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7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마르코 8,34-9.1
자녀는 언제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게 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당신 뒤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만이 결국엔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그 말씀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예는 ‘순교’라 할 수 있습니다. 순교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배척당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고 세상의 힘에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신일덕 기장이 조종하는 사이판행 대한항공 725편 비행기에는 신혼부부 61쌍을 비롯한 165명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이렇게 종교적으로 안내방송을 하였습니다.
출발하는 김포공항은 하늘이 높고 푸른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보여 주었습니다.
“일생에 처음 가는 신혼여행이 알찬 여행이 되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비행이 되셨으면 합니다.
부디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철저한 불교 신자였던 부기장은 이런 기장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기내 방송을 마치고 비행기를 무리 없이 조종해 가고 있었습니다.
비행 도중 하와이 관제탑에서 사이판 기상이 너무 나빠 천둥이 치고 장대비가 내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아열대성 기후는 예측하기 어려워 날씨가 변덕스럽지만, 염려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착륙 15분 전에 문제가 생겼다.
그는 기관사로부터 다급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기장님, 하이드롤릭이 새고 있습니다.”
하이드롤릭이란 비행기가 바퀴를 올리고 내리는 장치에 사용되는 유압입니다.
이것이 빠져나가면 바퀴를 자동으로 내릴 수가 없습니다.
보고받자마자 조처하였지만 내부 압력이 워낙 강하여 즉시 관이 파열되어 유압이 모두 새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수동으로 조작할 수밖에 없는데 몇 번을 시도해도 수동 장치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괌 관제소에서는 착륙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자 이상히 여겨 연락이 왔습니다.
“KE5725, 여기는 괌 컨트롤. 무슨 일인가?”
“괌 컨트롤. 여기는 KE5725. 랜딩기어 하이드롤릭이 모두 샜다.”
괌 관제소에서는 “자갈밭으로 된 보조 활주로에 동체 착륙하라”라는 긴급 지시를 내렸습니다.
연료는 얼마 남지 않았고, 비는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신 기장은 조종관을 부기장에게 맡기고 기관사와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비행기에 벼락이 내리꽂히며 전기가 나가
비행기 안은 암흑으로 가득 찼습니다.
탑승객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부기장의 조롱 섞인 말에도 기장은 일어서서 기도하였습니다.
피를 말리는 기도는 울부짖음이었고 절규로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울부짖으며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늘로 신 기장의 몸이 붕 뜨는 듯하며 황홀한 환상 속에서
세미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 41,10)
그 사이 객실 사무장은 비상 착륙을 대비해 비상 착륙 시 행동 요령을 승객들에게 교육하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신 기장은 용기를 내어 기관사에게 한 번 더 수동 착륙 장치를 돌려보라고 지시했습니다.
기관사는 포기한 듯 핸들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노력해도 돌아가지 않던 핸들이 돌아가고
바퀴가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기적이었습니다.
조정실에서 신 기장은 소리쳤습니다.
“승객 여러분, 저는 기장입니다. 모든 바퀴가 정상적으로 내려왔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이 비행기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십니다.”
그는 모든 승객에게 감격에 떨며 이렇게 방송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큰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드립니다.”
그는 이 놀라운 은혜를 승객들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내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의 눈물은 비행기가 착륙해 계류장으로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멈추지 않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기장의 얼굴을 보고 내리려는 승객들을 하나하나 다 인사하며 내려주고는 조종실로 갔습니다.
불교 신자였던 부기장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고 신 가장은 하느님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힘들게 들어온 대한항공에 사표를 내고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대한항공 수석기장으로 30년을 근무한 그의 한결같은 기내 인사에서도 그가 믿음의 사람임을 짐작게 하고 있습니다.
“이 비행기는 하느님이 동승하고 계십니다. 편안한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신 기장이 월남전에서 비행기 조종할 때도 그랬습니다.
미군을 태우고 폭격을 나갔다가 밑에서 쏘는 포에 맞아 비행기 동체에 불이 붙었습니다.
