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6:5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개역개정판)
이사야 36:22 그 때에 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자기의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그에게 전하니라 (개역개정판)
구약 성경에서 가장 인상적이고도, 임팩트 있는 양반이 바로 이 랍사게가 아닐까 생각한다.
랍사게는
사람의 이름이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고 한다.
아카드어를 사용했던 것 같은데
랍-샤쿠(Rab-shaqu, Rabshakeh)
그러니까 느헤미야와 같은 술 맡은 관원(Chief Cupbearer)이라고 한다.
고대 근동에서 최측근 실력자이자 절대 신임을 받는 사람이며
군사, 정치, 심지어 외교까지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성경에서조차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고
우리도 잘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라기스와 46개 성읍이 앗수르에 의해 함락되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은 건지셨지만
라기스와 46개 성읍의 함락을 허락하셨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필 상대는 악하고 잔인했던 앗수르
앗수르가 잔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유튜브와 인터넷에 잘 나와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중세의 몽골처럼, 현대의 나치와 일제처럼
이들의 잔임함은 선을 넘었다.
일단 산채로 사람의 껍질을 벗기는 건 물론이고
그걸 성벽에 도배하였으며
사람을 꼬챙이로 뚫어버린다음 땅에 꽂아 서서히 죽이는데,
중세 유럽에서 이런 형벌을 배워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했다.
그림과 조각으로 그 잔인한 장면을 기록으로 남겼기에
후세 역사학자들은 고마워했을지 몰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인생이란 이처럼 본인에게도, 타인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잔인한 법인가...
두려움...
심리전이다.
앗수르의 군사적, 행정적 능력은
그들이 놓인 지리적 여건보다 크지 않았던 것임에 틀림없다.
점령만 하면 압박
압박으로 인한 반란
반란을 진압하고 재점령
더 세게 압박...
그 압박으로 인한 재반란
재반란을 진압하고 재재점령...
그 사이에 또다른 신흥 강국의 등장...
이런 악순환은
사사기의 악순환을 연상하게 한다.
고대 근동이라는 지역은
근대의 발칸반도 비슷하게
전쟁과 충돌이 거의 필연적으로 일어났다.
다스릴 능력이 없으니
(어쩌면 지킬 능력도 없으니)
일단 무리해서 점령한 다음
딴 생각 못하도록 시범케이스로 잔인하게...
지리적 여건상, 행정적 역량성 계속 점령도 못하고
거 참...
이미 가지고 있는 역량으로
지키기만 해도
저 욕심많은 상대방이 또 공격한다.
그러면
그냥 방어만 잘했던 나라는 별로 없다.
신체에 사이토카인 폭풍이 발생하듯이
욕심 많은 자신에게 무슨 발열반응이 일어난 것인지
몽골처럼 상대방을 절멸시키는 듯한 미치광이 반응도 이어진다.
거의 언제나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것은 민중들이다.
정복자들의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내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르고
내 나라를 빼앗길지도 모르니까...
(내 백성들을 걱정하긴 했을까?)
온화한 사람이 아니었던 그 랍사게는
잔인한 조국 앗수르가 예루살렘조차 쉽게 정복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벌이는 저 저열한 심리전
히브리어도 잘했으니
히브리 출신일지도 모르겠다. (유다인들이 머리가 좋아서 그랬는지, 관원이 된 경우도 많았지...)
1. 외교언어, 내지는 공영어였던 아람어 대신 히브리어 구사
내 주께서 이 일을 네 주와 네게만 말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기의 소변을 마실 성 위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냐 (사 36:12)
잘난 척이 아니다.
백성들을 요동시키는 랍사게의 언어는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던
어쩌면 지네 주군보다 더 똑똑했을지도 모를
유능한 이의 심리전이다.
실제적 위협은 번역투의 문장으로 오지 않는다.
아주 직설적이고
아주 분명하게 명징하면서도 서늘하게 다가온다.
그것보다 무서운 공포는 없다.
본인이 별 능력이 없어도
개개인은 하찮은 존재에 불과해도
언어가 주는 힘이 있는 것이다.
2. 이집트와 유다 동시 비하
동맹과 군사력에 대한 신뢰 무력화는
오히려 본인들이 애굽을 부담스러워 했다는 것에 반증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애굽이 제대로 유다를 도와준 적이 없었지만
손찔릴 행동 하지말라며 원천 차단하는 모습은
사탄 마귀가 우리의 일상에서 주는 작은 공격들을 연상케 한다.
"야, 내가 말 이천필 줄게
니들이 그걸 운영할 기마병이 있냐?"
낄낄낄 거렸을지도 모르겠다.
