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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3. 묵상글 ( 연중 31주간 월목요일. - 보답이 필요 없는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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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3. 연중 31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1.03 02:54
- 보답이 필요 없는 사랑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선행을 하면 그가 가난하기에
보답할 수 없는데 그래서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뒤집으면 그가 보답할 수 있고
그래서 보답을 받게 되면 불행한 것입니까?
보답을 바라지 않았는데도 보답을 받게 되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런 행복은 괜찮지 않을까요?
인간적으로는 보답을 바라는 사랑과 선행은 두 가지로 불행케 합니다.
첫째는 바라는 보답을 그가 주지 않을 때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런 사랑과 선행은 참사랑도 순수한 선행도 아니기에 불행합니다.
그러니까 그가 보답해 줄지라도 보답을 바라는 사랑과 선행은
그 자체로 참사랑과 순수한 선행이 아니기에 불행하다는 겁니다.
뭐든지 불순물이 있으면 값어치가 떨어집니다.
그런데 보답을 바라는 것은 결핍의 표시이고,
사랑의 결핍을 보답으로 채우려는 것이며,
결핍을 채우려다가 불순물로 채우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다른 것을 더 바랄 이유가 없습니다.
가득 찬 컵에 물을 더 부으면 넘칠 뿐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참사랑은 결핍이 없는 사랑이고 보답이라는 불순물이 전혀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보답을 바라지 말아야 할,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기 때문이고,
하느님 사랑만으로 충만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면 보답을 바라지 않게 되기도 하지만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기 위해 보답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면 그 무엇보다 보답을 바라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초심자에게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 멀기만 하기에
귀에다 속삭이는 인간 사랑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의지적으로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하느님 사랑을 영적 감각으로 느끼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물론 쉬운 것 아니고 한두 해 걸리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기에 평생의 호흡으로 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도 생활이고 영성 생활임을 다시 한번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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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3. 연중 31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여!
“사랑의 신비가”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당신 구원의 진실로 제게 응답하소서”(시편69,14ㄴ)
좋은 신자, 착한 신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신비가가, 사랑의 신비가가 되어야 합니다. 요즘 신자들의 치명적인 손실은 신비감각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비감각을 잃어버린 무수한 신학적 지식들은 공해요 쓰레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신비, 자연의 신비, 삶의 신비앞에 놀랄줄 알아야하고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20세기 영성의 시대에는 누구나 신비가가 되어야 한다고 20세기 대 신학자 칼 라너는 말했습니다. 제가 평생 수십년을 두고 감동깊게 읽고 있는 유다인 랍비이자 신비가인 여호수아 헷쉘의 책, <사람을 찾는 하느님>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놀라움>입니다.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살아 있음의 놀라운 신비에 대한 무관심하는 것이 죄의 뿌리이다. 놀라움 또는 근본적인 경탄은 자연과 역사를 대하는 종교인의 기본태도다. 문명이 발전할 때 놀라움의 감각은 후퇴한다.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것은 정보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놀라움을 올바로 감상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놀라움이 없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음을 이해하는 데서 우리의 행복은 비롯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믿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놀라려는 의지다. 하느님에 대한 앎은 놀라움에서 시작된다. 매일같이 놀랄 필요가 있기 때문에 매일같이 예배를 드릴 필요가 있다. 날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기적들에 대한 감각과 계속되는 놀라운 일들에 대한 감각이, 깨달음이 기도의 원천이다. 시편은 대부분 삶의 기적들을 발견한 놀라움에서 솟아난 찬미와 감사의 고백이다.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시편139,14).”
사랑의 신비가 입에서 쏟아지는 감탄사가 “놀랍다, 새롭다, 좋다”등 끝이 없습니다. 놀라움에 대해 공부하다보니 제가 쓴 짧은 선시禪詩같은 시들은 이런 놀라움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온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자작시 두편 소개합니다.
‘아침의 자연은 늘 놀랍다, 새롭다, 좋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밤의 침묵과 휴식 때문이다
“아침을 먹었느냐?”가 아닌
“아침을 보았느냐?” “아침을 들었느냐?”
인사할 수는 없을까
똑같은 사람, 환경, 말과 글도
살아 있으면
침묵의 밤이 있으면
늘 새로운, 놀라운, 좋은 아침일 수 있다’<1997.8,16>
“아침”이란 시에 이어 “임맞을 준비는 끝났다”라는 시입니다.
‘하늘 향해 쭉쭉 뻗은 은행나무들
임맞을 준비는 끝났다
마침내 노랗게 물든 사랑의 단풍잎들 다 쏟아
노오란 길 만들어 놓고 임 기다리는 은행나무들!
너무 아름다워 슬프고 깊어 고요한 노오란 단풍잎길
묵묵히 임기다리는 은행나무들!
