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학 예비고사는 외국의 국가고시제도를 본 떠 마련된 제도로
대학의 질적 저하를 방지하고 고교교육을 정상화하며
대학교육에 적합한 인재(대학입학 시험의 응시자격 여부 판정)를 선발한다는 목적으로 실시되었으나
실행 이후 예비고사와 본고사의 병행 실시에 따른 수험생 부담 가중,
과열과외로 인한 가정경제 압박, 재수생 누적 등 여러가지 부작용이 사회문제로 부각이 됩니다.
오늘(1968년 12월 19일)은 대학정원의 150% 가량인 6만1천2백15명의 합격자안에 들기 위하여
11만2천4백36명이 전국 15개 지구 84개 고사장에서 시험을 치른 날 입니다
군사정부가 교육쇄신방안의 하나로 실시한 대학입학자격 국가고사제 이후
다시 국가가 대학입시에 관여한 입시제도인 대학입학 예비고사가 처음으로 치러진것 입니다
용현초등학교 출신 동문들의 경우 16회 졸업생들 까지는
대학입학 예비고사와 본고사는 물론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입학시험을 치러야하는
이른바 입시지옥의 해당자들 입니다
'이제까지 힘들었다', '나 보내달라, 고생했다고 말해달라',
어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떤 젊은 가수가 남긴 말 이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러가지 모양으로 끝을 모르는 경쟁에 내몰리는 우리들의 모습인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1969년 초반까지 전국적으로 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올라갈 때
연합고사(중학교 입학 선발고사)를 보고 합격을 해야 중학교에 들어 갈 수 있었읍니다
당시에도 1류, 2류, 3류 중학교가 있어 수험생의 수준에 맞는 중학교에 지원을 하고
그 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았는데
지금의 수능시험처럼 전국의 중학 입시생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문제(문교부 중앙고시위원회가 출제한 문제)로 시험을 쳤읍니다.
입학시험은 필기시험이라 불리던 학과 시험(국어와 산수는 물론 자연, 사회, 음악, 미술 등 전 교과목)과
체력장이라 불리우던 체능고사(體能考査 100m 달리기, 턱걸이, 팔굽혀펴기, 공던지기 4과목)를
이틀간에 걸쳐 나누어 치러졌읍니다
당시 중학교는 전기, 후기 두차례로 나눠 신입생을 모집했으며 전기 불합격자는
후기 모집 중학교에 또 한번 시험 칠 기회가 주어졌읍니다.
이 제도는 문교부가 69학년도 중학 신입생부터 무시험입학제(서울 외 지역은 70년도부터)로 바뀌면서
이땅의 어린이들은 중학교 입학시험의 중압감에서 해방이 됩니다
당시 용현초등학교의 6학년 학생들의 경우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 하거나 엄두를 내지 못하여
사회생활로 뛰어들었던 아이들이 무척 많았는데
그들 중에서 공부에 소질이 있던 학생들은 공장에 다니면서 야간에 공부하는 아이들도 있었읍니다.
이틀동안 치러지는 중학입학시험의 첫날
한창 뛰어놀아야 할 초등학교 6학년 수험생이 한 문제라도 더 풀기 위해 애 쓰는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67년 12월 1일)
입시 2일째인 체능고사 시험장. 엄숙한 표정의 감독관과 가슴에 수험표를 단 수험생들이
초조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여자 수험생 어린이들이 팔굽혀펴기(남학생들은 턱걸이)를 하고 있읍니다
수험생들이 수험을 치르고있는 고사장(응시학교)의 교문밖에는
학부형들이 추위와 초조감 속에서 하루종일 수험생들을 기다립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바람이 전하는 말>,<알고 싶어요>, <맆스팈 짙게 바르고>,
<타타타>, <그 겨울의 찻집>등
명품 노랫말을 만든 양인자(작곡가 김희갑의 부인)씨는 40살이 될때까지 신춘문예에 투고를 하다가
신춘문예를 포기하며 쓴 글이 < Q>라고 합니다
'내가 쓴 글에 절망하던 날. Q는 나의 문학이었다.' - 양인자 -
Q (1989) - 작사: 양인자, 작곡: 김희갑, 노래: 조용필
(조용필 앨범 10집 part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