.
투자에 뛰어들었을 때, 이미 거기에는 투자의 끊임없는 환유적연쇄의 흐름이 있다.
투자해서 일시적으로 돈을 번다해도, 그것이 끝이아니다.
현재 번 것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가능성, 즉 ‘차이(differ)’가 영원히 미래로 ‘지연(defer)’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베팅은 영원히 끝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러한 투자의 이득이 이전의 저축처럼 누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터져 나와 환유적 연쇄를 뒤흔들지 모른다. 거의 무한한 변수들이 유령처럼 떠돌다 어느 날 갑자기 도래한다.
이제 나의 국지적 행동이 멀리 떨어진 사건이나 행위자에 의해 영향 받으며, 심지어는 결정되기도 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태국의 바트화의 하락이라는 국지적 사건이 뉴욕의 월스트리트를 강타하고 러시아를 지급불능 상태로 빠트린다.
무조건적 소모가 전 지구적으로 연결되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경제 영역이 이렇듯 무조건적 소모로 운영되기 시작하자, 경제 영역의 지배를 받던 정치 영역, 종교 영역,지식 영역도 덩달아 무조건 소모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금융자본이 잉여 가상 자본을 창출하고 파괴하기를 반복하듯이, 다른삶의 영역도 잉여 의미를 창출하고 파괴하기를 되풀이한다.
그래서 수학적 물리학 또는 도구적 합리성에 의해 쫓겨났던 의미, 즉 초월성, 도덕, 정서가 되살아나 뒤죽박죽 뒤섞여 파괴와 소모의 잔치판을 벌인다.
시공간을 극복하고 많은 정보를 가져다주도록 만들어진 합리적 기계인 테크놀로지가 오히려 인간의 삶을 비합리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합리성이 ‘너무나 성공’해서 오히려 비합리성을 낳은 역설적 상황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제 새로운 형태의 계산 불가능성이 출현한다.
텔레테크놀로지는 이전의 의미 작용 양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 작용 양식을 열었다.
모더니즘이 지시 대상을 떼어내고 기표와 기의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 작용하는 길을 열었다면, 텔레커뮤니케이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의를 떼어내고 기표들의 연쇄를 통해 의미작용하는 길을 열었다.
이 새로운 의미 작용 양식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텔레테크놀로지는 차연(差延), 즉 기표들의 무한한 환유적연쇄(……+y+z+a+……)의 흐름을 그 근본 논리로 하고 있다(Derrida,1982). 이것은 낙원(이전)-상실(현재진행)-회복(이후)이라는 상승적시간을 따라 진행되는 기존의 오이디푸스 서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텔레테크놀로지는 지구상의 존재했던/하는/할 모든 상징체계들을 해체하여 각 체계 안에 갇혀 있던 요소들을 해방시키고, 이렇게 해방된 요소들(기표들)을 다시 무한한 이미지의 환유적 연쇄로 구성된 문화 상품으로 만들어 전 지구에 실시간으로 전송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 상품들 무엇보다도 영상적 이미지의 앙상블로 나타나는데, 이 이미지의 앙상블은 그 참조 대상과의 시각적
유사성을 통해 의미를 얻는 퍼스(Charles S. Peirce)의 아이콘(icon)도, 논리적 정합성에 의해 결합된 통일체도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텔레테크놀로지에 의해 전송되는 이미지들은 오히려 무한한 환유적 연쇄에 의해 그 의미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흐름(flux)이다.
이 이미지들은, 데리다(Derrida, 1994)가 말하는 ‘유령(specters)’처럼 떠돌아다니다가 카이로스적으로 회귀한다.
유령은 서구 형이상학의 토대인 ‘존재(Being)’와 ‘비존재(Non-Being)’의 이분법을 허문다.
유령은 존재와 비존재의 대립이 있기 이전부터 먼저 있으며, 또 미래에 항상적으로 대기하면서 출몰한다.
이러한 출몰의 방식은 선형적이고 누적적인 시간을 따라 이루어지는 크로노스(chronos)가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의 연쇄를 파괴하는 순간을 따라 이루어지는 카이로스(kairos)이다(김홍중, 2006a).
이제 의미 작용은 탈맥락화된 기표들의 우연한 인접성(contiguity)에 의한 결합을 통해이루어진다.