나 이런 사랑 본 적 없다’<2000/11/10>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시도 이런 놀라운 깨달음에서 탄생한 것이란 생각입니다. 오늘 로마서에서 대 신비가 바오로 사도의 하느님 찬미가가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남김없이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의 몰락과 그리스도교의 흥기에 대한 하느님 섭리의 신비에 대한 놀라움, 찬미, 감사가 어울려진 고백 <하느님 찬미가>입니다. 너무 아름답고 깊어, 하나도 생략할 수 없어 단숨에 읽히는 전문을 고스란히 인용합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힘듭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께 무엇을 드린 적이 있어 그분의 보답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이스라엘의 놀라운 신비전통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대신비가, 대영성가 바오로 사도입니다. 존재하는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니 그대로 우리의 하느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이 진리를 이해하여 그들 모든 삶의 기초로 삼은 이들은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해 깊이 깨달은 하느님 사랑의 대신비가임에 여실히 드러납니다. 초대 방식이 완전히 파격입니다. 유유상종 끼리끼리의 동호회적 초대가 아닌 혁명적 이타적 아가페 사랑의 초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크게 깨달은 대신비가 예수님의 말씀은 예나 이제나 영원한 진리로 우리의 편협한 교제를 비춰주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역시 단숨에 읽히는 놀랍고 은혜로운 우리가 해야 할 <과제> 전문을 인용합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보답을 바라지 않고 선행과 사랑을 베푸는 이들에게 행복을 약속하십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린 차별없는 사랑의 실천이요 말 그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참으로 복음적 교회는, 복음적 수도원은, 복음적 사람은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무사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진정 자유롭과 부요하고 행복한 <사랑의 신비가들>이요 이런 삶자체가 그대로 보답이겠습니다.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마음을 닮은 예수님입니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의 사회복지에 원조인 예수님이요 참으로 복지제도의 확산은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 놀라움의 영적 신비감각을 일깨워 주시고 당신 사랑의 신비가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시편16,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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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3. 연중 31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오늘 <복음>에서는 ‘초대를 베푸는 이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자녁식사를 베풀 때에는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2-13)
예수님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도록 요청합니다. 곧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에 대조되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은 보답할 능력이 없는 이들이 초대의 대상으로 제시됩니다. 이들에게 행한 은밀한 자선은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4)
이는 단순히 ‘초대한 이들에게 보답을 바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는 단순히 자선이나 시혜를 베푸는 인간애 차원의 선행을 넘어, 신앙행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고통 받는 가난한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현존하심을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마태 25,35)
이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하늘나라의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보다 ‘곤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 안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210항)
또 “새로운 복음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 사회, 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이다. ~이 선택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로라는 초대입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이는 우리가 ‘복음의 길’로 나아갈 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분명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우리는 ‘작고 가난한 이’, ‘가난한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생명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시고,
저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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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3. 연중 31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선희가 부른 ‘알고 싶어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나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앉아 눈물 흘린 적은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이야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는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이렇게 알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내비게이션이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듯이,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다 거북이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바다 거북이는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바닷가 모래 위로 나온다고 합니다. 모래를 파고 그 안에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다시 모래를 덮어놓고 바다 거북이는 바다로 돌아갑니다. 이제 모래 속에 있는 알은 스스로 알에서 깨어야 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장애물인 모래를 뚫고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다로 들어가서도 48시간을 바다 깊이 수영해서 들어갑니다. 그래야 새끼 바다 거북이는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이렇게 참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한 걸음씩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을 이어가는 길이 이렇게 험난하다면 진리를 깨닫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훨씬 더 어렵고 힘들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고 합니다. “깨닫기 전에 물을 길어오고 나무를 날랐다면 깨달은 후에도 물을 길어오고 나무를 날라야 합니다.”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일상의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깨달았으니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깨달았으니, 일상의 삶에서 깨달음을 드러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알고 싶은 것에 대한 방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갑니다.” 권불십년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민족을 차별하고, 억압하고, 쫓아내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길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어서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천년을 나라 없는 서러움 속에 살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스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음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과 에사오가 화해하고, 평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도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콩과 콩깍지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듯이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도 같은 하느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예수님께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초월적인 삶에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세상을 떠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조건 없는 나눔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겸손으로 뿌리를 내리고, 조건 없이 나누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실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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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3. 연중 31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를 어떤 새로운 길로 이끄시는 분 - 예수님!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1월 2일 일요일- 마흔네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산상 수훈을 살아내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길에 서 있는 새로운 자아로 이끌어 주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산상수훈의 급진적인 메시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 특히 산상수훈을 통해 당시 문화의 가치들을 아래로부터 비판하고 새롭게 재구성하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라 부르는 또 다른 세계관에 대한 충성으로 인해, 가족, 종교, 권력, 자원 통제 등 기존의 지배적 제도들과 당시 사회의 중심 가치들에 등을 돌리십니다. 이러한 충성은 그분께 대중적 인기의 상실, 권위자들의 등돌림, 깊은 내적 고통, 그리고 마침내 당신 생명의 희생이라는 대가를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넓은 틀에서 세상을 바라보심으로써, 모든 작은 틀들을 문제 삼고, 듣는 이들을 의식의 급진적인 변화로 초대하십니다. 많은 이들이 그 변화에 준비되지 않았으며—오늘날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산상수훈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마태오는 산상수훈의 서두를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태 5:1–2).
모세가 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내려왔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마태복음의 유대인 독자들에게 이 장면은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로서 다시 산에 올라가 진리를 새롭게 선포하시며, 새로운 율법을 내려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맥락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새롭게 조명하고 재해석하신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복팔단(Beatitudes)은 때때로 "행복한 삶의 자세" 혹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축하의 말"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그 대상은 군중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복음서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장 도전적인 가르침—"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더 좁은 범위인 열두 사도에게 주어집니다.
산상수훈은 그보다 넓은 두 번째 제자 집단, 즉 아직 신앙의 길에 입문 중인 이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양성에는 실제로 매우 정교한 계획이 있는 듯합니다. 그분은 때와 준비, 성숙의 정도를 분별하고 계십니다.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는 복음의 고된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 십자가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을 갖추지 못한 상태입니다.
삶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는 죽음이 삶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신비의 일부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비 안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이러한 무게 있는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영혼은 대개 나이가 들었을 때의 정신(psyche)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나병 환자처럼, 치유는 치유받고자 하는 갈망에서 시작됩니다. 진짜 도전은 그 치유가 조금씩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인내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분의 분노를 용서하고, 그녀의 정신질환이 어머니가 짊어진 짐이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수년이 걸렸습니다.
끊임없는 기도, 좋은 치료, 사랑하는 남편과 가족—이 모든 것이 저에게는 축복의 치유 레시피였습니다.
—Toppie B.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Jesus’ Alternative Plan: The Sermon on the Mount (Franciscan Media, 2022), 71, 103, 137–13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achel Spina, untitled (detail), 2023,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한 여인이 아이가 꽃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그들 모두가 작고 연약한 것을 알아보고 존중함으로써 진복팔단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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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3. 연중 31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14)
식사에 초대받은 가난한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한 데 대한 백 배의 보상을 이승에서 언제 받겠습니까? 그 보상은 하느님께서 하시던 모든 일에서 쉬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이렛날, 곧 나라의 때에 주어질 것입니다. 그날이야말로 의인들의 참된 안식일, 지상의 일을 하지 않아도 되며 하느님께서 차려 주신 온갖 맛난 음식으로 배불리 먹는 날입니다.
