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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보이심(2)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김양인 목사
오늘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도마의 이야기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믿고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요한복음 10장의 증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던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 즈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계셨는데, 나사로의 소식을 들으시고도 그곳에서 이틀을 더 지내신 후에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한 사건은 얼마 전에 수전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있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대화 하시던 중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시자,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사람인 주제에 자칭 하나님이라 한다면서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손을 벗어나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위험한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시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한 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라면 죽음도 사양치 않겠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도마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도마가 믿음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문들을 걸어 잠그고 숨죽여 지내던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을 때 그들은 뛸 듯이 기뻐하였고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도마가 돌아왔을 때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그에게 예수님은 구세주가 아니라 단지 위대한 랍비에 불과할 것입니다. 과거에는 구세주로 알고 믿었더라도 지금은 아닐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하나님과 천국에 관하여 받은 가르침이라든가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 받은 감화, 경험한 이적들만 가지고도 예수님의 제자로 지낸 충분한 보람이 있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한 그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는 않지만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박애정신을 높이 추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믿지는 않습니다. 단지 존경하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세상에는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석가나 공자를 비롯해서 온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인물들 뿐 아니라, 크든 작든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자녀들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들도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것과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다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인이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은 교회 안에도 예수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그들의 종교적인 욕구를 위해 필요할 뿐입니다. 기독교가 마음의 평안을 주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니까 좋은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기독교인이 되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엄격히 말하면, 그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 분이 하나님의 독생자시며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감사할 일이지만, 만약에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구세주로 인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4절 이하에 부활과 관련해서 이같이 말씀합니다.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기독교가 주님의 부활을 강조하는 것은 부활이야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에 이르기를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가 죽음을 철폐하실 능력자이심을 입증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위인이 출현했지만 하나같이 죽음에게 삼키고 말았습니다. 종교의 창시자들도, 세계를 정복한 영웅들도, 탁월한 이론을 만든 과학자들도, 세계적 기업을 일으킨 기업가들도, 병을 치료하는 의사들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신 증거는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선언합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죄인이 구원 받는 도리는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고 지극히 간단하고 쉽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게 되어 죄 사함과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이제 다시 도마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도마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동료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이 너무 예수님을 사모한 나머지 동료들이 헛것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는 직접 주님의 못 자국 난 손을 보고 또 자기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고 그의 손을 주님의 옆구리에 넣어 창 자국을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도마가 이처럼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하신 말씀을 주의 깊이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 9:22)고 하셨습니다. 또한 마지막 만찬석상에서도 말씀하시기를 “31)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 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도마가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을 새겨들었다면 의심의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신비체험이나 깨달음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믿음의 토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하셨고,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세워야 합니다. 개신교 예배 시에 말씀 선포를 중요시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진위가 갈립니다. 주님의 말씀을 불변의 진리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만, 그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마의 잘못은 그가 주님의 말씀을 의심한 데 있습니다. 그래서는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고백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해 나가려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감촉으로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감각적인 차원을 초월합니다. 육안으로 볼 수 없어도 믿음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창조를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과학으로 입증할 수 없다고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부인하는 것은 과학을 완전한 기준으로 여기는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의 생활은 매 순간이 믿음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곳에서 안심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이 건물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암묵의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어디를 갈 때에도, 무슨 음식을 먹을 때에도, 다 믿음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매사에 의심한다면 우리는 집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활은 믿음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이 증언하는 바를 믿을 때 신령한 세계가 열립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사람은 천지만물의 창조를 의심 없이 믿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먼 거리에 있는 천체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천체만원경과 같고, 너무 작아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생물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현미경과도 같습니다. 믿음은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의심하는 도마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도마를 위해서, 처음 제자들을 찾아오셨던 날로부터 여드레를 지나서 다시금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는 도마를 포함해서 열 한 제자가 다 함께 있었습니다. 문이 다 잠겨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도마에게 이르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도마 한 사람을 위해 이처럼 친절한 배려를 하시다니, 얼마나 자비하신 주님이십니까!
요한복음은 도마가 실제로 주님의 손에 난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옆구리의 상처를 확인했는지 여부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대면한 마당에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할 것이 있겠습니까? 도마가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자기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 그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것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신 말씀은 공생애 내내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제자 도마에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다면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선뜻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삼년이 넘게 주님과 동거 동락하면서 직접 주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 주님의 고귀한 인품을 대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라면 죽는 데도 사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 되셨을 때 그의 믿음은 위기를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다고 했지만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의심한 도마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몸소 그를 찾아오셔서 그의 의심을 해소시켜 주셨습니다.
도마처럼 우리도 때때로 믿음이 약해져서 주님의 말씀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본디 믿음은 우리의 상식과 경험을 초월하는 것인데도 우리는 상식과 경험의 잣대로 주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우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으면 그만이지 어떻게 부활할 수 있단 말이냐? 그것은 상식에 맞지 않아, 우리의 경험에 어긋나’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걸음을 내디뎌야 하는데도 그만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믿음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저녁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는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한편,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너가던 제자들은 그만 풍랑을 만나 호수 한복판에서 무진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밤새도록 물결과 사투를 벌이다보니 어느덧 새벽 4시가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산위에서 이 광경을 보시고 제자들을 돕기 위해 물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 소리 질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즉시 말씀하시기를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예수님께로 걸어갑니다. 얼마나 놀라운 광경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위대함을 대합니다. 그런데 불현 듯 베드로의 마음속에 의심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물위를 걷다니, 어찌 이것이 가능하단 말이냐?’
“오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물위를 걸어가는 것을 망각하고, 마음속에 의심이 들어오자 불어오는 바람을 보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가 물속으로 빠져 갔습니다. 소리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기를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시니 바람이 그쳤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을 때에는 물 위를 걸었으나 그가 의심했을 때에는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의심하였을 때 그는 믿음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믿음으로 행하다가도 또 어느 순간 의심에 사로잡혀 낭패를 볼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연약한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님의 이름을 불러 “주여, 나의 믿음을 도와주소서.”라고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기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항상 “예”만 있었지 “아니요”가 없었습니다. 그의 나이가 백세가 되어 죽은 자와 방불하였고 구십 세난 사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의심 없이 믿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백세에 독자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친 것입니다. 이삭이 청년이 되었을 때,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려운 시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싣고 불과 칼을 준비해서 그 아들 이삭과 두 사환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삼일 길을 걸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두 사환을 머물게 하고 이삭과 단 둘이서 산을 올랐습니다.
명하신 곳에 이르자 돌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벌려놓고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놓고 손에 칼을 쥐고 이삭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불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그것을 가져다가 이삭 대신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에 이르기를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과연, 온전히 믿음으로 행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 이르기를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영적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무슨 일이든 다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대면한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후대의 신자들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도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고,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들은 적도 없고, 기적의 떡을 먹은 적도 없지만,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습니다. 영감으로 기록한 신구약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의 토대입니다. 신약성경은 사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려 보증한 증언이요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믿고 행할 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아니하고 믿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는가 하면, 자주 의심에 사로잡히는 연약한 믿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는 우리 각자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아니하고 믿는 자가 되겠다는 각오를 하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작은 믿음이 큰 믿음으로, 약한 믿음이 강한 믿음으로 자라나서 “너는 나를 보지 못하고 믿으니 복 있는 자”라고 하시는 주님의 칭찬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요 20:19-23, 롬 8:10-11 / 이윤재 목사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래전에 교황이 미국을 방문했답니다. 그래서 고속도로로 달리고 있는 데 갑자기 교황이 운전하고 싶어졌답니다. 그래서 운전수를 뒤에 타라고 하고 교황이 직접 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운전하다 보니까 기분이 좋아서 교황이 과속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빨리 달리다 보니까 경찰이 삐용 삐용하면서 따라옵니다. 경찰이 오더니 “과속하셨습니다. 신분증 좀 보여주세요”. 하고 보니까 교황입니다.
그래서 경찰이 놀라서 자기 혼자 결정하지 못하고 경찰서장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서장님, 이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화했습니다. 과속해서 붙잡고 보니 교황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장이 말했습니다. “뭐,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딱지 끊으면 되지”. “그래도 좀 어려울 것입니다. 뒤에 누가 탓습니다”. “누가 탓는데. 시의원?” “아닙니다”. “”국회위원?“ ”더 높은 분 같습니다“. ”그럼 대통령이라도 탓단 말아야?“ 경찰이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대통령보다 높은 분 같습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이 타신 것 같습니다“. 교황이 모시고 운전할 사람은 하나님밖에는 없지 않으냐 하는 것입니다. 교황 운전수는 그날 졸지에 하나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에는 부활절 이후,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와 함께 길을 가고 있습니까? 당신이 태우고 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부활절 이후, 우리는 누구와 함께 우리의 길을 가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첫 번째 나타나신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 죽은 것이 두려웠던 제자들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는 데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말씀했습니다.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그리고 깊은 숨을 내쉬시더니 “성령을 받으라” 말씀했습니다. 언제나 처음 하는 일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부활전과 부활후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부활전, 그는 육체를 입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후, 그는 신령한 몸을 입었습니다. 부활전, 그는 땅의 지배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후 그는 땅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후 가장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나 “성령을 받으라”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오순절날 임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임했으나 성령받으라고 예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한 것은 부활후가 처음입니다. 왜 예수님은 부활하시지마자 성령을 가장 먼저 언급하셨을까요? 부활이후의 삶의 어떤 이유로 우리에게 성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성령님은 부활절 이후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줍니까?
다시 22절을 보시겠습니다.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성령을 받으라 한 문맥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인사가 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러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고자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신 명령이 하나 있습니다. 23절, 요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그러니까 이런 구조입니다.
평안 성령을 받으라 사죄
성령받는 것이 평안과 사죄 사이에 있습니다. 평안은 제자들이 얻었습니다. 사죄는 남들이 받습니다. 평안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얻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평안으로부터 남에게 베풀 사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림을 그리면 어떨까 합니다.