텔레테크놀로지의 발달 덕분에, 이전에는 전혀 시공간적으로 인접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던 것들조차도 인접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텔레테크놀로지가 사회세계를 구성하는 중심 기제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텔레테크놀로지는 일상의 대면적상황에서 ‘너-지향(Thou-orientation)’으로 특징지어지는 ‘우리-관계(We-relationship)’를
매개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조직화, 탈조직화, 재조직화시키는 것을 무한정 반복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보았듯이 텔레테크놀로지를 통해 전송되는 이미지가 카이로스적으로 영겁회귀하기 때문이다. 텔레테크놀로지를 통한 텔레커뮤니케이션은 끊임없이 흐르려고 한다.
빨리 흐르고 늦게 흐르고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것을 보여주려 한다(Dienst, 1994). 계속해서 카이로스적으로 영겁회귀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출현한 이미지가 그 전에 있던 이미지의 가치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카이로스적으로 회귀할 때마다, 매순간 최종이기 때문에 의미는 계속해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경험은 칸트적인 의미의 ‘종합적 경험(Erfahrung)’도 아니요, 그렇다고 벤야민적인 의미의 ‘사건적 경험(Erlebnis)’도 아니다
(김홍중, 2006a). 종합적 경험이 가능하려면, 주체가 선험적 종합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그것을 통해 직관에 부과되는 감각적 소여에 일관적인 형식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선험적 종합 능력이란 사실 기어츠(Geertz, 1973)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문화 체계(acultural system)’이다.
주술, 세계종교, 과학 모두 문화 체계이다.
하지만 이 모든 문화 체계가 해체된 지금, 이는 선험적 종합 능력의 역할을 맡을 수 없다.
또한 사건적 경험이 가능하려면, 주체에게 충격을 주어 그의 ‘주의(attention)’를 그 경험에 집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경험은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다.
충격적인 것을 너무나 많이, 너무나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면 더 이상 그것은 충격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바우먼(Bauman, 1993)의 ‘도덕적 무관심(adiphorization)’과 보드리야르(Baudrillard, 1990)의 ‘실재의 포르노그래피화’는 모두이를 지칭하는 것이다. 짐멜은 일찍이 근대 초기 대도시의 삶이 ‘신경 자극의 강화(intensification of nervous stimulation)’
로 인해 ‘무감각한 태도(blasé attitude)’를 지니게 된다고 지적하였는데, 이 모든 것은 이러한 태도가 극단화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Simmel,1997).
그 결과 사회세계 전체가 ‘역치 단계(liminal phase)’로 변한다.
역치단계는 고대의 주술의 성스러운 세계를 지배했던 무조건적 소모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공간으로서, 원래는 일시적으로 성과 속이 뒤섞였다가 이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나면 다시 성과 속은 재분리되어 재구획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역치 단계는 ‘질서 지어진 무질서(ordereddisorder)’의 단계이다(Turner, 1969). 포스트모던을 ‘일상생활의 미학화’라는 테제로 설명한 페더스톤(1999) 역시 이러한 입장을 따른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사회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역치 단계의 진정한 특징은 질서 지어진 무질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무질서이다.
나는 이것을 ‘사회적인 것의 미학화’란 말로 표현했는데, 이는 “성과 속의 이분법적 상징적 분류 체계에 기반한 사회적인 것이 성과 속 간의 관계가 차연적이 됨으로써 이전에는 표상될 수 없었던 체계의 한계가 무한한 환유적 연쇄를 이루면서 표상되는 것을 말한다.”(최종렬, 2004c: 148)
이 한계들은 선형적인 시간적 질서를 통해 조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카이로스적으로 영겁회귀를 거듭하고 있기에 항상적인 가역성의 상태에 빠져 있다.
그 결과 이미지의 잉여, 의미의 잉여가 넘친다.
이제 관건은 고대의 주술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미지의 잉여,’ ‘의미의 잉여’를 무조건적으로 소모하는 일이다.
귀중한 이미지와 의미를 파괴하는 일이 경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귀중한 것을 무조건적으로 소모하는 이유는, 그 대가로 더 귀중한 성스러움을 창출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창출된 성스러움은, 또 다른 더 극단적인 무조건적 소모에 의해 탈성화(desacralization)된다.
