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포에니 전쟁사에서 극히 잘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육상 민족이었던 로마인들은 이 전쟁에 이르러서야 겨우 배를 만들어 보게 되었는데,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나포한 카르타고 전함을 모델로 삼아서 군함을 제작했다고 하는 것이다.
폴리비오스의 『역사』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Polyb.1.20) 그 자체로도 유명하기는 하지만 국내에서는 특히 『로마인 이야기』에 수록되어 널리 퍼졌다. 그 에피소드는 초기의 로마 해군이 얼마나 빈틈 투성이였고 모험적이었으며,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둔 승리가 얼마나 놀라운지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또 덧붙이자면 로마 함대가 채택한 신장비 "까마귀"를 마치 기적의 신무기처럼 보이도록 만들기도 한다.
어쨌거나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재미있다는 것은 신뢰성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는 문제가 많은 일화이고, 마치 앞뒤가 바뀐듯한 해석이다. 로마 함대는 밀라이(260)-에크노모스(256)-헤르마이아(255)의 대해전에서 연달아 승리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마땅히 우리는 비록 카르타고가 전통적인 해상 강국이었지만 로마 함대의 전력도 만만치 않았다고 해석할 것이다. 그러나 로마 함대를 '모방품으로 급조된 것'으로, 그 승무원들을 '경험없는 사람들'로 보는 인식이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면, 이 잇따른 승리가 참으로 괴상한 사건이 되어버린다. 정말로 "까마귀"가 함선 성능이건 조함 경험이건 죄다 무력화시켜버리는 기적의 신무기라도 된다고 받아들여야 할 판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래야 하는가? 그 인식들이 실은 잘못된 선입견일 가능성을 먼저 고려해야 하지 않은가. 물론 그 '고려' 역시 적잖은 문제점을 지닐 수 밖에 없으나, 안 하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보다 자세한 논의는 Lazenby, Ch.5와 Walbank, p72-79 참조]
무엇보다, 로마인들이 항해에 익숙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지배를 받는 이탈리아 반도에는 항구가 많았다. 캄파니아에는 네아폴리스, 쿠마이 등이 있었고, 당대의 유명한 항구 도시들인 레기움, 로크리, 크로톤, 타렌툼 등이 마그나 그라이키아 해안을 따라 들어서 있었다. 이런 도시들로부터 숙련된 선원이며, 노잡이와 배를 받아와서 함대에 소속시킬수 있지 않은가? 폴리비오스가 정확히 '동맹국들은 쓸모가 없었'다는 식으로 진술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야기에서는 충분히 전력에 보탬이 될 수 있었을 이탈리아 동맹국들의 존재감이 지나칠 정도로 옅다.
좀 더 구체적인 문제를 살펴본다. 1차 포에니 전쟁의 주력 전함은 "퀸퀘레미스(5단선)"라는 대형 갤리선이었다. 폴리비오스는 로마인들이 그 전에는 배를 만들어 본 일도 없으며, 이탈리아에는 퀸퀘레미스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노잡이로 뽑힌 사람들은 땅 위에 의자를 놓고서 구령에 따라 팔을 앞뒤로 젓는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Polyb1.20~21)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리비우스의 연대기에서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출현하는 '전함'(navis longa, 단어 구성상으로는 '긴 배'가 되지만 보통 '전함'의 뜻으로 사용됨)은 무엇인가?(Liv.5.28) 전승에 따르면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는 이미 왕정시대부터 존재했다.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발굴결과 최소한 기원전 4세기 말에는 그곳에 성채가 세워져 있었음이 분명하다.[김창성] 또한 로마인들이 일찍이 타렌툼과 체결했던 협정에서는, 로마 선박이 "라키니움 곶(오늘날의 카포 콜로네)"을 넘어 항해해 오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Appian.Sam.7) 카르타고와 맺은 조약에도 항해 범위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Polyb.3.23)
로마인들이 애초에 배를 만들지도 않았다면 그런 조항이 왜 필요하며, 또 기원전 282년에 로마가 그 협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타렌툼인들이 공격한 10척의 배(Appian. Ibid.)는 현실에 존재하는 배가 아니라 이데아 세계의 물건이기라도 했는가? 다수의 증거가 보여주는 바는, 로마인들에게는 배도 있었고 항구도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배는 모두 수입산이고 로마인들은 단 한번도 독자적으로 이를 만들어 보려는 호기심조차 갖지 않았으며, 항구는 그저 '바닷가에 있는 마을'에 불과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상식적인 면을 포기하면서까지 폴리비오스를 그렇게 믿어야 할 이유를 단 하나도 알지 못한다.
