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에 명예퇴직한 후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픈 줄 모르던 몸이 여기저지 아프다. 병원에 가보고 한의원에 가봐도 뚜렷한 병명이 나오지 않는다. 병원에서 주사도 맞고 한의원에서 침도 맞아봤지만 별 차도가 없다. 헬스클럽에도 나가고 동사무소에서 실시하는 생활체육 탁구교실에도 다닌다. 어떤 분은 찜질이 좋다고 한다. 전남 함평군 손불면 궁산리의 해수찜질이 유명하다고 해서 한번 가보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차에 찜질방 무료 초대권이 두 장이나 집으로 왔다. 아내보고 가자고 했더니 날 보고 치사하게 공짜 좋아하지 말고 그 차비에 2500원 보태어 목욕탕 사우나에 가는게 백 번 낫다며 말린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이다. 아내의 단호한 거절과 충고에도 가고 싶은 욕망과 호기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4월6일, 아내가 외출한 사이네 초대권에 지시한 대로 하얀 반바지와 흰 티셔츠를 준비해 가지고 지하철을 갈아타며 성내동에 있는 찜질방으로 찾아갔다. 난생처음 가본 찜질방, 말로만 듣던 찜질방인데 여인들만 들어가고 남자는 보이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는데, 한참만에 남자 한 분이 들어가기에 나도 따라갔다. 상하 흰옷으로 갈아입고 찜질방에 들어갔다. 대부분 여인들인데 옥돌위에 서있는 이, 앉아 있는 이, 누워 있는 이들 제 각각인데 저마다 땀을 흘리고 있다.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이렇게 무료로 해주는 것은 업자들이 찜질방에 돈을 내놓고 며칠간 빌려서 무료로 해주는 대신 물건을 팔아서 그 비용을 충당한다는 것이다.
11시에 불가마가 나와서 30분간 땀을 흘리니 신기하게도 우축 어깨통증이 사라지고 왼쪽 가운데 발가락 통증도 풀린 것 같다. 12시엔 모두 2층 휴게실로 올라오라고 방송을 한다. 건강에 대한 유익한 말도 하고, 추첨해서 푸짐한 상품을 줄 테니 한 분도 빠지지 말고 올라 오라고 하여 나도 따라갔다. 레크레이션 강사가 장구를 치며 흥을 돋우고 사람들에게 추첨 번호표를 나눠주며 줄줄이 앉히더니, 오죤살균기에 대해서 성능을 실험해 보인다. 요즘 우리가 먹는 농산물에는 많은 농약이 묻어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그냥 먹고 있다며, 이를 제독하는 기계가 바로 오존 살균기라는 것이다.
농약 제독 실험을 한다. 농약을 섞은 물을 두 개의 유리컵에 나누어서 하나엔 금붕어를 넣자 얼마 안가서 죽어버린다. 다른하나엔 오존 살균기로 30여분간 제독을 한 뒤에 사람이 직접 먹어 보인다. 이렇게 완벽하게 제독을 한다며 실제로 사용해본 사람들의 증언도 들려준다. 발가락의 무좀도 낫는다며 즉석에서 그 물에 몇 사람이 발을 담그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혹하게 하는 것이다. 살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자 몇 사람이 손을 든다. 또 살 사람 나오라고 해도 희망자가 없다. 그러자 판매원이 군중들 사이로 다니면서 살 만한 사람들을 골라 사라고 권한다.
판매원이 내게 와서 "어르신 하나 써보시죠" 하기에 이런걸 사가면 집사람에게서 항상 좋은 소리 못 듣는다고 했더니, 옆에 있던 남자가 자기도 사용해 보니 좋더라고 한다. 어떤 할머니는 두 개 사다가 며느리와 딸에게 주었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하여 귀가 솔깃해진다. 나도 효능이 확실하다면 너덧 개 사다가 두 며느리와 두 딸들에게 하나씩 주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우선 내가 사용해보기로 했다. 관의 허가증을 전지 크기로 확대한 것도 보여준다.