자, 우리는 모두 세상에 삽니다.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해서 예수님께 니왔습니다. 그래서 그가 흘린 십자가의 피로 평안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서 내가 받은 평안으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성화의 삶입니다. 그 한 가운데 성령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 믿고 평안얻는 구원과 예수님의 평화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화가 다 한 성령안에 있습니다. 성령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한 우리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자, 이것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나나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였습니다. 히브리어로 하면 “샬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이 “샬롬”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우리 말로 “안녕, 안녕하세요”입니다. 가벼운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사용하신 “샬롬”은 다만 인사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평생 사역을 요약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모든 사역을 한마디로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말한 평화는 다만 심리적 평안이 아닙니다. 마음의 평화가 아닙니다. 그보다 크고 넓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갖고 살던 인간과 하나님의 총체적 관계회복입니다.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가까워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맺어진 평화의 끈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수님이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한 것은 부활이에만 나타납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그리고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0절 보시겠습니까?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할 때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보여주신 것이 손과 옆구리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었을까요? 손과 옆구리와 평화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손과 옆구리에 난 못자국이 하나님의 평화의 상징입니다. 세상도 평화를 말하지만 예수님이 말한 평화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못박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로마 군병이 예수님 손과 발에 못을 박을 때 붉은 피가 하늘로 솟아오릅니다.
두 가지 평화가 있습니다. 남의 피를 흘려 내가 이루는 평화가 있고 내 피를 흘려 남이 이루는 평화가 있습니다. 남을 죽임으로 내가 사는 평화가 있고 내가 죽음으로 남을 살리는 평화가 있습니다. 세상은 남을 죽이고 내가 사는 평화를 택합니다. 팍스 로마나, 옛날 로마의 평화가 그랬고, 지금 강대국의 평화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화는 다릅니다. 요20:27, “내 손과 내 옆구리를 보라. 그리하여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있는 자가 되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는 십자가의 평화입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려 우리를 살린 평화입니다. 로마서가 말하는 평화가 이 평화입니다. 롬5:1-4절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
여기 우리가 얻은 평화의 내용이 종합되어 있습니다. 그 평화는 1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네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미 그 평화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미래 어느 시점에 쓸려고 벽장에 숨겨 놓는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천국에서 최후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천국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나라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될 평화는 우리의 현실적 삶속에서 환란과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 소망가운데 이루어져갑니다. 다같이 “이미 받았습니다”. “지금 누립시다”. “천국에서 완성될 평화를 바라봅시다. ”오늘의 고난과 인내속에서 이루어갑시다”. (아멘).
성령을 받으라
문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평화를 얻었지만 그 평화를 누리는 곳은 이 땅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평화를 바라보는 곳도 세상이고, 고난과 인내속에서 평화를 이루어가는 곳도 땅입니다. 21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마10:16에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리떼가 득실걸히는 세상입니.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주님이 우리를 보낸 세상은 마치 늑대가 사는 세상과 같습니다. 우리가 무슨 수로 평화를 누리며 살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더구나 부활하신 주님은 곧 승천해야 합니다. 그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육신으로 온 주님이 떠나면 남은 제자들은 고아와 같습니다. 고아들이 어떻게 삽니까? 육신의 어머니가 없는 사람이 고아입니다. 주님은 그 대신 영의 어머니를 남겨주고 싶었습니다. 영의 어머니가 성령입니다. 요4:18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육신으로 오신 주님은 하늘로 가지만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는 분을 두고 가셨습니다. 그 분이 성령님입니다.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우리와 함께 거하고 우리 속에 계십니다.
존 스토트라는 영국의 신학자가 이를 십자가와 성령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안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십자가 성령
권세(authority) 권능(power)
이 말씀이 요14:17입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룬 구원을 성령님은 계속 완성해 갑니다. 그 분은 지금 우리 안에서 계속 구원을 이루어갑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이루신 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자녀가 된 우리가 이 땅에서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성령님은 권능을 주십니다. 다같이 하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우리안에서”. 2천년전 갈보리에서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와 함께 십자가지신 주님, 이제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우리안에 성령님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성령은 늘 함께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영성신학이라는 과목을 하나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목을 가르치신 교수님이 학기말에 숙제를 하나 내 주었습니다. 자기가 나무로 직접 십자가를 만들어서 그것을 교문에서 지고 들어오는 숙제였습니다. 학기중 아무 때나 한번만 해도 되지만 마친 후에는 반드시 소감을 써내는 것이었습니다. 속으로 “참 이상한 숙제도 낸다” 하면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님의 의도는 알 것 같은데 십자가 만드는 것도, 지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나깨나 고민하고 있는 데 한번은 한 학생이 십자가를 지고 교정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용기에 감탄을 보내면서 슬금 슬금 가까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이 갈수록 나무는 둔탁했고 도대체 그 무거운 것을 어떻게 지고 오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가까이 갔을 때 그 놀라운 비밀을 알았습니다. 이 사람이 십자가 밑에 바뀌를 달았던 것입니다. 어디 철물점같은 데서 도르래를 사서 십자가밑에 바뀌를 달아 그것을 끌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양새는 매우 무거워 보였지만 별로 힘들지 않게 콧노래를 부르며 십자가를 지고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존 스토트의 책을 보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The cross gives us suffering, but the Holy Spirit makes us enable. (십자가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만,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가능하게 하신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이 고통가운데 십자가를 져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우리가 고통가운데 십자가를 져서 성화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우리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But the Holy Spirit makes us enable.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를 가능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바뀌를 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도, 우리의 십자가를 통한 성화도 모두 성령님이 가능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어떤 분이 미국을 다녀오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에 미국가면서 비행기를 탓는 데 어려움이 있었답니다. 갑자기 비행기에서 큰 소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뒤에 있는 사람이 발을 앞 자리위에 놓았다가 앞에 있는 사람 머리를 쳤다는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면 되는 데 시비가 나서 싸움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비행기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비행기를 오래 타보았지만 그렇게 심하게 흔들리는 것은 처음이었답니다. 마치 비행기가 당장 추락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기가 울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승무원을 불렀고, 승무원이 물을 가지고 달려오면서 물을 엎질러서 비행기안이 소란스러워졌답니다. 그런데도 자기 자신은 정말 평안했답니다. 사나 죽으나 생명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고 그래서 아기에게 다가가 달래주기도 하고, 승무원이 떨어뜨린 물병도 주어 주기도 하고, 기도하면서 미국에 내렸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제 직업병이 돋았습니다. 제가 목사가 아닙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행기에 탄 사람은 모두 미국에 간다. 승객중에 동요한 사람, 침착한 사람, 싸우는 사람, 조용한 사람, 아기, 어른, 승객, 숭무원, 할 것 없이 비행기에 탄 사람은 모두 미국에 간다. 이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미국 가는 티켓을 가졌다는 것이 비행기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믿고 구원받으면 누구나 천국에 간다. 그러나 비행기안에서 행복하게 여행하느냐의 문제는 다른 문제다. 같은 비행기를 탓는 데 불안해하거나 서로 다투거나 시비 걸거나 소리질러도 미국가는 데는 지장이 없으나 결코 행복하지는 않다. 더구나 비행기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마음이 평안했거나, 살고 죽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갔다면 그것은 참 아름다운 것이다. 이 역할을 성령님이 하신다. 미국 가는 비행기가 십자가의 역할이라면 비행기안에서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할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님이 필요하다”. 아멘.
그래서 로마서 1-8장까지는 크게 두 주제가 있습니다. 1-7장까지는 구원의 문제, 곧 십자가의 역할을 다룹니다. 그러나 7장이 지나고 8장이 시작되면 성령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9절,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11절,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안에 거하시면”. 우리 속에 게시는 성령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 성령님이 들어오신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들어와 사신다. “너희 속에 거하시면”. 거한다는 말은 집을 짓고 산다는 말입니다. 지속적이고 영구적으로 거주한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예수믿는 여러분안에 계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을 위해 죽으신 주님이 이제 여러분 안에 사는 것을 믿습니까? “너희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성령은 살리는 영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이 영으로 우리를 살립니다. “He lives with you and in you".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우리안에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이제 우리안에 영으로 계십니다. 육체로 33년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영으로 영원토록 우리안에 계십니다.
죄를 사하라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단지 우리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만 아닙니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23절 볼까요? 요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원문으로 보면 재미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사하여 질것이요”라는 동사는 수동형으로 되어 있고 “뉘 죄든지 사하면”은 능동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죄를 사하는 사람은 나인데 죄를 사하는 분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사죄의 선포자와 사죄자가 다릅니다. 나는 다만 죄용서를 선포할 뿐입니다. 내가 용서를 선포할 때 실제로 용서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내가 죄사함을 선포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 용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지난 주 고난주간에 눅23:34을 읽다가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외치신 일곱 마디중 첫 번째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저는 이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전혀 다른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스스로 “내가 용서하노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문장상으로 보면 예수님이 직접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용서를 부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간 오해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다는 말인가?” 다음 순간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아, 예수님이 “내가 용서한다” 하지 않고 “하나님, 용서해 주옵소서” 한 것은 우리 죄를 용서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뜻이구나“. 이 말씀을 지나치게 신학적으로 논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용서는 다만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는 예수님의 겸손한 기도라는 것만 아시면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도 하나님께 용서해달하고 기도했는 데 죄인인 우리인들 오죽하겠습니까? 우리가 용서하기 어려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가 아니라 ”하나님, 누구 누구의 죄를 용서해주세요“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용서의 한계고 특징입니다.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여러분, 우리가 우리 죄도 용서하기 힘든데 어떻게 남의 죄를 용서하겠습니까? 용서 안되는 것이 정상이고 그래서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성령님, 나는 내 감정으로는 절대 용서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간구하옵나니 하나님이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것입니다.