반면에 이탈리아아를 통틀어 "퀸퀘레미스"가 없었다는 이야기에는 훨씬 너그러운 시선을 주어야 할것 같다. 헬레니즘 시대에 대형 전함 확충은 일종의 유행 비슷했지만, 마그나 그라이키아에서는 어떤 이유에선지 이 유행이 무시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자연스러운 것으로 따지자면 타렌툼이나 로크리같은 대도시에는 퀸퀘레미스가 있었다고 보는 쪽이 더 자연스럽지만, 꼭 그랬다고 볼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로마인들이 기원전 261년, 혹은 기원전 260년에 본격적으로 함대 편성에 착수했을때, 필시 기술 확보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 꼭 카르타고 배를 뜯어볼 필요는 없었다. 당시에는 이미 시라쿠사가 로마 동맹국이었으며, 로마인들은 이 "기술 강국"에서 전문가를 초빙할 수 있었다.(나는 "까마귀(Corvus)"를 실은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했다고 해도 얼마든지 믿을 준비가 되어 있다!) 물론 카르타고 배에 특별히 좋은 점이 있어서 그것을 분석하기 위해 나포한 전함을 해체해 보았을 수는 있다.
땅위에서 노젓는 연습을 했다는 이야기도 그것 자체로는 있었음직하다.(고대의 다른 예로, Polyaen.3.11.7) 하지만 이 에피소드가 은연중 자아내는 뉘앙스대로 따라가서 로마 함대의 조함 기술이 전반적으로 형편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전술했듯이 기존에 이미 로마인들은 배와 항구를 갖고 있었으며, 로마 시민권 지역을 벗어난 속령에도 항구 도시가 많이 있었다. 새로운 함대에는 다수의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노잡이를 더 확보하려고 경험없는 사람들을 데려와 연습을 시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호흡을 맞추어 보기 위해서 연습을 한다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카르타고인들이라고 해서 그런 '연습'이 일절 불필요했다고 여길 수는 없다. 말그대로 경험없는 인원이 어느 정도 비율로 투입되었는지 자체가 불확실하며, 또 '5단선'의 경우 '3단선'에 비해 경험없는 노잡이들이 상당수 있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이상(*만약 '5단선'에서 노 하나당 5명이 붙었다면, 비숙련자가 한 두명 섞여 있어도 그보다 노잡이 수가 적은 배에 비해 노질을 망칠 위험성이 적다. 관련 논의는 카슨을 참조), 이런 에피소드 때문에 로마 함대의 기동 능력을 얕잡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쟁 전반부의 대해전에서 "까마귀"가 가한 충격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역시 흔히 운위되는 바에 의하면 1차 포에니 전쟁 당시 카르타고의 해전 교리는 충각 돌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까마귀"가 이를 봉쇄하고 전투 양상을 선상 백병전으로 몰고갔기 때문에 "백병전에서 로마 병사의 상대가 되지 못한 카르타고 수병"들은 속절없이 패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항해에 익숙하기는 커녕 배도 만들어 본 일이 없다던 로마인들이 어떻게 선상 전투는 그토록 능숙하게 해낼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카르타고 함대는 기원전 255년까지 세차례의 대해전에서 모두 대패를 당했다. 밀라이에서 벌어진 최초의 접촉에서는 "까마귀 충격"으로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에크노모스와 헤르마이아에서는 로마인들의 전법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텐데 또 왜 졌는가? "까마귀 충격"은 해전 기술상의 문제일 뿐 아니라 1차, 2차 포에니 전쟁을 통틀어 계속해서 출현하는 카르타고 병사들의 이상한 나약함(*한니발의 군대만 제외)과도 직접 연결되는 문제이다. 충각 전술은 절대 "까마귀 상대만 아니면" 무적인 전법이 아니다. 카르타고인들이 조함 기술에 자신이 있었고, 따라서 다른 나라에 비해 충각 돌진에 의지하려 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시칠리아인들이 아테네 함대의 충각전술을 파훼한 것이 벌써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절의 일이다. 상식이 있는 함대 장관이라면, 항해술에서 비교 열세에 있는 적이 백병전 위주의 전술을 구사하기 위해 전함을 개조할 수도 있다고 당연히 예상했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나는 "까마귀"의 성능보다도 카르타고 함대의 보잘것없는 대응 역량이 더욱 놀랍다.
