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293
7월23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4A4lT_fMDYU
[인천교구 박성경 시몬(구월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완고함과 불신의 잡초는 모두 모아 불에 태워버립시다!>
이런 작물 저런 작물 많이 심어 보았지만, 심는 족족 실패를 많이 하다 보니, 너무나 한심해 보였던 이웃들이 하시는 말씀, “쌩고생 하지 마시고 그냥 마트 가셔서 사드세요!”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성공적인 농사를 위해서는 몇 가지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적절한 날씨입니다. 햇볕이 필요할 때 해가 쨍쨍 떠줘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적정한 강수량이 중요합니다.
지혜로운 농부들께서는 일기 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비 오기 직전 파종을 하던지, 모종을 심습니다. 따로 물을 주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봄비가 올 때 너무 기쁜 나머지 우산도 쓰지 않고 다니십니다. 봄에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하지 않고 비님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꾸준한 잡초와의 전쟁입니다. 잠깐 신경 안 쓰면 밭은 온통 잡초가 점령합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에 앞서 중요한 것은 바로 ‘좋은 토양’, ‘좋은 땅’입니다. 아무런 영양가 없는 황무지에, 또는 자갈밭에 씨를 뿌리면 몇 년을 기다려도 싹이 올라오지 않을 것입니다.
부지런한 농부는 늦가을부터 넉넉히 다음 해 봄에 쓸 양질의 퇴비를 준비합니다. 이른 봄 그 퇴비를 밭 여기저기에 골고루 던지고 땅을 갈아엎습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기름진 토양을 만들어야 수확도 많고 병충해에도 강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신앙 안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고 싶다면 각자에게 주어진 신앙의 밭을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의 덕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고, 인간적 성숙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고, 균형 잡힌 신앙을 지니도록 할 것이며, 자신의 한계나 약점을 점진적으로 강점, 경쟁력으로 탈바꿈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훌륭한 삶을 살다 가신 성인들, 그들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좋은 밭, 기름진 밭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황무지, 불모지, 모래사막 같은 땅의 소유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꾸준하고 점진적인 노력, 불굴의 노력 끝에 세상 모든 것을 다 포용할 수 있는 탁월한 성품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온유와 애덕의 박사라고 불리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 역시 자신의 신앙 여정 안에 엄청난 점진적 성장이 있었습니다. 제2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로 불릴 만큼 부드럽고 따스한 성품의 소유자 돈보스코는 어린 시절 정말이지 까칠하고 과격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전쟁을 치르듯이 자신의 약점과 한계에 맞서 싸워나갔습니다. 많은 결실을 바란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 매일 마음의 밭을 가는 것입니다. 매일 솟아오르는 이기심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교만한 마음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멀리 내다 버려야 합니다. 완고함과 불신의 잡초는 모두 모아 불에 태워버려야 합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우리 각자에게는 양질의 밭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아주 좋은 밭의 소유자가 된 우리는 강한가 하면 부드럽고, 당당한가 하면 겸손하며,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최상의 토양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백배의 결실을 맺은 우리는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이웃들에게는 기쁨이 되는 값진 선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NiLAzyKqTM
++++++++++++++++++
<사랑을 증가시키는 유일한 법>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백성을 위해 우리의 소리를 담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라.”라고 명했습니다. 당시 사대부와 학자들에게 중화(中華)의 한자를 버리고 ‘언문(諺文)’을 만드는 것은 문명에 역행하는 어리석고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최만리 등 수많은 학자들이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성삼문, 신숙주 등 스승인 세종의 뜻을 믿고 따른 젊은 학자들의 순종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인 ‘한글’을 창제하는 위업으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모든 백성에게 지식과 문화의 혜택을 누리게 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만든 백성의 이익을 위한 수많은 발명품이 그랬습니다. 세종대왕의 말씀을 자신들 안에서 열매 맺게 하는 이들에 의해 생겨난 것입니다. 그들은 세종대왕을 사랑하여 그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뿐인데 이웃 사랑의 열매까지 맺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의 말을 존중하고, 그 말이 결국 옳았음을 내 삶으로 증명해 보이고 싶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리고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 비유에서 ‘좋은 땅’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상태가 좋은 땅이 아닙니다. 씨앗을 심어준 주인을 사랑하기에, 어떻게든 열매를 맺어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의지’를 가진 땅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너의 후손이 저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씀하신 분을 믿고 사랑했기에, 그 말씀을 붙들고 고향을 떠났고, 그의 사랑 가득한 순명이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위대한 진리로 열매 맺게 했습니다.