옛날 수도원에서 자신도 모르게 늘 분노에 차있는 한 젊은 수도자가 스승을 찾아왔답니다. “스승님, 저는 언제나 사소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분노속에 삽니다. 왜 그럴까요?”. 스승이 말했습니다. “아마도 네가 지금까지 받은 상처때문일거야”. “그래요? 저는 지금 제가 받은 상처를 다 기억하지 못하는데요”. “그래?” 스승이 옆에 있던 작은 물병을 수도자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손을 앞으로 뻗어 이 물병을 들어봐. 무겁지?”젊은이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10분 후에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무겁지?” “예, 참을만 합니다”. 한 시간이 지난 후 스승이 물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매우 무겁습니다. 더 이상 들 수없습니다.” 그때 스승이 말했습니다. “문제는 물병의 무게가 아니라, 그대가 그것을 오래 들고 있었기 때문이야. 과거의 상처의 무게는 똑같애. 그런데 그것을 자네가 오래 들고 있다보니까 그 무게가 커진거야. 무게는 물병에서 온 것이 아니라 네 마음에서 온 것이지. 과거의 상처는 안 받았을 수 없었지만 그 물병을 네 마음으로 오래 들고 있지 않는 것이 중요애. 이미 받은 상처의 물병을 또 다시 들지 말게. 그러면 분노가 사라질거야”.
그래서 요즘 심리학에서도 1차 상처, 2차 상처라는 말을 씁니다. 1차 상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준 상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사는 한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피하려면 로빈손 크로우소처럼 무인도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1차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디면 2차 상처를 안 받으면 됩니다. 2차 상처는 내가 나에게 주는 것입니다. 내려 놓아야 할 물병을 계속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갈수록 물병이 더 무겁습니다. 물병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받은 물병을 다시 들고 있지 않기로 마음먹는 것이 자기 용서입니다. 다른 사람이 짊어져 준 무거운 물병을 다시 들지 않는 방법은 물병을 짊어져 준 그 사람을 잊는 것입니다. 처음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잊는 것입니다. 그러다 조금씩 여유가 생기면 이해하는 것입니다. 역시사지입니다. 그러다가 더 기도하면 그가 가해자가 아니라 내가 가해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를 용서하는 것은 곧 나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성령님이 하십니다.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 그가 우리 속에서 죄를 이기며 용서하게 하게 승리하게 합니다. 부활절 이후,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신 주님,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부활을 사는 능력의 원천인 성령을 부어 주옵소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예수께서 오사
요 20:19-29 / 박상훈 목사
이디 아민이라는 독재자가 아프리카의 우간다를 통치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한 사람의 잘못된 통치 때문에 많은 국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에 있는 어떤 교회 목사님이 이디 아민의 불의를 공공연하게 비판했습니다.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그날은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예배를 마치고 난 뒤에 자기 사무실로 들어섰습니다. 뜻밖에도 사무실 안에는 다섯 명의 비밀경찰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목사님이 들어서자마자 사무실 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습니다. 그러더니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목사님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국가의 명에 따라서 반국가사범을 처단하기 위해서 여기에 왔소."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목사님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침착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아시다시피 부활 주일입니다. 나는 부활을 믿는 사람이기에 죽음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단지 나에게 2분간의 시간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내 삶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목사님에게 2분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나라의 통치자 이디 아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원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명에 따라야 하는 이 불행한 다섯 명의 형제들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에 참된 자유를 허락해 주시고 사랑과 공의가 이 땅에 정착되게 하옵소서. 저의 죽음으로 이제는 더 이상 이 땅에 이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 나라, 이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옵소서."
목사님이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곁에서 목사님의 기도를 듣고 있던 다섯 명의 경찰들도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경찰의 통솔자가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우리가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하십시오. 목사님은 교회에 안 계시더라고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러더니 그들은 목사님의 답변을 듣기도 전에 쏜살같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뜻깊은 부활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분명한 부활 신앙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부활 신앙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단순한 과거적 사건으로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처럼,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역사 하시는 예수님은 우리들도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찰스 스펄젼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그가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보니까 한 어린 아이가 새장 안에 갇힌 새 한 마리를 몹시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 그 새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그 아이가 대답을 했습니다.
"좀 괴롭히다가 죽여버리려고 해요."
목사님은 그 새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돈을 주고 그 새를 새장 채로 샀습니다. 목사님은 그 즉시 새장의 문을 열고서 그 새를 날려보냈습니다. 그 새에게 자유를 준 것입니다. 그 다음 주일은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빈 새장을 들고서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원수 악한 마귀는 우리를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엄청난 대가로 지불하고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얻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뜻깊은 부활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모든 것에서 풀림 받아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슬픔을 씻어주십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유머입니다. 어떤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얼굴이 구겨진 채 펴지지를 않습니다. 아내는 걱정이 되어서 원인을 곰곰이 분석을 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최근에 남편이 한약 한 첩을 잘못 달여 먹고서 얼굴이 구겨진 것입니다. 한약 이름이 무엇이겠습니까? 구기자입니다. 남편은 구기자를 달여 먹고서 그만 얼굴이 구겨져 버린 것입니다.
아내는 어떻게 하면 남편의 얼굴을 좀 펴 줄 수 있을지 궁리를 했습니다. 드디어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서 선물을 받자마자 그의 얼굴이 환하게 피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었겠습니까? 피자입니다. 구기자를 달여 먹고 구겨진 남편의 얼굴을 아내는 피자로 환하게 펴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만 생각하면 마음이 슬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예수님뿐만이 아닙니다. 부활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부활의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주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강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11절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몹시도 사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너무나도 슬펐습니다. 그래서 하염없이 울며 또 울었습니다. 11절에 보면 운다는 단어가 두 번씩이나 반복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가 슬픔에 잠긴 채 눈물만 흘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예수님을 얼른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제대로 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묻고 있는 사람이 그저 동산지기인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그때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그 음성은 너무나 친근한 음성이었습니다. 마리아가 평소에 듣던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제서야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마리아는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그도평소에 하던 대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랍오니여."
이 말은 "선생님이여"하는 뜻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슬픔의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만 생각할 때 마리아는 한없이 슬펐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을 뵈옵고 난 뒤 마리아의 얼굴은 기쁨의 광채로 환하게 빛났을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를 찾아가셔서 그의 슬픔을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그를 기쁨의 여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을 때, 그들도 똑같이 슬펐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머물러 계신 사흘동안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이 슬픔에만 잠겨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서는 자신의 못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뵙게 된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오늘 본문 20절 하반부입니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들은 더 이상 슬픔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기쁨의 사람들로 바뀌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슬픔이 우리를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이 시간 슬픔을 안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시면서 우리의 슬픔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마리아야." 다정하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의 모든 슬픔은 사라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두려움을 물리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 19절 말씀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언제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해치러 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곳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인 곳의 모든 문을 꼭꼭 걸어 잠갔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이 두려움이 떨며 지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예수님은 부활 하셔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에 평강을 심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21절에서 다시 한번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두려움을 물리쳐 주신 후, 제자들이 담대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무장시키셨습니다. 22절입니다.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담대해졌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요, YMCA의 운동을 일으켰던 월남 이상재 선생님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는 일제의 무수한 협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작전을 바꾸었습니다. 그를 돈으로 매수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루는 총독부가 보낸 한 청년이 돈 뭉치를 들고서 이상재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선생 앞에 돈 뭉치를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정도의 돈이면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 시골에나 가셔서 조용하게 사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이상재 선생은 그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닐세. 그러니 나를 돈으로 매수하려는 생각은 버리게."
청년은 이상재 선생을 겁내 줄 생각으로 넌지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인도의 간디나 영국의 처칠은 100세를 산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얼마나 더 사실 것 같습니까?"
얼마 남지도 않은 여생인데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조용하게 살면 좋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러자 이상재 선생은 대뜸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 사람아! 사람이 한번 태어났으면 죽지를 말아야지, 죽기는 왜 죽어?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거야."
청년이 그 대답을 듣고 기가 막혔습니다.
"선생님, 불로초를 구했던 진시황도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사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무슨 불사약이라도 드셨습니까?"
이상재 선생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럼, 먹었지! 나는 너희 천황도 먹지 못했던 불사약을 먹었지. 그래서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걸세. 나는 살아서 너희 나라 일본이 망하고 군국주의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말 것이네."
청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약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때 이상재 선생은 옆에 놓여 있는 성경을 손에 쥐고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약일세. 이것은 신약과 구약으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일세.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기 때문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이 되었네. 그러니 그까짓 돈으로 나를 매수하려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게."
그러면서 그 청년을 쫓아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요16:33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도 이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세상의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미 이겼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에 있는 그 어떠한 두려움이라도 물리치고 담대하게 세상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의심을 제거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 24절 이하에 보면 도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에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 뒤에 도마가 제자들이 모인 곳을 왔을 때, 제자들은 도마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그러자 도마는 그들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아마도 도마는 예수님이 자기가 없는 사이에 제자들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에 기분이 좀 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심하는 도마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도마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기의 두 눈으로 분명하게 목격한 도마는 그 즉시 예수님께 자기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더 이상 도마는 의심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수십 년 후에는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오셔서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처럼 우리도 그 모든 의심을 버리고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벤허"라는 제목의 영화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영화는 본시 류 월레이스(Lew Wallace)가 쓴 소설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어느 날 월레이스는 자기의 절친한 친구요, 유명한 무신론자였던 로버트 잉거솔(Robert Ingersoll)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부인하는 글을 써서, 기독교를 영원히 사라지게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그 후 이년 동안 세계 각국의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기독교를 완전히 부인하고, 없애 버리는 글을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드디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2장을 쓰는 순간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살아 계셔서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후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변화를 "벤허"라는 주인공 인물에 고스란히 투영을 시켰습니다.
벤허는 본시 칼과 창의 무력을 통해서 자기의 신음하는 동족 유대인들을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겠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의 손에서 칼과 창을 빼앗아 갔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벤허는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삶의 현장으로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서, 찬양 속에서, 말씀 속에서 날마다 매 순간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에도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마리아야."