미군들은 뛰어내릴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기장은 조종관을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미군들은 이제 기장이 두려움에 미쳤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번개가 치는 듯하더니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신 기장은 불이 타는 비행기를 몰고 기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불이 다 꺼져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때 미군 39명이 신 기장이 양쪽 가슴에 넣고 다니는 작은 성경을 사 달라고 하였고 39명 모두 한 명도 전사하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가 다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1만 명을 전도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합니다.
신 기장은 가슴에 항상 성경을 넣고 다닙니다. 덕분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주일간 구금당하고 입국이 금지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은 박해가 따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죽는 법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믿지 않는 이를 싫어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를 비웃습니다.
하지만 보란 듯이 기도한다면 많은 이를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
우리는 지나친 개신교의 전도 덕분으로 조용히 전도하는 게 좋다는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드러나게 성호를 긋고 사람들을 함께 기도하자고 이끌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언제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일까요?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아는 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창피해서 그렇습니다. 부모가 나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낄 때, 그래서 부모가 옆에 있어도 외면할 때 그것이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할 수 있는데 하느님께 청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느님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세상에서 대놓고 기도하는 좋은 예가 김연아 선수에게 세례를 주게 되는 계기를 만든 하늘 병원의 ‘조성연 요셉’ 원장입니다.
그분은 아침부터 다른 일을 제쳐놓고 믿는 직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며 시작합니다.
그때는 기도가 아니면 누구도 원장실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성호경을 긋고 하는 기도의 힘을 보여 줍시다.
우리가 기도하면 세상에서는 박해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보고 박해하여도 상관없이 대놓고 기도하는 것, 이것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목숨을 잃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세상에 기도의 힘을 보여 줍시다.
하느님 아버지를 ‘능력’ 없는 분으로 만들지 맙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7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마르코 8,34-9.1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총은 바로 십자가 신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여러모로 미성숙했던 젊은 수도자 시절, 틈만 나면 제가 몸담고 있던 공동체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입만 열면 공동체가 이게 대체 뭐냐고 투덜거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사실 교회 공동체의 근본적인 속성 가운데 두드러진 속성 하나는 ‘죄인들의 모임’이란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면면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너나 할 것 없이 다 부족합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나약하고, 오늘 비록 우리가 상처투성이이고, 오늘 비록 우리가 이토록 형편없지만,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 천천히 성화와 완성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의 미성숙 앞에, 때로 생기는 스캔들 앞에, 이기심 앞에, 세속성 앞에 너무 당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문제성 많은 우리를 늘 기다려주셨듯이 우리 역시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느님을 보다 가까이 따르면 따를수록, 복음 정신을 보다 철저히 실천하면 할수록 ‘희한한’ 일이 한 가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노력이 더해짐에 따라 십자가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상처받는 일도 많아집니다.
고통도 커져갑니다.
때로 다 벗어놓고 떠나버리고 싶습니다.
그럴수록 복음서를 펼치십시오.
복음서를 읽고 또 읽으십시오.
복음서는 갖가지 고통과 상처, 십자가에 적절한 진단과 처방전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다양한 치료제, 다양한 노하우를 우리에게 전수해줍니다.
새로운 감성으로 다시 읽은 복음서는 갖은 의혹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희망의 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인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입니다.
다름 아닌 십자가를 꼭 껴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용, 자아 포기가 신앙인들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설명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 복음 8장 34절)
세상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십자가를 저주합니다.
십자가만 다가오면 기겁을 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총은 바로 십자가 신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징표로 보내주시는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순간,
나약하고 비천한 우리의 몸은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의 인생은 언젠가 반드시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사람의 길>
2023. 02. 17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마르코 8,34ㅡ9,1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참사람의 길>
앞섬이 아닌 따름의 길
홀로가 아닌 함께의 길
가짐이 아닌 비움의 길
오름이 아닌 낮춤의 길
누름이 아닌 받듦의 길
받음이 아닌 베풂의 길
밀침이 아닌 품음의 길
없앰이 아닌 이룸의 길
죽임이 아닌 살림의 길
찰나가 아닌 영원의 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