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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호박을 바라보며>
여러 농작물을 재배하는 가운데, 가장 신기하게 바라보게 되는 작물은 호박입니다.
봄에 1000원쯤 하는 모종 몇 개를 둔덕에 심어놓고, 거름을 듬뿍 줍니다.
완전히 잊어먹고 있었는데, 가을이 오면 온 둔덕이 호박넝쿨과 호박잎 천지로 변합니다.
여기 저기 묵직하고 탐스런 호박들이 숨어있습니다.
어떤 녀석들은 얼마나 무거운지 혼자서 들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탐스럽게 잘 익은 녀석들 때문에 올 가을 축제 때는 호박죽을 제대로 쑤어 팔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올 호박 농사가 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호박과실파리라는 녀석들 때문입니다.
호박재배 농가의 피해는 심각합니다.
더 괴로운 것은 퇴치를 위한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렇게 잘 자란 호박의 겉모양은 정말 멀쩡합니다.
오랜 나날 자식 키우는 심정으로 잘 키웠다가 설레는 마음으로 수확합니다.
시장에 내다 팔거나, 호박즙을 생산하는 건강원에 납품합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항의가 빗발칩니다.
물건 도로 가져가라고.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으면 어떻게 이따위 호박을 팔 수 있냐는 말을 들으며 호박을 거두어 와야 합니다.
호박을 잘라보면 호박과실파리 유층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호박과실파리 녀석들이 애호박 시절, 애호박 안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호박 내면에 자리 잡은 알들은 애벌레가 될 때까지 그 안에서 성장을 거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
불행하게도 그들은 호박과실파리들로부터 철저하게 유린된 썩은 호박과 같았습니다.
겉은 멀쩡했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이 봉헌하는 헌금의 액수도 대단했습니다.
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았을까요?
그들은 철저하게도 이중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삶이 가식적이었습니다.
위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잘 보이기보다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바빴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비쳐졌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진 곳에서는 호박씨를 깠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귀신같이 꿰뚫어보시던 예수님이셨기에
그토록 철저하게도 이중적인 인간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악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생에 걸쳐 노력해야할 것이
바로 위선과 이중성의 극복입니다.
사람보다는 하느님 앞에 똑바로 서기입니다.
언행일치, 기도와 삶의 조화, 신앙과 생활의 통합, 전례와 삶의 일치입니다.
미사 가운데서는 천사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는 말과 함께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게 될 때,
우리 역시 예수님의 신랄한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바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 시간이 ‘땡’하기 무섭게 주변 사람들 괴롭히고 족치는 사람들,
예수님의 무서운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련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지혜 예찬>
저는 어제 난생 처음 황금빛의 아름다움을 체험했습니다.
한마음 수련원에 계신 주교님을 찾아가던 중
논에 익어가는 황금빛 눈부신 벼들이 정말 황홀했습니다.
원숙한 지혜로 빛나는 노년의 아름다움을 연상케 했습니다.
또 함께 운전하던 수사님의 말도 잊지 못합니다.
“운전을 배울 때 ‘초보자처럼 운전을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운전만이 아니라 늘 초보자처럼 살아감이 바로 겸손의 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지혜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지식과 정보의 홍수 시대에 분별의 지혜가 참으로 절실합니다.
옛 어른들은 지식은 짧았지만 삶의 지혜는 깊었습니다.
지혜 없는 지식은 짐만 될 뿐입니다.
얼마 전에 타계한 IT의 전설이 된 스티브 잡스의 잠언입니다.
‘오늘이 생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가슴을 따라 살아야 한다.’
‘타인의 견해가 네 내면의 목소리를 삼키지 못하게 하라.’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내는 것이다.’
‘늘 갈망하라.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남의 인생을 사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마라.’
지혜를 갈망하고 지혜에 따라 살라는 말입니다.
지혜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입니다.
지혜는 그대로 진선미 하느님의 반영이라 참되고 좋고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 그대로 지혜를 찾는 사람입니다.
지혜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입니다.
간절히 하느님을 찾고 살 때 선물처럼 발견되는 지혜입니다.
‘찾고 구하여라.
그러면 지혜가 너에게 알려지리라.’
(집회6,27)
‘지혜를 찾으면 얼마나 행복하랴!