우리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슬픔을 씻어주시고 기쁨을 심어 주실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의 평강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영적으로 재무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세상의 모든 환란을 담대하게 이겨내고 승리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반석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뜻깊은 부활 주일을 맞이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깨끗하게 제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손잡고 동행하는 승리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만나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해결하고 날마다 주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강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평강
요 20:19-21 / 이중표 목사
사람마다 마음속에 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있어야 쉼이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부요를 누리고 권세와 지위가 있다 하더라도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다 이 땅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평화롭게 사는 것은 최대의 축복입니다.
나폴레옹이 센트헤르나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한 사람이 찾아가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폐하여 지나온 날을 회상할 때 살아온 생에서 행복한 날이 얼마나 됩니까?” 그때 나폴레옹은 잠잠히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하는 듯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전 생애에 걸쳐서 행복한 날은 단 일주일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서 “오대양에 넘실거리는 파도는 세상에 오고 간 사람들의 눈물이고 육대주에 부는 바람소리는 세상을 살아간 인생들의 한숨소리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지만 평화롭게 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고서는 평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는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57:20-21)라고 말했습니다.
악한 사람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마음속에 평강이 없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평강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이 세상이 끊임없는 갈등 속에 있습니다. 남북이 갈등하고 이 역사가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는 은혜 가운데 최고의 은혜가 평강입니다. “예수 믿은 이후에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큰 변화는 잘 모르지만 제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평안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이 주는 평안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주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소유에서 옵니다. 돈이 있어야 편안합니다. 건강해야 평안합니다. 집이 있어야 평안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유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돈이 많이 있다고, 지위가 높아졌다고, 건강하다고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돈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평생 고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평안은 시간적입니다. 일시적입니다. 오늘의 평안이 내일까지 보장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평안은 환경에 따라, 만나는 사람에 따라 수시로 변합니다. 그래서 상황적입니다.
세상적인 평안은 상대적입니다. 소유의 평안이 상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가도 더 잘 사는 사람을 보면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립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욕구 충족에서 옵니다. 무엇인가 바라는 소원이 성취될 때 마음에 평안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평안은 문제가 없을 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평안을 상실해가는 위험 요소를 안고 있습니다.
평화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 로마식 평화(Pax Romana)입니다. 이것은 힘에 의한 것입니다. 전쟁의 승리, 힘의 지배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둘째, 헬라식 평화(Eirene)입니다. 이것은 마음과 정신의 평안입니다. 철학적으로 무엇인가를 깨달았을 때 얻는 평안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주는 평안(Shalom)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시는 평안이며 죄로부터 자유를 얻는 평안입니다. 모든 것이 자유를 얻는 평안입니다. 하나님과 나, 나와 나 자신,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 나와 자연의 관계 모두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나실 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예수님은 죽으실 때도 평화의 주님으로 죽으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줄 때도 그 속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줄 때도 고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줄 때도 평안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고 내려오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뻔 하였거니와 네 눈에 숨기웠다”고 탄식하시면서 우셨습니다. 평화를 모르는 백성들을 탄식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나음을 입는 것이 평안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평강
예수님의 평안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믿음의 선물이 평안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어떻게 근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온 천지에 충만하신 것처럼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나와 임마누엘로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평안을 얻지 못하는 것은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자는 평안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믿기 때문에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노벨 의학상을 받은 카렌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근심과 싸워 승리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업가는 일찍 죽는다.”
모든 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방법은 마음의 평안입니다. 마음의 평안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어떻게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전능하신 주님을 믿으면 됩니다.
영국에 화이트렉이라고 하는 귀족이 있었습니다. 그가 크롬웰의 특사로 스웨덴에 갔는데 당시에 영국의 정세가 불안하므로 잠을 자지 못하고 불면증이 생겼습니다. 거기에 믿음이 좋은 비서가 동행했는데 잠 못 자는 화이트렉 경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이시여, 왜 주무시지 못하시나요.” “나라가 이렇게 어지러운데 어떻게 잠을 잘 수 있나” 그때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부터 하나님은 영국을 다스렸겠죠?” “내가 이 세상에 나기 전부터 영국은 있었지”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영국은 존재하겠죠.” “그렇지 영국은 있겠지” “지금도 영국은 선생님이 염려하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고 믿으십니까?”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지.” “선생님 편안하게 주무시지요.” 이 말을 한 후에 비서가 겸손하게 절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비서가 자리를 떠난 후에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인 것을 내가 쓸데없이 걱정했구나’
오래 전에 큰 교회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 목사님 나라가 잘 되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라 잘 됩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 6:25).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기 욕구대로 되는 것이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 뜻대로 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안되었어도 마음에 평안을 얻으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 나에게 좋은 것을 준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평안을 얻습니다.
사랑으로 얻는 평강
평강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사랑으로 얻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화평해야 되지만 사람과의 관계도 화평해야 됩니다. 누구든지 화목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부부가 살면서 돈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화평하는 것입니다. 자식 공부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화평입니다.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1등 하더라도 아버지와 평화가 깨지면 원수가 됩니다. 부부는 일생에 한 번 살다 갑니다. 전무후무한 삶을 삽니다. 그러므로 화평해야 합니다.
아내 생일날 카드 한 장 써 주지 못하고 생일 선물 한번 사주지 못하는 남편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아내 생일날 “당신이 세상에 태어나 나를 만나 살아온 것이 너무 고맙소. 부족한 나를 만나 살아오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소. 생각하면 미안할 뿐이오.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는 내가 되었기에 하늘을 보아도 당신, 땅을 보아도 당신, 온통 세상을 보아도 당신 생각에 젖어 있지. 건강하게 살아주오.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오.” 하고 카드를 써서 금일봉과 함께 화장대 위에 올려놓으면 아내가 그것을 보고 얼마나 행복해 하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부자간에 평화, 부부간에 평화, 고부간에 평화를 누리려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시어머니 미워하는 며느리에게 주는 병이 위장병입니다. 구세대라 잘 맞지 않죠. 평안을 못누리면 병이 오는 것입니다. 신반포에 사는 여자 하나가 위장병이 들어서 병원에 왔다 갔다 하는데 알고 보니까 시어머니 미워하다가 병들었어요. 병원에 왔다 갔다 하다가 대학 동창을 만났습니다. 친구 따라 집에 놀러 갔는데 그 집에도 사납게 생긴 시어머니가 있는데 그 친구는 시어머니와 잘 지내요. 시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면 “예, 알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들어보니까 이치에도 안맞고, 논리에도 안맞고, 상식에도 안맞는데 시어머니 말에 “예 예” 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시어머니 비위를 잘 맞추니”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맞춘다.” “그게 무슨 말이니?” “주 안에서 네 부모를 순종하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순종하고 맞춘다.” 음식 만들 때 시어머니가 옛날 식으로 “팍 삶아라” 그러면 영양가가 파괴되지만 시어머니 드실 것은 팍 삶고 내가 먹을 것은 살짝 삶아서 먹으면 될 것 아닙니까 똑순이는 똑똑해서 시어머니 말만 떨어지면 탁탁 받아내니까 평화가 없고 덕순이는 시어머니 말에 순종하니까 평화가 있습니다. 평화는 사랑으로 얻는 것입니다.
소망으로 얻는 평강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평강을 온 세상에 나누며 살도록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십니다.
중국 성현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의를 의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요, 의를 침묵으로 말하는 것은 덕이다.” 덕을 가진 자에게 평화가 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평화롭게 살고 안락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똑똑한 체 말아라”라고 말했습니다.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라는 시가 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 하셔서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 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서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잃는 것 욕심 때문입니다.
자기를 많이 죽여야 평화가 옵니다. 자기를 많이 죽여야 곁에 있는 가족도 편하고 주위 사람들이 편합니다. 끊임없이 사랑을 담고 남의 허물을 덮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격려하면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평화의 사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누구신가
요 20:19-22 / 지용수 목사
인도에서 사역하는 한 선교사님이 힌두교 사제와 길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앞을 수백 마리의 개미가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개미 중 한 마리가 힌두교 사제의 발을 물었습니다. 힌두교 사제가 아프니 화가 나서 개미들을 발로 지근지근 밟았습니다. 많은 개미들이 죽고 부상을 입었습니다.
선교사가 웃으며 힌두교 사제에게 말했습니다.
“사제님, 당신을 문 개미만 죽이든지 밟든지 할 것이지 왜 아무 잘못도 없는 개미들까지 그렇게 죽이고 부상을 입히는 것입니까?”
“그렇군요. 내가 잘못했네요. 내가 개미들에게 미안한 짓을 했군요. 어떻게 하지요?”
“어떻게 하기는요? 당신이 개미가 되어 개미에게 사과해야지요.”
그렇습니다. 사람이 개미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개미야, 미안하다.”라고 해도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습니다. 개미가 되어서 “개미야,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라고 해야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사람끼리도 갭(gap)이 너무 크면 대화가 어렵습니다. 대통령과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갓 공무원이 된 말단 공무원 둘이 앉아 대화를 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큰 재벌과 아주 가난한 사람이 같은 자리에 앉아도 대화가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과 배우지 않은 사람도 대화가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멸망으로 치닫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천사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나팔을 불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방법은 효과가 작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뿐인 외아들, 독생자를 사람의 몸을 입게 하시어 이 땅에 보내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것도 왕으로서가 아니라, 귀족으로서가 아니라 서민으로, 목수의 아들로 시골에 태어나게 하셔서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하면서 사람을 구원하시도록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 계획대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즉흥적인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창세 전에 벌써 예수 안에서 세워 놓으신 계획입니다.
