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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리지 않은 집단이 피를 흘린 집단을 억압한다!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리지 않은 집단이 피를 흘린 집단을 억압한다!
기자 검사, 판사, 운동권들이 양반처럼 군림한다.
가장 적게 희생한 기자들이 가장 많은 희생을 한 군인과 기업인을 몰아세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다가 전사한 군인은 17만600여 명이다.
여기에 북한정권이 불법억류하여 노예노동으로 말려서 죽인 6만의 국군포로들을 포함하면 약23만600명이
피로써 나라를 지켰다.
8사단 전사자가 가장 많은데 1만8000명을 넘는다.
8, 7, 6, 3, 수도, 5, 1사단의 전사자가 각 1만 이상이다.
1950년 10, 11월 중공군의 기습을 받은 사단에서 전사자가 특히 많다.
한국 기자는 한 명도 없다. 위험지역이나 목숨을 건 취재를 기피한 결과일 것이다.
나라를 위하여 희생을 많이 한 사람들일수록 국가 운영에 발언권이 강해야 정의롭다 할 것이다.
한국은 정반대이다.
피로써 나라를 지켜낸 군인과 땀으로 나라를 부자로 만든 기업인 위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적이 없는
기자, 검사, 판사, 운동권들이 양반처럼 군림한다.
가장 적게 희생한 기자들이 가장 많은 희생을 한 군인과 기업인을 몰아세운다.
그것도 상습적인 거짓선동으로. 선동하는 사람, 선동당하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은 선동과 싸우지 않으려는
공직자이다.
*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용산 전쟁기념관은 규모나 전시품의 질에 있어서 세계적이다.
6월25일의 남침전쟁과 월남전쟁을 치렀던 나라이고 상무정신이 되살아난 나라이니까 이 거대한 공간을 꽉 채울 수 있는 전시품이 생긴 것이다.
이 전쟁기념관 건설의 책임자였던 고 이병형 장군의 노심초사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6‧25 전쟁 때 한국의 일선 지휘관중 가장 잘 싸운 분들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이 장군(육사4기)은 전쟁과 전투의 본질에 대해서 철학 있는 말씀을 많이 남겼다.
그가 쓴 '대대장'이란 책은 문학적인 장면을 많이 담고 있다.
서울의 명물이 된 이 기념관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이병형이란 이름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전쟁 기념관의 핵심은 회랑에 새겨진 전사자의 이름들일 것이다.
이런 통계표가 붙어 있었다.
* 한국군 전사자
6.25 전 창군기: 8,824 명
6.25 전쟁기 : 152,279 명
월남전 : 4,770 명
휴전 이후 : 4,712 명
합 계 : 170,585 명
이는 천안함 전사자 46명과 연평도 포격 사건 전사자 2명을 반영하지 않은 수치이다.
통계는 한국이 아직 북한 정권과 전쟁중이란 현실을 잘 보여준다.
1953년 7월27일 휴전 이후 국군 4712명이 침투하는 북한군과 전투를 하다 죽었다.
이라크전에서 죽은 미군 숫자와 비슷하다.
한국은 휴전기에 다른 나라의 전쟁기보다 더 많이 싸운 셈이다.
월남전 참전 한국군 전사자와 비슷하다.
한국이 아직 전쟁중이란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17만의 전사자에 추가해야 할 인원은 북한이 불법적으로 억류, 노예 세습 노동을 시키면서 말려죽인
국군포로 6만 명이다.
이를 더하면 23만 명의 군인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낸 나라이다.
국제법적으로도 한국은 휴전중일 뿐이다.
축구에 비교하면 우리는 하프타임에 와 있다.
전반전에서는 남북한이 1-1로 비겼지만 후반전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가운데서 불안한 유혈 속 평화를
즐기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는 6‧25남침 전쟁은 언제 종료되는가. 이 표가 말해주고 있다.
북한 정권이 무너질 때 전쟁은 한국과 자유진영의 최종승리로 끝난다.
6‧25는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45년8월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소련의 꼭두각시인 김일성 정권이 등장하여 대남적화공작을 시작하면서
사실상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6‧25 전에 국군이 북한군 및 남한내 좌익반역세력과 싸우면서 8824명의 전사자를 낸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6‧25전쟁, 그 무대인 한반도에서 냉전이 이미 끝났으니 대북경계태세를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한때 집권세력이 되었다.