김창성, 「로마 최초 식민시 오스티아 건설의 목적」, 서양고대사연구28 (2011)
라이오넬 카슨, 『고대의 배와 항해 이야기』, 김훈 역 (2001)
J. F. Lazenby, 『The First Punic War』 (1996)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 2, 김석희 역 (1995)
F. W. Walbank, 『A Historical Commentary on Polybius』I (1970)
첫댓글 로마인이 배와 항구를 가젔다는거와 선호했다는건 좀 다른이야기인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이베리아에 갈때 배를 타면 편한데 로마인은 굳이 걸어갔고 그래서 도로를 깔았습니다.
카타프랙트나 궁기병등은 그 사회가 유지해줘야 가능한 전력 입니다.
그걸 알고있고 소수 운영한다고 전력이 되는건 아닙니다. 비슷하게 5단 노선은 전력으로 운영할게 아니면 보유가 불필요한 전력 입니다.
당연이 존재를 알고 자문을 받았겠지만 실제로 몇만명을 전력으로 만드는건 전혀 다른 문제 입니다.
해운의 전통이 없는 국가는 이런 전력을 보유할 필요가 없거든요.
제가 보기엔 카르타고의 전력은 용병이 대부분 차지하고 해전에서는 되도록 백병을
회피했던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아웃복서 스타일이 인파이터에게 제대로 걸려든거죠.
또한 카르타고에게는 해군은 자산이지만 로마군에게는 소모품 입니다. 카르타고군이 조심조심 싸우려는것도 이해가 안가는건 아닙니다.
이왕 그 땅을 차지했는데, 도로를 안 만드는게 더 이상하지 않은지요. Polyb.3.76(기원전 218년 그나이우스 스키피오), Liv.26.17(기원전 211년 C.네로), Liv.26.19(기원전 210년 스키피오), Liv.34.8(기원전 195년 카토)를 보면, 스페인으로 갈 때도 뱃길을 잘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Liv.37.57(기원전 189년 L. 바이비우스)처럼 육로를 통해 가던 사례도 있지만, 이 경우는 마실리아까지 가기도 전의 이야기라서 비교 대상으로서는 좀 약하고, 또 앞의 사례들로도 로마인들이 '뱃길을 놔두고 굳이 걸어갔'다고만 하기는 어려움을 충분히 보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로마는 좀 미묘한데... 남부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들은 충분히 해운의 전통이 있는 나라들입니다. 더구나 사실 Appian:Sam.7에서 기술한 사건을 감안하면 해안 초계용인것 같기는 하지만 로마인들도 수십척 정도는 전함을 보유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3세기 중엽의 이탈리아는 로마가 거대하게 확대된 단일 국가체가 아니라, 성향이 다른 여러 나라들을 로마가 모두 복속시켜서 이루어진 동맹체제를 띠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에게 해양성이 그 전에는 두드러지지 않는게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남부 이탈리아의 해상역량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것이 위 글의 주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카르타고 함대의 '아웃복싱' 스타일은 아마 충각 돌진 전법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카르타고가 주로 구사하려 했던 전술임은 인정할 수 있지만, 딱히 그것이 함대를 소중히 여겨서라고는 할 수 없어 보입니다. 충각으로 적선을 들이받게 되면, 아군 배도 어느 정도는 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술적이면서도 파괴적인 전법으로, 조심조심 싸우는 방식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습니다. 로마군에게 있어 함대가 소모품이라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전투중 상실함 함선은 카르타고 배가 훨씬 많고, 로마의 전법이 특별히 소모적이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카르타고의 전술이 소모적이었다는 증거도 없지만요. 로마인들이 어쩐지 배를 훨씬 더 많이 만든 것 같기는 하지만, 이는 해군에 투사한 국력의 크기와 로마 함대가 풍랑에 여러번 휘말린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후자에 대해서 좀 부연하자면, 사실 1차 포에니 전쟁기의 풍랑 피해는 과장된 것 같은 면도 보이는데, 이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기왕 배가 폭풍을 만나 침몰했으니 재건하려 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소모품으로 여기는지, 아닌지와는 관계 없는 문제 같습니다. 함대에 탑승하는 사람들이 저등급 시민들이라서("프롤레타리이") 좀 그런 취급을 받았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증명이 잘 되진 않습니다.
