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없이 지낸 지가 몇 년이 흘렀지만,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꼭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딱 두 개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일흔을 훌쩍 넘긴 할아버지 배우들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같은 여배우들이 번갈아 가며 해외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워낙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젊은이들과는 또 다른, 인생을 돌고 돌아 지금의 자리에 선 이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반응과 감상이 참 신선하게 느껴져서 금요일 밤마다 인터넷을 뒤지게 됩니다. 특히 터키 이스탄불의 옛 아야 소피아 성당의 웅장하고 화려한 내부를 보며 “내가 늙어서 그런지, 이걸 짓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을까 하는 생각에 슬퍼져”라던 여배우 윤여정의 말은 확실히 강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건축물을 계획하고 돈을 대고 그 결과물에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땀과 눈물, 때로는 목숨까지도 희생하면서 지은 대건축물에 아마도 평생 동안 발 한번 들여놓지 못했을 힘없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평소 스스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반응이 아닐까 합니다. 미국 9.11 테러 사망자 수를 훨씬 뛰어넘는 4,000명이 카타르 월드컵 공사 중 사망할 것으로 예상돼 제가 뜬금없이 그 장면을 떠올린 건, 며칠 전에 읽은 어느 기사 때문이었습니다. 국제노동조합연맹(ITUC)이 지난 3월 중순에 ‘The Case against Qatar'라는 제목의 특별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거기엔 2022년 월드컵 개최국인 카타르에서 축구 경기장과 사회기반시설 공사에 투입된 노동자들 가운데 이미 사망자가 1,200명을 넘어섰고, 지금 추세대로라면 월드컵 개막전까지 모두 약 4,000명이 사망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 | | ▲ 2010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회는 카타르를 월드컵 개최국으로 결정했다. (사진 출처 / FIFA 홈페이지) |
세상에나! 4,000명이면 미국의 9.11 테러로 인한 사망자 수 2,843명을 훌쩍 넘어가는 숫자라고 하니, 9.11때만큼이나 세상이 발칵 뒤집어질 만한 일대 사건이 아닐까요? 하지만 지금까지 세간의 반응은 무덤덤하기만 합니다. 그보다는 올 6월에 열리는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할 국가대표팀 감독의 말 한마디에 귀를 더 쫑긋 세우는 게 현실인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저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2010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회에서 카타르를 월드컵 개최국으로 결정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의 첫 반응은 이랬습니다. “아니, 그 더운 나라에서 선수들더러 뛰어다니라고? 관중들은 뙤약볕에서 쪄죽을 지경일 텐데?” 앞으로 뜨거운 사막에서 경기장을 짓고 도로를 닦고 호텔을 세워야할 노동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머리에 떠올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겁니다. 아무튼 그래서 국제노동조합연맹의 보고서를 토대로 지금 카타르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좀 더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유치한 국가들이 다 그렇듯, 카타르 정부 역시도 중동 최초의 월드컵 개최를 국가 이미지 개선과 관련 산업 활성화를 통한 ‘국운상승’의 계기로 삼을 꿈에 부풀게 됩니다. 그래서 모두 약 1천 4백억 달러(한화로 약 150조원)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비전 2030’ 계획을 수립하고 대대적인 국토 재개발에 착수했다지요. 여기엔 50억 달러가 투입되는 12개 월드컵 경기장의 신개축뿐만 아니라 국제공항 신축과 철도, 항만 건설, VIP들이 묵을 수 있는 최고급 호텔 세 곳을 포함한 국제축구연맹 단지 조성 등 하나같이 입이 딱 벌어지는 대형 건설토목공사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결승전이 열리게 될 루사일 시티, 외국 관광객들을 위한 아파트와 호텔이 지어질 바르와 시티, 상업 지구인 도하 페스티벌 시티 등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도시들을 사막 한 가운데에 새로 조성하겠다는 원대한 계획까지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 필요한 인력은 이미 전체 인구 200만 명의 70%가 넘어선 기존의 140만 명 이주노동자들에다가 추가로 50만 명의 이주노동자들을 더 데려와 충당할 계획이구요.