이는 이사야 9장 6절에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것은 통치권을 의미하고, ‘기묘자, 모사’는 Wonderful Counselor, 높은 지혜자를 의미합니다. 어찌 이런 예언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이 읽으면 ‘정신병자가 쓴 글이 아닌가?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가 놀라운 지혜자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평강의 왕이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어찌 이런 글을 쓸 수가 있지?’라고 할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그 아기가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16절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소개되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하며 누가 누구를 낳고 죽 그렇게 되어 있는데, 요셉에 와서는 ‘요셉이 예수를 낳고’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여자는 밭이고 남자는 씨앗입니다. 그래서 남자의 씨를 받아 여자가 아기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남자의 씨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의 몸에서 예수가 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이사야 7장 14절에도 예언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남자 없이 처녀가 아기를 낳는데 그 아기의 이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이 예수님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시자마자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상하고 큰 별이 나타나서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서 찬양하고 목자들이 와서 경배하고 동방의 박사들이 와서 경배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단순히 별만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이 아닙니다. 그 신분이 귀족, 왕족으로 그들의 나라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헤롯이 그들에게 융숭하게 대접을 해 주었습니다. 그들을 잘 대접하지 않으면 자기 나라에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 그들이 깊은 밤에 왔는데도 그런 대접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 정도로 힘 있는 사람들이 갓난아기에게 엎드려 경배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아기가 사람으로 나셨지만 하나님이심을 증거해 주는 일입니다.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복음을 전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작은 위로를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병이나 고쳐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무의미한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게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러 오신 것만도 아닙니다. 우리들의 가정을 조금 행복하게 해 주시려고, 우리의 삶에 복이나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도 하시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큰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지옥으로 치닫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오직 천국입니다.
따라 합시다.
“오직 천국.”
예수님을 믿으면 잘 되기만 합니까? 잘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감옥에 갈 수도 있고 예수님을 믿어도 병들어 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가도록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먼저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입니다. 회개해야 됩니다. 외모가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적이어도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최고로 아름다운 여인, 최고로 멋있는 남자가 되어도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그것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심령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 마음이 회개해야 됩니다.
어느 회사의 입사 시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시험을 보러 온 응시자 칠십 명을 한 사람씩 방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 방은 네 칸으로 되어 있는데 각 칸에는 큰 거울이 있고 그 거울 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답은 ‘예, 아니오’ 중에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방에 들어가면 큰 거울에 자기의 모습이 비치는데, ‘이 사람은 정직한가?’라는 질문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답은 간단합니다. 그 질문에 자기가 ‘예, 아니오’ 중에서 답을 하면 됩니다. 답을 하고 다른 칸에 들어가면 또 큰 거울에 자기의 모습이 비칩니다. 거기에는 ‘이 사람은 어디에서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질문에 답을 하고 세 번째 칸에 가면 또 ‘이 사람은 과연 신뢰할 만한가?’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칸에는 ‘당신이 사장이라면 이 사람을 채용하겠는가?’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칠십 명 중에서 육십구 명이 자신이 ‘정직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믿을 만하다. 채용하겠다.’라고 답했고, 한 사람만 ‘아니오.’라고 답했고 합니다. 회사에서는 ‘아니오’라고 답한, 자신을 바로 볼 줄 아는 양심이 있는 그 사람만 채용했다고 합니다.
사람 앞에서도 진실해야 사랑을 받고 길이 열립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이겠습니까? 내 가족을 속이고 내 형제를 속이고 내 친구를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늘 우리의 모습 그대로 진실하게 ‘주님, 내 모습 이대로 받아 주소서.’하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위선의 가면을 벗고 언제나 회개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계속 땅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3년만 전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70명 전도대원을 부르시고 여러분과 저를 부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만 복음을 전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십일간 계시다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한 번은 어떤 교우가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 우편에는 예수님께서 계시는데 하나님 좌편에는 누가 있습니까?”
성경에 답도 없는 것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좌편에 의자가 있는지 없는지는 성경에 드러나 있지 않으니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드러나 있지 않는 것에는 우리가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 좋을 줄로 믿습니다.
어쨌든 주님께서는 3년만 전하시고 가셔야 했기 때문에 제자들을, 사람들을 부르셔서 복음을 전할 사명을,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린 대로 우리 모두는 복음을 전할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세우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5:16)
우리가 사과를 맺겠습니까? 포도를 맺겠습니까? 우리가 무슨 과실을 맺겠습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과실은 전도 열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도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주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요한을, 야고보를, 안드레를, 빌립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요, 부활의 주님이시요, 전지전능하신 분이신 줄을 알지만, 그들은 이것을 모르고 그냥 훌륭한 선생인 줄로만 알고 따라갔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배를 버리고, 직장을 버리고 가족마저 떠났습니다. 한 판 도박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을 따라다닐수록 기쁘고 감격하고 놀라게 되고, 정말 주님을 잘 따랐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대개 사람은 가까이 접하면 단점이 자꾸 보입니다. 그래서 산과 사람은 멀리서 보라고 합니다. 보스톤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 정도 달려가면 큰 바위 얼굴이 나타납니다. 자동차를 타고 달려가면서 그 바위를 보면 위엄이 있고 인자하고 귀한 얼굴 모습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에 가서 보면 얼굴은 없어지고 바위만 보입니다.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위대해 보여도 가까이 하면 위대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조심합니다. 여러분은 저를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보고 사랑해 주시지만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나 직원들에게, 특별히 저와 가까이 만나는 사람에게 조심합니다. 제가 잘못해서 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상처를 받을까 봐입니다. 특별히 제 아내와 아들딸에게도 조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완벽한 하나님이시고 완벽한 사람이시니 그 삶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러니 그 거룩함, 그 고상함에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주님께서는 능력이 있으셔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치료하시고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니 예수님의 인기가 얼마나 올라가는지, 요즘 말로 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 가만히 있어도 자기들이 장관 자리 하나씩은 맡게 되었으니 예수님 따르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나라 왕이 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고 왕이 되시면 우리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각본대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셔서 무덤에 갇히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무서워 도망가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식 후 첫날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있는데 문을 열지도 않으시고 그냥 들어오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뼈도 있고 살도 있지만 보통 몸이 아니라 영광의 몸입니다. 천사의 몸처럼 벽이 있어도 상관없이 왕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하면 그런 몸이 됩니다. 또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우리는 변화하여 그럼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영광의 몸이 될 때는 교통사고로 잘린 다리도 다시 생기고 빠진 머리도 다시 나고 수술로 생긴 흉터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형 수술한 것은 어떻게 될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천국에 갔더니 천국 문 앞에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에 계십니까?”
“문에 있는 글을 보시오.”
그래서 그 사람이 문을 쳐다보니 문에 ‘대조중’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형수술을 하도 많이 해서 그 사람이 맞는지 대조하느라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형수술하지 않은 사람은 바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성형 수술한 사람은 그 사람이 진짜라는 것이 확인될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한국 여자는 지옥에 갔는데, 지옥 문 앞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 있더랍니다.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저기를 보시오.”
그래서 쳐다보니 ‘보수중’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왜 지옥을 보수하느냐고 물으니 한국 여자들이 불가마에 하도 왔다갔다해서 불에 면역이 생겨 지옥에서도 잘 견디기 때문에 지옥 불을 더 뜨겁게 하는 중이라고 하더랍니다.
웃기 위해 만든 이야기일 것입니다.
성형수술을 했든 어쨌든 우리가 부활할 때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광의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변화하리 우리는 부활하리 우리는 영생하리」
영광의 몸을 입으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Peace be with you).”
그리고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 주시며 제자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마음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불안하고 무서워서 떨었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니 평안하고 즐거워졌습니다. 원어에 보면 기쁨이 넘쳐흘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비롭습니다.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여전히 예수님을 잡아 죽인 그 분위기, 아주 살벌한 분위기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방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니 평안했습니다.
캄캄한 방에 전기 스위치를 켜면 환하게 되는 순간 어두움이 도망가듯이, 우리가 불안하고 어둡고 우울해도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빛을 발하시면 그 순간 우리가 밝아지고 평안하고 좋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150평 아파트에 사느냐, 20평 아파트에 사느냐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미국 우리 교회에 가면 숙직실에서 생활합니다. 교회 화장실 앞에 두 평 정도 되는 방이 있습니다. 그 방에서 생활합니다. 그런데 그 방에서 생활할 때나 한국에 있는 우리 집에서 생활할 때나 기쁨에는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환경 때문에 기쁨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이 만족하니 어디에 가든 기쁜 것입니다. 할렐루야!
제자들의 방이 어두움과 불안과 공포로 가득했는데, 예수님께서 들어오시자마자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의 방에 주님께서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께서 평안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밝아지게 됩니다.
주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Peace be with you).”라고 하신 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저를 통해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우리 모두 복음 전할 직분 받은 것을 꿈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전에 한 번도 행하지 않으신 일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뚫어지게 보시며 ‘후~’하고 숨을 뿜으시며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 합시다.
“성령을 받으라(Receive the Holy Spirit).”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신 그 귀중한 시간에 왜 숨을 뿜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만큼 성령이 중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만큼 중하기 때문에 승천하실 때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누구입니까?
마태복음 28장 19절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베풀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라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인격이 계십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은 목사님이 하는 축도의 모델입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가 아닙니다. 예수님 성자, 아버지 하나님 성부, 성령님 성신을 말합니다. 신비롭습니다. 성자와 성령이 다르고, 성부와 성령이 다릅니다. 성자와 성부와 성령은 다른 인격체입니다. 그러나 이 다른 인격체가 한 하나님이십니다.
따라 합시다.
“성부 성령 아니시고, 성자 성부 아니시다.”
다시 따라 합시다.