로마인들이 육상국가로 육로를 애용했다면 카르다고와 싸울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로마인들이 도로를 깐것은 그만큼 무역와 유통에 관심이 많았고 그것에 따라 기반시설을 발달시켜온 증거가 아닐까요. 배를 타는 것보다 육로를 선호하는 경우가 적은 것은 아닙니다. 배를 오래 타보지 않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때이지요. 그건 민족적 자부심이나 개인적인 호오에 기반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충각돌진이 쉽게 보여도 그것을 실행하려면 숙련된 해군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로마에게는 그런 해상병력보다는 육군이 우월했고 기존에 가진 단순히 배를 운용하던 인원은 풍부했기에 까마귀전술이 고안된거겠죠. 이것은 초기총이 활보다 뒤떨어짐에도
전장의 주인되었던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숙련된 해군이 아니어도 배를 운용할수 있는 비전투선원들과 독립된 백병대가 합쳐지면서 시너지 효과가 생긴겁니다. 민간인도 해군 전력이 될수 있었고 육상병력또한 그러하니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야말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요인입니다. 저술된대로 해군이 형편없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겠죠. 아마 그 시절에 해군이라하면 충각돌진을 할수 있는 인원을 가리키는 말일겁니다. 해군과 해병대의 차이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듯 싶네요.
로마인은 개개인은 배를 이용해도 군대는 가능하면 배를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것처럼 도로를 이용한 국가는 고대에는 로마를 제외하고 존재하지 않았고요. 그리스와 비교하면 그리스인은 어디갈때는 배를 띄우지만 로마인은 걸어갔죠.
배는 운반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특히 무거운 물건을 이동할때는 더 그렇습니다.
중국은 물류를 위해서 운하를 깔았고 로마는 도로를 깔았죠.
군대처럼 다수의 장비와 인원을 수송할때 배는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로마군의 행군은 단지 이동만이 아니라 밤에는 진지를 짓습니다.
배를 타고가면 굳이 이런 수고로움을 할 필요가 없는데도 로마군은 행군을 선호했습니다.
위에서 제가 거론한 4가지 사례는 모두 행정관이 대군을 동반하고 뱃길로 스페인까지 간 경우입니다.
기원전 218년 Cn.스키피오는 P.스키피오의 군대 대부분(>20,000?)과 함께 갔고, 기원전 211년 C.네로, 기원전 210년 스키피오는 1만 정도, 기원전 195년 카토도 집정관군을 데리고 스페인으로 갔습니다. 기록이 분명한 사례들입니다. 역시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육로로 간 것 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가능하면 배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판단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군대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는 배를 무서워하거나 탐탁치 않아하는 성격이 반영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휘관이라면 이는 별 문제가 아니지만 병사들이라면 단지 미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축할수는 없으니까요. 솔직이 너 매일 행군을 하고 진지를 지을래? 배를 타고 갈래하면 전 배를 타고 가겠습니다.
제가 말하는건 그들이 배를 타는걸 금기시 하지는 않았지만 생각자체는 그렇게 못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해양세력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포에니전쟁이 일어냔 배경은 시칠리아 었습니다.
여기서 패권다툼이 일어났고 여기서 싸운 한니발의 아버지가 이베리아에 세력을 구축하고 한니발이 로마를 침공하죠.
제가 알기로는 몇몇 사례가 있는데 지금은 찾아보기 곤란하니 늦은저녁에는 가능할거 같습니다.
다만 정리까지 할 정도의 성의는 좀 없습니다.
그리고 충각 전술은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노를 부러 뜨리는거고 하나는 배를 받는것입니다. 노를 받으면 노만 부러지는게 노를젓는 사람도 다치고 이건 꽤 숙련이 필요한 방식 입니다.
한번 받히면 거의 전투력을 잃는정도라 거기에 활 쏘고 진입하면 안전한 방법이죠.
나나미 여사는 레판토 해전에 대한 글도 썼는데 거기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레판토 해전에서 베네치아 스페인 제노바 가 주축이 되는데 제노바의 경우 꽤 유명한 장군이 지휘를 했고 상대도 해적으로 이름높은 장수가 지휘를 합니다 반해서 베네치아와 스페인은 거의 막싸움에 비슷한 싸움을 하는데 나중에 너무 우아하게 싸운 제노바측은 전과가 유달리 적었습니다.
이에 반해서 베네치아는 피해도 많았지만 공적도 컸죠.
해서 나중에 욕을 먹습니다.