우리집엔 정수기도 없고 먹는 샘물도 없으며 수돗물을 끓여 먹으니 이렇게 좋은 기계하나 쯤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사기로 했다. 뒤에 생각해보니 그들이 모두 한 패거리로 바람잡이가 아니었나 싶다. 6개월 할부는 390.000원 인데 일시불로 하면 345.000원 이고 옥이불을 덤으로 준다고 한다. 나는 일시불로 하여 다음날 은행에 입금시키기로 하고 물건들을 들고 죄지은 도둑고양이 모양으로 집사람 눈치를 살피며 귀가했다. 역시 아내로부터 꾸중듣기에 바빴다. 처음부터 공짜바라지 말라고 했는데, 어디 가서 속아서 가짜를 사왔다는 등, 비싼 물건을 사왔다는 등, 얼마를 주었느냐고 하며, 할부로 사왔으면 당장 물러오란다. 계속 이어지는 잔소리에 아무 말도 못하고 얼마 안 주었다며 얼벼무렸다.
풋고추를 물에 담가 오죤 살균기로 30분간 제독하여 맛있다고 고추장을 찍어먹으며 좋아하기도 했다. 기분이라도 농약 없는 고추를 먹는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웠다.
얼마간 사용하다가 효능도 의심스럽고 사용하는 게 귀찮아서 그냥 식탁 밑에 방치해 두었다. 그러던 7월13일 저녁 7시, 9시 TV뉴스에서 오죤 살균기가 가짜라며 소비자 보호원에 접수된 것만도 700여건인데 반품도 안되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한다. 전문가의 말에 오죤 살균이란게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오죤을 가까이서 많이 쏘이면 인체에 해롭다는 말까지 한다. 아내가 TV를 보라며 지난번에 사온게 바로 저거라며 큰 소리를 친다. 나는 말없이 TV를 보면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요즘에도 봉투에 넣어 우편으로 초대장이 계속 온다. 어떻게 내 주소를 알았을까?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오죤 살균기를 샀으니까 그때 그 주소로 계속 초대권을 보내는가 보다. 김영임 회심곡 발표회, 남진 리사이틀, 최진희 신곡 발표회, 배삼룡 그때 그시절 쇼 등등 여러 가지 초대권이 오고 있다. 그렇게 사람을 모아놓고 그런 물건들을 판매한다고 TV에서 말한다. 거짓말 없는 세상은 없을까? 학생들에게 양심을 속이면 삼대 빌어먹는다며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쳤는데, 남들도 다 내 마음 같은 줄 알고 믿었는데, 그게 어리석은 생각 이었다는걸 늦게서 깨달았다.
나는 귀가 얇아서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고, 남의 말에 잘 넘어가는 타입이라고 아내에게 자주 들어왔다. 아내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에게 속은 일이 없다는데 나는 여러 번 있었다. 아무리 눈 없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라지만 그렇게 남을 속여서 자기 배를 채워야만 하는 걸까?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아무리 그런 무리들이 감언이설로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는 굳은 의지가 있으면 당하지 앓았을 것 아닌가. 심봉사 개천 나무라 무엇하나? 아내 말을 듣지 않고 내 멋대로 하다가 속은 내가 바보이지. "실수는 한번으로 끝내야지, 두 번 같은 실수를 하면 그건 바보, 저능아 이다"그말은 평소에 내가 하던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세상에 공짜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얻어먹는 음식이 사먹는 음식보다 더 맛있다는 말도 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큰 것으로 먹는다는 말도 있고, 공짜 좋아하면 이마가 벗어진다는 말도 있다. 그러고 보니 내 이마가 벗어지긴 벗어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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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이
주영이는 우리 외손녀의 이름이다. 이제 세 돌이 지나고 네 돌을 바라보는 귀염둥이다.
병원 신생아실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예정일보다 이 주일 먼저 나와서인지 "저게 언제 크나?" 하며 "잘 먹여서 부지런히 키워야겠구나" 하고 혼자말을 했다.
