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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위 사이트를 재편집한 내용임
<미니마 모랄리아>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철학적 단상집
"미니마 모랄리아(Minima Moralia: Reflections from Damaged Life)"는 아도르노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나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1944년부터 1947년까지 작성한 잠언들을 모아 1951년 첫 출간되었다.그에게 있어 나치의 지배와 유대인 박해, 망명생활과 세계대전 등은 "예로부터 꿈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해 있던 소리 없는 소음이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면 신문의 큰 제목들에서" 울려 퍼지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고통의 표현으로서 철학은 '부정적'이어야 하며, 현실의 모순을 남김없이 폭로하고 비판하며 그 변화를 촉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이어야 한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즘이라는 경험을 겪은 후, 자본주의 사회와 현대인의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다. 아도르노는 유대인으로서의 망명 생활과 전쟁 후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를 깊이 고찰하며, 개인의 삶과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타락하고 파괴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제목의 의미
'Minima Moralia"라는 제목은 아도르노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패러디한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이 어떻게 최고선을 실현하며 덕을 쌓고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를 논한 반면 "미니마 모랄리아"는 현대 사회에서 도덕적 삶의 파괴와 도덕적 이상이 무너진 현실을 반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도르노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소외되고 파괴되었는지를 탐구하면서, 더 이상 최고선이나 윤리적 삶이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구조와 내용
"미니마 모랄리아"는 153개의 짧은 단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 단상은 철학적 에세이 형식으로, 일상적 경험이나 사회적 현상에서 출발하여 현대 사회의 도덕적, 문화적 타락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철학은 이 슬픈 시대, 슬픈 사회의 이론적 반영이며, 현 시대의 "부정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단호한 시선이다. <미니마 모랄리아>는 이러한 '부정 변증법'으로서 아도르노의 철학 기획을 사회의 가장 내밀한 영역, 사적이고 문화적인 일상의 영역 - 반항적인 청소년들과 부모들의 세대갈등, 옷차림과 유행, 결혼과 이혼, 프랑스어로 외설소설을 읽을 때의 느낌, 부인이 외투를 입혀주어야 하는 폭군 가부장, 선물을 고르는 아이들, 신문 부고란, 영화와 대중문화 등 - 을 배경으로 실행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인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이 암시하듯, 이 책은 파시즘과 전체주의, 후기 자본주의의 시대에 상처받은 개별자들의 삶의 경험을 기록한다. 이를 통해 아도르노는 '슬픈 시대'에 걸맞은 '슬픈 학문'으로서 철학이 상처받은 개별자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주요 주제들:
1. 자본주의와 개인의 소외: 아도르노는 자본주의가 개인의 삶을 상품화하고 비인간화한다고 주장한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더 이상 자율적 존재로서 살 수 없고, 자신의 삶을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시키게 된다. 이는 개인의 자아가 파괴되고, 소외된 노동을 통해 수동적 존재로 전락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2. 도구적 이성과 억압: 아도르노는 도구적 이성이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고, 인간을 도구화하며 체제의 효율성에 맞춰 조정된다고 비판한다. 이성은 더 이상 비판적 사고나 자유로운 정신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억압적 구조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3. 대중문화와 문화 산업: 아도르노는 대중문화와 문화 산업이 인간의 개성과 창의성을 억압하고, 획일화된 소비자로 만든다고 보았다. 현대 사회에서 문화는 더 이상 자유롭고 창조적인 활동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표준화되고 상품화된 형태로 제공된다. 이는 인간의 비판적 사고와 감수성을 마비시키고, 정신적 퇴행을 초래한다.
4. 도덕적 삶의 파괴: 아도르노는 현대 사회에서 윤리적 가치와 도덕적 삶이 파괴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전체주의 체제나 자본주의의 비인간화된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도덕적 자율성 을 지니지 못하고, 사회적 압력에 순응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5. 전쟁과 인간성의 파괴: 아도르노는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경험을 통해, 인간성이 얼마나 쉽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목격했다. 그는 이러한 극단적인 폭력과 파괴가 단지 나치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현대 사회 전체가 내포하고 있는 폭력적 구조의 결과라고 분석한다. 전쟁 이후의 세계에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은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의의와 영향
"미니마 모랄리아"는 철학과 사회비판을 결합한 독특한 저작으로, 아도르노의 사상적 깊이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은 특히 자본주의 비판과 대중문화 비판에 있어서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며, 이후 문화연구, 사회철학, 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전후 사회의 비판적 성찰로서, 현대인들이 직면한 소외와 비인간화의 문제를 깊이있게 탐구한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니마 모랄리아"는 아도르노가 개인의 일상적 경험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와 현대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품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대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는 데 유효한 통찰을 제공한다.