충각으로 노를 부수는 전법에 대해서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연달아 굉장히 마이너한 사항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계신데, '로마군이 함대를 소모품으로 생각했다'고 하신 주장에 대한 근거가 없는 이상, 충각에 대해서 하신 말씀도 전체적인 결론에는 영향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노를 부수는' 충각 전법의 경우, 1차 포에니 전쟁 내내 카르타고군이 한번도 명시적으로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카르타고 함대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드레파나 해전(기원전 249)에서도, "여러번 (적함을) 들이받아서 다수를 침몰시켰다"(Polyb.1.51.7) 라고 나오며, 우아하게 노를 부수는 식으로 싸웠다고는 아무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1, 2차 포에니 전쟁을 통틀어, 이 '노를 부수는' 충각 사용의 결과처럼 보이는 사례는 오히려 반대로 로마 함대가 카르타고 함대를 상대로 거둔 기원전 217년 에브로강 어귀의 해전에서 나타나며(Polyb.3.96), 사실 이것도 리비우스 기록과의 교차 검증 문제 때문에 실체가 무엇인지는 좀 의문스럽습니다. 아마 그런 전술이 여기저기서 쓰이기는 했겠지만, 당시 카르타고군의 주력 전법이었다고 볼만한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다시피, 로마군이 함대를 소모품 취급했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카르타고 함대가 '조심 조심 싸웠다'는 말씀도 사료상 입증되지 못합니다.
그 다음으로 '배를 타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아마 이 이야기가 나온 것 자체는, 로마인들이 '배를 선호하지 않았다. 그래서 배가 있기는 있었지만 전력감은 아니었다.' 고 주장하려 하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그런데,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배도, 항구도 있다는 것은 노잡이와 숙련된 선원도 어느 정도는 있다는 말로, 로마인들이 바다에 아주 무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또한, 이탈리아 중, 남부의 항구도시들은 로마인들이 바다를 좋아했건 그렇지 않았건 자기들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 있었겠지요. 본문에서는 로마의 함대 편성에서 이들의 역할이 중요했으리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저는 말씀해 주신 견해와는 무관하게 제 논지가 성립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로마인들이 배를 선호했느냐, 아니냐, 로마 군대가 특히 배를 잘 탔느냐 아니냐로 불일치가 발생했는데, 저로서는 군대가 배를 타고 어디론가 간 기록이 잔뜩 있는데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배를 잘 안 탔다:고 전제하시고 이런 저런 평가를 말씀하시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위에서 거론한 예시에 좀 부연하겠습니다. 2차 포에니 전쟁기에 로마군이 스페인이 간 사례는 총 4번이 나옵니다. 기원전 218년 Cn.스키피오, 기원전 217년 P.스키피오, 기원전 211년 C.네로, 기원전 210년(혹은 그 전해 말?) 스키피오가 그 사례들입니다.
앞에서 거론하지 않은 기원전 217년도 배를 타고 간 경우입니다.(Liv.22.22) 그러니까 2차 포에니 전쟁기에 스페인으로 간 군대는 모두 배를 타고 이동했던 것이지요. 기록에 남지 않은 적은 규모의 지원군이 더 있었을 수는 있겠지만, 어차피 알 수 없으니 당장 고려할만한 대상도 아니지요. 당시는 아직 스페인까지 육로가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가 불공평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기원전 218년에는 에트루리아와 리구리아 해안을 돌아 마실리아 까지 갔다고 되어 있으며, 기원전 211년에는 푸테올리에서, 기원전 210년에는 티베르강 어귀에서(~오스티아) 출발했다고 나옵니다. 아예 처음부터 배로 갔던 셈이 됩니다.
기원전 195년의 카토는 루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좀 달라 보이지만, '로마군이 가급적 육로를 선호했다면' 리구리아 해안을 따라 게누아까지 못갈 이유도 없어 보이며, 또 '피레네의 항구' 까지 갔다가 거기서 다시 '로데', 다시 엠포리온까지 또 배를 타고 갑니다. 충분히 육로로 갈 수 있었는데도 배를 타고 갔던 것입니다. 말이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스페인까지 가는데 뱃길이 표준이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런 사례가 이처럼 많다는 것 정도만 보이려는 것입니다. 육로로 간 사례가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군대가 배를 타고 먼 거리를 이동한 예가 계속 보이는데 '로마군은 배가 편리한줄 알아도 가급적 육로로 이동했다. 그 이유는 해양 세력이 아니라서...' 라고 해석하는 것이 과연 정당화 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찾아보니 사례가 없네요.