“성부 하나님이시고, 성자 하나님이시고, 성령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느낌으로는 아버지가 아들보다 높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 아버지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이나 똑같이 전능하시고 높으시고 존귀하십니다. 왜입니까?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헷갈리게 말씀하지 마세요.”라고 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원래 이런 것입니다. 나락을 찧으면 쌀이 나오고 밤송이를 까면 알밤이 나오듯이, 성경을 연구하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이 계시는데 한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암컷과 수컷이 2세를 낳는 것은 생물학적 차원입니다. 그런데 남자인 아버지와 여자인 딸이 결혼하면 안 된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차원이 아니라 인류학적 차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와 질서상 아버지와 딸은 남자와 여자이지만 결혼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님 나라 차원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을 받음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신비를 말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총각과 처녀는 여자의 신비, 남자의 신비를 모릅니다. 결혼해야 ‘이런 것이구나.’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도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태양에 비유하면 가장 가까운 비유가 될 것 같습니다. 태양은 하나이지만 거기에 빛도 있고 열도 있습니다. 빛이 있고 열이 있지만 태양은 하나인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계시지만 한 분으로 계십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님 대신 보내주신 다른 보혜사입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에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지 않으시고 지금도 예루살렘에 살아 계신다면 좋겠습니까? 만일 그랬다면 우리는 망했습니다. 예수님을 한 번 뵈려면 이스라엘까지 가야 되고, 또 이스라엘까지 가도 만나 뵙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온 세계 사람들이 다 모이니 우리가 간다고 어떻게 뵐 수 있겠습니까? 평생 예수님 얼굴을 뵙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대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 각자의 심령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합니까?
요한복음 14장 20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 안에 예수님께서,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으니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대신 보내주신 분이 다른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누구나 다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식당에 가면 비빔밥을 먹을까 국밥을 먹을까 선택해서 사 먹습니다. 중국집에 가서도 자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선택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성령을 받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다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람은 다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시자마자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을까요? 왜 승천하실 때도 마지막으로 힘주어 오직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성령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 합시다.
“성령이 생명이다.”
이 생명은 보통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죽는 생명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영원히 삽니다. 그 생명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 나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한다. 사람이 거듭나지(두 번 나지, born again)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장성한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야, 내가 진실로 네게 말한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파스칼이 말했습니다.
“사람이 혼자서 결혼하지 못하는 것처럼 혼자서 크리스천이 될 수 없다.”
교회에 10년, 20년을 다녀도 성령을 받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60년간 교회에 다녀도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자기 아버지가 목사님이라도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을 받아야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왜 ‘후’ 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창세기 2장과 짝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흙덩어리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마치 마네킹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그 코에 ‘후’ 하고 생기, 영혼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영혼을 불어넣어 주지 않으셨으면 지금도 흙덩어리일 것입니다. 영혼을 불어넣어 주셔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후’ 하고 부신 것은 영혼이 아닙니다. 성령입니다.
영혼을 받은 사람은 죽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25-26)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성도인 우리의 육도 죽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히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마네킹과 같습니다. 흙덩어리와 같습니다. 백화점에 가보면 마네킹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마네킹들이 얼마나 잘 생겼고 몸매가 좋은지 감탄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아주 좋은 옷을 입고 멋있는 모자도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입지 못하는 몇 천만 원짜리 밍크코트도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 생기고 멋있게 차려 입었다고 그 마네킹이 행복하겠습니까? 마네킹에게 “마네킹, 너 행복하니?”하고 한 번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그 잘 생긴 마네킹이 못 생긴 우리와 바꾸자고 할 것입니다. 마네킹에게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생명을 달라.’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잘 되고 성공하고 높아져도 마네킹과 같습니다. 죽을 사람, 망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아무리 부족해도 영원히 사는 하늘나라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령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성령보다 더 귀한 축복은 없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무엇 합니까? 도지사가 되면 무엇 합니까? 회사의 기업주가 되면 무엇 합니까? 검찰 총장이 되면 무엇 합니까? 회사의 기업주가 되면 무엇 합니까? 성령을 받지 못하면 마네킹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하늘나라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면서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또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께서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에서는 성령을 주셨다가 죄를 지으면 성령을 빼앗으셨습니다. 사울 왕이 성령을 받고 승리하다가 교만하니 하나님께서 성령을 빼앗아 가셨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이 간음하고 살인한 후에 떨면서 “하나님, 내게서 성령을 거두어 가지 마소서. 제발 성령을 거두어 가지 마소서. 내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간음하고 살인했지만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내게서 성신을 거두어 가지 마소서.”하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기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을 주셨다가 거두어 가기도 하셨지만 신약 시대에는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감사의 박수를 올려드립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것은 가슴 뛰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예수님 믿은 다음에도 슬쩍슬쩍 죄를 짓는 때가 많습니다. 그 때마다 성령을 빼앗아 가시면 우리는 망하는데,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십니다. 영원히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또 그런 짓을 하느냐?’ 하시며 탄식하십니다. 그래도 우리가 깨닫지 못하면 아픔도 주시고 채찍질도 하셔서 우리를 돌이키시고 또 회개시키셔서 세워 주십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은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너희는 구원 받았으니 이제 잘 살아라.”하시며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함께 살아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도령과 춘향이를 참 좋아합니다. 이도령과 춘향이가 잘 생겨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깨끗한 이야기가 좋은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마지막 장면을 좋아합니다. 변사또의 명으로 춘향이가 죽게 되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 위기의 순간에 “암행어사 출두야!”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자 변사또와 관리들이 부들부들 떱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춘향이에게 암행어사가 “고개를 들라.”라고 합니다. 춘향이가 고개를 들어 암행어사를 바라보니, 세상에!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남자입니다.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그때 이도령이 “춘향아,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구나. 미안하다.”하며 목의 칼을 벗겨주며 “이제 너는 자유다. 여기에 5억이 있다. 이것 가지고 집에 가서 어머니랑 잘 살아라. 나는 공인이어서 이제 너를 떠나가야 한다.” 하고 갔다면 춘향이가 좋아했겠습니까? 목 놓아 통곡했을 것입니다. 5억이 있으면 무엇 합니까? 사랑하는 이도령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이 춘향이를 한양으로 데리고 가서 함께 삽니다. 그러니 춘향이가 얼마나 행복합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 부자가 되고 건강하게 되는 것이 중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과 함께 사는 것이 중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최고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에 “이제는 너희가 살아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와 함께 살아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위대하신 보혜사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함께 하시니 사실 우리는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이런 일 저런 일이 얼마나 많이 터집니까? 그러나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제가 불안해 하면 어떻게 목회를 하겠습니까?
‘사람은 변하는데 팽장로님이 변해서 내게 반기를 들면 어떻게 할까? 노장로님이 변해서 내가 하는 말에 늘 NO, NO 하면 어떻게 할까? 교우들이 나를 싫어하여 물러가라고 하면 어떻게 할까? 한 여자, 한 남자의 마음도 맞추어 주기 어려운데 이렇게 많은 교우들의 마음을 어떻게 맞추어 줄꼬? 혹 우리 교회에 마귀가 들어와서 까불면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을 한다면 제가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밥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제 안에 성령께서 계셔서 ‘내가 너를 돕는다. 염려하지 말아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된다.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하시니 제가 편안하게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한 아이가 글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글씨도 형편없고 내용도 없어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열한 살 때 마음을 써서 글 하나를 써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보여 주었더니 그것을 읽어 본 아주머니들이 “얘야, 이런 글은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너는 글 쓰는 일을 하지 말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한 아주머니는 “얘야, 네가 시간만 낭비했구나.”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글을 쓰고 싶은데 자기의 글을 보는 사람마다 악평을 하니 하루는 집에 가서 막 울었습니다. 엄마가 우는 아들에게 꽃을 보여 주며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아직 꽃봉오리가 맺히지 않은 거야. 이제 시작하는 거야. 꽃봉오리가 맺히고 그 다음에 꽃이 피는 거야. 너는 이제 열한 살이야. 아직 꽃봉오리도 맺히지 않았어. 앞으로 꽃봉오리가 맺히고 꽃이 활짝 필 거야. 그때 네가 쓴 글은 좋은 글이 되는 거야. 엄마는 너를 믿는다.”
엄마의 말에 아이가 힘을 얻어 계속해서 글을 썼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세계적인 위대한 작가 안데르센입니다.
어머니가 옆에 계셔서 격려해 주어도 위대한 사람이 되는데, 하나님의 성령께서, Wonderful Counselor께서, 그 놀라운 분이 우리 안에 계셔서 도와주시니 우리가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할렐루야!
우리는 장사할 때도 성령님과 동업해야 됩니다. 식당을 해도 성령님과 동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도 성령님과 동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방송국 PD로 일해도 성령님과 함께 해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성령님, 전능하신 하나님인 성령님께서 계시면 세상에 무서운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히브리서 13:6)
상황이 어떠하든, 하늘에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겁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구촌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주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사람, 모든 영계, 우주를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만 알면 우리는 담대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하셨습니다. 안데스 산맥을 지나가던 여객기가 난기류를 만났습니다. 비행기를 자주 타 보신 분들은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실 것입니다. 비행기가 때로는 30미터 아래로 툭 떨어지면서 쿵 하는 소리도 납니다. 땅에만 아스팔트처럼 포장된 평탄한 길이 있고 비포장된 험한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도 평탄한 길이 있고 험한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데스 산맥의 난기류가 심해서 몇 십분 동안 비행기가 100미터, 200미터 아래로 떨어지곤 했습니다. 승객들 모두 죽음의 공포로 두려워 어쩔 줄 모르는데, 한 아이만 비행기가 아래로 떨어질 때마다 까르르 까르르 웃었습니다. 비행기가 나중에 안정을 찾고 나자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무섭지 않았니?”
“우리 아빠가 이 비행기 조종사예요.”
그 아이는 자기 아빠가 비행기 핸들을 잡고 재주를 부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 아빠의 비행기 조종 실력을 믿으니 무서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우주, 이 지구촌의 개인과 가정의 행복은 하나님께서 잡고 계십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것, 흥하고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모든 해답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엇인지 이해되는 분은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이미 성령을 받았으니 “재충만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 분은 성령을 받아야 삽니다. 오늘 여기에서 성령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19-22 / 정필도 목사
우리는 교회가 선교를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습니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선교는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선교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지.”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선교를 해야 교회다운 교회가 됩니다. 마태복음 28:18-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동일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이요 유언이며 가장 중요한 명령입니다.