주요내용
●현대사회 비판
감각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현대인들에게 사유적 성찰은 빛바랜 수장고처럼 고답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바닥에 뿌리내리지도 않은채 수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수생식물처럼 부박한 현대산업사회일수록 현상을 꿰뚫는 성찰의 필요성은 커진다.
20세기 철학은 1·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경험, 자본주의 사회의 급속한 발달로 인한 인간소외의 문제 등 이전 시기와는 또 다른 ‘인간의 문제’에 대해 사유했다. 그 가운데 ‘미학이론’으로 잘 알려진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근대와 현대를 관통하는 철학적 사유를 보여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힌다.
사실 그의 글쓰기는 매우 난해해 독해에 이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다. 한데 다행스럽게 보통사람들에게도 ‘의사소통’의 길을 하나 남겨두고 갔다. 최근 번역 출간된 ‘미니마 모랄리아’(김유동 옮김, 길 펴냄)가 그것이다.
"활짝 핀 나무조차 사람들이 그 만개 밑에 가려진 공포의 그늘을 인지하지 않는 순간 거짓말을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순진무구한 표현도 아름답지 못한 존재자를 치욕스럽게 하는 구실이 된다. 아름다움이나 위로란 더 이상 없으며, 있다면 그것은 오직 다음의 시선, 즉 공포를 직시하고 감내하며 '부정성'에 대한 단호한 의식 속에서도 더 나은 상태에 대한 가능성은 놓치지 않으려는 시선이다."
●인간의 삶은 물질적 생산과정의 부속물
‘미니마 모랄리아’는 유대계 독일인인 그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 망명기간에 쓴 에세이 형식의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의 주저인 ‘계몽적 변증법’이나 ‘미학이론’과 달리 그의 말대로 ‘사물과 현상의 연관 관계에 관한 표명을 유보한 채 느슨하고 자유분방한 형식으로’ 씌어졌다. 내용은 ‘계몽의 변증법’의 속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핵심개념은 ‘도구적 이성’이다. 현대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자신의 주체적 사유나 실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물질적 생산과정의 부속물에 불과하며, 거대사회 속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우리가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삶조차 기만 속에 가둬져 있다는 것이다. 삶에서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탓이라고 말한다.
후기자본주의에서 삶은 "어떤 자율성이나 독자적 실체도 지니지 않은, 물질적 '생산과정'의 부속물이 됨으로써 사적 영역이나 단순한 소비의 영역"으로 전락했다. 삶은 생산에 종속되어 생산이 목적이고 삶이 (재생산과 소비 등을 통해 생산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지만, 거꾸로 대중매체는 '충만한 삶'에 대한 이미지를 퍼뜨리고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현존을 긍정하도록 유도한다. 오늘날 유행하는 자기계발서나 힐링 담론 역시 이 과정의 연속이다. "난 할 수 있어!", "그래도 삶은 아름답지 않은가?"라는 사고를 강제하는 이 과정은 삶이 궁극적으로 생산에 종속되어버린 현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삶은 가상이 되었다. 이러한 삶의 쇠락은 곧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행위하는 주체의 소멸을 의미한다. 나아가 주체의 소멸은 다시 윤리의 불가능성을 함축한다. 만약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살아가는 자율적인 주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윤리의 물음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올바른 삶"은 오늘날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허위적인 삶 속에 올바른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허위적 삶을 강제하는 객관적인 힘, 즉 사회적 강압 속에서 개별자는 독자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리의 물음, 올바른 삶에 대한 물음을 우리는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개별자들이 올바른 삶에 대한 물음을 더 이상 제기하지 않는 순간, 사회적 억압과 지배의 메커니즘은 개별자들의 체념을 양분삼아 더욱 굳건한 토대를 이룰 것이며, 이는 사회적 자유의 완전한 말살과 특수자에 