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컵
박목월
빈 것은
빈 것으로 정결한 컵
세계는 고드름 막대기로
꽂혀 있는 겨울 아침에
세계를 마른 가지로
타오르는 겨울 아침에
하지만 세상에서
빈 것이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서늘한 체념으로
채우지 않으면
신앙의 샘물로 채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나의 창조의 손이
장미를 꽂는다.
로오즈 리스트에서
가장 매혹적인 죠세피느 불르느스를.
투명한 유리컵의
중심에
(시집 『무순(無順)』, 1976)
[작품해설]
민요적 가락에 바탕을 둔 토속적 서정의 세계를 노래하던 박목월이 일상적 생활인으로서의 진지한 모습을 보여 준 중기 시를 지나 도달한 곳은 역사적 · 사회적 현실과 사물의 본질 추구 등 지적 인식(知的認識)의 관념적인 세계이었다. 이 시는 바로 그 같은 후기 시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깨달은 것 같은 달관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어찌 보면 호사스런 감정의 과잉이거나 초로(初老)의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허무 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에는 무의미하다고도 할 수 있을 듯한 ‘빈 컵’에서마저 따뜻한 애정과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목월 특유의 관찰격이 돋보인다. 이러한 심미안(審美眼)이 그의 인생관과 결합하여 잔잔한 공감과 미감을 자아냄으로써 이 시는 목월이 도달한 원숙한 경지를 잘 보여 준다.
충만한 영혼에의 구도적(求道的) 자세를 주제로 하고 있는 이 시는 ‘빈 것은 / 빈 것으로 정결한 컵’이라는 첫 시행에서 이를 단적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빈 컵’이란 화자가 도달하고 싶어하고 경지를 함축하고 있는 구절이다. 화자는 컵은 채워져야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어 있음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깨달음은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시인이 얻은 달관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고드름 막대기로 / 꽂혀 있는’, ‘바른 가지로 / 타오르는 겨울 아침’처럼 삭막하고 메마르고 거친 곳임을 인식한 화자는 그 같은 현실 속에서는 더 이상 ‘빈 것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 ‘빈 것은 / 빈 것으로 정결’할 수 있다지만, 현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음을 아는 화자로서는 이제 그것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빈 것’을 채우는 일은 피조문ㄹ인 인간의 의지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신 절대자만이 할 수 있는 일로, 마침내 ‘서늘한 체념’이나 ‘신앙의 샘물’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절대자가 주신 ‘신앙의 샘물’로 자신의 내면세계을 채운 화자는 그것으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손’으로 ‘가장 매혹적인 죠세프느 불르느스’라는 이름의 ‘장미’를 자신의 내면에 꽂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앙의 샘물’을 먹으며 자라나 꽃피게 될 참다운 사랑의 꽃은 그가 꿈꾸는 인간 존재의 가장 아름다운 경지가 된다.
이렇듯 이 시는 정결한 영혼의 ‘빈 것’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인식한 시인이 순수한 신앙의 힘에 의존하여 모진 세월 모진 세상을 극복하고, 나아가 인간 존재의 가치를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작품이다.
[작가소개]
박목월(朴木月)
본명 : 박영종(朴泳鍾)
1916년 경상북도 경주 출생
1933년 대구 계성중학교 재학 중 동시 「퉁딱딱 퉁딱딱」이 『어린이』에, 「제비맞이」가
『신가정』에 각각 당선
1939년 『문장』에 「길처럼」, 「그것이 연륜이다」, 「산그늘」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6년 김동리, 서정주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조선문필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1957년 한국시인협회 창립
1973년 『심상』 발행
1974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78년 사망
시집 : 『청록집』(1946), 『산도화』(1955), 『란(蘭)·기타(其他)』(1959), 『산새알 물새알』(1962),
『청담(晴曇)』(1964), 『경상도의 가랑잎』(1968), 『박목월시선』(1975), 『백일편의 시』
(1975), 『구름에 달가듯이』(1975), 『무순(無順)』(1976), 『크고 부드러운 손』(1978),
『박목월-한국현대시문학대계 18』(1983), 『박목월전집』(1984), 『청노루 맑은 눈』(1984),
『나그네』(1987), 『소금이 빛하는 아침에』(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