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두리 해설로 본 해설가론 - 차 두리와 다른 해설가들- ----------차두리 해설이 인기를 끄는 까닭? 방송사마다 막강 해설진을 내세워 시청률 경쟁이 치열하다. 주로 지난 월드컵 선수출신들이라 경기장 밖에서 또 다른 경쟁이 되고 있는 셈이다. 해설로는 선배가 된 유 상철 선수가 전반전 해설을 처음으로 마치고 나온 김 태영 선수더러 이렇게 말하는 걸 보았다. “죽을 맛이지?” 한편 그들은 또 다른 스타를 꿈꾸고 있다. 시쳇말로 몸값이 뛰는 해설자도 생겨날 게 뻔하다. 이미 한 사람이 앞서 나가고 있다. 차두리 선수다. 비록 월드컵에 선수로 출전하지 못했지만 해설자로 출전(?)해서 그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네티즌 사이에 이른바 차두리 어록이 돌 정도다. 흥미로운 일은 아버지 차 범근과 나란히 앉아서 해설을 하면서도 그가 당당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정 혜신 정신과의사가 그들 부자의 이야기를 한 글이 생각난다. 내용인즉 아버지 그늘에서 당당히 독립을 선언하고 선 아들의 표상으로 차 두리를 보기로 삼는다. 정신과의사의 깊이 있는 심리학적 분석을 꼭 동원하지 않더라도 우린 보통 이런 생각쯤은 한다. 역사의 인물 중에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반열에 오른 역사를 발견하기 쉽지 않음을. 이상하리만치 씨가 말라버린 일도 있다지 않는가. 하지만 정 혜신 의사의 글에 조금 수긍은 하면서도 나는 이런 생각쯤 남아 있었다. ‘그래도 국가 대표도 되고 독일에도 진출한 건 다 아버지 덕이 없을라고.’ 요즘 차 두리 선수의 해설을 듣고 나는 그런 생각을 지웠다. 그럼 차 두리 선수가 정말 당당히 선 까닭이 뭘까? 나는 차두리 선수가 당당히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을 한 까닭이 요즘 회자 되는 것처럼 솔직 화법을 쓸 만한 솔직한 인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말하는 걸 보면 알만하다. 그 솔직함은 단순히 인기를 끌기 위한 솔직한 토크 정도가 아니다. 차두리 선수의 해설을 보면 그는 자기를 멀찌감치 두고 다시 객관화해서 자신을 말한다. 자기 자랑을 살짝 곁들이는 말과는 멀다. 다시 말해서 말을 꾸며서 하는 해설이 아니다. 거기서 진실함이 드러난다. --------이런 해설 어떻든가요? (해설가론) 얼마 전 어느 방송사에서 해설가로 데뷔하는 아무개 선수를 다룬 적이 있다. TV방송 해설 연습을 하느라 밤늦은 시간까지 모니터 앞에서 누군가의 지도를 받는 장면이 나왔다. 옆에 앉아서 지도를 해주는 이가 스피치전문지도사였다.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스피치를 배워서 익히면 방송 해설을 잘 할 수 있을까? 스피치 지도를 받아서 말 잘하는 기술을 배우자는 걸까? 해설가는 아나운서와는 다른 소양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나운서에 견주어 말 잘하는 해설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해설가라면 이미 아나운서에 얽매이기 마련이다. 아나운서는 시청자가 보고 있는 화면에 드러난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음향 효과를 넣듯이. 그래서 TV에서는 라디오와는 달리 아나운서가 지나치게 시시콜콜 말하다보면 시청자가 누리고자 하는 ‘보는 즐거움’을 반감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이치를 생각하면 시청자가 뻔히 보고 있는 걸 아나운서가 말하고 그걸 또 해설자가 뒤 따라가서는 좋은 해설이라 볼 수 없다. 재미없다. 그럼 해설자는 뭘 해야 하나? 시청자가 못 보는 것, 그러니까 화면에 담지 못하는 걸 그 때 그 때 적절하게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해줘야 한다. 가령 선수들의 개인 특성들. 이건 해설로서 가장 좋은 소재다. 그리고 화면에서 당장 읽을 수 없는 것. 이를 테면, 양 팀이 펼치는 감독의 전략이나 전술 같은 것. 이런 걸 전달하려는 해설이야말로 시청자가 반긴다. 또 그게 아나운서와는 다른 해설자다운 소양이라고 본다. 차두리 선수가 확실하게 잘 하는 게 있다. 선수 개인별 정보를 친근하게 들려주는 것. 그리고 선수로서 경험을 살린 말이 아주 돋보인다. 그걸 꾸미지도 않는다. 아울러 긴장한 나머지 자기 말을 못 하는 일이 없다. 