대한 보편의 지배를 완성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날 삶이 가상이 되고 올바른 삶이 불가능해진 것이 사회적인 메커니즘에 따른 것이라면, 오히려 "올바른 삶"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삶을 불구화하고 개별자의 고유한 경험을 말살시켜버리는, 교환원칙에 입각해 삶을 교환 가능한 것,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사회적 시스템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행위가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따라서 "어떻게 주체의 윤리적 삶이 가능한 객관적 관계망을 만들어낼 것인가?"의 물음으로 소급된다. 결국 아도르노는 윤리의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정치의 문제로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전체는 비진리다"라는 이 책의 유명한 명제는 현실의 '허위적' 전체를 변혁해야만 그 안에서 '올바른' 삶이 가능할 것이라는 진단이다. 윤리는 축소된 정치이며, 정치는 확장된 윤리다. 따라서 개별자의 고유한 삶의 가능성은 빈틈없이 총체적으로 조직된 사회적 전체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사회적인, 그러나 전체에 저항하는 개인
"올바른 삶"에 대한 물음은 또한 주체로서 개인 또는 개별자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삶은 언제나 개별자에 고유한 영역이며, 개별자는 바로 자신의 고유한 삶을 통해서만 적대적이고 허위적인 전체와 거리를 둠으로써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개인이 전체에 종속되어버리는 전체주의적 사회는 물론, '대중 민주주의'와 '대중문화',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특징지어지는 후기 자본주의적인 대중사회에서도 개인은 언제나 동일한, 사회적으로 규정된 삶의 형식 속에서 그 고유한 삶의 영역을 박탈당하고 만다. "자본주의에서는 '차이'와 고유성 덕분에 지배적 교환 관계 속에 흡수당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질의 유토피아'가 물신적 성격 속으로 도피한다." 이에 반해 아도르노는 '비판이론'의 지배 비판은 바로 전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개인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차이'를 녹여버리는 것을 곧바로 '의미'라고 외쳐대는 전체주의적 통일성에 직면해서 사회의 해방적 힘들 중에서 어떤 것은 잠정적으로 '개별적인 것'의 영역으로 모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비판이론'은 (…) 이 '개인' 속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의 삶의 고유성이 중요한 이유는 점점 개별성과 고유성을 잠식해 들어가는 사회적 전체의 허위적인 통일성과 총체성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개인만이 이 사회적 전체의 허위를 증명하고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원리로 통일되어 고유성이 해체되어가는 시대에 개인은 마지막 남은 "진리의 파수꾼"이다, 개인은 전체에 저항함으로써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비동일자로 남는다.
아도르노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급진적으로 재구성한 마르크시스트 철학자였지만, 개인과 전체, 특수와 보편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집단주의에 갇혀 개인의 역사적 역할을 부정하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은 "개인에겐 두 개의 눈이 있지만, 당에는 천 개의 눈이 있다"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당과 계급 같은 집단적 주체의 실천만을 강조하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에 대한 반감 때문에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 자신의 삶의 고유성과 개인의 의식에 관한 물음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한술 더 떠 '반동적'이라고 비난한다. 이 때문에 개별자의 삶과 경험, 그리고 고통에 주목하는 아도르노는 흔히 '부르주아 개인주의자'로 매도된다. 물론 개인에 대한 관념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부르주아 계급의 형성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다. 그러나 정작 아도르노는 개인을 실체로 규정하는 자유주의적인 개인주의는 오히려 개인에 대한 전체의 예속을 강화하는 무기력한 이념이라고 비난한다.