-이레네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그분이 열매 맺는 방식을 잘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밀알이라고 부르는 그분의 영혼도 그분의 인성에 싸여 있는 동안 그분처럼 고난을 겪고, 슬픔과 죽음을 겪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이 고난을 겪어야 할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내 영혼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입니다”(마따태 26,38; 마르 14,34).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서 지극히 높은 선이신 하느니과 늘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분은 결코 하느님의 능력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고난이 절정에 이른 순간에도 아버지와 성령과의 친분을 누리셨으며, 아버지와 성령과의 합일을 즐기셨습니다. 슬픔도 고난도 죽음도 이 합일을 어쩌지 못했습니다. 실로 그리스도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고통스런 죽음을 맞을 때도, 그분의 고귀한 영은 살아서 지극히 높은 선이신 하느님을 관상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분의 고귀한 영은 오감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분의 거룩한 육신과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이 지으신 영을 영혼이라고 부르셨고, 그 영은 육신을 살리는 생명의 원리였습니다. 그 영이 오감 및 정신과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본다면, 그분의 육신이 죽음을 겪을 때, 그분의 영혼은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었다고 하겠습니다.(496)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히브 1,5-14
천사들보다 뛰어난 아들
하느님께서 어느 천사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느님께서 당신의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에는,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예배를 드려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사들에 관해서는,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바람으로 쓰시고 일꾼들을 불꽃으로 삼으셨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당신의 왕권은 영원무궁하시며 당신이 잡으신 지팡이는 정의의 지팡이입니다.
당신은 정의를 사랑하시고 불의를 미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곧 당신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즐거움의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시고 당신의 동료들보다 더 기쁘게 해주셨습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주님, 한처음 땅을 만드신 이도 주님이시요, 하늘을 손수 만드신 이도 주님이십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주님은 영원히 계십니다. 만물은 옷처럼 낡아질 것이요
주님은 그것들을 겉옷처럼 말아 치우실 것입니다. 만물은 옷처럼 변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같으시고 주님은 영원히 늙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어느 천사에게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들로서 결국은 구원의 유산을 받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파견된 일꾼들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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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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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3. 연중 31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냉전 시대에 미국과 구소련 두 나라가 벌인 치열한 우주 탐사 및 기술 개발 경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최고의 인재만 모아서 수백만 달러의 돈을 들여 무중력 상태에서 쓸 수 있는 볼펜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잉크는 중력을 받아 떨어지면서 글씨를 쓸 수 있는 것인데, 우주에는 중력이 없어서 잉크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소련에서는 어떠했을까요? 마찬가지로 그런 볼펜을 개발하고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구소련은 그런 볼펜을 개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연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연필을 통해 충분히 글씨를 쓸 수 있었고, 굳이 비싼 돈을 들여서 무중력 상태에서 써지는 볼펜을 개발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해결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자기 사고를 닫아 버려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어려운 일로 만들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진실은 아주 단순하고 바로 옆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주십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 바라봅니다. 세상은 온갖 거짓과 불의로 우리를 계속 유혹해서 잘못된 길로 이끕니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루카 14,12)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사회적 ‘상부상조’의 관행이 있었습니다. 초대받았으면 나도 초대하는 것이지요. 또한 나중에 초대받을 것을 생각해서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결국 ‘사회적 투자’ 개념입니다. 이런 세상의 경제 논리를 반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익을 바라는 초대는 ‘자선’이 아니라 ‘거래’일 뿐이지요.
그래서 참 자선의 모습으로,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루카 14,13)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참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보답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은 계산적이지만, 하느님 나라는 자선과 나눔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어떤 모습이 더 올바른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을 철저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철저하게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누구도 타인에게 그토록 잔인할 권리가 없다(빅터 프랭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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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3. 연중 31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작아질 수 있는 위대함, 약해질 수 있는 강함,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
인물의 초상화나 사진, 또는 조각상은 단순한 외형을 넘어서 그 사람의 성격과 인격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남길 때, 어떤 특별한 기억이 될 만한 사람이나 멋진 배경과 함께 포즈를 취하길 선호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조금 다른 배경으로 묘사되는 성인이 있습니다. 그는 주로 빗자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빗자루 성인"이라고도 부릅니다. 그의 조각상이나 그림에는 흔히 빗자루를 들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며, 이는 그가 기꺼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봉사했음을 나타냅니다. 또 그를 묘사하는 그림에는 주변에 고양이와 개가 함께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동물들과도 특별한 교감을 나누었고, 자비와 사랑을 모든 생명에게 베풀었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어떤 수도원에서 "도나도"(기증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수도서약을 하지 않고 봉헌자로서 노동과 봉사를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수도생활에 참여하지만 정식 수도원 구성원은 아닌 사람)로서 허드렛일을 맡아 일하는 조건으로 수도복을 입을 수 있는 특권을 얻어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오늘 선택적으로 기념하는 성인들 중 한 사람인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입니다.
그는 페루의 리마에서 아프리카계와 스페인계 혼혈로 태어났는데, 당시 식민지 사회에서는 이러한 배경이 사회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그는 "열등한 사회 계급"으로 분류되어 차별을 받았고, 수도회에 정식으로 입회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그는 자기희생의 미덕으로 삶을 승화시킨 성인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겸손한 삶은 단순한 순응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주님께 헌신하려는 깊은 열망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인종과 계급의 장벽을 뛰어넘어, 사랑과 봉사로 사람들을 섬기며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성 마르티노는 보속과 자선 그리고 겸손을 삶의 중심 가치로 삼아 살았습니다. 밤에는 기도와 고행에 몰두했고, 낮에는 병자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고 합니다. 마르티노는 자신이 신분적으로 낮은 처지에 있었기에 동병상련의 정을 깊이 품고 살아갈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는 인종, 피부색, 사회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고 섬겼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자주 황홀경에 빠져 공중에 부양되기고 했고, 그의 기도실이 신비로운 빛으로 가득 차기도 했으며 한 번에 두 군데에 현존하기도 했고, 알수 없는 지식을 깨닫고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겸손한 삶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세속적 명예는 우리가 세속적인 가치에 발을 딛고 있을 때만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어, 부와 권력과 지위와 같은 외적인 명예는 일시적이며 조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에 발을 디딜 힘이 빠지기 시작하면, 이러한 명예는 공허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윌리엄 예이츠(William Yeats)가 말한 대로 우리는 "진리 속으로 시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외관 중심에서 벗어나 내면의 본질을 향하는 여정을 우리가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벼가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듯이 말입니다....