위의 말씀 중에서 특별히 [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기 위해 가라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12: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지시할 땅]이라는 말씀은 미래 진행형입니다. 어디로 갈 것인지 미리 정해주지 않으시고 그때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계속해서 가라는 뜻합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하라] 말씀하실 때에는 반드시 [이렇게 이렇게 된다]는 약속의 말씀도 함께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순종하면 큰 민족을 이루게 되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 이름을 창대하게 해주실 뿐만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약속된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한 것같이 저와 여러분도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2: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씨]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16절에서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윽박지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하라고 말씀하시는 명령 앞에 언제나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결단만 내리면 힘을 주십니다.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물질도 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에 무조건 순종하기로 결정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모든 성도에게는 선교의 사명이 있습니다. 성도는 선교해야 할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이사야 44:21절을 보면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그들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고 하나님을 믿어 구원얻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것으로 다 된 줄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 인간들을 구원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선교사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선교사로 보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최초의 선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명의 제자들은 모두 다 선교사가 되어 복음을 열심히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신약성경의 사도행전은 이들이 어떻게 선교를 하다가 어떤 역사가 나타났고 또 어떤 어려움을 당했는지에 관하여 기록한 책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제자들로 인하여 오늘날 이 땅에 수십 억의 기독교인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4:14절을 보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며, 천국 복음이 다 전파되면 마침내 이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나는 날은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이며,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우리 주님이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계 11:15).
다니엘 2:44절을 보면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해서 세워지는 나라는 이제까지 인류 역사상 나타났다가 사라진 그런 나라가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세계 복음화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복음화가 반드시 이루어지는 이유는?
1.하나님의 뜻임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성경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은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전지 전능하시고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능히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선교를 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1.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하신 백성을 모두 구원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2.선교의 일거리를 주심으로 해서 우리의 신앙을 건강
하게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3.장차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면류관 상급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계시록 2:26-27절을 보면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일을 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일을 하는 그 사람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20:4절에서도,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영혼들과 무서운 환난과 핍박중에도 신앙의 지조를 지킨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한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0:29-3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면 얼마나 어려움이 클까 하는 생각부터 먼저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 살 때, 장차 받을 영광도 크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백 배의 기쁨이 있고 백 배의 축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선교를 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어 구원받고 축복 받는 것은 좋아하지만 십자가는 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27). 누구든지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으면 선교를 할 수 없습니다. 선교는 돈보다 우선 사람이 필요합니다. 복음을 들고 땅끝까지 가서 죽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는 선교사들의 묘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500명의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1956년 1월 2일에 피튼 선교사가 자기 아내에게 긴급전보를 쳤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흥분한 인디언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기도해주세요.” 그 후에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튿날 구조대원과 가족들이 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피튼을 비롯한 다섯 명의 선교사들이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순교한 것입니다. 20대의 젊은 선교사 부인들은 남편의 시체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하나같이 “남편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우리가 완수하리라.”는 비장한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순교한 젊은 선교사들의 아내들은 짐을 싸들고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 마을 아우카로 들어가 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4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마을이 완전히 예수 믿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선교사를 죽이는데 가담했던 다섯 명의 인디언 중에서 4명이 목사가 되었고, 천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다 기독신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존 게디라는 이름의 카나다 선교사는 기도하다가, 아직도 식인종이 살아있다고 전해진 뉴 헤브라이드 섬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식인종에게 잡혀먹을 각오를 하고 그 섬에 들어가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섬 사람들의 언어를 배워 신약성경을 번역하고 그들에게 온갖 사랑을 다 쏟으며 헌신했습니다. 그 결과 선교사의 헌신에 감동을 받은 원주민들이 모두 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이 선교사가 죽었을 때 그의 무덤의 비석에는 [1848년 그가 이 섬에 상륙했을 때 기독교인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1872년 주님의 품에 안겼을 때에는 이 섬에 식인종이 하나도 없었다]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23절에서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할 때 영광으로 알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믿는 사람들 중에 선교를 위해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들이 왜 이리 적습니까?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성령충만함을 받은 사람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아니하고는 결코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이전의 사도들의 모습은 형편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에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생명 걸고 담대하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감격스러운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바나바와 사울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선교를 떠나게 되었고, 이 일이 금식기도하는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금식기도는 생명을 바쳐서 기도하는 기도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바칠 각오로 기도할 때 그들은 성령의 음성을 들었고, 성령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으며, 선교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앞으로 우리 교회가 선교대회를 할 때는 선교를 위해 금식기도하는 날로 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금식기도하는 중에 선교사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를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아낌없이 드리는 헌신된 사람이 많이 나와 선교센타를 짓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저의 소원은 우리 교회가 20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1. 성령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선교비 지출에 인색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3. 선교사를 대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4. 내 교회, 내 교파, 내 민족의 벽을 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는 선교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년간 10억 정도의 예산을 선교에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2000명 이상의 선교사를 각 나라로 보낸다 해도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할 수 없는 이유를 고린도전서 9:16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이 일은 부득불 해야 하는 일이며, 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를 보면, 만일 우리가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므로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죽게 되면 그 사람의 피값을 우리에게서 찾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듣지 않았다면 그 사람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땅 끝까지 가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선교는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힘으로 된 줄 착각할까 봐서 이 일에 부족한 사람을 들어쓰셨고, 선교사를 파송할 때도 이방인들의 교회를 들어 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리아 수가성 사람들을 구원할 때도 과거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도 남편이 아닌 사람과 살고 있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 밖에 다닐 수 없는 이런 부끄러운 여인을 들어 쓰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우리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런 사람들을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고전 1:26-29).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선교에 힘써야 하고, 선교를 한다고 해도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23 / 김진호 목사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을 3년간 믿고 따라 다니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여지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속에서 문을 꼭 잠그고 숨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곳에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찌어다"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는 무엇을 가장 절박하게 찾게 됩니까? 밝은 빛입니다. 춥고 떨리는 때는 따뜻함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당시에 상황은 믿고 의지했던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로마병정들이 이곳저곳에서 평소에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무리들을 요주의 인물로 감시하고 있을 때 제자들은 자기들도 언제 잡혀가서 죽을지 알지못한 상황에서 두려움과 불안의 먹구름이 꽉 쌓인때에 이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맘에 평안이요, 평강이요, 평화입니다.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시자마자 바로 그날밤에 처음 제자들을 만나자마자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맘에 평안과 평강이 있어야 기쁨도 있고 행복도 있지 평안과 평화가 없는데 무슨기쁨과 축복이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 우리가 전쟁이 터져서 언제 적들이 나타나 우리를 해하거나 죽이려고 한다면 그런 상황에서 아파트가 크면 뭘하고 진수성찬을 차린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문제는 평안입니다. 평강입니다. 당시에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평강이요 평안이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부활하시자마자 하실말씀도 많은데 그의 첫 번째 말씀이 "평안할지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은 너무나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극도의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에서는 작년 9.11 사태이후에 각 가정마다 독까스를 막기위한 방독면을 비치해 놓지않으면 안되고 고층 아파트나 고층빌딩에는 반드시 불의에 사고를 대비해서 낙하산을 준비해 놓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세계 가장 잘살고 최고의 문명국이지만 그들의 내면에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차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2000년전에 있었던 당시의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평안과 평강이 절실한 것이 아닙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모두에게도 평안과 평강과 평화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러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할 때 하늘의 천사들의 노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로다"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느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해서 평안이 없어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까? 원인을 바로 알아야 치료도 바로되고 해결점도 바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로, 죄가 들어오면 평안이 떠나고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최초로 아담과 하와에게 이런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 왔습니다. 이들 부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따먹지말라는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조를 범하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두려워서 나뭇잎으로 자신의 몸을 감추면서 숨고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앞에 잘못하면 두려워서 숨는 것과 똑같습니다. 최가 있는곳에 평안이 떠나갑니다.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평화가 떠나고 전쟁이 찾아옵니다. 제자들은 지금 불신의 죄를 범하고 맙니다. 평소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리라는 말씀이 있건만 이 말씀을 때로 믿는 자가 되지 못하고 의심하는 불신의 죄가 이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게 한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성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쟁과 테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팔레스타인 민족간의 갈등과 미움과 복수의 죄로 그곳에 평화가 없습니다. 이들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한다면 그곳엔 계속되는 전쟁은 그치고 말 것입니다.
수백번 강도와 도욱으로 3년간을 경찰의 눈을 피해 귀신처럼 나타났다가는 숨어버린 신창원이가 드디어 그의 애인의 집에서 변장된 모습으로 있다가 체포되었다-그가 경찰에 붙들리는 순간 "숨어살때보다 잡히고 나니깐 오히려 마음이 평안하다고 실토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물귀신 같은 신창원이도 죄짓는 순간부터 그는 불안과 공포속에 지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시면서 본문 23절에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의심하고 불신하는 불신앙의 죄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믿으라고-내가 죽고 다시 살아나리라고 미리 예수님이 말씀했건만 그들은 이 말씀을 믿지 않는 불신의 죄 때문에 그들속엔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뭔지 아십니까? 예수 안 믿는 죄가 가장 근본적이고 큰 죄입니다. 우리나라 말에도 "맞은 사람은 다리를 쭉 뻗고자지만 때린 사람은 발을 오그리고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평강하고 평화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해결해 주시기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엡 2:16"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고 2:17에서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찬송가 208장 2절 "주 예수 내맘에 들어와 계신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 머리털 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 눈 보다 더 희어졌네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맘에 오심"
지금 죄로 인해 고민되고 불안하고 두렵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 죄 용서함을 받으시고 맘에 평안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옛날 50년전 농촌에서 한 어린아이가 남의 참외를 따다 먹고는 늘 불안해서 그 앞을 못지나 갔다는 것이다.그가 얼마후 참외집 주인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니 다시는 그러지말라고 네가 잘못이라고 깨달으니 다시는 그러지말라고 네가 잘못이라고 깨달으니 모두 용서해 주겠다고-그래서 그 순간부터 이 아이는 두렴이 떠나고 맘대로 참외밭 주인집을 지나 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년이 누군 줄 아십니까?