이 과정은 무한정 계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스러움은 보편적인 세계종교의 형식을 띠지 못하고, 국지적으로 순간적으로 작동하다가 사라지는 주술의 형식을 띤다.
우리는 성스러운 영웅을 창출하고, 곧 그를 희생 제물로 잔인하게 소모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황우석 신화’는 그 한 예를 잘 보여준다.
이제, 여름날 무논에서 들끓는 개구리들의 울음처럼 무수한 주술들이 악머구리 끓듯 출몰한다.
V. 맺음말: 문화사회학을 위하여
나는 지금까지 고대, 중세, 모던, 포스트모던을 초능력의 거주지, 사회의 영역 분화, 의미 작용 양식, 사회를 구성하는 지배적 원리, 성과속의 관계라는 다섯 가지 기준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이념형적인 것이어서, 실재(reality)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념형은, 실재를 분류하고 식별할 수 있는 안내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단한 도표로 만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고대 중세 모던 포스트모던
초능력의
거주지
유형의 구현체 초월적 세계
초월적 기의의
제거
카이로스적으
로 회귀하는
이미지의
차연적 연쇄
사회의 영역
분화
미분화
종교 영역이
독자적으로
분화;
종교 영역의
지배
분화와 자율성;
경제 영역의
지배
탈분화
의미 작용
양식
상징주의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를
구성하는
지배적 원리
무조건적
소모의 원리
(주술)
보편적 도덕의
원리 (도덕학)
수학적
물리학의 원리
(과학)
차연의 원리
(미학)
성과 속의
관계
국지적으로,
성의 세계들이
속의 세계들에
포섭;
성과 속 사이에
근본적 긴장이
부재
보편적으로,
속의 세계가
성의 초월적
기의로 환원;
성과 속 사이에
근본적 긴장이
존재
성과 속이
속으로 일원화;
특정의
시공간에 성을
구축
항상적인 성과
속의 뒤섞임;
성과 속의
차연적 관계
<표 1> 고대, 중세, 모던, 포스트모던의 이념형적 구분
위의 이념형적 틀을 통해볼 때, 모던 사회학은 중세로 축소된 전통과의 대립 속에서 모던을 정의하고 주로 모던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정의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고대는 물론 포스트모던을 사회학의 지평에서 배제하고 협소한 틀에 갇히는 결과를 낳았다.
모던 사회학은 전통(중세) 사회에는 종교가 인간의 행위를 결정한다면, 모던 사회에는 ‘사회구조’가 인간의 행위를 결정한다
는 근본적 가정 아래 이론과 경험적 연구를 해왔다.
사회구조의 모델이 물리학인가 통계학인가 그것만이 차이 날 뿐이었다.
물리학이든 통계학이든, 그것을 모델로 한 사회구조 안에서 의미와 상징이 행하는역할은 극도로 제한된다.
인간의 행위는 기껏해야 물질적 이해관계의 반영이거나,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일 뿐이었다. 과학적 맑스주의이든합리적 선택이론이든, 인간의 행위는 ‘도구적 차원’에서만 설명될 뿐이다.
이는 두 진영 모두 모던 세계에서 상품화, 탈성화, 탈주술화의 진행으로 의미와 상징이 사회세계에서 행하는 역할이 감퇴된다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던 세계에서마저도 이러한 과정은 결코 일방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탈상품화, 재성화, 재주술화가 되살아나상품화, 탈성화, 탈주술화와 길항하는 역동적인 과정이 나타난다(최종렬, 2006b).
그렇다면 모던 시대에서마저도 의미와 상징이 사회적 행위자의 행위를 안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하물며 상징체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고대와 중세는 물론이고 의미의 잉여로 넘쳐나는 포스트모던 상황은 말하면 무엇 하랴.
이렇게 본다면, 사회적행위를 도구적 차원에서만 설명하는 시각은 문화적 차원을 통해 ‘보완’
되어야만 한다.8)
8)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문화사회학을 말하면, 마치 문화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문화 환원론자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문화가 인간의 행위를 ‘모두’ 설명한다는 시각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의 행위는 도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보완을 말하지 ‘대체’를 말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사회학이 너무나 오랫동안 사회구조만을 다루다보니 의미와상징을 다루는 방법론을 거의 개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9)
현재 한국에서 문화를 말하는 사회학자는 엄밀한 사회과학자라기보다는 ‘말발 꽤나 날리는’ 문화 평론가로 취급받는다.