물론 차 범근 감독도 나름의 인기를 누리는 해설을 한다. 그러나 차두리 선수는 아버지 차 범근의 복사판이 아니다. 무슨 말이건 있는 그대로 하는 말이야말로 진실이 드러난다. 해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요즈음 각 방송사의 해설자들을 보면 듣기 거북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다. 뭔가 말을 자꾸 학문적이듯이 꾸며서 하는 해설자도 있다. 그는 말이 길어지기 마련인데 그러다 보니까 보충해주는 해설을 넘어 아나운서까지 압도하고 시청자한테도 시끄럽다는 인상을 준다. 시청자도 생각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스포츠 미학적 탐색은 시청자 각자가 알아서 느끼고 즐기면 되는 것이지 그것까지 안내하려다 지나친 구담이 붙으면 해설은 이미 도를 넘는 것이 아닐까. 또 말을 굳이 어렵게 꽈는 해설자도 있다. 몇 가지만 보기를 들어 보겠다. “공격적으로 움직임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공격적인 타이밍으로 전개가 빨라지죠?” “경기를 거듭할수록 팀에 작용할 수가 있습니다.” “좋은 패스 연결이 나가주지 못했습니다.” “중원에서의 어떤 많은 움직임을 해주고 있어요.” 분명히 억지스러운 느낌을 주는 말버릇이 아닌지. 이건 아마도 논문 따위의 글에서 버릇이 든 탓이 아닐까 의심이 간다. 말하자면 문어체 문장을 구어체에 섞어 쓰다보니까 생긴 버릇이다. 이건 분명히 우리말을 편하게 하는 우리말 습성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 해설자와 방송이 아닌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결코 저렇게 말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유명 선수 출신 해설자이다. 너무 전문 해설자라는 데 얽매이지 말고 자기 몸에 밴 자기 말로 편하게 했으면 좋겠다. 경기장에서는 몸으로 말하듯이 해설도 자기 몸에 밴 말로 친구를 앞에 두고 편하게 들려주듯이 하면 듣기도 편하다. 다음과 같이. 공격적으로 많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공격이 점점 빨라지죠? 경기를 할수록 팀에 좋은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좋은 패스를 해주지 못했습니다. 중원에서 많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생생하게 움직이는 경기를 해설하는데 학문 용어 따위나 꾸며진 말, 꽈배기 말을 쓰는 것은 분명히 듣기 거북하다. 지금 눈앞에 벌어진 광경이나 팔팔 뛰는 선수의 변화 그리고 적어도 선수가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활약상을 직접 다가가서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는 해설이 지금 당장 시청자가 목말라 하는 것이니까. 선수 출신으로 처음 해설 무대에 데뷔하는 분들은 긴장하게 되고 해설이 잘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냥 생생한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의 말버릇을 살려 있는 그대로 하면 술술 말이 터질 게 틀림없다. 전문 용어를 늘어놓아야 실력이 있는 해설로 보고 기존의 누군가를 떠올리고 거기 맞추려고 하면 어려워진다. --------선수로서 약이 되는 차 두리 해설 차 두리 선수는 새로운 해설을 보일만한 능력이 엿보인다. 차두리 선수는 바로 경기장을 누비듯 말한다. 그는 경기장에서 뛰지는 않지만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 못지않게 지금 독일월드컵 스타가 아닐까.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여 자기 몸값을 올릴 선수들이 있다고 하면, 바꾸어 말해서 차두리 선수는 운동장 바깥에서 자기 몸값을 올리는 셈이다. 그 까닭은 경기장 바깥에서 게임을 읽는 눈을 길러 정말 좋은 선수로서 다시 돌아오게 되겠기 때문이다. 그가 앞으로 해설가로서 성공해서 그 몸값을 올리는 일이야 먼 훗날에 기대해볼 일일 테고 선수로서 다시 서는 날엔 경기장 안에서 뛰던 때의 눈높이가 아니라 경기장을 위에서 바라보는 눈으로 경기를 읽는 해설자의 기회가 분명히 약이 되지 않겠는가. |
출처: 통하는 생각 통하는 삶 원문보기 글쓴이: 통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