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지금 현재도 이미 카타르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강제 노동, 아니 사실상 거의 노예에 가까운 상태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국제노동연맹이 직접 돌아본 ‘수용소’ 10곳의 노동자들은 침실 하나에 적게는 8명, 많게는 16명이 바닥에 얇은 매트리스를 깔고 지내고 있었으며, 24명이 화장실과 부엌 하나를 나눠 쓰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노동자들은 아침에 제대로 씻지도 못한 상태로 비좁은 숙소를 나와 통근 버스에 몸을 싣고는, 보통 하루 12시간에서 16시간까지 일터에서 일을 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와서 쪽잠을 청하는 생활을 일주일에 엿새 동안 반복합니다. 게다가 사막의 경기장이나 도시 건설에 투입된 이들은 그나마 숙소에 오지도 못한 채 공사장 한 편에서 쭈그리고 잠을 청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합니다. 50도가 넘는 더위에서 일하다가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어 작년 9월 카타르의 노예 노동 실태를 보도한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 지의 기사에 등장하는 27살의 네팔 청년은 24시간 내내 먹을 것도 주지 않은 채 일을 시키는 감독관에게 항의했다가 오히려 수용소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동료 노동자들에게 음식을 구걸하러 다니는 신세가 됐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특히 카타르에서는 6월 중순부터 8월말까지는 기온이 50도 넘게 치솟아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 3시까지는 일을 못하게 노동법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현장에서는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절대 다수가 2,30대 청년들인 이주 노동자들 가운데 사망한 이들의 상당수가 장시간 더위에의 노출로 인한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에도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 | | ▲ 카타르 월드컵 공사 현장 (사진 출저 / Russia Today 유튜브 갈무리) |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고용주에게 쉽사리 불평불만을 털어놓거나 항의를 하지 못합니다. 물론 노동조합을 만드는 건 더더욱 꿈도 못 꿉니다. 취업에서부터 임금, 작업 환경, 신분증 발급까지 고용주가 모두 결정하도록 보장해주는 카타르의 저 악명 높은 카팔라(kafala) 시스템이 있기 때문입니다. 카팔라 시스템 하에서 노동자들은 현재의 일터에 불만이 있어서 직장을 옮기려면 현재의 고용주로부터 동의서(Non Objection Certificate)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고용주들이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리고 동의서 없이 일터를 벗어나면 바로 경찰에 체포돼 구금시설에 무기한 감금돼 있다가 빈손으로 쫓겨나게 되죠. 심지어 고용주의 허락 없이는 일을 그만두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습니다. 카팔라 시스템에 그렇게 규정돼 있거든요. 이건 가난한 건설노동자나 가사노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카타르의 프로축구팀에서 주장으로 뛰던 자히르 벨루니스라는 알제리계 프랑스 선수도 임금체불에 항의했다가 쫓겨나 2년 동안 카타르에서 가족들과 함께 오도 가도 못한 신세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런 사실들과 더불어 카타르가 월드컵 개최권을 따기 위해 각국 집행위원들을 매수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일각에서는 카타르의 개최국 자격을 박탈해야 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곳의 이주노동자들의 삶이 더 나아지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월드컵을 개최하려면 카팔라 같은 전근대적인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이주노동자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하라고 요구하는 게 올바른 순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채 현재의 상태 그대로 2022년의 그날이 찾아와, 4천 명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 지어진 웅장한 경기장 안에서 뛰어다니는 선수들을 보며 우리와 전 세계인들이 환호하고 열광하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이들을 가리켜 흔히 사이코패스라고 하던데, 우리가 집단적인 사이코패스가 돼서는 절대 안 될 일입니다. 최재훈 (안토니오) 국제연대단체 '경계를넘어'의 회원으로 활동. 2008년에 노엄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개정판, 이후출판사)을 번역했으며, 2011년 7월에는 여행기 <괜찮아, 여긴 쿠바야>를 공동집필해 출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