인문학을 전공한 문화 평론가나 사회학을 전공했다는 문화사회학자나 문화 현상을 분석하는걸 보면 ‘인상 비평’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문화사회학을 한다고 하면, 일종의 조롱감이다.
시대의 변화를 읽는 발 빠른 감수성은 문화 평론가들에게 한참이나 뒤떨어지고 그에 대한 과학적 설명력은 엄밀한 사회학자에게 뒤처지는 얼치기로 취급받기 십상인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우선적으로 문화사회학자들이 사회학 전통 내에서 문화를 다룰 방법론을 발전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 사회학의 전통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맑스, 뒤르케임, 베버, 짐멜, 미드와 같은 고전 사회학자는 말할 것도 없고, 파슨즈,슈츠, 블루머, 고프만, 가핀켈, 벨라, 쉴즈(Edward Shils), 부르디외와 같은 현대 사회학자들까지 사회학 내에서 문화를 다루는 전통은 얼마나 풍부한가?
우선 문화사회학자는 이러한 ‘사회학 내’의 전통으로부터문화를 사회학적으로 탐구하는 방법론을 발전시켜야만 한다.
동시에의미와 상징이 인간 행위를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풍부한 연구를 내장하고 있는 상징적 인류학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
기어츠, 모스(Marcel Mauss), 샐린스(Marshall Sahlins), 더글라스(Mary Douglas)등이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사실 이들은 모두 후기 뒤르케임을 이어받은 학자들이 아니던가?
9) 사실 문화사회학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는 기존 모던 사회학의 도구적 설명을 넘어서야 한다는 방법론적 요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성이 근본적으로변화되고 있다는 존재론적 차원과, 이러한 새로운 사회성 아래에서 어떻게 사는것이 좋은 삶인가를 따지는 윤리적 차원, 그리고 그것을 집합적 차원에서 성취하려는 정치적 차원까지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들은 불충분하나마 다른 글(최종렬, 2005a)에서 이미 다루어진 적이 있고, 또 이 글은 방법론적 차원에 주로 문제의식을 갖고 문화사회학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기에 이를 논외로 한다.
이는 결국 사회학이 ‘문화적 전환’을 이루어 문화사회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말하는 ‘문화사회학(cultural sociology)’은 ‘특정의 문화 현상’을 기존의 모던 사회학의 방법(론)을 통해 탐구하는
좁은 의미의 ‘문화분과사회학(sociology of culture)’과는 다르다(Wolfe,2002).
문화분과사회학은 문화를 한 민족이나 문명이 성취한 것 중 최고이며 가장 중요한 또는 영광스러운 것으로 정의하는 인문학적/미학적 문화 개념을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미 자리를 잡은 문화제도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분화와 자율이라는 모던의 이상을 따라, 문화를 독자적인 영역으로 분화되어 나름의 원리에 따라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과 연결되어 있다.
이와 달리 문화사회학은 문화를 상징체계로 정의하며, 인간의 행위를 안내하는 나침반으로 본다.
그런 면에서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 인간의 행위를 안내할 상징체계는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상징체계의 성격이 다를 뿐이다.
고대에는 주술이, 중세에는 세계종교가, 모던에는 과학이, 그리고 포스트모던에는 미학이 인간의 행위를 안내하는 주된 나침반의 역할을 한 것이라는 점에서만 차이가 난다.
각 상징체계는 나침반으로서 특유의 강점이 있다.
주술은 정서적 나침반으로서, 세계종교는 도덕적 나침반으로서, 과학은 인지적 나침반으로서 인간의 행위를 안내하는 강점이 있다.
그렇다면 미학은? 미학은 기존의 나침반을 산산이 깨부수어 인지적/도덕적/정서적으로 혼돈 상태에 빠트리는 강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상징체계(주술, 세계종교, 과학, 미학)를 인간의 행위를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독립변수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근래 들어 알렉산더를 위주로 한 신뒤르케임주의 문화사회학이 가장 집중적인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Alexander, 2003; 최종렬,2004a; 2005a).
하지만 신뒤르케임주의 문화사회학은 문화의 자율성의모델을 주로 ‘세계종교’에 기대어 만들고 있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
다.