천안함 전사자 46명의 원혼들은, 햇볕정책으로 국민들의 대북경계심을 해체한 위선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전쟁중인 조국의 상황을 평화시기라고 속이려드는 자들은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으니 조심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을 냉전세력, 반통일세력, 반민족세력이라고 매도한다.
이들은 영하30도의 혹한이 계속되고 있는 한겨울인데도 '봄이 왔다.
우리도 속옷 벗고 바깥으로 나가자'고 어리석은 자들을 선동하여 집단동사로 몰고가려고 한다.
한국의 현실을 직시하자는 이들을 수구라고 매도하는 자들은 북극에서 웃통을 벗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일종의
정신질환자들이다.
* 세계 기자들 1072명이 취재중 피살될 동안 한 명도 안 죽은 한국 기자
언론인보호위원회(Committee to Protect Journalists)의 통계에 따르면 1992년 이후 2014년 8월까지 취재중 피살된 기자는 세계 전체에서 1072명이다.
피살된 지역 통계에 따르면 이라크가 166명으로 가장 많다.
이어서 필리핀 76명, 시리아 67명, 알제리아 60명, 러시아 56명, 파키스탄 54명, 소말리아 53명, 콜롬비아 45명, 인도 32명, 멕시코 30명, 브라질 29명, 아프가니스탄 26명, 터키 21명, 스리랑카 19명, 보스니아 19명, 타지크스탄 17명, 르완다 17명,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16명, 시에라 레온 16명, 방글라데시 14명이다.
피살될 때의 취재 대상은 정치가 45%, 전쟁이 38%, 부패가 22%, 인권문제가 19% 순이었다.
한국에선 한 명의 기자도 피살되지 않았다.
한국인 기자도 전무. 일본인 기자는 6명이 죽었다.
이번에 고토 기사가 IS에 참수당함으로써 7명이 되었다.
1072명 중 한국인 기자가 한 사람도 없는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위험 지역이나 위험한 취재를 피한 것, 또는 총알을 피해다니는 비상한 재주가 있거나. 從軍(종군)취재중 죽은
한국 기자는 최병우(한국일보) 한 분뿐이다.
한국에선 기자가 戰場(전장)에 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랑이 된다.
군인이 전장에 갔다고 유명해지는 셈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소장 최북진) 자료실은 “육군 제8보병사단(오뚜기 부대)이 6·25전쟁 기간 중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부대”라고 밝혔다.
6·25전쟁 당시 전투를 수행한 사단은 1, 2, 3, 5, 6, 7, 8, 9, 11, 12, 수도사단이다.
8사단 정훈공보참모 임문택(학군34기) 소령은 그 이유를
▲중공군 2차 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와
▲ 6·25전쟁 최다 전투 참가 기록(약 158회)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특히 ‘최다 전투 참가 기록’은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임 소령은 “중공군 2차 공세 때 미군은 정세판단을 잘못했다.
‘중공군이 5~6만 명밖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그 정보만 믿고 진격했던 국군과 미군은 중공군의 유인 섬멸전에 당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미군은 중공군의 개입 목적을 ‘수풍발전소를 방어하기 위한 소규모 공세’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방일보 2010년 11월24일자 《다시 쓰는 6·25전쟁》의 ‘중공군 2차 공세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50년 11월6일 중공군이 갑가지 사라진 이후 24일까지 18일 동안 청천강 일대의 전선에는 정적이 흘렀다.
美 극동군사령부(사령관 맥아더) 정보참모부(G-2) 월로비 소장은 중공군이 갑자기 물러난 것은 싸울 만한 의지도 전력도 없기 때문이라고 오판했다.
미군의 공군력과 강력한 화력을 경험한 중공군은 다시는 공세를 재개할 수 없을 것이며, 한번만 더 미군과 국군이 공세를 감행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 도쿄에 위치한 맥아더 극동군사령부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11월25일 중공군 38군은 전선에 대치하고 있는 국군의 3~4배나 되는 병력을 투입해 국군 2군단 예하 육군 7사단을 포위했다.
중공군 38군 소속 113사단이 깊숙이 침투해 후방을 차단하고 나머지 중공군은 양 날개를 펼쳤다.
