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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연합 [긍휼로 빚진 삶] 김성현감독
(마태복음 18:23~35)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의 주님이 우리 교회를 친히 이끌어 주셔서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의 따뜻한 심정으로 우리를 안아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저 나라 갈때까지 보호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저는 모태신앙이지만, 어릴 때부터 영적인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일찍이 제가 특별히 집중적으로 뭘 배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저는 이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각각 영혼들의 하나님이시고, 또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고 말하지만, 전체에게 말할 때와 똑같은 강력으로, 똑같은 임팩트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자가 “여러분!” 혹은 “교회여” 하고 복수형으로 말했어도, ‘사랑하는 김 아무개’, ‘사랑하는 이 아무개’라고 하지 않아도 각 사람에게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제가 교회의 임무에 대해서, 교회가 해야 될 임무에 대해서 얘기했다면 그것은 각인에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당신의 나라의 기쁨과 성공을 위해 말하지만, 우리 각인에게는 주님과 자기와의 관계에서, 그분의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그분과 내가 손을 잡고 이루는 작품입니다. 교회 성공은 내 성공, 예수의 성공은 우리 모두의 성공, 그리고 나의 성공입니다.
우리가 ‘나’라는 개인에 대한 이 담을 넘어야 합니다. ‘나’에게 받쳐져 있는 내 모든 의지, 모든 구성, 모든 체제, 나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들, 다 깨야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오히려 망칩니다. 나는 주님께 맡겨진 자입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죽었고, 의로 살도록 그리고 의를 위해 살도록 다시 태어났습니다. ‘주께서 내 안에 사신다.’라고 갈라디아서 2장에 말씀했습니다. ‘내 삶은 내가 애타고 투쟁할 일이 아니다. 그가 당신의 일을 내 속에서 할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주를 위해서 해야 된다. 사나 죽으나.’
그래서 오늘 말씀은 나의 신앙이 어떤 형식적인, 종교적 차가운 회초리로 이끌고 성장시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이 현장에서 나를 인도해주시는 신앙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이 차갑고 강압적으로 가면서 이 땅에서 내 현실은 너무나 몰라주는, 현실의 나는 외면하고 무정하게 나를 다루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내 주님이 나를 친히 만져 주시고, 친히 속삭여 주시고, 따뜻하게 감싸 주시고, 친히 나를 만족하게 해주시는, 친히 꿈을 심어 주시는, 말씀이 달콤한 위로가 되는 그런 신앙을 갖기를 원합니다.
신앙생활이 어떻습니까? 대략적으로 보면, 우리 교회에서 저보다 신앙생활 오래한 분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는 두루 어떤 체험을 근거로 해서 얘기할 수 있는데, 옛날에는 우리나라의 어떤 정서랄까? 여러 가지가 정치사회적, 경제적인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까? 사회 모든 분야로부터 영향을 받는데, 교회의 문제도, 신앙도 영향을 받습니다. 전도의 방법이나, 신앙방법 같은 것들이 사회적인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것과는 완전히 별개로 간다!’ 주장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류는 세상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반대를 하더라도 반응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교회의 입장입니다. 교회가 변해가는 이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교회 지도자가 사회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면 한 대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그렇게 많은 사람이 신의를 버리고, 자기 욕구를 위해 얼마든지 자기의 목자도 버릴 수 있고, 하나님과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눈치 채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적 자부심, 언제까지 이것만 내세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회개하고, 돌이키고 고쳐가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 고쳐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이후에 수 백 년을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그들은 실패하고, 다시 그들이 돌이켜서 ‘다시 실수하지 말자. 실패하지 말자.’ 하고 신앙을 재건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으로부터는 퇴짜를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다 버리고 실제적으로는 열두 명으로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거듭 잘라내고, 이스라엘에서 떨어져 나가고, 거기서 또 나라가 잘려 나가서 나중에는 열두 명으로 주님이 친히 품에 안고 젖 먹이듯이 먹인 그들을 통해서 하셨는데, ‘이것도 안되겠다. 내가 성령으로 너희에게 보내 줄게.’ 해서 성령이 와서 방언이 터지면서 그 능을 주시고 그 능을 받은 자들로서 그들이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늘의 힘을 받아 교회를 오늘까지 이렇게 해왔습니다. 인간이 타락이, 인간이 한 번 꺾어지니 회복하기가 이렇게 힘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수 믿는다는 건 무슨 뜻인 줄 아십니까? 이것은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원수였을 때 그는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나는 주님을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님은 나 때문에 죽으셨다.” 고백하는 것은 백 번, 천 번 맞는 말입니다. 상황이 그런 것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그가 죽으셨으니 내가 그를 죽인 거나 다름없습니다. 내 죄가 그를 죽인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가 죽으셨으니, 그가 죽지 않으면 나를 살릴 수 없는 것인데, 이는 또한 그가 죽을 정도로 사랑해주지 않으면 나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께서 내게 무슨 빚을 졌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한 분, 아버지와 한 분 되신 분으로서 아버지의 그 마음을 그대로, 그리고 그분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셔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것은 사랑뿐입니다. 긍휼, 자비입니다. 자기를 내어준 긍휼입니다. ‘어유, 예쁘다. 불쌍하다.’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습니다. 그분처럼 자신이 죽지 않으면, 나를 위해 죽지 않으면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 관련된 것입니다. 사랑틱한 그런 것이겠죠.