왜냐하면 개인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이며, 사회적으로 규정된 개별자이기 때문이다. "사회화의 압력에 저항하는 사람으로서조차 개인은 사회화의 가장 고유한 생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고유한 삶과 자율성은 그러한 고유한 삶을 보장하는 객관적인 사회적 관계망을 전제로 한다. "사회 해방 없이는 아무런 해방도 없다." 반면 '실체로서 개인'이라는 관념은 '가상'에 불과하다. 나아가 개인을 실체로 보고 사회를 원자화된 개인의 총합으로 보는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로운 삶의 전제가 되는, 개인을 넘어선 사회의 보편적인 상태에 대한 물음을 기각함으로써 오히려 개인을 예속시키는, 현존하는 사회적 억압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개인을 무장 해제시킨 자리에는 언제나 전체주의적인 지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20세기 역사의 경험은 이를 말해준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개인에 대한 관점을 '사회적인, 그러나 전체에 저항하는 개인'이라는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개별자들은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지배질서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차이'를 넘어선 '연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고유성의 유토피아는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
●구원의 시선: 현실과 그 넘어섬
"절망에 직면해 있는 철학이 아직도 책임져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물들을 구원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서술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한다. 인식이란 구원으로부터 지상에 비추어지는 빛 외에는 어떠한 빛도 가지고 있지 않다."
벤야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아도르노는 이 책의 결말을 "메시아의 빛 속에서 드러날 세상"을 고대하는 "구원의 관점" 또는 "메시아적 관점"에 대한 서술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는 사유가 현존의 해방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미시적인 일상의 영역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사유'에 남겨진 마지막 기회는 외떨어진 것에 대한 시선, 진부한 것에 대한 증오심, 닳아빠지지 않은 것, 즉 보편적 개념의 틀에 의해 아직 파악되지 않은 것에 대한 추구에 있다."
아도르노는 전통적 철학이론이 다루지 않았던 한 사회의 일상적이고 사적인 영역, 문화적인 소비의 영역 속에서 개별자들의 경험을 다양한 형태로 다루며, 그 안에서 그러한 일상 속에서마저 그 흔적이 감지되는 지배적 전체의 "객관적 힘"을 발견하려 시도한다.
그 결과 아도르노적인 시간 개념 속에서 "가장 최근의 과거사는 항상 카타스트로프(재앙)에 의해 파괴된 것인 양 나타난다." 진보하는 역사는 동시에 개별자들의 고통의 역사였을 뿐이다. 석기 시대에 돌을 던져 소유물을 놓고 다툼을 벌이던 인류가 핵무기와 가스실을 만들어 수백만 명을 대량 학살한 것은 진보이면서 동시에 파국의 역사인 셈이다. 철학은 이러한 역사적인 재앙이 낳는 사회적 고통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다. 그러한 고통의 표현 속에는 그러나 절망적인 슬픔과 체념을 넘어서, 이 고통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해방과 초월에 대한 사유의 갈망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구원을 향한 사유의 시선은 결국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응시를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관점은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를 함축한다. 사유는 언제나 현존을 넘어선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을 자기 내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유토피아적 상태에서 각 개별자들은 생산에 종속되어 자신의 고유한 삶을 박탈당하는 일 없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노동한 대가로 주어지는 돈을 공허함을 채워주지도 못하는 쾌락적 소비에 소모하는 생활을 중단하고, 존재 그 자체가 의미를 갖는 자기 자신의 삶을 영위할 것이다.
"짐승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물 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그 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더 어떻게 규정할 것이나 실현할 것도 없이…….'"
그러나 그 유토피아가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모습으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유토피아란 애초부터 어디엔가 있을 것 같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는 희뿌연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론적으로는 증명이 불가능하지만 우리의 윤리적, 정치적 삶을 위해 실천적으로 요청되는 일종의 "규제적 이념"(칸트)인 셈이다.
"우리가 구원을 희망할 경우 희망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음성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한순간이나마 숨 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은 무기력하기 그지없지만 그러한 희망인 것이다."