저 역시 한 말씀을 붙들고 거의 30년 가까이 씨름하며 열매 맺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주님과 거래하려 했던 저에게 주님께서는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씨앗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분을 향한 사랑이 제 안에서 싹트자, ‘이 말씀이 내 삶에서 얼마나 위대한 진리인지를 증명하여 주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리라’는 거룩한 의지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는 제 삶에서 구체적인 깨달음의 열매들을 맺게 했습니다.
첫째, 내 불행의 근원이 뱀과 같은 ‘자아’와 거기서 비롯된 삼구(교만, 육욕, 소유욕)임을 깨달았습니다.
둘째, 그런 자아 때문에 내가 하느님을 내 목적을 위한 ‘소’처럼 부리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셋째,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 하듯, 내가 할 유일한 일은 예수님께 붙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넷째, 주님이 모든 것을 주셨기에 나에게는 불가능이 없으며, 원수까지 사랑하고 위대한 신학자가 되겠다는 거룩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다섯째,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성체의 ‘은총’과 말씀의 ‘진리’가 함께 가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여섯째, 은총으로 얻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과 진리로 얻는 ‘이웃에게 꽃을 심는 마음’으로 살아야 다른 이에게 열매를 맺어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열매는 그저 열린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의 말씀을 헛되이 만들고 싶지 않다는 저의 작은 의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네가 가진 것의 십분의 일을 봉헌하여라.”(신명 14,22 참조) 혹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하신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이건 현실적으로 어려워’ 하며 길바닥에 버려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니, 내 삶으로 기어코 이 말씀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이리라’는 의지로 그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바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가장 명확한 증거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말씀을 살아내려는 의지적인 노력으로 표현됩니다. 오늘, 우리 마음 밭에 뿌려진 말씀을 사랑으로 받아, 반드시 열매 맺어 보이겠다는 결심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주임 신부님의 축일을 축하하면서 신부님과 저의 세례명을 성서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부님의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두 이름은 성경에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늙은 즈카리야에게 나타나,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잉태할 것임을 예고합니다. 그 아이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천사의 말씀이 없었다면 잉태도 없었고, 이름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부주임 신부님과 저의 관계는 성서적으로도, 사목적으로도 참 특별하고 감사한 인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하셨습니다. 도박에 쓰는 돈은 어쩌면 길가에 떨어진 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은 트지만 해가 나면 말라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위험 부담이 큰 투기가 돌밭에 떨어진 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버렸다고 하셨습니다. 돈 때문에 친한 친구가 갈라지기도 하고, 돈 때문에 형제간이 다투기도 하는 경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차라리 돈이 없었으면 다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는데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되는 돈이 좋은 땅에 떨어진 씨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돈은 열매를 맺어서 하늘에 쌓는 보화가 될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생각합니다. 좋은 씨앗은 비록 땅이 거친 황무지라도 꽃을 피우는 것을 봅니다. 나쁜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졌어도 싹이 트지 않는 것도 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거친 땅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는데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좋은 땅으로만 가서 선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의 씨앗을 뿌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은 거친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전대에 돈을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겉옷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만 가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마실지 알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을 할지도 알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좋은 땅을 찾습니다. 그런 곳을 블루오션(Blue Ocean)이라고 합니다. 좋은 땅에서 생산성을 높이고, 좋은 땅에서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 것을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척박한 땅이라도 그곳을 옥토로 만들어야 합니다. 시련과 박해와 죽음이 있을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결실을 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보았습니다. 성인들에게서 보았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좋은 땅이라면 감사하면서 좋은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가시밭길이라면 그곳을 옥토로 만들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좋은 땅은 선택이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같은 씨앗인데도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집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의 먹이가 되고, 돌밭에 떨어진 씨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시들어버리며,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숨이 막혀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결실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광야에서 단식하셨으며,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복음은 ‘좋은 환경’에서만 피어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박해받는 땅, 눈물의 땅, 침묵의 땅에서 더욱 진하게 피어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씨앗은 거친 땅이라도 꽃을 피운다. 그러나 나쁜 씨앗은 아무리 좋은 땅이어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진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씨앗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희망, 사랑, 용기라는 씨앗이 내 안에 있을 때, 나는 가시밭도 옥토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만나를 비처럼 내리셨다.” 광야에서조차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논리는 생산성과 이익을 따지지만, 하느님의 논리는 믿음과 충실함을 따집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어디에 있든, 그곳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라. 