조금 더 과감하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반드시 에고의 해체와 영적 각성의 여정을 꼭 겪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삶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오래 세상적 가치에 두 발을 딛고 살아왔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에고의 해체와 영적 각성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에 집착하면서 거기에 목을 매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의 의미를 깊이 있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이런 삶의 태도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람들의 평가나 판단에 연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세상적 가치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경청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지만, 이러한 것들에 정신을 너무 많이 빼앗기게 되면 우리 내면의 하느님의 뜻을 찾아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겸허한 마음으로 일상의 작은 일들에 충실하면서 꼭 믿어야 할 것은, 비록 아주 서서히 이루어질지는 몰라도 우리 개인과 인류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여전히, 그리고 반드시 일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보답에 연연하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은 그의 겸손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요한은 "그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고백하며, 하느님의 속성인 자기 비움(kenosis)의 삶을 살아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가장 찬미받는 성인이지만, 성모님 역시 자신의 비천함을 인식함으로써 위대함에 이르렀습니다. 성모님은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습니다."(루카 1,48) 하고 노래하며, 하느님의 은총은 겸손한 자에게 임한다는 진리를 증언하십니다.
이는 복음의 고유한 논리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마태 20,16 참조) 세속적 지위나 특권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이며, 참된 크기는 자기 낮춤과 섬김의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겸손은 루카 복음의 핵심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논리는 당시 로마 제국의 세속적 가치관—권력, 지위, 명예—와는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특별히 루카 복음은 작은 자를 들어 높이시는 하느님의 역동적 개입을 선포합니다.
작아질 수 있는 위대함,
약해질 수 있는 강함,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
이것이야말로 참된 성화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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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3. 연중 31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슬로우 묵상] 이미 받은 자로서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14,14
이미 받은 자로서
예수님은 보답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보답을 약속하신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 복음의 심장이 뛰고 있다. 나는 한때 이 말씀을 ‘하늘의 적금 통장’처럼 이해했다. 지금은 손해를 보더라도, 언젠가 천국에서 이자가 붙어 돌아올 거라고. 하지만 그 생각 속에서도 여전히 계산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더 깊이 들어가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 이 표현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먼 미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이다.
내가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음을 다시 떠올려본다. 잊고 있었던 말씀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콜로 3,1).
보답은 미래에 받을 것이 아니었다. 이미 받았다.
이미 받은 것, 무엇을 받았을까?
조건 없이 사랑받는 존재로 살아갈 자유를 받았다. 타인의 평가와 인정으로부터 해방될 자유를 받았다. 주고받음의 계산에서 벗어나, 그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돌이켜 보니, 나는 하느님께 무엇을 드린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사랑이 내 삶을 감싸고 있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께 보답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셨을까?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보답할 능력도 자격도 없었을 때, 그분은 먼저 나를 사랑하셨다.
나는 이미 보답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이구나!
그래서 내가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하는 것은, 미래의 보상을 위한 투자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의 자연스러운 흘러넘침이다.
항아리가 가득 차면 넘친다. 애써 쏟아내지 않아도 저절로 넘친다. 이미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으로 충만해진 마음은, 자연스럽게 조건 없는 사랑으로 흘러넘친다.
가난한 이, 장애인, 다리 저는 이, 눈먼 이를 초대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받은 자의 기쁨 넘치는 표현일 뿐이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어 하듯이,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그 사랑을 나누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행복의 비밀이 있구나.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3).
이 말씀이 이제 새롭게 들린다. 행복은 미래에 올 보상이 아니다. 행복은 지금, 보답 없이 줄 수 있는 자유 그 자체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약속이 아니다. 선언이다.
이미 너는 사랑받았다.
이미 너는 자유롭다.
이미 너는 보답을 받은 자다.
이제 이미 받은 자로서 살고 싶다. 내 주변에 가난한 이, 장애인, 눈먼 이를 초대하고 싶다.
그런데 누가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인가.
사회적 약자, 이주민, 노숙인, 고립된 노인들
외로움이나 상실 속에서 침묵으로 살아가는 사람
‘능력 없음’ 때문에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
혹은 나에게 불편함을 주는 사람들
나의 가치관을 흔들거나, 다르다는 이유로 거리를 두게 되는 사람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내가 쉽게 초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에게 바로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신다.
어쩌면 이 말씀은,
내 안의 결핍과 상처 입은 부분,
버려진 내면의 존재들까지 식탁으로 불러들이라는 초대가 아닐까.
내가 이들을 초대할 때 내 존재 전체를 품는 하느님의 식탁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 1요한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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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3. 연중 31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초대할 때
보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초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인가를 누군가에게 줄 때
그것을 돌려 받을 생각으로 주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돌려 받을 생각으로 주는 것은
빌려주는 것이지
주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보답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식사를 베푸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식사를 빌려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도 결국 남에게 받은 것이기에
무한히 다른 사람에게 퍼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내가 준 것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비슷하게 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주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내가 무엇을 베푼다는 생각보다는
주고 받으면서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더 큰 것 같습니다.
관계라는 측면에서 주고 받음이 나쁘지만은 않지만
이 생각은 다르게 바뀌어 갑니다.
주고 받음이 되지 않으면
관계를 맺기 어렵습니다.
일방적으로 한 쪽이 주고, 한 쪽이 받는 것은
자칫 건강하지 못한 관계로 바뀌기도 합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대등한 높이에서 관계를 맺기 힘든 경우가 더 많습니다.
주는 사람의 요구를 받는 사람이 쉽게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자세히 보면
결국 이 관계도 주고 받음이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같은 것을 주고 받지는 않지만
식사를 서로 대접하는 것은 아니지만
겉으로는 돌려 받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하면서
안 보이는 방식으로 더 요구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때로 우리를 지치게 하고
건강하지 않게 만듭니다.
그러다보니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 두렵기도 합니다.
지금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도 됩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다보니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도 받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을까
두렵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는 존재이기에
하느님께 받아야 하지만
마음 편하게 받지는 못합니다.
받지 못하다보니
다른 사람에게 나눔도 어려워집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돌려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그대로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관계이며
그것은 주종관계가 아니라 부자관계입니다.