아마도 이 책에서 아도르노가 음울한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이나 방안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기적도 바라기 어려울 만큼 전망이 어두웠던 1940년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아도르노의 대안적인 성찰들은 이후 그의 철학적 주저인 <부정 변증법>에서야 그 어렴풋한 윤곽이 드러난다. 이 책에서 그는 "비동일자"에 대한 강조를 통해 그가 겪어야 했던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동일성 논리"를 넘어서는 철학적 구상을 서술한다. 나아가 사유의 비판적 무기로서 변증법의 역할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여전히 신학적인 문제틀이 개념적인 분석과 공존하고 있으며, 현재의 억압적 상황을 넘어선 대안적 상태에 대해서는 언제나 가정법(접속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결국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유토피아적 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보다 더욱 중요했던 것은 슬픈 시대의 슬픈 학문으로서 철학이 부정적 현실에 대해 단호하게 맞서려는 '비판적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슬픈 학문'이라는 표현은 원래 <즐거운 학문>(기쁜 학문, Fr?hliche Wissenschaft)이라는 니체의 철학적 모토를 패러디한 것이다. '즐거운(기쁜) 학문'을 '슬픈 학문'으로 대체하는 것은 슬픔 속에서 비관하라는 메시지처럼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러나 '기쁨과 긍정의 철학'은 시대의 아픔을 표현하는 '슬픈 학문'이라는 출발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헤겔, <정신현상학>)는 오늘날처럼 모두가 슬픔에 잠긴 '슬픈 시대'를 이겨내기 위한 철학적 출발이다. 이러한 비판으로서의 철학은 '슬픈 학문'으로만 남지 않는다. 철학은 슬픈 시대의 고통을 표현하면서, 그 부정성에 대한 단호한 자세 속에서 유토피아의 희망을 보존하려는, '긍정'(현존에 대한 무비판적인 자세라는 의미의 긍정이 아니라, 부정적인 자세를 통해 현존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의미에서의 진정한 긍정)을 향해 나아가는 '부정의 힘'으로 이어져야 한다.
●삶의 다양성을 딜레탕트적 자유분방함으로 해석
아도르노는 이 책에서 개인적 ‘삶’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 153개의 단상(斷想)을 통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난삽하고 지루한 이론적 천착은 자제하고 ‘주관적 경험’에 꽂힌 영상들을 딜레탕트적인 자유 분방함으로 해석해나가면서 자신의 알몸을 드러낸다. 철학이나 변증법, 정신분석학 등 전문적 대상을 다루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결혼, 이혼, 부부관계, 세대문제, 성(性), 사랑, 지식인, 인간관계, 노동·산업의 문제, 소유 등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들과 그속에 숨겨진 본질을 드러낸다. 각 단상마다 글을 이끌어낸 모티프를 소제목으로 붙였다.
거대한 생산 메커니즘 속에서 왜곡된 삶을 살아가는 왜소화된 주체 또는 기형화된 개성을 표현한 ‘어리석은 아우구스투스’를 보자.
‘…불행은 기존에 있던 개인을 급진적으로 근절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개인은 이미 죽음을 당했음에도 중화되어 무기력하게 질질 끌려 다니고 치욕적으로 끌려 내려온다는 데 있다.….”
자신과 외부의 견실한 관계설정 속에서 세상이라는 망망대해를 헤치며 삶을 일구어나가는 ‘주체’였던 예전의 개인이 후기산업사회에 오면서 무력화·불구화되고 있음을 통찰하고 있다.
결혼과 이혼에 대한 그의 사유는 그야말로 통렬하다.‘분리와 결합’이란 단상에서 그는
‘결혼은 오늘날 대체로 자기트릭으로 작용한다. 결혼식장에서 굳은 서약을 한 당사자들은 자신이 범한 모든 악에 대한 책임을 밖으로, 상대편에게 전가하는 것을 말한다….’
며 결혼 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해관계적 속성을 거침없이 들추어낸다.
이혼은 어떤가.‘책상과 침대’라고 이름을 붙인 글을 보자.
‘사람들이 이혼을 하게 되면, 착하고 친절하고 교양있는 사람일지라도,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켜 자기 주변의 모든 것들을 먼지로 뒤집어씌우고 똥칠을 하곤 한다. 공동생활의 신뢰기반인 친밀감의 영역들은 그 토대인 결혼관계가 파경에 이르자마자 사악한 독소로 변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부부가 원래 서로에게 더욱더 관대했을수록, 또한 소유나 의무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을 수록 이혼과 함께 품위가 파괴되어가는 과정은 더욱 가증스러워진다….’
망명 지식인으로서 아도르노는 엄청난 고통과 무게를 느꼈던 것 같다. 그는 ‘망명 지식인은 모두 예외 없이 상처받은 사람이다.’고 진단한다.‘나치의 획일화 통제의 치욕을 피해 망명의 길을 택한 사람들은 이러한 뿌리뽑힘을 특별한 표지로 달고 다니며, 사회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비현실적이고 허깨비 같은 생존을 영위하게 된다. 망명자는 언어를 몰수당하며, 인식력의 샘인 역사적 차원은 매장되어 버린다….’라며 그 스스로 이방인로서 겪은 치욕과 고통을 토로하고 있다.‘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이란 책의 부제도 여기서 나왔다.