그것이 너희의 사명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좋은 땅이라면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 땅에서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가시덤불이요 돌밭이라면, 그것을 옥토로 만들 수 있는 신앙의 용기를 청해야 합니다. 좋은 땅은 선택이지만, 열매 맺는 삶은 우리의 책임이자 사명입니다. 우리가 뿌리는 사랑의 씨앗, 나눔의 씨앗, 용서의 씨앗이 언젠가 누군가의 삶에서 백 배의 열매로 맺히면 좋겠습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의 여러 형태 가운데에서 비유를 선호하셨습니다.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약 3분의 1 정도입니다. 비유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 간결하고 생생한 이야기로 꾸며집니다. 씨 뿌리는 이야기, 물고기를 잡아서 고르는 어부 이야기, 포도원의 일꾼들 이야기, 진주 상인 이야기, 잃어버린 양 이야기, 누룩 이야기 등 갈릴래아의 민중들이 쉽게 만날 수 있는 소재를 활용하시어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소재들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농부, 어부, 일용직 노동자, 상인, 목자, 심지어 당대 가르침에서 소외된 여자들도 당신 말씀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친밀한 소재이기에 청중들을 생생하게 끌어들였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소외감이나 열등감 없이 하느님과 그분 나라의 현실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비유가 보여 주는 현실을 추구하며, 그것을 향하여 나아갈 결심을 하도록 이끄셨습니다.
본질적으로 비유는 듣는 사람의 반감을 극복하고자 사용되었던 문답식 형태였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 사제들 같은 당신의 반대자들에게서도 공감을 끌어내고자 비유를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방어하는 데 급급하시지 않고, 직선적이지 않게, 마음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하느님의 존재 양식과 행동 양식을 알려 주시고 그들이 스스로 반성하고 판단하여(마태 18,12; 21,28 참조) 결론을 끌어낼 수 있게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려 깊게 사람을 이끄는 방법을 알고 계시면서 그 누구도 복음의 대상에서 제외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이처럼 모든 마음에 복음의 씨를 뿌리십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1-9: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4절) 여기서 길이란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께로 가는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나그넷길 세상이다. 이 길에는 하느님의 것은 조금도 모르고 세상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길은 단단하여 씨앗을 덮을 만큼 충분한 흙이 없다. 악의 세력이라고 하는 새가 그 씨앗을 먹어버리고 만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5-6절) 돌밭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들은 지나가는 악마들에게 채여 간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시련의 겨울이라고는 없는 날씨가 맑고 편할 때만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고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어려운 시기나 박해가 닥치면 쉽게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7절) 가시덤불은 하느님보다도 재물을 추구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위험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신앙의 진리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한다. 재물에 관한 관심과 욕망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씨를 고이 보존하고 가꾸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엄청난 결실을 보장받고 있다. 이렇게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큰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또 실천하여야 한다. 여기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씨앗은 금방 효과를 내어 싹을 틔우고 잎을 내고 열매 맺지 않는다. 오랜 기간을 꾸준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제 말씀을 잘 간직하고 싹을 틔워 백 배의 열매를 맺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라는 밭에 있는 온갖 장애물들을 치워야 한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와 가시덤불을 걷어내어 좋은 땅이 되도록 하는 수고를 기꺼이 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향한 삶을 살 수 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탓하지 않는 사람 되어>
마태오 13,1-9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탓하지 않는 사람 되어>
씨 뿌리는 사람
땅을 탓하지 않고
아낌없이 뿌리듯이
뿌려지는 씨
뿌리는 사람도
땅도 탓하지 않고
기꺼이 뿌려지듯이
때를 탓하지 않고
언제나
곳을 탓하지 않고
어디에서나
사람을 탓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다만 믿음이기를
다만 희망이기를
다만 사랑이기를
오롯이 그런 사람이기를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도하고 노력하면, 누구든지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1-9)
1)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서, 처음부터 좋은 땅과 나쁜 땅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백지 상태에서 ‘말씀’이라는 씨를 받게 되는데,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각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좋은 땅이 되고, 어떤 사람은 나쁜 땅이 됩니다. 누가 마지막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은 좋은 땅이라도 마지막에 나쁜 땅으로 끝날 수 있고, 반대로, 지금은 나쁜 땅이지만 회개해서 좋은 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좋은 땅이었다가 나쁜 땅으로 끝난 사람이고, 바오로 사도는 나쁜 땅이었다가 좋은 땅이 된 사람입니다. 그렇게 생생하게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땅과 나쁜 땅 사이를 오락가락하기도 하고, 자기 상태를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채로 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다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운명을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결과가 미리 정해져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바꿀 수 없다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2)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아예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안 믿는 자들,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없거나 안 믿는 자들, 내세, 종말, 심판 등을 믿지 않고,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자들, 오직 현세의 일만 생각하면서 사는 자들이 그런 자들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에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3) 길에 떨어진 씨를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것은, 악마가 와서 씨를 빼앗아 간다는 뜻이라고 뒤의 19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악마가 와서 씨를 빼앗아 간다는 말은, 신앙인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 열매 맺는 일을, 즉 신앙생활을 소홀히 한다는 뜻입니다.