이건 제가 잘못 안거 같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렇다고 알고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아마도 그리스에 로마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지 않고 브린디시에서 배를 타고 가서 그렇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충각전술은 살라미스해전때도 많이 쓰였던거죠. 제가 하고자 한말은 전통적인 해양강국인 카르타고 해군은 아마도 피해없이 깔끔하게 잡아보려고 했는데 로마군은 힘으로 밀어붙여서 승리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로마군은 해전을 육상전처럼 이해했고 그래서 과감한 돌격을 했고 카르타고군은 기동을 하다가 밀려서 패배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로마군은 굳이 해군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전투가 끝나면 그 선박들이 유지될지 미지수 입니다. 로마는 상비군을 유지하는 체계가 아니고 그 상비군에 대량의 해군이 포함되지 않으니까요. 겔리선은 노꾼만 전투원만큼 필요한데 5단 겔리 같은건 운송에도 별로 적합한 구조가 아니죠.
또한 제가 보기엔 아마도 노꾼도 로마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전통적으로 겔리선의 노꾼은 노예나 하층민들이 맡는데 갑자기 몇만명의 노꾼을 구할수는 없죠. 해서 노꾼을 같은 로마군이 한다면 전투원의 수는 함선당 2배가 됩니다.
살라미스 해전 이후로 거대한 해전이 벌이진예는 거의 없고 아마도 포에니전쟁때가 단일로는 가장 거대한 전투이지 않나 싶습니다. 악티움 해전은 훨씬 나중이고요. 카르타고가 해양강국이긴 하지만 대규모 해전을 벌인적은 거의 없을겁니다. 그래서 전력과는 별개로 전투경험은 별로 없었을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로마군은 육상전이지만 경험이 많았고 용맹했죠. 제 생각에는 이마 이러한 차이가 승패를 가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양한 상상을 해 보시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상상이 역사적 상황과 부합한다는 보장은 없으므로 기록과 맞추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1차 포에니 전쟁 중에 카르타고군의 전술이 그렇게 우아했다고 볼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2차 포에니 전쟁은 해전 기록이 더 소략한데, 없는 부분을 무리해서 만들어낼 수는 없겠습니다. 또한, 실제 해전에서 로마군이 특별히 과감한 돌격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에크노모스(기원전 256)에서는 비록 로마군이 먼저 공격에 나섰다고 하지만, 밀라이(기원전 261)에서는 카르타고 전함들이 로마군을 얕보고 먼저 달려들었다가 당해버렸습니다.
W.W. Tarn이 정리한 것을 보면, 카르타고인들도 아주 위급할때나 200척 이상의 함대를 운용하지 그렇지 않을 때는 전쟁에도 100여척의 전함만 나타납니다. 로마인들이 평상시에 전함을 줄였으리라는 주장은 아마 근거를 갖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상상 같습니다만, 아마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로마인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카르타고도, 그리고 다른 해군 보유국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군은 굳이 해군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전면 해체를 염두에 둔 것이라면 근거가 없을 뿐더러, 사실도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시칠리아를 영유하기 전에도 로마군은 함대를 다소 갖고 있었음이 확인되는데다, 엄연히 해외에 영토가 있으며 이권이 걸려 있는 통상로와 해외 동맹국들도 있는 마당에 해군을 무시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습니다. 전시처럼 200수십척씩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도 당연히 위급할 때 군대를 실어 보내거나 해안을 경비할 정도의 세력은 유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수만명의 노군을 갑자기 구할 수 없다. 노군도 로마군이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어떤 근거로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원전 225년의 인구 조사 목록을 보면, 이탈리아 반도에 사는 자유인 성인 남자로 목록에 포함된 사람만 63만명이 넘습니다.(Polyb.2.24)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고 평가받습니다. 물론 무산자가 몇명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기원전 3세기의 무산자 수를 추산할 때는, 다른 증거가 많은 것이 아니라 바로 함대 동원 규모가 가장 중요한 단서를 이룹니다. 즉, 함대가 이만큼 나왔으니 그러기 위해서는 무산자가 몇 명 정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절대 비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단순히 연역적으로 추정한다 해도, 대략 전체 성인 남자를 90만명이라고 쳤을 때, 그 중의 단 1/10만이 무산자층이라고 가정해도 9만명으로, 300척의 5단선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무산자는 아니지만 함대에 편성된 사람들도 있었을테니, 잠재적인 인력 풀은 훨씬 넓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드레파나 전투같이, 혹시 군단병이 노도 젓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나오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증거가 뚜렷하다고 인정되는 설도 아니고, 일반적인 사례도 아닙니다.