지혜를 얻는 것이 은보다 값있고 황금보다 유익하다.’
(잠언3,13-14참조)
하느님을 찾지 않아, 하느님을 몰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똑똑한 바보들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묘사하는 바 바로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받았는데
하느님을 모름은 직무유기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지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진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찾지 않은 까닭에 자초한 어리석음입니다.
새삼 끊임없는 하느님 찬양과 감사가 탐욕을 비워 지혜롭게 함을 깨닫습니다.
지혜롭다고 자처하지만 바보가 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개탄하는 현실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예나 이제나 많은 사람들은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것들의 형상으로 바꾸고,
하느님의 진리는 거짓으로 바꾸며,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받들어 섬깁니다.
하여 마음은 욕망으로 더럽혀지고
몸도 수치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떠남으로 자초한 결과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 역시 똑똑한 것 같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재산 관리, 몸 관리, 건강 관리, 명예 관리, 지위 관리의 외적인 것 이전에
내적인 마음 관리입니다.
바리사이에 대한 질책은 우리에게도 참 유익한 경종이 됩니다.
“정녕 너희 바라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본말전도, 주객전도의 어리석음을 반영하는 바리사이들입니다.
속이, 마음이 깨끗하면 저절로 전체도 깨끗해집니다.
사악과 탐욕을 비우면 비울수록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탐욕만 비워 마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지혜를 발견합니다.
깨달아 발견하여 알게 되는 지혜입니다.
이게 평생 우리 수행의 목표입니다.
무욕의 지혜입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자기를 비워갈수록
깨끗한 삶, 겸손한 삶, 지혜로운 삶입니다.
결론하여 아름다운 삶입니다.
삶의 여정은 비움의 여정이자 지혜의 여정입니다.
비워갈수록 지혜로 빛나는 황금빛 영혼의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주님은 매일 미사를 통해
우리 내면의 사악과 탐욕을 말끔히 비워주시고
당신의 지혜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아멘.
- 성베네딕토수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지난주에 여행을 다녀온 뒤 일이 밀려서 계속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행기도 써야 하는데, 문제는 저에게 주어진 일들의 처리가 더욱 더 시급한 상황이네요.
예비신학생 일, 성소국 일, 각종 특강과 써야 할 원고 등의 일이 제 앞에 놓여 있습니다.
또한 새롭게 나온 책의 판매 역시 저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시간은 별로 없고 해야 할 일은 많아서 걱정이 앞섭니다.
사실 걱정이야 아무리 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하지요.
그러나 막상 이렇게 많은 일들이 제 앞으로 다가오니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묵상을 하다 보니
이러한 걱정들의 원인은 너무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도 신경 쓰고, 저것도 신경 쓰고 하다 보니 모든 걱정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었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큰 걱정이었고 그래서 과연 이 순간이 지나갈까 했습니다.
그러나 지나가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순간도
지금 와서 보니 모두 지나간 옛날이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그때를 떠올리며 ‘그때가 좋았는데’라는 말을 하며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걱정 역시
조금만 미래의 시간으로 가면 모두 괜찮은 일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조금만 더 넓게 보아야 할 때입니다.
지금의 작은 것에 매어 사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주님 앞에서 누릴 영원한 행복이라는 커다란 가치에 중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걱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이었던 바리사이들이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그들은 오늘도 예수님께 반대의 의견을 내놓습니다.
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위생상의 문제를 떠나 하느님께서 주신 음식을 먹기 위해 손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작고 세세한 것에 신경 쓰면서 더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다면 말짱 헛것이라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주신 거룩한 음식을 모시기 위해 손을 씻는다면서
정작 마음속에 온갖 죄악이 가득하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우선이고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지요.
겉으로 보이는 작은 것에 모든 걱정을 쏟아 붓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에 적합한 일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활만이 나의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몸만 씻지 말고 마음을>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으셨다는 것은
식사 전의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 정결 예식은 복잡한 종교 예식이었습니다.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로 손을 씻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으신 일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던 바리사이들의 기준으로는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처럼 거룩해지는 것이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목적이었는데,
구약시대 사고방식으로는 거룩함과 깨끗함이 동일시되었습니다.