주로 위기의 시기에 가치가 일반화될 때, 성과 속의 이분법적 문화구조는 마치 세계종교처럼 인간의 행위에 막강한 인과적 결정력을 가질 수 있다.
전쟁이라는 위기의 시기에 성(아군)과 속(적군)이 명확히 나뉘고, 각자 자신의 성스러운 가치를 따라 행위하게 되는 것을
상기해보면 이는 쉽게 이해가 간다.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는 마치 세계종교가 경험적으로 주어진 현실을 완전히 재조직하여 모든 사회 영역을 혼융시키는 것처럼, 사회 영역 전체가 일시적으로 혼융된다.
이는 ‘가치’가 행위를 결정한다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 대신, 문화 구조가 인과적 결정력을 지니게 되는 특정의 조건(위기)을 명시하고, 위기로 나아가고 해결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탐구하였다는 점에서 분명 신뒤르케임주의가 지닌 강점이다.
하지만 일원론적인 세계종교처럼, 단 하나의 보편적인 문화가 모든 사회적 행위를 안내하는 것으로 그리는 경향이있다.
그래서 다문화가 시대의 대세가 되고 있는 현 상황을 탐구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위기의 시기가 아닐 경우, 즉 상습화된(routinized) 일상생활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이 경우에도 ‘가치’가 사회적 행위를 안내 또는 결정하는가? 현상학, 상징적 상호작용론, 민속방법론을 비롯한 일상생활의 사회학의 전통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만약 일상생활 전부를 세계종교에 의해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긴장으로 터져 죽을 것이다.
이러한 삶은 소수의 종교 대가에게만 가능하다.
상습화된 일상생활은 세계종교의 카리스마가 일상의 현세적 요구에 의해 주술적 형태로 변형되어 있거나, 과학의 도구적
합리성에 의해 제거되어 있는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상습화된 일상생활에서는 궁극적 가치가 사회적 행위를 안내하거나 결정하기 어렵다.
일상에서 사람들은 보통 초월적 가치 대신에 현세적 목적을 추구한다. “부자 되게 해주세요”, “아들대학 붙게 해주세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현세적으로 합리적인 목적을 주술은 비합리적 수단을 통해 추구하고 과학은 합리적 수단을 통해 이루고자 한다.
따라서 상습화된 일상생활에서 사회적 행위를 안내하는 상징체계는 세계종교라기보다는 주술 아니면 과학이다.
그렇다면 상습화된 일상생활에서 작동하는 문화의 모델은 세계종교가 아닌 주술이나 과학에서 차용할 수 있다.
주술이나 과학 모두 추구하는 현세적 목적을 얼마나 잘 달성하느냐에 따라 그 정당성이 유지된다.
그런 점에서 주술과 과학은 현세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인 사회적 행위의 연장통(tool kit)이라 할 수 있다(Swidler, 1986).
모든 실제 문화들은 세계종교가 그리는 문화 모형과 달리 다양해서 때로는 갈등하는 상징, 의례, 이야기, 행위의 가이드를 포함하고 있는 연장통이다.
사회적 행위자들은 상이한 종류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연장통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상이한 요소들을 골라 특정의
행위의 도정을 구성한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주술은 보통 문화적으로 형성된 전통적인 기술, 습관, 스타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유교는세계종교적 성질이 탈색되어 있기에 유교의 궁극적 ‘가치’는 더 이상 사회적 행위를 안내하지도 결정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가 남겨놓은 전통적인 기술, 습관, 스타일은 여전히 사회적 행위자들이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전통적인 기술, 습관, 스타일이 상황마다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이미 조직되어 있는 행위의 도정으로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장통으로서 과학은 어떠한가? 합리적 선택이론은 행위자가 주어진 목적에 효율적인수단으로서 한 번에 하나씩 행위들을 선택하는 것처럼 그리는 경향이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사회적 행위자는 무(無)에서 행위의 도정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합리적 선택도 이미 조직되어 있는 행위의 도정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조금 다른 입장이긴 하지만, 한 사회에 세계종교와 같은 집합표상이존재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바로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집합 스타일에 의해 걸러진다는 입장도 일상생활에서 문화가 작동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Eliasoph and Lichterman, 2003).