반면에, 에크노모스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에 상륙한 레굴루스 휘하의 원정군은 15,500명 정도 뿐이었습니다. 이때 함대는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330척이지만 Tarn, Walbank는 200 수십척 수준으로 낮추어 보는데, 200척으로 보더라도 노잡이와 수병을 합치면 총원이 84,000명이나 됩니다. 하지만 그런 대군은 나타나지 않았지요. 이는 당시 함대 인원의 대부분은 실제로도 전투 병력이 아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5단선의 경우 노잡이=전투병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기록상 선원은 총 300명 가량에 수병은 40명 정도에서 많이 태우면 100명을 넘는 정도로 보입니다.)
고대부터 노젓기는 중노동이었기 때문에 노예나 죄수 하층민들이 했죠. 로마는 군대가 그리스와 같은 시민군이었기 때문에 주력은 시민이었고 재산이 적은 사람은 경보병이었고 무산자는 군대자체가 면제였습니다. 그래서 선거권도 없었죠. 그럼 노꾼을 수급하기 위해서는 유력자들이 자기 노예를 동원 하거나 돈으로 무산자를 끌어모아야 합니다.
당시 해전이 일어난 시기는 한니발이 쳐들어오기 이전이라 로마는 비상상황이 아니었고 로마가 한니발전쟁시기 동원한 10만명 정도에 비추어 보면 로마가 상비병을 유지하지 얺는다는걸 감안하면 8만은 엄청난숫자 입니다.
그중 최소한 3만이 노꾼이면 당시 노젓기의 노동강도를 생각해보면 사람을 모으는게 쉽지 않았을 겁니다. 강제로 동원할수는 없으니까요. 동맹시의 경우 군대를 제공받는 동맹이기 때문에 동맹시의 해군이 제공되었다면 굳이 로마군이 함대를 만들 이유는 없었을거고요. 당시 로마는 단일공동체가 아니라 도시연합이었고 포에니 전쟁이끝난후 동맹시 전쟁이 일어납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어느정도 상비된 해군전력을가지고 있던 카르타고를 로마가 신설한 함대로 이긴건데 여기서 이유를 찾자면 카르타고가 특별이 약하다고 전제하긴 어렵죠. 실제상황을 알수는 없지만 가정일뿐이니까요. 다만 로마 역시 해전의 사례가 없고 당시 끊임없는 확장시절이고 주로 육상전을 했고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것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해양세력이었던 이탈리아 남부는 복속시킨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또 다른 해양세력인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와 세력싸움이 벌어진 거고요. 그것도 주로 육상전이었죠.
제가 보기엔 당시 로마는 해군력을 갖출시간도 의지도 없었을 겁니다.
로마가 또다른 해전을 한건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을 하면서 북해에서 한번 어떤부족과 해전을 한걸로 압니다. 겔리선과 범선의 대결이었는데 북해에서 거의 카이사르의 사병이었던 군단병이 해전에서 그것도 겔리선을 가지고 북해에서 이겼다는건 흥미롭죠.
그리고 그 해전에서는 카이사르가 참전하지도 않었고요.
폼페이우스의 해적토벌이나 악티움 해전은 비교하기가 곤란하고 어찌보면 겔리선의 싸움에서 해군의 경험이나 숙련도는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일어난 살라미스 해전의 결과는 정반대 입니다.
아닙니다. 무산자도 군대 복무 의무가 있고, 그 의무가 바로 함대 복무입니다.(Polyb.6.19.2) 폴리비오스의 기록은 기원전 2세기 대상이라서 논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폴리비오스가 참고한 자료에는 필시 훨씬 이전에 쓰여진 파비우스 픽토르의 책이 포함되어 있으며, 2차 포에니 전쟁 중에는 함대에 인원이 모자라자 노예를 차출하도록 명령이 떨어져서(Liv.24.11, 26.35) 국가의 강제력으로 사람을 모아들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무산자에게 선거권이 없다는 말씀도 잘못되었습니다. 켄투리아회의 차등 투표제에서 적은 표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투표권은 있었습니다. 트리부스회에서는 35표중 4표가 도시에 할당되어 있어, 역시 비중은 적지만 투표권이 있었습니다. 켄투리아회에서 과반 결과가 나오면 해산이 되는 관례 때문에 무산자의 투표 기회가 잘 없었다고 설명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투표권이 아예 없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요.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내 동맹국은 대체로 속국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불평등한 조약으로 의무 사항을 규정받고 있어, 병력 제공을 안 하고 싶다고 안 할 수 있는 계제가 아니었습니다.