둘째로, 소망이 없고 절망할 때 인간은 불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힘없이 돌아가시자 예수님께 대한 모든 기대와 희망이 다 무너졌습니다.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헛수고로 여겨지니깐 후회도 됩니다. 이젠 주님께 대한 희망은 다 사라지고 절망케 되니깐 그들은 불안과 공포가 그들 맘속에 가득차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사셔서 그들 앞에 나타 나시면서 "영영죽어 없어질 내가 아니라 이렇게 너희들 앞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을 보여주시게 될 때 제자들은 다시 희망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기대를 갖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소망과 기대가 제자들에게 다시 살아 난다면 이들에겐 불안이 떠나고 평안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병들었을 때 불안하고 두렴이 있습니까? 회복된 다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복된다는 희망이 있다면 아무리 아파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회복 될 수 있고 다시 건강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환자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내일일 때문에 장래문제 때문에 불안합니까? 확실한 보장이 없기 때문에 불안합니까? 확실한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질 않기 때문입니다. 왜 자녀 문제로 부모들이 걱정하고있습니까? 자녀에게서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치룬 학생이 왜 불안합니까? 합격된다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사람들이 공포에 떠는 것은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고 천국이 있다는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게 죽음이 와도 "나는 예수 믿으니깐 천당갈 수 있다"는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 14:13에 "주 안에서 죽는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영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실 줄 모르고 있거나 의심하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그들은 다시 희망이 생겼습니다. 다시 소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기대를 갖게 되니깐 그들은 담대해졌습니다. 우리도 부활의 주님을 확실하게 믿을 때 우리는 절망치 앖습니다. 소망을 갖고 상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수 많은 성도들이 핍박속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찬송하며 기도하며 스데반처럼 그 얼굴에 기쁨이 넘치는 것은 오직 부활의 주님을 통한 산 소망 때문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베드로가 옥에 잡혀서 갇혀도 평안한 잠을 잘 수 있고, 사도바울이 감옥속에서 기도와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모든 근심과 불안을 주님께 맡기면서 맘에 평안과 평강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세상사람들은 불안을 해결해보려고 두려움에서 해방되려고 술도 마셔보고 마약도 맞아보고 어떤 취미생활에도 몰두하지만 그것으로 불안의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찬송가 469장 4절에 "이 땅위에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있나 우리모두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제 결론적으로 말씀 드립니다.
우리 주님께서 불안과 공포에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안과 평강이 있을지어다"란 말씀 속에는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함께 해주시면 주님이 제자들을 지켜주실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엄마 옆에 있는 어린아이는 그 엄마가 그 어린 아이에 먹고자는 것 입고 살아가는 것 모든 것을 책임져 주기에 불안해 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비니다. 그래서 마28:20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말씀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본문 22절에 예수님이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도 부활하시기전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속에 계셨으나 이제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그를 믿는자들과 함께 계시고 함게 지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골리앗이 나타나 호령할 때 이스라엘 군대들은 벌벌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소년 다윗만은 담대하게 그 앞에 나가 골리앗과 싸워 이겼습니다. 바로 다윗의 믿음속엔 "만군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켜주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시고 우리를 영영 떠나버린 분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지금 내 곁에 오셔서 날 지켜주시고 날 붙들어주시고 계속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런 주님을 제자들이 마가다락방에 성령을 통해 체험케 되니깐 얼마나 용감해졌으며 얼마나 담대해 졌습니까? 우리도 내 속에 성령을 통해 지금도 함께하시는 주님을 모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나라 황사바람 때문에 여기저기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황사바람은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 심지어 이 바람은 하와이까지 불고 있답니다. 그런데 황사바람은 중국에 있는 모래벌판인 사막에서 시작 된다고 합니다. 사막을 옥토로 변하게 하지 않는한 황사바람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환경전문가들과 정치인들이 이곳에 돼지감자를 심든지, 나무를 심어야 사막이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 불신과 죄악의 황사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고 있습니다. 시내 외곽을 나가면 먹자판 놀자판으로 이 사회가 오염되고 있습니다. 음란의 소굴이 치고 있습니다. 이 추하고 더러운 바람을 막자면 인간 맘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심어야 합니다.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면 죄악이 떠나고 불안이 떠나 참 평안이 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우리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살아나셔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놀라운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죽은 줄 알고 있었던 사람이 사실은 죽지 않고 있다가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돌아가신 분이 살아나셔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고 숨을 거두시는 것(요19:30)도 보았으며, 그의 십자가처형을 집행한 군인들이 그가 이미 죽으신 것을 확인하고는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나오는 것(요19:34-35)도 보았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그의 시체를 가져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와 함께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향품과 함께 세마포에 싸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있는 동산의 새 무덤에 안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살아나셔서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셨으니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놀라운 것은 그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안에서부터 걸어 잠그고 있어서 밖에서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 서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본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또 부활하신 그의 몸은 겉으로는 예전과 같아 보여도 새 몸이었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한 말이 없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첫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샬롬 알레헴”으로서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인사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건네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인사는 단순한 인사 이상의 큰 의미를 담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가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를 결정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는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를 이루시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참된 평강을 누릴 수 있게 해주셨으며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한 죄와 악의 세력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음을 선언하신 것이 바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물론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곧 하나님의 나타나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면 그는 곧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통념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었다가 다시 사셔서 들어올 수 없는 장소에 들어와 서계신 예수님 곧 하나님을 뵈었으니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싸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평강을 전하신 데는 제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안심하게 하시려는 뜻이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버리고 떠났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반가운 일이면서도 그를 다시 대면한다는 것은 배신의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고 그로부터 받을 질책 때문에 결코 마음이 편한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먼저 평강을 선언하신 데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확신을 갖고 마음의 죄책과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신 뜻도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다 걸어 잠근 방 안에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살아나셔서 다시 나타나시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시는 현실 앞에서 놀람과 두려움과 안도가 교차하는 가운데 과연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반신반의하고 있었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손의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의 상처를 눈으로 직접 확인시켜주심으로써 제자들이 지금 허깨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실제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 있음을 확신시키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기뻐했습니다. 제자들이 기뻐한 것은 첫째로는 돌아가셨던 주님을 다시 사신 채로 만나 뵙게 된 때문이며, 둘째로는 죽음의 공포와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벗어나 평강을 누릴 것을 주님으로부터 보장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만나서 처음 하시는 인사말이 아니기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신 말씀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반복하신 것은 이제 제자들이 누리는 기쁨이 헛된 기쁨, 근거 없는 기쁨,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기쁨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주시는 참되고 영원한 기쁨임을 확신시키시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모처럼 진정으로 기뻐하게 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것은 그때 예수님을 뵌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평강을 누리게 되고 기뻐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사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할 일 없이 놀라고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선교의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선교를 의미하는 “미션”(mission)이란 말은 바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의 라틴어 (missio)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선교사입니다. 선교사라는 공식직함을 가지고 어느 타 지역에 파송되어 가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나 기회 있는 대로 전도해야 할 사명을 지닌 우리입니다. 전도를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우리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존재들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명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와 그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평강을 전할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다른 말씀들을 들어봅니다. 마24:14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 하셨습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세주이시며 그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가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진리 즉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마28:19-20에 따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란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열린 천국의 복음을 증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우리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 그의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무엇을 위하여 보내셨습니까? 세례 요한의 증언대로 말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한 어린양으로 보내셨습니다(요1:29). 요3:16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보내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그가 주시는 물을 먹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며(요4:14), 그가 사람들이 먹고 영원히 주리지 않을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시려고 보내셨습니다(요6:32-58). 또한 그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하시기 위한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요8:12).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의 말씀 안에 거하여 그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됨으로써 죄의 종의 상태에서 자유롭게 되게 하시기 위하여 보내셨습니다(요8:31-36). 또한 그의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히 얻도록 목숨을 버릴 선한 목자로 보내셨습니다(요10:10-15). 또한 우리를 하나님께로 오게 하기 위한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보내셨습니다(요14:6). 또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우리 안에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기 위하여 보내셨습니다(요15:10-11, 17:13). 또한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해도 그의 승리 안에서 우리도 승리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보내셨습니다(요16:33).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진리로 거룩함을 얻고(요17:19) 하나가 되게(요17:22-23) 하시려고 보내셨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러하다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시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지는 더욱 구체적으로 확실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가 주시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며 그는 우리가 먹고 영원히 주리지 않을 생명의 양식이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를 따르면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말씀 안에 거하면 그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되어 죄의 종의 상태에서 자유롭게 됨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의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시는 선한 목자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오직 그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길과 진리와 생명임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만 우리가 사랑과 기쁨이 충만할 수 있으며 평안을 누리고 환난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으며 거룩함과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다는 진리의 증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살도록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은 보내신 이가 주신 과업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 과업을 수행하는 일에 전심을 드리고 전력을 다하며 전생을 바쳐야 합니다. 그 일을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사명을 주시고는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명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 없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람을 정죄하고 용서할 권한이 주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죄의 용서와 성령의 능력에 의한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와 기쁨을 선포하는 한편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심판에 이를 것임을 경고할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향해 은혜의 선포와 심판의 경고를 해야 할 교회를 다스리시며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는 우리가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온통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에게 적대적이던 때에 그 적대적 세상을 향해 증언하라 하셨습니다. 전도가 날로 힘들어지는 이때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전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 안 해도 제 발로 찾아오는 사람 많은데 뭐 하러 전도하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사람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 제 발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미 믿는 분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전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전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교회의 신자수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전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계속되어야 할 사명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리고 있는 놀라운 복을 증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우리 혼자만 누리며 만족하라고 주신 것 아닙니다. 우리 모두 열심있는 증인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