저의 엄마가 직장관계로 힘도 들었고, 임신중독으로 몸과 다리가 맷토막 같이 퉁퉁 부어서 의사의 권유에 따라 제왕절개로 일찍 세상구경을 하게 된 것이다. 나에게 처음으로 할아버지란 이름을 붙여준 아이이다.
아내는 그 때까지도 다른 아이들이 할머니라 부르면 그 소리가 싫어서 할머니 아니라고 했다는데, 나는 할아버지란 소리가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때가 되어 할아버지라 부르는,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을 나는 빨리 받아들였는데, 아내는 그걸 그리 쉽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는가 보다. 혈액형이 저의 부모 따라 o형인데 성격도 저의 엄마를 닮아 명랑하고 활달하다. 아니 어쩌면 외할머니의 성격을 그대로 가져간듯 하다.
처음엔 모르겠더니 자라면서 저의 엄마 어렸을 적 모습이 그대로 살아난다. 넓은 이마에 수려한 눈썹, 서글서글하고 커다란 눈망울, 도통한 입술, 둥그런 턱까지 모두 저의 엄마를 그대로 닮은 것이다. 한가지 닮지 않은 곳이 있다면 코라 할까? 저의 엄마는 콧날이 약하다가 자라면서 살아난다고 하여 조금 안심은 하지만 콧날이 그래서 좀 그렇다. 그의 사촌들도 다 그랬다고 한다.
사람들이 주영이를 보고 얼굴은 예쁜데 콧날이 약하다고 하면 어린 마음에도 싫어하며 몹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주영이 앞에서는 코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다. 자라면서 저의 엄마를 빼 닮은 붕어빵이다. 저의 엄마는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 달덩이 같이 얼굴이 탐스러워서 3일만에 보신 할아버지가 매우 좋아하셨다. 남들은 밭이 좋아서라고 했다나.
그 아이가 아빠를 잘 따라서 한번은 세 살 때인가, 지금의 주영이 만했을 때에 나를 따라서 이발학원에 갔었다, 학원에서 뛰어다니니까 아줌마가 아이들은 먼저 집에 가라고 하자, 혼자서 집에 오다가 나와 길이 엇갈려서 큰길을 건너지 못하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단다. 나 혼자 온걸 본 아내가 달려가서 데려온 일도 있는데 주영이도 저의 아빠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누가 제일 좋으냐고 물으면 물을 때마다 아빠라고 한다. 그런 주영이가 유아원에 다니는데 토요일엔 쉰단다. 엄마도 직장에 가서 집에 아무도 없어, 저의 이모가 금요일에 유아원에서 우리 집으로 데려온다. 그럴 때면 엄마가 보고 싶다며 차안에서 운다는 것이다.
하루는 화요일인데 주영이가 감기에 걸려 유아원에 못 보내니 나보고 병원에 데리고 가라는 전화가 와서, 아침 일찍 분당 주영이네로 갔다.
출근하는 저의 엄마에게 "엄마 학교에 안가면 안돼?"한다 "엄마가 학교에 가서 돈을 벌어와야 주영이 좋아하는 장난감도 사주고 과자도 사주지" 하자, "아빠가 돈 벌어오쟎아"한다.
"아빠가 벌어오는 돈으로는 모자라" 하나까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군다. 차 뒷좌석에 앉아서 저의 엄마가 점점 멀어져 잘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말없이 바라보더니 완전히 보이지 않자 뒷자석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이 측은해 보였다.
룸밀러로 슬쩍 보다가 "주영아! 왜 그래?" 했더니 입을 삐죽거리다가 "엄마가 보고 싶어요" 하더니 엉엉 우는 것이다.
"주영아 감기 고치러 병원에 가는데 울긴 왜 울어?"했더니 "엄마가 보고 싶단 말예요" 하더니 더 트게 운다.