1차 포에니 전쟁시, 로마군이 메시나 해협을 건너갈 때 타렌툼과 로크리로부터 3단선과 '50노선'을 제공받았던 사실이 폴리비오스의 글이 보존되어 있으며(Polyb.1.20.14) 조나라스는 많은 수의 삼니움인이 함대 복무를 위해 동원되어 있었다는 정보를 줍니다.(Zonar.8.11) 당시 동맹국에서 제공한 배가 총 몇척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카르타고와 싸우기 위해 최신함을 더 만들어야 했다면(5단선), 당연히 더 만들었겠지요. 동맹국의 배나 사람이 오고 안 오고는 함대 건설 유무와 관련이 없습니다.
Appian:Sam.7의 타렌툼과의 분쟁 기사는 기원전 3세기 초에도 이미 로마에 함대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Liv.9.30에는 삼니움 전쟁기에, 함대 담당으로 두명이 임명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9.38에는 함대가 해안 공격용으로 사용되는 사례가 보입니다. 이런 말들이 전부 거짓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딱히 그렇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없음은 물론입니다. 특히 Appian:Sam.7의 기사를 부정해 버리면 그후 타렌툼과 전쟁에 돌입한 원인을 설명하기가 아주 어려워지지요. 이탈리아 정복 전쟁이 육상전 위주이기는 했겠지만, 그렇다고 바다가 무시되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넌센스로 보입니다. 이탈리아에는 수많은 항구도시가 있습니다.
카이사르의 베네티족과의 해전이야말로 여기서는 거론할만한 것이 아닐텐데요. 지중해에서 일어나지도 않은데다, 서로 체제도 너무 다르고, 기원전 1세기 중반의 일이 아닙니까. 단순히 많이 안 알려져 있다 뿐이지, 비교해 볼만한 해전은 기원전 3, 2세기에도 잔뜩 있습니다. 갤리 해전에서 숙련도가 중요한게 아니었다면, 드레파나 전투와 아이가타이 전투에 대한 폴리비오스의 기록에서 선원들의 훈련도 이야기는 왜 나올까요?(Polyb.1.51.4, 61.3-4) 물론 전술이나 무기에 따라 극복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외람됩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주장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로마에는 함대가 없었다."라는, 기존에 가지고 계시던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것저것 단편적인 다른 정보를 가져오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단편적인 정보들이, 지금까지 보기에는 맞는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됩니다. '로마인들은 육로를 선호했다', '로마인들은 함대를 소모품 취급했다', '노잡이를 많이 모을 수 없었다.'- 모두 증거 없는 이야기거나, 사실이 아니지요.
그 외에도 무산자는 투표권이 없었다거나, 충각 전법이 조심스러운 전법이었다거나, 로마 함대는 밀어 붙이는 전술을 썼다거나- 이렇게까지 상상만 계속 말씀하시면, 저는 대체 어쩌라는 것인지요. 제가 지금까지 진지하게 답변해 드렸음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별로 잘 아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이런 저런 사료나 논저에 근거를 두고 얘기하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시겠지요. 로마인 이야기에서 보신 이야기나, 부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신 것, 단순히 상상해 보신 것 등으로 저를 설득하려고 시도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하지도 않고, 저도 피곤합니다.
취미의 곁가지로 알고 있는 로마사로 뭘 설득해볼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재미있는주제고 무얼 근거로 그리 생각하느냐고 해서 이야기를 해본거죠.
재미있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신흥 도시국가라면 모를까 로마 중심의 도시국가연합체인 로마에게 해군이 없었다라는건 이해가 안되더군요.
하다못해 로마자체의 해군은 미약했을지라도 로마동맹국들의 해군력을 이용했을거라 봅니다.(실제로 로마는 이후에 동맹국들 해군을 이용해먹기도하죠. 고대 그리스에서도
스파르타가 다른 도시국가의 해군을 빌려써먹는거 보면 로마도 그랬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카르타고는 해운국이죠
상당히 재밌는 글이군요. 생각해보면 말씀하신 견해가 상당히 신경쓰이긴 하죠. 카르타고는 해상강국이고 로마는 육상강국이라는 견해가 많은데 정작 포애니 전쟁의 양상을 보면 웬지 카르타고가 해전에서 발리는 황당한 상황이 더 많다보니 뭔가 좀 갸우뚱 하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는데 이 글을 보니 확실히 기존의 카르타고=해상, 로마=육상이라는 견해에는 문제가 제기될만하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