주종관계가 아니라 부자관계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나는 어떻게 돌려드리면서 하느님과의 관계에 머무를 것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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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3. 연중 31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4,12-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꿀벌은 생태계에서 너무나 큰 역할을 하는 곤충입니다. 여러 꽃을 돌아다니며 수술의 꽃가루를 암술에 묻혀 주는데, 이렇게 해주어야 수정이 이루어져 꽃이 떨어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가 여러 동물들에게 좋은 먹이가 됩니다.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꿀벌이지만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지 아느냐며 으스대는 일도, 자기가 하는 일에 보상을 요구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저 매일 같이 꽃 사이를 날아다니며 꿀을 빨아먹을 뿐입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 일이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가져다주기에 꿀벌이 하는 일은 참된 선행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꿀벌 같은 존재가 되라고 하십니다. 대가를 바라고 조건을 따지며 사랑하지 말고,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좋아서, 사랑하지 않고는 도저히 배길 수가 없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만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차피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당신 본성에 따라 행하시는 것이고, 그분을 닮은 모상인 우리는 그 사랑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랑에 보상을 바랄 수도 없고 바래서도 안됩니다. 그런 점은 사랑을 실천하는 양상 중 하나인 ‘자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이들,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 때에는 그들이 겪는 아픔과 괴로움에 깊이 공감하며, 그들의 상황이 더 나아지기를, 그들이 지금보다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선한 의도로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자선에 다른 목적을 담으면, 즉 자선을 통해 나의 선함을 드러내거나, 하늘나라에서 더 큰 보상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들면,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자선을 많이 베풀어도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점점 더 교만해지고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질 뿐이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상을 바라지 말고 자선을 베풀라고 하시는 것은 보상을 바라면서 행하는 자선이 그것을 받는 이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받은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기에, 누군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면 나도 그만큼 그에게 호의를 베풀고자 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그럴만한 능력과 재물이 없으면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그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 방법은 기도일 수도 있고, 배려나 존중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호의를 베푼 그 사람도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보람을 느끼며 기뻐하게 되지요. 그 보람과 기쁨은 세상의 재물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영원한 가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 가치를 차지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죄 많은 우리를 위해 끝까지 사랑하시면서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느님 자녀가 되는 영광을, 그분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는 기쁨을 얻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절대 얻지 못했을 것을 주셨으니, 우리는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보며 기쁨과 보람을 얻으시도록 그분께서 바라시는대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실천하며 내가 사는 자리를 하느님 나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시작하신 사명이 우리를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함께 그 유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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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3. 연중 31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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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박윤식”님을 찿아 들어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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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3. 연중 31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김종업로마노
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김종업로마노”님을 찿아 들어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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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3. 연중 31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공유
김건태 신부님_거저 주어진 선물
예수님은 앞서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겸손을 상기시키셨으며, 이제 식사에 초대한 사람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따라 모든 행위를 조정할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셈족들에게 있어 식사에 초대한다는 것은 자기의 마음을 열고 우정을 나눈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만을 초대하는 사람은 이해타산적인 행위로 비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들도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식사 초대는 하느님이 이르신 사랑에 기초한 행위로 볼 수 없습니다. 자기 사랑의 또 다른 방법, 이기적인 사랑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곧 제자는 모든 행위에서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 하느님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늘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를 저는 이들, 눈먼 이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꺼리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길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행위, 절대적인 이타적 행위로 열립니다. 식사에 초대받기는 했으나 그 보답으로 식사에 초대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한다면, 이는 그들에게 무상의 사랑으로 자기의 마음을 열어 보이는 위대한 행위, 하느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사랑의 숭고한 행위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과 심판의 날에 이는 참 행복과 영원한 보상의 발판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당신 죽음에 대한 기념으로 제자들에게 남겨 주실 사랑의 잔치를 마음에 두십니다. 이 잔치에는 그 어떤 차별이나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미사성제는 사회 계급이나 종족이나 신분과 관계없이 모든 이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막 태어난 교회가 당신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지도자에게 주신 이 가르침을 늘 상기할 필요가 있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야고보서와 바오로 서간을 읽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 큰 선물을 하느님에게서 거저 받았으니, 이웃들, 그들이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를 저는 이들, 눈먼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거저 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오늘 하루, 잠시만이라도 이기적이거나 이해타산적인 우리의 셈법을 내려놓고, 주님이 보여주시고 가르치시고 원하시는 대로, 마음 외에는 감사할 방법이 없는 이웃들에게 다가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좀 더 의미 있고 행복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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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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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397
11월3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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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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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작은형제회 양두승 미카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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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채워져 있어야>
바람직한 영성생활, 복음서가 요구하는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가 묵상하던 중에 여러 신앙의 선배들께서 강조하셨던 “기도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받은 충만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내가 체험한 강렬하고 뜨거운 하느님 사랑이 자연스럽게 동료 인간들을 향해 흘러가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영성생활이요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요청하시는 사랑은 곰곰이 생각해보니 통합된 사랑, 조화가 이루어지는 사랑이더군요.
하느님 사랑 따로 이웃 사랑 따로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그런 사랑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들을 바라볼 때 허물과 죄 투성이인 인간 존재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나약한 인간 존재 안에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형제들과의 때로 구차스런 일상생활을 살아나갈 때조차도 그 관계 안에서 거룩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해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안에서, 거룩한 성사 안에서, 엄숙한 전례 안에서도 동료 인간들, 특히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웃들을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 전체의 결론은 결국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요 사랑입니다.
복음서의 요약 역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 인간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요 목숨까지 내어놓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유언 역시 사랑입니다.
결국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과제이자 평생의 숙제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부단히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향해 발돋움하는 노력, 우리가 받은 놀라운 하느님 은총과 사랑을 배경으로 동료 인간들을 향해 손을 내밀어주는 노력,그리고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결핍 투성이인 나 자신을 향한 연민의 마음...
언젠가 여름 캠프에 온 청소년들을 위해 배식을 해줄 때였습니다.
길게 줄을 선 청소년들이 식판을 들고 제 앞으로 다가오면 큰 가마솥으로부터 한 국자씩 퍼 담아줬습니다.
야외 체험 학습을 열심히 하고 온 뒤라 다들 배가 고팠던지 많이 달라고 했습니다.
손이 워낙 큰 저이기에 ‘오냐, 그래 많이들 먹어라’하며 팍팍 퍼줬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 문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앞에 아이들에게 너무 팍팍 퍼주는 그 많던 국이 순식간에 바닥나고 만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온 아이들에게는 더 이상 퍼줄 국이 없어 난감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란 그릇에 뭐든지 가득 담겨 있어야 그것을 동료 인간들에게 나눠줄 수가 있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 사랑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데,
내 안에 든 것이 없는지, 내 머릿속이 텅텅 비었는데, 내 영혼이삭막한데, 무엇을 이웃들에게 나눠줄 수 있겠습니까?