동일한 신념을 공유한 집단들은 다양한 스타일 또는 장르를 통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교의 가족주의라는 근본적 가치를 믿지만, 그 가치를 실천하는 스타일, 즉 집합적 세팅에 참여하는 스타일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고 그래서 그 결과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문화사회학은 바로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미시적인 상호작용을 탐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일상생활이 포스트모던 상황처럼 항상적인 역치 기간이 되었을 때에는 어떠한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는 보드리야르와 데리다와 같은 소위 포스트모던 학자들의 통찰적인 에세이로부터 문화사회학을 위한 방법론을 이끌어내어야 한다.
나는 이들의 에세이로부터, 포스트모던 세팅이 다양한 상징체계들(주술, 세계종교, 과학)안에 각각 들어가 있던 요소들이 모두 그 자체의 맥락으로부터 벗어나 단순히 인접성만으로 연결되는 끊임없는 차연적 연쇄를 이루고 있는상태(미학)라고 그려볼 수 있었다.
이러한 연쇄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없다.
카이로스적으로 회귀하는 기표들 때문에 체계가 항상적인 가역성의 상태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치’와 ‘행위 전략’의 구분이 붕괴되고, 대신 차연적 연쇄로 바뀐다.
이러한 연쇄의 모형은 무엇보다도 인터넷에 출몰중인 하이퍼텍스트에 있다.
“하이퍼텍스트는 단위텍스트들을 다양한 유형의 링크로 연결지워 놓은 것이지만, 링크도 단위텍스트만큼 의미 작용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따라서 링크는단위텍스트들의 부산물이 아니며, 링크에 의해 단위텍스트는 항상 새롭게 태어난다.
어떻게 존재하느냐는 어떻게 이어지느냐에 의해 많은부분 결정된다.”(장노현, 2002: 30)
우리가 텔레테크놀로지를 통해 텔레커뮤니케이션을 더 하면 할수록, 우리의 사회성은 점점 더 하이퍼텍스트를 닮아갈 것이다.
물론 이는 경험적으로 확인해서 상세히 보여주어야 할 문화사회학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텔레커뮤니케이션이 점점 더 우리의 삶을 안내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텔레커뮤니케이션이 사용하는 장르와 서사 양식에 대한 탐구를 해야 한다. 장르와 서사 양식은 전통적으로 인문학자들이 탐구했던 분야이다. 그렇다면 문화사회학자들은 인문학자들로부터 장르와 서사 양식에 대해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커뮤니케이션과 텔레커뮤니케이션이 장르와 서사 양식에 있어 어떤 공통점이 있고 다른 점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텔레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사회성을 구성할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구체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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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렬은 미국 네바다주립대학(UNLV)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전임강사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타자들:
근대 서구 주체성 개념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탐구와 Postmodern American
Sociology: A Response to the Aesthetic Challenge가 있으며, 관심 분야는
문화사회학, 사회학이론, 사회사상사, 포스트모던 사회학 등이다. E-mail:
jrchoi@kmu.ac.kr
260
The Postmodern and Cultural Sociology
Choi, Jongryul. Keimyung University
This paper aims to clarify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ostmodern
and cultural sociology. Modern sociology has narrowed its horizon when
defining its academic identity mainly in terms of the dichotomy of
traditional-modern. As a result, a narrow definition of the postmodern,
according to which the postmodern is defined in relation to its discontinuity
or continuity with the modern, is presented. In order to escape this
narrow framework, the trichotomy of ancient-medieval-modern instead
of the dichotomy of traditional-modern is needed. Given that human
order is symbolic in its fundamental dimension, this order was constructed
through the symbolic system of magic in the ancient period, world-religion
in the medieval period, and science in the modern period. Theories and
research have been constructed and conducted by modern sociology under
the assumption that science would dispel transcendence, morality, and
emotion from the social world and finally establish a cognitively-operating
world only. The postmodern, however, challenges this fundamental
assumption, claiming that the postmodern refers to the return of
transcendence, morality, and emotion to this seemingly reified social
world. Under this condition, the project of modern sociology in explaining
social action only in terms of its instrumental dimension is seriously
limited. Now, in order to investigate the way meanings and symbols
shape social action, sociology has to achieve a cultural turn and become
영문 요약 261
cultural sociology.
Key Words: The postmodern, cultural sociology, magic, world-religion,
science, aesthe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