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이효준의 부탁으로 원고를 넘겨받아 올리는 글입니다.
이순신은 후라이팬 손잡이 입구에서 학익진을 펴고 왜군을 안골포 밖으로 유인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 왜군은 한산해전에서 와키자카의 패전 과정을 알고 있어서 절대로 유인책에 말려들지 않았다. 전세가 불리해지면 육지로 달아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에게 교전을 명령했다.
판옥선 2대씩 교대로 후라이팬 손잡이를 드나들며 각종 총통들을 퍼부었다. 포탄을 장착하는 시간도 있기 때문에 치고 빠지는 수법이었다. 안골포 해안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던 전선과 왜군은 독 안에 든 쥐였다. 속수무책으로 포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적선 42척 중 절반 이상을 격침시켰다.
“우리가 여기 숨어 있는 걸 어떻게 알았쏘까? 혼또오니 귀신 잡는 이순신이무니다.”
판옥선에는 옆면에 6문의 포가 양쪽에 그리고 앞에 2-3문의 천자총통이 있다. 이 천자총통의 위력은 가공스러웠다. 천자총통의 사정거리는 약 1,500m였다. 적의 포 사정거리 밖에서 쏘았다. 포탄인 대장군전은 길이 2m, 무게 33.6kg의 긴 쇳덩어리다. 대장군전이 날아오면 배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가 파선되고, 장착된 화약이 폭발하여 배는 불붙고 사람들은 바다에 빠져 죽는다. 마치 통나무가 날아와 배에 꽂힌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선의 포 능력은 세계적이었다. 포는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이 있었다. 고려 말에 왜구의 격퇴 과정에서 최무선은 화통도감을 만들어 화약을 제조했다. 장영실이 있던 조선 세종 때는 과학의 시대였다. 화포제작 기술과 화포사용법이 기술된 ‘총통등록’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그때 천자, 지자총통이 만들어졌다.
왜란 초기에 부산진성, 동래성, 다대성에서 이 천자총통을 비롯한 총통들을 쏘며 저항했으면 그렇게 허망하게 함락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순신은 총통을 잘 활용했지만 당시 군에서는 대부분 총통을 다룰 줄을 몰랐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유사시의 전쟁 대비가 너무 해이했다. 이순신이 즐겨 쓰는 학익진도 이순신이 고안해낸 전법이 아니다. 일본 전국시대에 육상에서 여러 번 쓰였던 전법이다. 이순신은 화력을 앞세워 바다에서 훈련해서 활용한 것이다.
이순신은 적선 42척을 모두 불태울 수 있었다. 그러면 왜군들은 산으로 도주한다. 산에는 백성들이 피난 가 숨어 있었다. 왜군들은 눈이 뒤집혀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왜군들이 밤에 바다로 도주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구키와 가토는 남은 배와 병력을 동원하여 새벽에 죽기 아니면 살기로 포위망을 뚫고나왔다. 야간에 바다에서 전투를 하는 것은 피아간에 불리하다. 다소 충돌도 있었지만 퇴로를 틔워주었다. 왜군들은 부산포 쪽으로 빛의 속도로 도주하였다.
구키는 이 긴박한 도주의 와중에서도 무거운 쇳덩어리인 대장군전을 샘플로 챙겨갔다. 훗날 도요토미에게 보이며 이런 것이 날아오는데 당할 수가 없었다고 변명을 했다. 대장군전은 지금도 일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 수치스러운 물건을 국보처럼 보존하고 전시하는 일본인을, 이분법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들다. 이순신에게 탈탈 털리고도 진심으로 존경하는 와키자카처럼.
이 안골포해전은 이틀 전에 있었던 한산대첩과 함께 일본 수군의 주력부대를 궤멸시킨 빛나는 전과로서 의의를 가진다. 두 해전을 총칭해서 한산대첩이라고도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도요토미는 이후 조선 수군과 맞대결을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으으음, 이순신 빠가야로.” 왜군의 수륙병진책水陸竝進策이 좌절되었다. 이순신은 도요토미가 그린 전쟁 밑그림을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연이어 패한 왜군은 부산으로 움츠러들어 호남 진출을 포기하였다. 이로 인해 보급에 문제가 생긴 고니시 유키나가도 평양에 주저앉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순신은 뜻밖의 천재지변이었다. 평양까지 바다를 따라 왜군의 식량과 군수물자가 보급되었으면 무능한 선조는 돌아오지 않는 강(압록강)을 허겁지겁 건넜을 것이다. 지금 한반도 사람들은 모두 일본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은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했다는 말이 있다. 이순신 혼자서 조선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강직한 성품, 냉철한 지략, 허를 찌르는 전략, 강력한 리더십, 지형을 이용하고 물때에 맞춰서 공격하는 맞춤 전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새삼 숙연해진다. 장군은 웃음과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장군의 과묵함과 인품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 막연하게 이순신 장군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그렇다. 그러나 가까이서 장군의 행적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생각 이상이다. 완전체에 가까운 분이다. 이번에 안골포해전의 자료조사를 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장군은 왜란 7년 동안 23전 23승 했다. 순신불패다. 갓순신이다. 전쟁의 신이다. 전설도 아니고 게임도 아니고 팩트다. 장군은 우리나라보다 피해국인 일본에서 더 존경한다. 아이러니하다.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1848-1934) 제독은 1905년에 쓰시마해전에서 승리하고 노일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는 국가 영웅으로 추앙받고 그의 영령을 모신 신사도 있다.
“나보고 군신이라고? 당치도 않는 말이다.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의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백전백승했다. 나는 그의 군화 끈이나 매는 하사관에 불과하다.”
전 국민이 우러러보는 살아 있는 전설이 이렇게까지 자기를 낮추면서, 적국의 장군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그들의 심리는 해독하기 어려운 난해한 시와 같다. 그때는 우리나라 사람도 이순신이 누군지 모를 때였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부터 해군사관학교 교과 과정에 이순신 전술 과목이 있었다. 그들은 늘 이순신에 대한 연구와 학술대회를 해왔다. 우리는 거기에 자극을 받아 60년대부터 ‘성웅 이순신’ 영화를 만들고 영웅화, 신격화 작업을 했다. 역주행이다. 그것 또한 쿠테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의 집권 명분 때문이었다. 아산 현충사도 그 무렵 성지로 조성되었다.
안골만 해안도로를 걸어 올라갔다. 바다의 물결이 잔잔하다. 한가하고 여유롭다. 저 바다는 그날의 핫한 이벤트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통쾌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옛날의 해변에는 박살난 전선에서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고, 혼비백산 뛰어다니고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왜군들과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이 눈에 선하다.
이제 또 장군의 격전지인 웅포해전 현장으로 걸어간다. 기대감으로 발걸음이 가볍다. 마음도 설렌다. 도로변에는 벚꽃이 만개하여 눈 시리다. 꽃잎이 하얀 것도 모자라 그 위에 표백제를 갖다 부은 것 같다. 새하얀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 끝 )
계속해서 웅포해전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