이웃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나눠주고 싶습니까?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하느님의 따뜻한 위로와 충만한 은총을 건네주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무엇에 앞서 나 자신을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내 내면, 내 영혼, 내 정신을 하느님 연민과 자비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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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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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랑과 거짓 사랑 쉬운 구별법>
우리는 가끔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을 구별하지 못해 상처를 입거나 배신당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이 없어지려면, 참사랑이 어떻게 행해지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은 늙은 왕이 세 딸에게 '사랑의 고백'을 요구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왕은 자신을 가장 기쁘게 하는 딸에게 가장 큰 보상을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첫째 딸 고너릴은 "말로 다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생명과 명예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왕은 흡족해하며 왕국의 3분의 1을 줍니다.
둘째 딸 리건은 한술 더 떠, "아버지를 사랑하는 기쁨 외에 다른 모든 기쁨은 저의 감각에서 죽은 것과 같다"라고 맹세합니다. 왕은 기뻐하며 또 3분의 1을 줍니다. 그들의 고백은 정확히 아버지 리어왕의 시선에 맞춘 행위였습니다. 그들은 그 대가로 왕국을 보상받았습니다.
이제 왕이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 코딜리어의 차례입니다. "너는 무슨 말을 하겠느냐?" "아무 것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다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 보아라." 코딜리어가 마침내 입을 엽니다.
"저는 폐하를 제 의무(my bond)에 따라 사랑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 저는 언니들처럼 남편을 두면서 제 사랑 전부를 아버지께만 바친다고는 맹세할 수 없습니다." 리어왕은 격노합니다. 그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행위'에 대한 '보상'을 주는 데 눈이 멀어, '의무'로 사랑을 고백한 코딜리어를 추방합니다.
"나의 행위는 반드시 내가 사는 세상의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것이 CCTV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유난히 CCTV가 많아서 범죄율이 낮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보이는 시선'에 얼마나 강력하게 지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지배받는 시선이 나의 부모일 수도 있고, 이 세상 누군가의 기대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내 안의 욕망, 즉 에덴의 '뱀'처럼 '너 자신이 기준이 되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 CCTV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뱀의 소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 CCTV는 나에게 '의무'를 주는 나의 주인이고, 내가 사는 왕국의 왕입니다.
리어왕의 궁정은 이 '보상'이라는 세상의 CCTV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무대입니다. 고너릴과 리건과는 다르게 코딜리어는 누구의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CCTV는 '하늘의 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땅의 왕(리어왕)이 아닌 하늘의 왕을 섬겼고, 하늘에 정해주는 이를 사랑해야 하는 의무만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하늘에 속한 존재임을 드러냈습니다. 리어왕이 두 딸에게는 쫓겨나서 결국 막내에게 향하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나이가 많이 먹도록 참사랑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CCTV를 정확히 꺼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3-14)
예수님께서는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할 때, 바로 그때 '너는 행복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CCTV가 감지하지 못하는 행복입니다. '금도끼 은도끼'의 정직한 나무꾼이 이와 같습니다. 그는 산신령이 내민 화려한 '보상(금도끼)'이라는 CCTV에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의 CCTV 앞에서 자신의 '진실(쇠도끼)'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은 그의 정직함에 감동하여 모든 것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향해 솔직한 이들은 하늘의 보상을 받습니다.
성 니콜라오 주교는 가난한 세 딸을 돈 때문에 팔아넘겨야만 하는 한 아버지의 사정을 알고 몰래
지참금을 마련해 주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금 주머니를 던져 넣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어떤 감사나 보답도, 즉 세상의 CCTV에 찍히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 그는 그저 하늘의 CCTV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산타 클로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코딜리어처럼, 하느님과 나 사이에 맺어진 '의무(bond)', 즉 하늘의 CCTV 앞에서 사랑하고
봉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람을 분별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CCTV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하늘을 위해 사는 사람, 하늘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만이 참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고, 진짜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사람을 분별하고 싶거든 그 사람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면 됩니다. 세상의 CCTV는 우리를 기록하지 못할지라도 하늘의 CCTV는 우리를 똑똑히 비추고, '의인들이 부활할 때' 가장 큰 영광으로 우리에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동안 한 번만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누구의 시선 때문에 움직이는지. 세상의 시선에 휘둘리는 자는 결코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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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선희가 부른 ‘알고 싶어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나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앉아 눈물 흘린 적은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이야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는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이렇게 알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내비게이션이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듯이,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다 거북이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바다 거북이는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바닷가 모래 위로 나온다고 합니다. 모래를 파고 그 안에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다시 모래를 덮어놓고 바다 거북이는 바다로 돌아갑니다. 이제 모래 속에 있는 알은 스스로 알에서 깨어야 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장애물인 모래를 뚫고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다로 들어가서도 48시간을 바다 깊이 수영해서 들어갑니다. 그래야 새끼 바다 거북이는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이렇게 참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한 걸음씩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을 이어가는 길이 이렇게 험난하다면 진리를 깨닫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훨씬 더 어렵고 힘들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고 합니다. “깨닫기 전에 물을 길어오고 나무를 날랐다면 깨달은 후에도 물을 길어오고 나무를 날라야 합니다.”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일상의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깨달았으니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깨달았으니, 일상의 삶에서 깨달음을 드러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알고 싶은 것에 대한 방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갑니다.” 권불십년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민족을 차별하고, 억압하고, 쫓아내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길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어서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천년을 나라 없는 서러움 속에 살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스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음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과 에사오가 화해하고, 평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도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콩과 콩깍지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듯이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도 같은 하느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바로
예수님께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초월적인 삶에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세상을 떠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조건 없는 나눔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겸손으로 뿌리를 내리고, 조건 없이 나누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실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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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은 ‘빗자루 수사’로 널리 알려진 마르티노 데 포레스(1579-1639년) 성인의 기념일입니다. 성인은 리마의 로사(1586-1617년) 성녀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산 인물로서 그 지역에서 함께 큰 사랑을 받는 분입니다. 두 성인 모두 참회와 기도의 삶을 살았고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정성을 다하여 돌봄으로써 페루 사회사업의 기틀을 놓았지요.
에스파냐계의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리마의 로사는 1617년 선종한 뒤 1671년에 클레멘스 10세 교황께서 시성하시어 아메리카 대륙의 첫 번째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스파냐계 귀족 출신의 기사와 유색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나 혼혈에 사생아였던 마르티노는 1962년에 이르러서야 성 요한 23세 교황께 시성되었습니다. 그 또한 살아 있을 때 이미 성인으로 여겨졌고 사람들의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는데도 리마의 로사 성녀보다 삼백 년이나 뒤에 성인품에 올랐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루카 14,12)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그에게 보답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가 대가와 보답을 바라는 셈법이 아닌 순수한 사랑에 이끌리기를 바라셨기 때문이겠지요.