이런 거센 공격과 병력 열세 속에 7사단이 포위망에 빠지자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비슷한 시간 국군 7사단 오른쪽 영원 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국군 2군단 예하 8사단도 역시 3배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중공군 42군의 포위망에 빠졌다.
국방일보는 “11월24일부터 시작한 중공군 2차 공세는 중공군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진 완벽하게 실패한 작전”이라고 적고 있다.
중앙일보 2010년 1월15일자 백선엽 장군 회고록 《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중공군은 전력이 약한 상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다.
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피해 전쟁 내내 국군을 집중 공격했다.
국군이 여러 면에서 미군에 뒤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노림수는 동쪽 전선에 있던 국군 2군단이었다.
2군단 예하부대인 국군 6사단과 7사단, 8사단도 인원과 장비 무기 등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하면서 전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중공군은 이 점을 노렸다.
동쪽의 방어벽이 쉽게 무너지면서 그 서쪽에 있던 미군의 형세가 매우 위험해졌다.
잘못된 판단이 거듭 이어졌던 모양이다.
그들(미군)은 적유령을 넘어온 중공군에 대해 방심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인 軍隅里(군우리)에 진출하면서 미군은 그 지형적 조건이 초래할 엄청난 비극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국군 6, 7, 8사단과 9군단 예하 美 2사단은 평양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軍隅里(군우리)까지 철수했다.
이곳에서 다시 중공군과 만난 한미 양국군은 3일 동안 激戰(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3000여명의 사상자를 내 대패했다.
이것이 ‘서부전선 최악의 전투’, ‘인디언의 笞刑(태형)’이라 불리는 ‘군우리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는 특히 터키 여단의 활약상이 컸다.
그들의 방어로 퇴각로가 조기 차단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 패배 후 美 2사단은 평양 이남으로 퇴각했으며 국군은 38선 부근까지 후퇴하게 된다.
1951년 발행된 美 10군단 지휘보고서는 중공군 2차 공세 이후, 육군 8사단은 장교 323명, 병사 7142명의 병력손실이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3사단과 5사단(약 3000명)의 피해(백선엽 회고록 《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 중에서)를 훨씬 웃도는 수치이다.
임문택 소령은 “중공군 2차 공세 후 우리 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청천강에서 38선 부근까지 퇴각해야 했다”고 말했다.
“1950년 10월23일부터 26일까지 육군 6사단이 UN군과 국군 중 최초로 韓滿(한만)국경 압록강 초산(‘楚山 진격전’)까지 치고 올라갈 때 8사단의 10연대도 바로 밑 희천(평안북도 희천군)이라는 지역까지도 확보했었습니다.
그때 중공군과 북괴군은 UN군을 타깃으로 삼지 않고 상대적으로 약했던 한국군만을 집중 공격 했습니다.
중공군의 주 공격대상 부대가 육군 1, 5, 6, 8사단이었고 그 중 8사단은 후방지역 방어를 담당했기 때문에 많은 희생이 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8사단은 6·25전쟁 기간 중 영천전투(1950년)를 비롯,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해 승전했다.
총 158회 전투에 참가, 154회 참가한 육군 6사단 보다 많다.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 영천지구 전투(1950.9.4~9.13) - 영천 봉화산, 태약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북한군 15사단을 완전
궤멸시킨 전투. 8사단의 戰功(전공)을 대표하는 전투이다.
* 홍천ㆍ횡성 부근 전투(1951.2.5~2.12) - 원주ㆍ홍성ㆍ횡성선에서 적 7사단, 12사단 병력 섬멸.
* 노전평지구 전투(1951.2.12~10.28) - 강원도 인제군 노전평 부근에서 적 2ㆍ13ㆍ15ㆍ45사단 격멸.
적 4990명 사살, 포로 1094명.
* 백석산지구 전투(1951.9.30~10.1) - 사단장 최영희 준장이 요충지인 백석산을 점령하기 위해 적의 기선을
제압한 전투. 적 101명 사살, 포로 24명.
* 인제지구 방어전투(1952.3.23~10.20) - 인제에서 벌어진 주 방어 임무수행 전투. 적 319명 사살, 포로 1명.
[출처]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리지 않은 집단이 피를 흘린 집단을 억압한다! |작성자 일산간지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