세상에서는 천륜도 어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부모가 자식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 사랑하는 것이 천륜이지만, 그마저도 자기사랑 때문에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도 버릴 수 없는, 절대 망가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보여준 사랑입니다. 이 땅에서 이처럼 나를 사랑해줄 자는 없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가정도, 내 부모도, 내 자녀도 소중한데, 신뢰 문제로 하자면 이미 증명해주신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마치 남의 것처럼 나눠주지 않는 교회는 정말 너무나 불행합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교회는 절 사랑해주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항상 나를 견제하고, 미워했습니다. 나는 진짜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진짜로 잘되길 원하고, 누구와도 원수 관계를 갖지 않고, 누구를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성장한다고 할 때, 뭔가 그리스도 교회의 중심에서 유지해야 될 것을 많이 소홀히 했던 것 같습니다. 과거 우리 교회가 자랑하던 목사님들 중에는 굉장히 거친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걸 좋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박력 있게 여겼습니다. 걸걸한 목소리로 “용사들 나와! 성령의 용사들!” 하고 소리치면 좋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가 제일 어려울 때, 사태에서 제자들이 배반하고 교회를 어렵게 했을 때, 그들은 와서 사기를 쳤습니다. 제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에 방해되지 말아야 되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지만, 너무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지금은 많이 상처가 치유됐을 것이라고 보지만, 그렇게 무책임하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아주 차갑고 매서운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어떤 자들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들입니다. 지옥 불에 떨어지려는 자인데 건짐 받았습니다, 그런 자를 구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나를 구해준 분에게 “정말 내 육신 다 찢어, 잘라 가십시오. 나는 당신을 위해 도움이 되면 모든지 하겠습니다!” 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긍휼을 받았단 말입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경은 ‘긍휼 때문에 너를 살려주었다. 너희의 죄를 씻고 성령이 너희를 새롭게 하심으로 너희가 세워졌다.’[1] 했습니다. 너를 살리고, 이제 성령으로 너를 계속 보호하시고 깨끗케 해 가신다 했습니다.
또 ‘너희를 정말 양순하고, 긍휼하고, 선한 열심을 하게 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긍휼함을 받았기 때문에 너희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된다.[2]’라고 했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 돼요? 왜 양순해야 하고, 선한 건 왜 해야 되죠? 선한 열매를 왜 맺어야 돼요?’ 은혜 받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자냐? 베드로전서 2장 보면, 하나님의 그 덕, 영어로 하면 ‘virtue’인데, 그 덕을 선전하라 했습니다[3]. “나 이런 은혜 받았다.” 하고 나타내는 것이 우리 삶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유업의 그 성격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보아라, 하나님이 이렇게 큰 은혜,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셨느니라.’ 여러분과 나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긍휼 받은 것을 나타내는 것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 받은 것, 사랑받은 것,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긴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하게 보시더라. 그는 엄청 자비하시더라! 나, 그래서 용기를 얻었다. 세상은 나를 버리고, 세상은 나를 힘겹게 하지만, 앞도 보이지 않고, 옆이고 뒤고 보이지 않는다. 난 다 포기했다. 내일? 난 그런 것 없다.’ 하고 가더라도, 그냥 아프기만 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가 나를 사랑하신다. 이 세상의 삶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의지하고 오늘을 달려가겠다.’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도 중요합니다. ‘영적인 삶만 중요해. 인간의 삶, 다 버려!’ 이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영원한 삶은 영원히 펼쳐졌지만, 그러나 닥쳐진 오늘 있는 그 한가지가 나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세상에서도 힘을 내서 가야 합니다. 세상의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버텨 나가기 위해! 세상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내가 잘못되지 않고, 내 인격이 부서지지 말아야 합니다. 용기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호흡을 갖고 있는 사람, 하나님의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사람, 하나님의 법이 여기 머리에 써져 있고 마음에도 써져 있는, 하나님의 것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법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길을 가르쳐 준 사람입니다.
