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랑 어원지” 국가유산청 출원 요약서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얼이 담긴 고향 같고 어머니 품 같은 정겹고 친근한 말이다.
그런데 “아리랑”이란 말은 노래의 후렴이나 추임새로만 전해 내려오고 있어 “아리랑”의 의미를 노랫말에 의해 관념론적으로 폭넓게 구구각색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무튼 “아리랑”이라는 말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이다.
따라서 필자는 아리랑의 언어적 참뜻을 찾느라 그 나름으로 40여 년을 가슴에 담고 노력한 결과 “아리랑”을 고증할 수 있는 말과 그 자취가 현존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근거 자료를 찾아 하나하나 정리하게 되었다.
언어는 시대성의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에 슬며시 사라지는 말과 새로 쓰여 지는 신종어가 있는데 제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말이 바로 “아리랑”이었다.
그런데 “아리랑”에 대한 언어적 참뜻을 정리하면서 “아리랑”은 나 혼자만의 의문이 아닌 한민족 모두의 공동관심사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선조들은 이 “아리랑”을 가슴에 품고, 힘들고 외로울 때 그리움과 슬픔을 풀어 내리며 애절하게 “아리랑타령”을 노래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이 삶의 애환을 담아 부르던 아리랑의 실체는 다름 아닌 “강” 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물길의 명칭을 조사하게 되었고, 물길의 명칭을 조사하면서
“알(川)”이 내(川) 또는 강(江)이라는 것을 알았고, “알”은 “아리”의 준말이며, “아라리”는 “알”의 파생어 “알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물길의 명칭을 우리 선조들은 고랑, 도랑, 거랑, 큰거랑, 알(아리), 아리랑(아리수)라 하였으며, 모두 물이 졸졸 흐를 “浪(랑)”을 붙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쓰리랑”은 19세기 초 각 지역과 마을마다 아리랑이 수없이 창작되어 불러졌는데, 그 중에 진도아리랑과 밀양아리랑의 후렴에 흥을 돋우기 위해 추임새로 만들어진 신조어가 “쓰리랑”이라는 것도 보증할 수 있었다.
또한 우리국민들이 애국가처럼 부르고 있는 경기아리랑은 작자미상의 곡이 아니라 1926년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나운규가 구 경기아리랑을 개사한 곡으로 단성사의 빅터악단이 편곡(반주)한 노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1896년 미국의 선교사 헐버트에 의하면 조선인들이 부르는 포크송 같은 국민의 노래 “아리랑”은 즉흥의 명수(선소리꾼)인 조선인들에 의해 수없이 창작되어 불러졌지만 후렴은 변함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헐버트는 아리랑의 선소리꾼을 윌리엄 워즈워드 같은 시인이라 하였다.
특히 강릉은 유천, 남대천, 군선강, 칠성천, 어단천, 금광천(와천), 섬석천(박월천), 임곡천과 같은 내(川)가 많을 뿐 아니라, 경포호, 한송호, 풍호, 향호, 순포처럼 물을 펼쳐놓은 호수가 많아 옛 부터 냇물이 거문고의 6현처럼 흘러내려와 호수를 펼쳐놓은 곳이라 하여 “하슬라(河瑟羅)”라고 하였는가 하면, 냇물이 서쪽에서 흘러내려오는 곳이라 하여 “하서랑(河西浪)”이라 하였다.
“강”보다 작은 물길을 “알(아리)”이라고 하는데 강릉은 예로부터 내(알)”가 많아 “아라리”의 고장이라 하여 강릉의 “오독떼기”는 후렴을 “아리랑”이라 하지 않고 “아리 아리 아라리요. 아라리 고개로 넘어 간다”며, 노래하고 있다고 인간문화재 동기달님 께서 증언해 주었다. (오독떼기 악보 복원 전 구정초교교장 권오이)
나운규는 청진에서 회령까지의 철길공사 노동자들이 부르는 구슬프고 한이 서려 있는 노동요 “아리랑” 곡조를 듣고, 일제강점기(1926년)에 “아리랑” 영화를 제작(조선키네마 프로덕션이 제작한 흑백 무성영화)하여 단성사에서 개봉할 당시 영화 “아리랑”의 노래는 김연실이 불렀고, 반주는 일본의 빅터 악단이 연주했는데, 빅터 악단의 실수로 노래 제목이 “아르렁”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구 경기 아리랑”이 근간이 되어 창작되었다고 하여 “신 경기 아리랑”이라고도 하는데, 이 노래가 전국에 유행되자 일제는 “금창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 노래가 우리나라 백성들이 일제강점기 때 나라를 빼앗긴 슬픔에 애국가처럼 부르던 국민의 노래, 지금의 “아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선조들은 물길을 고랑, 도랑, 거랑, 큰거랑, 알(아리), 아리수(아리랑)라 하였으며, 모두 물이 졸졸 흐를 “浪”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큰 물길을 알(아리), 아라리, 라고 하였는데,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에 한강을 阿利水(구릉“阿”, 이로울“利”, 물“水” 즉 구릉으로 흐르는 이로운 물)라 기록 하였으며, 물길 따라 다니던 정선 뗏꾼들에 의하면 강가의 마을을 “아라리”라 했다고 하며, 이를 뒷받침 할 흔적(나루)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확실한 증거로는 제주도의 한천하류에 아라동(아라리)이라는 마을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아리랑은 광개토대왕 비의 阿利水 때문에 한자로 阿利浪이라 해야 바른 표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我理郞(참된 나를 찾는 즐거움)이라는 그럴듯한 한자 표기로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리랑은 구릉으로 흘러가는 강(River)입니다.
물은 우리의 생명이고 삶의 원천입니다. 물을 떠나서 우리는 살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선조들은 수렵생활을 하면서부터 강가에 정착하여 이웃을 이루고 혈연으로 마을을 형성하여 삶의 터전인 “아리랑”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이곳에는 어머니가 계시고 형제자매가 있고 친척과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곳이 정든 고향이고, 그리움이 있고, 이별과 삶의 애환이 서려있는 “아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리랑”이란 말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아리랑이라는 상상의 세계 속에 그 의미를 각양각색으로 다르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리랑은 강이었습니다. 강을 따라 길이 있었고, 길을 따라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마련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리랑과 함께했던 우리는 언젠가 떠나야 했습니다.
아리랑고개에서 시작되는 물이 고랑-도랑-거랑-큰거랑-알(아리)-아리랑(아리수)을 거쳐 돌아올 줄 모르고 바다를 향해 떠나듯....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슴에 간직한 채 우리는 떠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은 고향을 떠나는 이별의 통한을 아리랑의 노래 말처럼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며,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아리랑”은 우리의 고향이고, 정겨움과 삶의 애환이 가득담긴 뿌리 깊은 말입니다.
그런데 강릉은 예로부터 河西浪(물이 서쪽에서 흘러내리는 곳), 하슬라(河瑟羅:(냇물이 거문고의 육현처럼 흘러 호수를 펼쳐 놓은 곳), 명주(溟洲·바닷가 마을),
예국(濊國·물이 많은 나라), 임영(臨瀛·큰 바다를 품은 곳), 북빈경(北濱京·물가 빈) 등
한결같이 물과 함께 했던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원성왕 본기에 경주의 북천(川)을 “알(閼)”이라 하였는데, 강릉에서는 내(川)를 “알”이라 하며, “알”을 이두향찰의 음차로 “月”을 쓰고 있으며, 이를 증명하는 근거지로 沙月, 博月, 上月, 下月이 아직 현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강릉에는 아리랑의 語原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리랑 연구가, 시인 김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