유혹은 악마에게서 직접 올 수도 있고, 세상을 통해서 올 수도 있고, 각 개인의 본능과 욕망으로 오기도 합니다. 어떤 경로로, 어떤 방식으로 오든지 간에,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혹에 맞서 싸우는 과정입니다.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기도’입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충실한 신앙인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 성녀들이 유혹에 강했던 것은, 더 많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인터넷, 스마트폰 등이 유혹의 중요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세속적인 유혹들, 각종 사이비와 이단들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사용해서 신앙인들을 흔들고 있습니다. 만일에 기도하지는 않고, 그런 소리들만 듣고 있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지고 있던 신앙과 은총을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4) 돌밭에 떨어진 씨가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리는 것은, 믿는 대로 살지 않아서 믿음이 희미해지다가 결국 믿음을 잃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뿌리’는 ‘믿음의 실천’과 ‘신앙인다운 삶’을 뜻합니다.>
신앙은 곧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신앙만 있고 생활이 없다면, 즉 믿기는 하지만 믿는 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뿌리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믿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5) 씨가 가시덤불에 떨어져서 숨이 막혀 버리는 것은,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숨이 막히는 것이라고 뒤의 22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기도하고 노력하면, 누구나 주님의 도움을 받아서 자유와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6) 좋은 땅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최종적으로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좋은 땅이 되는 비결 같은 것은 따로 없습니다. 누구든지 좋은 땅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좋은 땅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곧 좋은 땅입니다. 충실한 신앙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곧 충실한 신앙인입니다. 이 말은, 말장난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을 보시는 분입니다.
이 노력은 한 번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끝까지(죽을 때까지) 계속 해야 하는 일입니다.>
=====================
[청주교구 원종훈 요셉 다미안 신부님]
<하느님을 만나려면>
하느님을 만나려면 그 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덕망이 높은 수도승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저는 하느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말없이 젊은이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젊은이는 매일 같이 수도승을 찾아와서 같은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도승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몹시 무더운 어느 날 수도승은 젊은이더러 강으로 함께 목욕을 가자고 했습니다. 젊은이가 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수도승이 뒤따라 물에 들어와서는 힘으로 젊은이를 물 속에 처박았습니다. 젊은이는 갑자기 당한 일이라 꼼짝 못하고 물 속에 처박힌 채 그저 허우적거릴 뿐이었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 수도승이 젊은이를 놓아 주며 묻는 것이었습니다.
"물 속에 처박혔을 때 무엇이 가장 절실하더냐?"
젊은이가 대답했습니다.
"숨 쉴 수 있는 공기였습니다."
그러자 수도승이 말했습니다.
"하느님도 그만큼 절실하더냐?
만일 네가 하느님을 그만큼 간절히 찾는다면 머지 않아 하느님을 만나 뵈올 것이다. 그런 갈망은 없으면서 그저 네 지식과, 말 솜씨와, 힘만 가지고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는 일이며 너는 결코 하느님을 못 만나 뵈올 것이다."
