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VAOKfuAlLJk?si=sc4cKWlsgx-4S8tr
[2025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사력 / 장희수
할머니가 없는
할머니 집에선
손에서 놓친 휴지가 바닥을 돌돌 굴렀다
무언가 멀어져가는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는 듯
소금밭처럼 하얗게 펼쳐지고
어떤 마음은 짠맛을 욱여가며 삼키는 일 같았다 그중 가장 영양가 없는 것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라 생각해본 적 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포기할 수 있었다면
또다시 포기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생길 리 없을 테니까
할머니도 이제야 뭔들
관두는 법을 배운 거겠지
다 풀린 휴지를 주섬주섬 되감아보면 휴지 한 칸도 아껴 쓰라던 목소리가,
귓등에서 자꾸만 쏟아지는 것 같았는데
쏟아지면 쏟아지는 것들을 줍느라
자주 허리가 굽던 사람의 말은
더 돌아오지 않는 거지
죽을힘을 다해본다 해도
사람들은
영정 앞으로 다가와
국화꽃을 떨어트리고 멀어져 간다
정갈하고 하얗게 펼쳐지는
꽃밭처럼,
무언가 떠나는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는 듯
할머니가 있었던
할머니의 집에서는
심사평
소소한 이미지로 삶-죽음에 대한 사유 성공적 이끌어내
시에 더욱 많은 것을 요청할수록 오히려 무게를 덜어내야 한다는 역설을 생각해 보게 하는 심사 과정이었다. 현대시가 그 어떤 때보다 ‘실재(혹은 실제)에 대한 열정’을 감당해 내야 하는 무게와 싸우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상당한 질량을 보유했으리라는 기대를 담은 관념어의 나열로도, 언어 경제를 잃은 장황함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 이번 본심 대상작을 중심으로 단적으로 말하자면 늘이고 포개는 것보다 오히려 줄이고 깎는 일이 더욱 관건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눈에 띈다.
‘사력’은 그런 점에서 최종적으로 검토의 대상이 될 만했다. 할머니의 죽음을 중심 소재로 하되 사건을 세세히 묘사하는 대신 소소한 이미지들을 그러모아 사건에 육박하게 하는 자연스러움이 돋보였다. 이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독자의 사유를 이끌어내는 것에도 성공하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능숙하게 쓰인 작품이다.
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권갑하 시인 분석
이 시는 크게 4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이 4개의 연을 중심으로 두고
할머니가 없는/ 할머니 집에선"이라는 첫 구절과
할머니 있었던/ 할머니의 집에서는"이라는 마지막 구절이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수미상관 기법은 시에 리듬을 형성하며 독자에게 안정감과 함께 강한 인상과 여운을 남깁니다
이 시에서는
할머니가 없는', '할머니가 있었던'이란 구절에서 알 수 있듯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의 집에 남겨진 가족의 상실감과 그리움을
강조하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첫 연의
무언가 멀어져가는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는 듯"
이라는 직유 구절과 마지막 연의
"무언가 떠나는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는 듯"
이라는 직유의 반복도 시에 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의 전개방식을 보면 앞 구절의 키워드를 이어가는 방법을 구사하고 있음이 눈에 됩니다.
첫 연 끝의 '포기'는 다음 구절에 '포기'로 시상이 이어지고, 쓸아지선" 쏟아지는 것들을 줍느라"로 이어가는 연에서 '쏟아지는' 이미지가 시법입니다.
두루마리 휴지에 관한 이미지 대비도 인상 깊습니다
손에서 놓힌 휴지가 바닥을 돌돌 굴렀다"가
무언가 멀어져 가는모습, 즉 할머니의 부재를 암시한다면
"다 풀린 휴지를 주섬주섬 되감아보면"이란 구절은
할머니를 기억하려는 상징으로 읽힙니다.
그뿐 아니라 이 시는
첫 연의 "소금밭처럼 하얗게 펼쳐지고"라는 구절은
할머니의 부재로 인한 공허함을 표현하죠
또 "어떤 마음은 짠맛을 욱여가며 삼키는 일 같았다"라는 구절은 슬픔과 그리움을 억지로 삼키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연의
"죽을힘을 다해본다 해도//
사람들은
영정 앞으로 다가와
국화꽃을 떨어트리고 멀어져 간다"
"도 인상적인데요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그리움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표현합니다.
이 시는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삶과 죽음
할머니가 없는 집에서 느끼는 상실감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시 창작과 관련해 배울 점
첫째는 소소한 이미지의 활용입니다
시는 할머니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소소한 이미지들을 통해
독자가 자연스럽게 사건에 다가가도록 합니다.
예를 들어, 바닥을 굴러가는 휴지나
소금밭처럼 하얗게 펼쳐지는 모습 등은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소소한 이미지들입니다.
둘째는, 시상 전개에 절제와 간결함이 돋보입니다.
"할머니가 없는/할머니 집에선//
손에서 놓친 휴지가 바닥을 돌돌 굴렀다//
무언가 멀어져가는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는 듯//
소금밭처럼 하얗게 펼쳐지고"
첫 연이 바로 할머니의 부재를
간결하고 절제된 표현으로 묘사한 경우라 할 수 있죠
이러한 절제와 간결함은
시 창작에서 깎아내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셋째는 독자가 시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대상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습니다.
감정 이입은
화자가 자신의 감정을 특정 대상에 투영하여
그 대상이 마치 동일한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독자는
화자의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죠
감정이입 방법은 감정을 투영할 대상을 의인화하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화자와 대상이
동일한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묘사하는 방법이 있는데요
"죽을힘을 다해본다 해도//
사람들은/ 영정 앞으로 다가와/
국화꽃 떨어뜨리고 멀어져 간다//"
라는 구절이 바로 그런
감정을 깊이 담아낸 사례라 하겠습니다.
넷째는, 심사평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독자가 자연스럽게 사유할 수 있게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휴지와 소금밭의 이미지를 통해
떠나는 이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그려내며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시의 첫 연이 바로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시 창작에서 매우 중요한 기술이라 하겠습니다.
2025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장희수의 <사력>을 분석해봤습니다.
이 시는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느끼는 슬픔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독자의 깊은 사유를
이끌어내는 작품입니다.
그러 점에서 이 시의 주제는
상실과 애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