마르티노 성인의 시성이 리마의 로사 성녀보다 늦었다고 하여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 또한 세상이 기준으로 삼는 시각과 셈법에 길들여질 수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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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¹1
복음: 루카 14,12-14: 선을 베풀어야 할 사람들에 대하여
오늘 루카 복음(루카 14,12-14)은 잔치의 초대와 관련된 주님의 가르침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회적 체면과 보답을 기대하며 잔치에 사람들을 불렀다. 그러나 주님은 그 질서를 전복하시며, 갚을 수 없는 이들, 곧 가난한 이, 불구자, 절름발이, 눈먼 이를 초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드러내는 하느님의 정의이다. 하느님 나라는 거래와 보상에 근거하지 않고, 무상의 은총과 자비에 근거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마태오 복음 강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잔치를 열 때, 부유한 자를 부르지 말라. 그들은 너를 다시 불러 네가 한 것을 갚아주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보상 얻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불러라. 그들은 너에게 갚지 못하지만, 그들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너를 갚아주실 것이다.”(Homiliae in Matthaeum, 50) 즉, 인간적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상을 바라보며 자선을 해야 함을 강조한다.
성 암브로시오는 “자선을 행하는 것은 단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곧, 가난한 이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De officiis ministrorum, II, 28(136-138절)이라는 해석이다. 성 바실리오는 다음과 같이 꾸짖는다. “너의 곡간에 넘쳐나는 것은 네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의 것이다. 네가 입지 않는 옷은 벌거벗은 이들의 것이며, 네 창고에 쌓인 곡식은 굶주린 이들의 것이다.”(Homiliae de divite et Lazaro) 나눔은 선택적 선행이 아니라, 하느님이 맡기신 재화를 올바로 관리하는 정의의 행위임을 분명히 한다.
교리서는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을 특별한 사랑으로 돌보시며,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인식해야 한다.”(2443항) 교황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에서 “가난한 이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살을 만지는 것이야말로 참된 복음화다.”(Evangelii Gaudium, 197항) 한다.
주님의 말씀은 “주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광임을 드러냅니다. 세상은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 하지만, 신앙인은 “갚을 수 없는 이들과 관계”를 맺으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이는 단순히 덕행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방식을 닮는 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베푸셨듯이, 우리도 조건 없이 나누고 사랑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거래의 논리에서 은총의 논리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은 보답을 바라지 않고 나누며,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더 큰 영적 보상을 기다리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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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된 만남>
루카 14,12-14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참된 만남>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
당신의 것을
내려놓고
몸과 마음
가벼이
당신만
오세요
나를
만나러
당신을
만나러
나만
갈게요
몸과 마음
가벼이
나의 것을
내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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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주님의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14)
1) 여기서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는, “친한 사람들만 부르지 마라.”이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짓은 하지 마라.”입니다.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라는 말씀은, “사랑을 실천할 때에는 보답을(대가를) 받기를 바라지 말고 그냥 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여라.”입니다.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어야 한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는,“그들은 너에게 보답할 수 없겠지만, 하느님께서 보답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입니다.
2)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보면, 저승에 간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서 서로 건너가지 못한다는 말이 나옵니다.(루카 16,26) 저승에 있는 그 큰 구렁은, 부자 자신이 이승에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큰 구렁은 인간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 현상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라자로 쪽에서 생각하면 부자에게 다가가는 것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고, 부자 쪽에서 보면, 라자로에게 다가갈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차가운 이기심입니다. 부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구렁, 또는 장벽을 만들어 놓고서 가난한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3)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의 부유한 신자들을 꾸짖은 일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내가 지시하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러분이 교회 모임을 가질 때에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에 분파도 있어야 참된 이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17-22)
그 당시에 ‘아가페 만찬’을 하려고 신자들이 모인 상황에서, 부자들이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시고, 가난한 사람들은 배고픔을 참아야 하는 일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아가페 만찬, 즉 ‘사랑의 식사’를 하겠다고 모여서는 정말로 ‘사랑 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부유한 사람들이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무시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서러워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6-48)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세리들(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세리들이나 하는 짓’은, ‘죄를 짓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처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명령입니다. 친하지 않은 사람, 낯선 사람,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이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5)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1-2) 여기서 ‘손님’이라는 말은, ‘낯선 나그네’를 뜻하는 말입니다. ‘천사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을 뜻합니다.
낯선 나그네들을 접대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을 접대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창세 18장)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다음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낯선 나그네’와 ‘가장 작은 이들’은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사랑을 주어야 하는 사람은,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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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하며 유족들에게 위로와 평화가 함께하기를 빕니다. 치료를 받는 분들의 빠른 쾌유를 희망합니다.
“성인의 무심한 은혜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은 자기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잘 안 됩니다. 내가 베푼 것은 꼭 기억하고 남이 나에게 베푼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보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하다”(루카 14,1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보답을 받지 못하지만, 우리가 베푸는 하나하나는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
저는 미국에 있을 때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려자들을 위해 무료급식을 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본당에서도 한 달에 두 번 봉사활동을 가지만 그들을 돕는다는 것보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매번 정성껏 마련한 음식이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도 하느님의 안배입니다.