그 사고방식 때문에 그들은 복잡한 정결 예식을 만들어서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정결 예식은 원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내적인 거룩함을 외적인 정결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정결 예식만 잘 행하면 거룩해지는 것으로 변질되어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손만 잘 씻으면 마음도 씻은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외적인 예식에 집착하지 말고 속부터 깨끗하게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한데 겉만 깨끗하게 하는 것은
거룩한 척 하는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이천 년 전의 유대인들을 비판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입구에 놓인 성수를 찍어서 성호를 긋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정결 예식입니다.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속세의 때와 먼지를 씻어내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자, 그런데 과연, 항상 그 뜻을 생각하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성수를 찍어서 성호를 긋고 있는가?
(정말로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성전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가?)
아니면, 그냥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성수를 찍어서 성호만 그으면 저절로 깨끗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더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것은 고해성사입니다.
사실 진실하게 회개한 사람은 회개의 결과로 자기 죄를 고백하게 됩니다.
(죄의 고백은 원래는 회개의 시작이지만,
고해성사의 죄 고백은 회개를 했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고해성사 5단계 - 성찰, 통회, 고백, 정개, 보속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성찰, 통회는 고백 전에 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통회의 결과가 고백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고해성사의 다섯 가지 요소 중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고백과 보속에만 집중하고 성찰, 통회, 정개는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고해성사라는 형식이 회개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았으면서도
형식적으로 고해성사만 거치면 회개가 된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만 씻지 말고 마음을 먼저 씻으라고 하십니다.
경건한 척, 거룩한 척 하지 말고
진짜로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겉으로 ‘척’만 하는 것과 진짜로 경건하고 거룩한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어떤 이는 겉으로라도 경건한 척, 거룩한 척 하다보면 언젠가는 진짜로 경건하고 거룩해질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하기도 하는데,
그건 궤변입니다.
겉으로만 경건한 척, 거룩한 척 하는 것,
즉 위선은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 전주교구 함열 본당 상지원 공소
* <굿뉴스> '매일미사'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맥스 비어봄(Max Beerbohm)이 쓴 『행복한 위선자』라는 짧은 소설이 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조지 헬(Hell: 지옥)은
이름자 그대로 부도덕하고 탐욕스럽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가 어느 날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제니 미어’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납니다.
그러나 방탕하고 흉측한 그의 얼굴로는 그녀의 마음을 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랑에 빠져 그녀를 포기할 수 없게 되자
밀랍으로 성자(聖者)의 마스크를 맞춥니다.
이 마스크는 매우 정교해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의 본디 얼굴을 아는 사람은
마스크를 만들어 준 사람과 마스크 가게에서 나오다 마주친 옛 연인 ‘갬보기’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조지 헬은 이름도 조지 헤븐(Heaven: 천국)으로 바꾸고
성자의 마스크를 쓰고 사랑하는 제니 미어에게 다가가 사랑을 고백하여 혼인을 합니다.
그러나 그의 행복한 혼인 생활 뒤에는
자신의 흉측한 내면, 자신의 과거 모습이 탄로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성자처럼 자신의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착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가짜 얼굴과 마주하는 자신의 사랑하는 제인 미어에게 미안함과 무거운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정체를 아는 옛 연인 갬보기가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들의 혼인 생활이 행복할수록 질투심에 가득 찬 갬보기는 그들을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행복하게 사는 제인 미어를 만나 남편의 정체를 폭로하며 그녀가 보는 데서 그의 마스크를 벗기고 맙니다.
그런데 마스크가 벗겨진 순간
옛날 흉측했던 조지 헬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고
오히려 그의 얼굴은 성자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가면 뒤에서 끊임없이 회개하고 성자의 얼굴을 닮으려고 애써 노력하여 그의 얼굴이 바뀐 것입니다.
성자의 얼굴이 된 그는
이제 자신의 진짜 얼굴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진실한 사랑의 입맞춤을 하며 소설이 끝납니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누구나 이런 가면을 쓰고 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에게 보이는 가면을 나의 진짜 얼굴로 착각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겉과 속이 다른 나’를 살고 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약함과 죄스러움을 주님께 고백하고 꾸준히 선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월과 함께 자신이 쓰고 사는 성자의 얼굴 마스크는 나의 진짜 얼굴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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