과거 우리 교회를 돌아보면, 덕이 없었습니다. 덕을 상실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차가운 겉모양만 있었습니다. “아이, 그것도 못해? 저것도 못해!?” 너무 사람을 실망시키고 너무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김성현’이라는 사람, 뭐 좀 되는 사람인 줄 아십니까? 저 많이 부족합니다. 당신도 부족하죠? 다 부족합니다. 차갑고, 냉정하고 이기적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해줬으면, 긍휼하게 대해 주셨으면, 그러 사랑과 긍휼을 받았으면 그와 같이 다른 사람을 긍휼하게 대해야지요.
우리가 왜 교회에 와 있습니까? 이 땅에 있는 몇 십년 동안 잘 버텨가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잘 버티자, 서로 용기를, 힘을 내자 하면서 서로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나는 긍휼로 먹고 산다. 주님의 긍휼하심이 나의 오늘의 힘이다. 내 존재의 가치는 주님이 나를 향해 긍휼한 그의 마음 내게 쏟으신 거기에 있다.’ 이게 나거든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없으면 안됩니다. 힘을 내 주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용기를 얻으려고, 좋은 것 있다고 전도 받아서 교회에 왔는데, 다들 사나운 눈길로 바라보고, ‘아, 저것도 모르네, 이것도 모르게…’ 하면서 야단 친다면, 누가 우리 교회 다니려고 하겠습니까?
우리 교회를 어렵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자기들이 원하대로 되지 않으니까, 교회를 이렇게 차지하고 싶은데 안 되니까 ‘차라리 무너져라.’ 합니다. 차라리 무너지면 깨진 것들 주워 먹을 수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본인들은 몇 십 년 다녔을지 모르지만, 그 자녀들은요? 자기의 정욕의 욕심, 그 지옥불에 들어가야 될 그 정욕의 욕심을 달래고만 있을 뿐입니다.
주의 교회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교회, 우리의 목적이, 의무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가 어떤 특징이 있는 교회가 할지라도,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준 자들입니다. 누구를 하대하고, 누구에게 고함을 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 원하는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오늘을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힘을 부어줘서 살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어디를 둘러봐도 친절합니다. “아, 고맙습니다.” “성도 힘내…” 다들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합니다. 힘겨운 인생 길을 걷고 있음을 인정을 해 줍니다. 알아줍니다. 이것만 해도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받은 자,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 주위에 있습니다. 도리를 압니다, 덕이 있습니다. 작은 예수님들이 잔뜩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서 자기들의 날 선 옛날 인성들이 싹 없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힘을 얻어 자기들도 선배들로부터 힘을 얻은 자로서, 내 선배들이, 내 신앙, 인생 선배들이 내게 이 긍휼로 사는, 긍휼을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으로 믿고 견뎌 가는 신앙의 모습을 내가 배우고 자라왔고, 살아왔기에 “힘내. 힘내. 힘들지? 세상, 힘들어… 그렇지만 주님의 약속 믿고 끝까지 견뎌야 돼, 힘내…” 하고 다른 사람을 격려해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나는 미래가 없는데… 나는 세상의… 세상이 나를 미워해, 세상이 나를 험악하게 해.” “그럼 교회에 와서 그냥 쉬어.” 이렇게 여기서는 잔뜩 긍휼에 은혜 받은 자들이 와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이런 긍휼이 빠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껍데기만 있는 것이고, 아무리 주장해도 차디찬 욕심꾸러기 이론만 있는 것입니다. 여기는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사실만이 있습니다. 주님께 빚을 갚듯이, 나는 내 교회를 섬기길 원합니다. 나는 나를 그래서 낮추고, 내게 주신, 내게 베푸신 은혜를 어떻게든 좀 갚으려고 애를 씁니다.
주위에 보면 그냥 가당치 않다고 남을 억누르고 이런 차가운 전쟁통 같은, 세상에서 쓰는 그 권모술수, 비겁하고 속이는 그런 유혹에 항상 머리 굴리고 있다가 남의 가정을 파괴하면서까지 끝까지 교회를 상대로 싸우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우리 교회를 이렇게 분열시켜서 제일 괴롭게 한 사람이라도 절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누구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랑하고 싶습니다. 난 특별히, 이 사람이랑 나랑 관련 없더라도, 나는 무슨 에너지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도 사랑해주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모두가 사랑하길 원합니다. 그것이 너무 성경적이고,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이드라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을 이기는 힘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짓누르고, 사회에서처럼 서열을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설명하자면 좀 긴데, 일단 제일 높은 사람과 친구가 되면 됩니다. 제가 교회 지도자가 되니까 저한테 달려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 방법을 이제 훤히 압니다. 원래 다 알고 있었는데 더 훤히 압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렇게 해서 꼭 그와 키를 맞춘 다음에 탁 칩니다. 그리고서 자기가 그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 식입니다. 세상에서 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진짜 날 사랑하고, 진짜 교회 사랑하고, 진짜 자기를 희생하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차라리 좀 치고 올라왔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필요로 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다른 사람의 천륜을 이간해서 깨고! 파괴 시켜서 자기의 재정적 이익을 얻는, 그런 것을 추구하는 일들이 우리 교회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우리 교회가 50년, 60년을 지켜나간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늘 모두가 회개해서 주님의 친절하심, 주님의 사랑, 주님의 따뜻한, 주님의 진실한, 주님의 선하심,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감싸주는 우리 교회, 다 주님 닮은 사람 참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폭력적인 것을 너무 많이 봐왔어요. 나는 우리가 뭐 소화할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많은 걸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딱 보니까 어느덧 60이 넘었습니다. 그러면 다음 세대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 역사에서 그래도 이 미련하고, 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미래를 걱정하는 유일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좀 과장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자부심은 있습니다. ‘나는 다음 세대를 준비한다.’