행려자들 앞에서 목사님은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저는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구애 없이 말씀을 선포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이 그리웠습니다. 그저 음식을 전해주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신 체면에 매여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화려한 잔칫상을 뒤로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분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가끔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왕래하며 사귄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만 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리고 요구도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모두를 품기를 주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소외된 이를 먼저 챙김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성녀 소화데레사는 “나는 무엇이든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아무런 손해도 볼 수 없고, 또 남을 위해 치른 수고는 언제나 한결 좋게 하느님께서 내게 갚아주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그것을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고 그들을 위한 행동은 보속이고 회개입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섬김의 삶에로 나설 때입니다.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것보다 전적으로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을 환히 꿰뚫고 계십니다. 드리고 부족함을 채워주십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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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창세 1,26-27 참조) 그리고 자유 의지를 주시어 모든 피조물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한과 그들을 다스릴 권한까지 허락하셨습니다.(창세 2,19-20 참조) 그런데 이러한 자유에는 반드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불순종할 자유까지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발견합니다. 인간의 불순종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 의지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그분께서는 인간의 불순종마저 당신 자비를 베푸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고백합니다. 한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누군가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 자신이 베푼 자선이나 선행에 보답할 수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은 인정받고 싶어 하고, 보상받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인내심은 부족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현세적 보상을 바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오는 보상은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책임 있게 사용하는 그리스도인, 사람에게서 오는 위로와 인정으로 자신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먼저 추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 고통받는 ‘변두리 이웃’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때에, 당신께서 바라시는 방법으로 모두 갚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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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냉전 시대에 미국과 구소련 두 나라가 벌인 치열한 우주 탐사 및 기술 개발 경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최고의 인재만 모아서 수백만 달러의 돈을 들여 무중력 상태에서 쓸 수 있는 볼펜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잉크는 중력을 받아 떨어지면서 글씨를 쓸 수 있는 것인데, 우주에는 중력이 없어서 잉크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소련에서는 어떠했을까요? 마찬가지로 그런 볼펜을 개발하고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구소련은 그런 볼펜을 개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연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연필을 통해 충분히 글씨를 쓸 수 있었고, 굳이 비싼 돈을 들여서 무중력 상태에서 써지는 볼펜을 개발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해결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자기 사고를 닫아 버려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어려운 일로 만들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진실은 아주 단순하고 바로 옆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주십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 바라봅니다. 세상은 온갖 거짓과 불의로 우리를 계속 유혹해서 잘못된 길로 이끕니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루카 14,12)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사회적 ‘상부상조’의 관행이 있었습니다. 초대받았으면 나도 초대하는 것이지요. 또한 나중에 초대받을 것을 생각해서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결국 ‘사회적 투자’ 개념입니다. 이런 세상의 경제 논리를 반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익을 바라는 초대는 ‘자선’이 아니라 ‘거래’일 뿐이지요.
그래서 참 자선의 모습으로,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루카 14,13)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참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보답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은 계산적이지만, 하느님 나라는 자선과 나눔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어떤 모습이 더 올바른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을 철저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철저하게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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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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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은밀한 자선은 하느님께 대한 응답>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오늘 복음에서는 ‘초대를 베푸는 이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자녁식사를 베풀 때에는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2-13)
예수님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도록 요청합니다.
곧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에 대조되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은 보답할 능력이 없는 이들이 초대의 대상으로 제시됩니다. 이들에게 행한 은밀한 자선은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4)
이는 단순히 ‘초대한 이들에게 보답을 바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는 단순히 자선이나 시혜를 베푸는 인간애 차원의 선행을 넘어, 신앙행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고통 받는 가난한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현존하심을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마태 25,35) 이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하늘나라의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보다 ‘곤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 안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210항)
또 '새로운 복음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 사회, 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입니다. ~ 이 선택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 ~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로라는 초대입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이는 우리가 ‘복음의 길’로 나아갈 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분명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우리는 ‘작고 가난한 이’, ‘가난한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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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생명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시고, 저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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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보답이 필요 없는 사랑>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선행을 하면 그가 가난하기에 보답할 수 없는데 그래서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뒤집으면 그가 보답할 수 있고 그래서 보답을 받게 되면 불행한 것입니까?
보답을 바라지 않았는데도 보답을 받게 되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런 행복은 괜찮지 않을까요?
인간적으로는 보답을 바라는 사랑과 선행은 두 가지로 불행케 합니다. 첫째는 바라는 보답을 그가 주지 않을 때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런 사랑과 선행은 참사랑도 순수한 선행도 아니기에 불행합니다.
그러니까 그가 보답해 줄지라도 보답을 바라는 사랑과 선행은 그 자체로 참사랑과 순수한 선행이 아니기에 불행하다는 겁니다.
뭐든지 불순물이 있으면 값어치가 떨어집니다. 그런데 보답을 바라는 것은 결핍의 표시이고, 사랑의 결핍을 보답으로 채우려는 것이며, 결핍을 채우려다가 불순물로 채우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다른 것을 더 바랄 이유가 없습니다. 가득 찬 컵에 물을 더 부으면 넘칠 뿐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참사랑은 결핍이 없는 사랑이고 보답이라는 불순물이 전혀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보답을 바라지 말아야 할,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기 때문이고, 하느님 사랑만으로 충만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면 보답을 바라지 않게 되기도 하지만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기 위해 보답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면 그 무엇보다 보답을 바라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초심자에게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 멀기만 하기에 귀에다 속삭이는 인간 사랑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의지적으로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하느님 사랑을 영적 감각으로 느끼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물론 쉬운 것 아니고 한두 해 걸리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기에 평생의 호흡으로 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도 생활이고 영성 생활임을 다시 한번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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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
<바보가 되자!>
오늘 복음(루카 14,12-14)은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대를 받으면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시면서, 이어서 초대할 때에는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3-14)
우리의 생각, 내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른 예수님!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마음이 맞고, 뜻이 맞고, 자리가 맞고, 가진 것이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이 참으로 벅찬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로부터,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루카 7,34)라는 말도 들으셨습니다.
위령성월입니다. 먼저 죽은 이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때가 되면 맞이하게 될 나의 죽음과 그 너머에서의 새로운 삶도 바라봅니다.
믿는 이들이 궁극적으로 희망하고 있는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라, 죽음 저 너머입니다. 그곳에서 누리는 영원한 안식, 영원한 기쁨, 영원한 평화, 영원한 행복,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궁극적인 희망과 목적을 믿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좀 색다르게 살아갑니다. 바보처럼 살아갑니다. 그 색다름과 바보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바보처럼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 놓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바보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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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4)
우리가
베푼 잔치는
결국 우리를
초대하신
하느님의
뜨거운 잔치였음을
깨닫습니다.
참된 사랑은
되돌려 받는
기쁨이 아니라,
나눔 그 자체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보답이나 인정에서
오는 행복이 아니라,
사랑 자체로
충분한 행복입니다.
보답할 수 없는
사랑이
가장 순수한
행복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답 없는 사랑이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듭니다.
그러나 세상은
행복을 보답과
동일시합니다.
인정받고, 보상받고,
결과로 확인되는
상태가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길은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의 길입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행복한 삶은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삶입니다.
신앙 공동체가
이 행복을
살아간다는 것은,
보답 없는
봉사와 기도의
삶을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는
참된 행복이 됩니다.
보답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며
사랑은 행복의
가장 큰
본질입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행복한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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