오다가 차창으로 보이는 "장지동"이란 지하철역 표지를 보고 "저기 ‘지’ 자 보인다" 하기에 "그래 그게 너의 엄마 김지선 할 때 ‘지’ 자지" 했더니 "엄마보고 싶어요" 하며 또 운다. 한글을 왠만한 글자는 안다. 저의 엄마, 아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유아원 친구들 이름도 웬만한 것은 읽을 줄도, 쓸 줄도 안다. 오면서 간판 글씨를 제법 읽는다 병원에 가면서 "이동 갈비"란 간판을 읽어주었더니, 뒷날 저의 외할머니하고 갈 때에 저기 이동갈비라고 쓴 집은 갈비만 먹는 집이냐고 묻더란다. 병원에 들려 진찰 받고 주사 맞는데 지난번에 안 맞으려 하고 겁에 질려 울더니 오늘은 울지도 않고 잘 참는다. 약을 먹이려 하면 손으로 입을 꽉 막고 고개를 돌리다가 약을 먹어야 빨리 낫는다며 달래면 즐겁게 잘 듣는다.
어릴 때 저의 엄마 하던 행동까지도 그대로다. 그런 주영이를 보면 작은딸을 보는 것 같아 더욱 귀엽기만 하다.
4월 어느 금요일, 그날도 저의 이모가 주영이를 유아원에서 데려왔는데, 낮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집에 가겠다고 한다. 내일 가야한다고 했더니, 지금 가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다. 금요일에 와서 한 밤자고 토요일에 집에 가는데 낮잠을 자고 나서 한 밤 잤으니까 집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낮잠을 잤으니까 오늘 가는 게 아니고 내일 가야 한다고 했더니 금새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한다.
어느 날 주영이에게서 전화가 왔기에 "너 언제 할머니 집에 오니?" 했더니, "금요일!" 하고 힘주어 말한다. 그 말엔 가기 싫은데 할아버지는 뭘 기다리느냐는 뜻인 듯 하다.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더 좋은데 그것은 할머니가 여러 가지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해주니까 그렇단다. 하루는 퇴근하는 아빠에게, "아빠, 아쿠아 시계를 우리 유아원 아이들이 차고 다니는데 나도 사주세요" 하더란다. 까르프에 가니 제가 먼저 뛰어가서 시계를 고르더니 차의 뒷좌석에 앉자마자 "아빠 고맙습니다. 이 시계를 찬 유아원 아이들은 없어요. 내가 갖고 싶어서 거짓말 했어요" 하더란다. 그럼 어디서 봤느냐니깐 텔레비전에서 보았다고 하더란다.
그 시계안에 들어있는 껌을 나누어 씹었는데 그게 아까웠던지 엄마에게 와서 "엄마, 나 껌이 필요해" 해서 "너 씹고 있잖아? 엄마가 씹는 껌을 달라는 거야?" 했더니 "응" 해서, 꺼내주니 씹으면서 신이 나서 룰랄라 좋아하더란다. 5월 어느 날 밤 아홉 시경에 집사람이 전화를 걸어 주영이 좀 바꾸라고 하니까, 전화 받으러 나오며 "아빠야?" 해서 외할머니라고 하니까 "난 아빤줄 알았지. 나 잔다고 해." 하고는 그대로 제방으로 들어가더라고 한다. 옛말에 외손자를 귀야워하느니 차라리 방아고리를 귀여워하란 말도 있는데 그 말이 맞는 말 같다. 아무리 천진난만한 철부지라 하지만 외할머니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 십분의 일이나 생각하는지?
외손자는 업고 친손자는 걸려가면서 업은 애 발시렵다고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할머니의 이야기도 있다. 아마 외손자는 딸이 낳았고 친손자는 며느리가 낳았으니까, 편협한 할머니 생각에 외손자는 업고 친손자를 걸려 가면서 업은 아이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금요일을 기다리게 하는 주영이는 우리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며 밝게 자라는 귀염둥이 꼬마 천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