제가 찬양을 많이 하는데, 제가 즐거워서 그렇게 하는 줄 아십니까? 찬양하는데 얼마나 힘든 줄 아십니까? 모든 성도들이 찬양하면서 기쁘고, 그들이 찬양하면서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그런 마음과 그런 걸 다 풀고, 세상 스트레스, 세상으로 인한 애매한 이런 것들 딱 자르고 찬양하면서 그들이 하나님과 더 가깝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미래를 위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찬양을 준비하는데 어렵습니다. 저도 너무너무 시간이 없고, 바쁘고 힘든데 그래도 하는 것입니다. ‘나, 좀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 이런 생각도 듭니다. 나는 이렇게 에너지가 없는데. 그러나 조심스럽습니다. 우리 성도가 ‘에이! 나 모르는 노래하네? 에이구 내가 왜 여기 있어? 그냥 집에 가서 테레비나 볼 걸, 연속극 그거 안 본 것 있는데.’ 그럴까 봐 미안하고, 괴롭습니다, 저도.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레파토리를 하나? 우리가 너무 안 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정말 우리 교회에 한 10년 안쪽에, 우리가 지금은 “MZ! MZ! 애기들!” 이랬는데, 그 MZ들이 애들이 아니라 “우리 어른이다!” 하고 금방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다 무시하고 할 순 없습니다. 시대를 앞서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단 문제와 분열 문제로 정지돼 있어서 앞으로 일어설 수 있을까, 없을까는 모르지만, 사실 저는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있습니다. 이는 내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한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상황이 나쁩니다. 나는 또 우리 교인들과 싸워야 됩니다. 아주 나쁜 그런 선배들하고 싸워야 되고. 무관심하고, 거칠고, 긍휼이 없고, 자비가 없고, 거친 선배들과 싸워야 합니다. 나는 진짜 존경하고, 사랑하고 이런 사람도 나중에 보니 나를 미워했습니다. 보니까 무슨 꾀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서는 무슨 하나님의 도구라고 하는지…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드로전서 3:8)
이게 누구의 말씀입니까?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긍휼? 아, 난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진리만 충실하게 할래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 여기 같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야고보서 2:13)
우리가 ‘긍휼’하면 우리 전체를 공격하는 원수를 이깁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시다. 우리 함께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 긍휼로 빚진 내 삶, 나도 긍휼하게 하겠습니다. 내 성도들에게 긍휼하게 하겠습니다. 나 그렇게 날카롭고, 잔인하고, 차갑고, 무감각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나를 낮추겠습니다. 겸손하겠습니다. 나를 이미 사랑해주신 것,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걸로 내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 뜻을 나타내기 위해 내가 더 사랑하겠습니다. 나, 우리 교회에서도 잘난 것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이미 베풀어 주신 것, 충분합니다. 나는 더 사랑하겠습니다. 그러한 나를 정말 주님이 봐주시고 인정해주시면, 박수 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모두를 이렇게 긍휼로 인도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긍휼하게 하여 주셔서 전도 잘 하게 하시고, 주님의 일이 잘 이루어지게 하시고, 원수들이 우리 교회에 원수들이 끼어들지 않도록 되는 훌륭한 교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다같이 기도합시다. 다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 들은 우리 성도들 다 도와주시고, 우리 주님의 긍휼하신 그 마음과 그 행실로 인하여 큰 사랑받은 우리들, 주님께 빚진 자들 우리 모두, 또한 받은 것을 생각하여 우리도 긍휼한 마음을 갖도록 주께서 도와주시고, 주님의 그 사랑을 또한 사랑으로 갚을 수 있는 우리가 되게 도와주셔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은혜를 나타내는 자, 기억하는 자, 또 이를 위하여 영광 돌리는 자들 다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마귀의 성질을 닮은, 미워하고, 파괴하고, 질투하고 또 속이고, 이간하고 이런 것들이 우리 교회에서 다 떠나게 하여 주시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체감하고, 공감하고 또 양보하고 또 희생해주는 우리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제작: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