***
우리는 하느님을 내가 보고 싶을 때만 보고, 만나고 싶을 때만 만나고, 원할 때에만 청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이 모든 걸 나에게 맞추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 정 반대로 우리는 하느님이 날 찾으실 때, 날 원하고, 보고 싶어하실 때, 늘 준비된 모습으로 그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모든 걸 그 분에게 맞추려고 나는 노력했습니까? 조용히 두 눈을 감고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
[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아무리 많은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이 무뎌지면 아무것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는 제1독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에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 홍해 바다를 건너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였지만 광야에 접어들자마자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합니다. 고기 냄비 곁에서 빵을 배불리 먹던 시간만을 기억하며 이집트 땅에서 죽는 것이 더 좋았겠다고 말합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손아귀 아래서 엄청난 고역을 겪으며 주님께 살려 달라고 외치던 그들이었습니다.(탈출기 2장 23절 참조)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고, 그들은 그 구원의 과정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치는 조그마한 시련을 참기 싫었나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모두가 큰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기적,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코앞에서 본다 하더라도 모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제1독서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어려움이나 시련이 닥치면 많은 이들이 말씀을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좋은 땅이 되어야 한다고 권고하십니다. 코앞에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주님을 원망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며 계속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만이 비로소 영원한 나라에서 주님을 만나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계심을 굳게 믿고 당신 말씀에 충실하기를 바라십니다.
=====================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의 비유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닿을 수 있는 것을 소재로 삼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주된 활동 무대였던 갈릴래아 호수와 그 주변 지역을 생각하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비유는 이렇게 하늘 나라의 신비를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들과 연결시킵니다. 똑같지는 않지만 경험으로 하늘 나라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갑니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로 가십니다. 군중의 눈에는 집에서 나와 그들에게 가시는 예수님과, 씨를 뿌리러 나서는 사람이 똑같게 보였을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말씀은 씨처럼 모든 사람에게 뿌려집니다. 이미 선택된 누군가에게만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뿌려집니다. 그러나 같은 말씀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 효과는 크게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하는 세 부류의 사람과, 상상을 넘어서는 많은 열매를 맺는 한 부류를 예로 드십니다. 마치 모든 이에게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오 복음서 저자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귀가 있는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며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을 삶으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삶으로 옮길 때 하늘 나라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삶 속의 성경>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성서 사도직의 소임을 맡으면서 언제나 마음에 품고 사는 표현입니다. 성경을 머리로만 배우고 익혔던 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기만 할 뿐, 가슴으로 삶으로 느끼고 다가가지 못하였습니다. 성서 사도직 소임을 하면서 성경을 통하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성경, 나와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며 나에게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서 또 다른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각자가 저마다의 삶 속에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을 만나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오 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철학적 사유가 담긴 단어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어렵고 난해한 신학적 단어나, 율법에 나와 있는 개념적 지식으로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씨 뿌리는 일, 수확하는 일, 빵 만드는 일, 고기 잡는 일, 물건 파는 일 등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통해서 하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어떻게 하면 하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는지 알려 주십니다. 이러한 비유 말씀은 어쩌면 사람들의 언어를 통하여 하느님의 언어를 듣게 하시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삶 속에서 쉬이 지나치고, 또 잊고 살았던 하늘 나라를 찾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것을 자신의 삶에 어떻게 비추어 보고 또한 어떻게 그 깨달음대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고민은 우리의 몫입니다.
땅을 갈아엎고 돌을 골라낸 뒤 흙을 부드럽게 하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어 햇볕이 잘 드는 땅으로 만들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말씀의 신비를 실현하기를, 나의 마음과 삶을 햇볕이 잘 드는 비옥한 밭으로 가꾸기를 기도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공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삶의 방식인 성공 지향적 생각을 하던 한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업계에서 2등은 의미 없다면서, 1등을 위해 온 힘을 쏟았습니다. 신앙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성공을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전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결국 사업은 실패했고, 건강도 잃고 신앙도 잃고 기쁨도 잃고 말았습니다. 후회와 힘든 시간을 거쳐서,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여유 있는 삶을 살면서, 사람들과의 만남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생활하십니다.
집중력 높이는 공부 잘하는 약이 있습니다. 효과는 분명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족지연’을 통해 맛볼 수 있는 기쁨과 지적 성취감을 앗아가 버립니다. 과연 집중력 높여 좋은 성적 맞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을까요?