<맞말이지만
그걸 운영할 니네도 우리를 점령할 수 없다!
묵묵히 듣고 있던 신실한 백성은
그렇게 대꾸했을지도 모른다.>
3. 신앙의 회의 유도
니네가 했다는 그 개혁이 하나님이 뜻에 맞았냐?
인터넷도 없던 시기에 유다 내부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면
스파이도 있었을 것 같다.
어찌되었던 하나님의 뜻을 사칭했던 랍사게는
하나님께서 이 멸망을 허락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사 36:10)
니들이 개혁한다고 했던 그 개혁은
원래 안했어야 한다는 것...
이걸 간파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우리 개혁의 방향이 맞았냐는 자기확인과 점검도 사실 필요하긴 하다.
그렇지만 저 랍사게의 말은
그냥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마음을 뒤집어 놓기 위한 심리전에 불과하다.
반역이라도 일어나면 땡큐였겠지.
4. 물질적 유혹과 타협안 제시
행복한 포로 생활이라는 것도 있나?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고 지금 항복하라며
이간질까지 시키는 이러한 말...
원래 앗수르가 주민 이주를 잘시켰다.
얼마나 겁이 났으면...
앗수르가 유다에서 포로로 잡아간 사람들이 20만명이라고
앗수르 본인들 주장으르는 일단 그런데
"각각 자기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자기의 우물물을 마실 것"이라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잔인한 앗수르의 실력으로는
포로들에게 그 정도의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끌려가면서 물 한 병이나 제대로 줬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우리 앗수르를 이길 수 없다는 공허한 외침...
사탄 마귀가
아무리 사는 것이 어렵다고 역설해도
사탄 마귀는 이기지 못한다.
랍사게에게
"말이 많노?" 라고 했다면
챗GPT처럼 이렇게 요약해 줬을지도 모른다.
‘니네는 약하다. 애굽도 니네를 구하지 못한다. 히스기야는 잘못된 지도자다. 그러니까 항복해라 잘해줄게.“
2차 대전 때 망해가던 나치가 포위 한 번에 호들갑 떨며 영미연합군에게 항복을 권유했듯이
중공군이 장진호 전투에서 UN군에게 “니네는 죽는다.”며 심리전을 했듯이
사면초가의 상황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심리전의 기본은
본인들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 이전에
상대방의 무기력을 절감하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하와에게 접근한 저 악한 옛뱀이 했던 질문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먹지 말라고 하셨냐?
"하나님 믿는다고 현실이 달라지냐? 정말 달라지냐?"
전쟁수행력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마음만 지킨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인식과 자기최면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믿음은 현실부정이 아니다.
현실에 대한 해석 문제다.
앗수르가 강하다 (O) / 앗수르가 강하지 않다. (X) cf> 앗수르가 강해도 난 괜찮아 (XX)
하나님은 안도와주신다 (X) /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O) cf> 하나님이 안계신다. (XXX)
언제나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시다.
비현실적인 낙관도
비관적인 비관(?)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영혼 구원에도 무익할 뿐이다.
오늘도 랍사게는 아주 시니컬하게 묻는다.
“니네 하나님이 니네를 구원할 능력이나 의지가 있나? 정말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겠나? 니 진짜 그렇게 믿나?”
의문형 종결어미를 –노? 라고 바꿔쓸지도 모르겠지만
대답할 필요는 없다.
일단 침묵하는 것이 지혜롭다.
사신의 목을 베어버리거나 구덩이에 쳐넣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그런 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도 교훈한다.
옷을 찢되
마음도 찢고
그런 질문을 가져다 주는 저 사탄마귀와
이 더러운 세상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가지고 가야 한다.
니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어도, 자기 자녀들이 선악과를 따먹어도 그저 바라만 보더라는 비아냥을
가지고 가야 한다.
18년전 어머니가 편찮으셨을 때
부임하자마자 찾아주셨던 황인철 목사님,
그리고
그 전 3년이 그랬듯이
지금도 담임목사님 자리는 공석이고
염원식 원로목사님도
그리고 그때 그 시절들을 감당해주셨던 분들도
이제는 계시지 않는다.
다시금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라기스와 46개 성읍이 함락될 때도
더 큰 비극과 위기가 우리를 삼키려 할 때도
우리의 반응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해주시는 경우는 솔직히 별로 없지만
함께 하시지 않는 경우는 없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고 하셨다. (잠 6:5)
어떤 노루는 사냥꾼의 손에 잡히고
어떤 새들은 그물에 걸리기도 하지만
우리는
우리는...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난 노루들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고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게 되길
울며, 옷을 찢으며
간절히,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