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축제의 열기는 설날 연휴를 지나며 서서히 식어갔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 터진 엔론 사태의 회계 부정 파문이 전 세계 자본시장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비수를 꽂았다 화려했던 IT 벤처의 환상이 다시금 흔들리기 시작했고 잘 나가던 코스피도 800선 문턱에서 숨을 몰아쉬며 주춤거렸다 개미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닷컴 버블의 악몽이 유령처럼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3월 봄바람과 함께 찾아온 것은 뜻밖의 기적이었다 1/4분기 국내 GDP 성장률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서프라이즈를 기록하자 시장은 대세 상승의 샴페인을 터트렸다 종합주가지수는 단숨에 890선을 돌파하며 대망의 900선 고지를 눈앞에 두었다 객장의 전광판은 온통 붉은빛 축제의 장으로 물들었고 투자자들은 드디어 암흑의 터널을 완전히 벗어났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탐욕이 정점에 달했던 4월 중순 종합주가지수는 마침내 941이라는 경이로운 숫자를 찍으며 1,000선 돌파의 목전까지 진격했다 전국의 객장은 지금 안 사면 평생 후회한다 는 비성성적인 확신으로 가득 찼다 수많은 개인 투자자들이 적금과 대출을 쏟아부으며 마지막 불꽃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곳이 천국의 계단 꼭대기이자 잔혹한 지옥의 입구라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5월 장밋빛 환상이 처참하게 깨지는 데는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미국 증시가 경기 회복 둔화 우려로 힘없이 고꾸라지자 외국인들은 잔인하게 차익실현 매물을 쏟아내며 한국 시장을 탈출했다 설상가상으로 원화 환율까지 급격히 절상되면서 국가 경제의 버팀목이던 수출 기업들의 주가가 직격탄을 맞았다 지수는 순식간에 840선까지 밀려났고 고점에서 상투를 잡은 개미들의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6월 대~한민국을 외치며 붉은 함성으로 가득 찼던 기적의 한 달이었지만 주식시장만큼은 철저히 소외된 지옥이었다 국민들이 월드컵 4강 신화에 미쳐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동안 주식시장은 월드컵 징크스의 늪에 빠져 피를 흘렸다 공식 후원사였던 현대차마저 폭락을 면치 못했고 매각이 무산된 하이닉스는 액면가 5,000원이 무색하게 390원짜리 동전주로 추락하며 시장의 동반 붕괴를 부채질했다
7월 월드컵의 뜨거웠던 열기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자리에는 차가운 침체의 흔적만 남았다 하이닉스는 하루에만 18억 주가 넘는 기괴한 거래량을 기록하며 단돈 수백 원짜리 투기판의 노리개로 전락했다 시장의 신뢰는 바닥을 쳤고 종합주가지수는 700선마저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축제 뒤에 찾아온 공허함 속에서 개미들은 또다시 깡통 계좌를 쥐어짜며 눈물을 흘렸다
8월 지루한 침묵과 공포의 계절이었다 미국 발 회계 부정의 여파가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을 짓눌렀고 외국인들은 거침없는 순매도로 일관하며 한국 증시의 숨통을 조였다 900선을 호령하던 지수는 이제 700선 사수조차 버거운 처절한 진흙탕 싸움을 벌여야 했다 악재만 가득한 시장을 바라보던 투자자들은 지쳐서 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운명의 9월 대외 변수의 폭풍이 한국 증시의 대들보를 통째로 흔들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가능성이 가시화되며 국제 유가가 치솟았고 대북 핵 문제까지 불거지며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극에 달했다 사방이 사면초가였다 심리적 마지노선이던 코스피 600선이 힘없이 무너지자 객장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집단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10월 마침내 파국이 도래했다 11일 코스닥 지수는 사상 최저치인 43.67까지 처참하게 주저앉으며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코스피 역시 500선 중반까지 추락하며 1년 동안 쌓아 올린 상승분을 단 몇 달 만에 모두 쏟아냈다 빚을 내어 주식을 샀던 수많은 이들이 반대매매로 시장에서 강제로 퇴출당했다
11월 모든 희망이 증발했다고 생각한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다시 한번 반전의 불씨가 당겨졌다 혹독한 구조조정을 견뎌낸 제일모직 풀무원 등 이른바 턴어라운드 우량주들이 견고한 실적을 무기로 시장의 구원투수로 등판했딘 지수가 폭락해 몸값이 헐값으로 떨어진 알짜 가치주들을 중심으로 저가 매수세가 강하게 유입되며 시장은 극적으로 심폐소생술에 성공했다
12월 2002년의 마지막 폐장일 종합주가지수는 결국 연초 출발선상과 다름없는 700선 초반으로 되돌아오며 긴 여정을 마무리했다 상반기 1,000선을 꿈꾸던 장밋빛 환상은 하반기 500선 추락이라는 롤러코스터 장세를 거치며 혹독한 한해를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