성공 지향적 사고, 세상의 일에 집착하는 것 모두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니체는 하릴없이 자연 속을 거닐 때 가장 위대한 사유를 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때 얻은 생각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공 지향적 사고, 세상에 집착하는 것에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으로 가치 있는 삶,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좋은 땅에서 열매를 맺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당연히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리고,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맙니다. 또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버립니다. 씨는 주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세상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좋은 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땅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만, 백 배,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서 말씀드린 성공 지향적 사고, 세상의 일에만 집착하는 삶을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기도와 성사, 신앙 안에서 꾸준히 길러진 겸손하고 열린 마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삶을 통해 가꾸어진 마음을 통해서만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농부는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할까요? 제일 먼저 하는 것은 땅을 갈아엎습니다. 땅을 부드럽게 만들고, 공기가 들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도 갈아엎어야 하지 않을까요? 성공과 세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갈아엎어,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좋은 땅을 만들어야 합니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불평에 대한 성찰>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합니다.
배가 고프기 때문이고, 이집트에선 노예로 살아도 배는 불렀는데 광야에선 배가 고프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남의 일처럼, 나는 그렇지 않은 양 이들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사는 동안 얼마나 불평이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불평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오늘 해야겠습니다.
먼저 볼 것은 불평은 불행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행복한 사람의 입에서는 결코 불평이 나오지 않습니다. 불행하거나 적어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불평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왜 행복하지 않고 더 나아가 불행합니까? 그것은 불만 때문이고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또 왜 불만이고 왜 만족할 줄 모릅니까? 그것은 욕구는 한계가 없고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능력에 한계가 있는데도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복하려면 만족의 비법을 알아야 하는데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곧 하나는 인간적인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방법입니다.
먼저 인간적인 방법을 보면 능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욕구를 없애거나, 욕구를 없앨 수 없다면 욕구가 욕망이나 욕심으로 발전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고파도 화내거나 불평하지 않고 능력이 없고 가난한 자신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겁니다.
다음으로 우리 신앙인은 신앙적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으로 만족하거나 하느님의 도움으로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곧 배고프면 인간에게 불평하지 않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반대의 짓을 합니다. 기도해야 할 입으로 불평을 하는 겁니다. 하느님께 향하지 않고 인간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또 반성해야 할 것은 이집트를 그리워하는 점입니다. 배고프다고 배불렀던 이집트를 그리워하는 것 말입니다.
복지 곧 행복의 땅인 가나안을 그리워하지 않고, 배고픔 때문에 노예의 땅인 이집트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철학자보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단식하시고 돌로 빵이 되라는 유혹을 광야에서 받으실 때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처럼 하느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빵 문제에만 관심이 있어서 하느님 말씀의 좋은 밭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불평 성찰을 한 우리는, 지상에 살면서도 천상의 행복을 그리워하고 배고파도 하느님과 하느님 말씀으로 만족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3)
<깊은 성찰이 필요한 때!>
오늘 복음(마태13,1-9)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농부들의 땀에 비유해 설명하십니다. 농부들이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 땀을 흘리듯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농부들은 뿌려지는 씨가 좋은 땅에 떨어지게 하려고 부단히도 애를 씁니다. 돌도 걷어내고, 거름도 주고, 풀도 메고 하면서 땅에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특히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짓는 농부들은 더 그렇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좋은 땅들이 이번 폭우에 쓸려가 다시 자갈밭, 돌밭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번 폭우에 큰 피해를 입은 농부들이 많습니다.
합천에서는 가회면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가톨릭 우리농 회원들이 모여 있는 열매지기공동체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논과 밭이 밀려온 토사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직접 가서 목격하니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현 공소회장님과 전 공소회장님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바라봅니다. 점점 더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재해 앞에서 깊은 성찰이 필요해 보입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 공동체가 함께 성찰해야 할 때입니다. 인간의 욕심과 탐욕과 그리고 개인과 집단이기주의를 내려놓고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사는 큰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각자가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뿌리시는 씨앗, 곧 하느님의 말씀이 좋은 마음의 밭에 뿌려져 함께 어우러져 사는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합니다.
더 가지지 못해서, 더 만족하지 못해서 계속 불평불만을 드러낸다면, 하느님께서는 더 큰 재해로, 더 크게 화를 내실 것만 같습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