●낯설고 왜곡된 모습 까발리는 사유에서 구원의 희망
이 책은 곱씹어 읽을 경우 감당하기 힘든 충격으로 다가온다. 도구적·부속물로서의 삶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모습은 바로 ‘나’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이후 여전히 시를 쓸 수 있는가란 질문은 수영장의 안락의자에 누워 아도르노를 읽는 것을 참을 수 있는가란 질문에 자리를 양보한다.’는 프레드릭 제임슨(미국의 좌파적 문화비평이론가)의 명제는 포스트모던한 미국적 현실에서 나온 말이지만, 미국 문화를 본받아 상품의 풍요와 산업의 찬가가 그 뒤에 감추어진 고통, 광기, 불안을 억압하는 우리의 현실과도 분리될 수 없다.
그래도 책을 덮으며 한가닥 위안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도르노가
마지막 단상 ‘결론’에서 ‘세상의 틈과 균열을 까발려 그 왜곡되고 낯선 모습을 들추어내는’ 구원의 관점에서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구원의 관점은 사유의 유일한 관심사이기도 하다. 다만 그같은 사유가 세상의 ‘올가미’에서 빠져 나온 자유인의 것이어야 한다는 데 현대인의 또다른 고민이 있다.
● 의식이 행복과 갖는 유일한 관계는 감사
행복한 마음에 대한 아도르노의 문장.
“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가 행복을 불러냄으로써 행복에게 죄를 짓기 때문이다. ‘나는 행복했었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것이다. 의식이 행복과 갖는 유일한 관계는 ‘감사’다. 이러한 감사 속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의 품위가 들어 있다.”
● 모든 예술작품을 아직 저질러지지 않은 비행(非行)
아도르노는 재능을 행복하게 승화된 분노라고 말한다. 모든 예술작품을 아직 저질러지지 않은 비행(非行)이라고 말한다. 무해한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문화란 있지도 않은 인간다운 사회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낙관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거부하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한 줌의 도덕이 될 것이라고 아도르노는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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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처로 숨쉬는 법 / 김진명
아도르노 철학을 풀이한 책이다. 철학자 김진영 선생이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를 강독하는 형식으로 설명한다. 아도르노(T. W. Adorno, 1903~1969)는 독일 출신의철학자로 미국으로 망명하여 연구 활동을 한 분 이다. 아도르노는 사회, 문화, 과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인간 소외 및 물상화를 예리하게 비판했다. '부정의 변증 법'이나 '계몽의 변증법' 등이 문명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기조로 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아도르노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관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아직 살 만하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우리 사회에 잘못된 점도 있지만 나름대로 편안한 점도 있어, 다 좋은 세상이 어디 있겠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도르노 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체제 너머에 있는 온전한 삶,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갈구하는 사람에게 아도르노는 길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 책으로 접해 본 아도르로의 특징은 총체적이고 철저한 부정성이다. 그의 사유는 '모든 것이 거짓말이다'라는 원칙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다음은 지은이가 정리한 아도 르노의 명제들이다
-삶은 살고 있지 못하다
- 잘못된 삶 안에 올바른 삶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거짓이다
⁃ 문화는 쓰레기다
-모든 것이 거짓인 사회에서 진실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 되돌아가는 것은 퇴행일 뿐이다
⁃ 이론이 실천이다
오늘날의 삶은 '객관적 권력'에-물질과 돈 등-의해 지배되어 있기에 종속된 삶이고, 살아 있지 못하다. 그저 주입된 행복에 도취되어 있을 뿐이다. 허위에 바탕한 우리의 삶에서 과연 삶다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성찰이 가능한가, 라고 아도르노는 묻는다. 우리는 촘촘하게 짜인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마치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알 수 없는 것처럼 결코 시스템 전체를 통찰 해낼 수 없다고 본다. 우리들 자신이 허위의식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에 나오는 '상처'는 우리 내부에 텅 비어 있는 장소다. 자유와 행복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들은 전부 어디론가 가버리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곳, 오로지 환상만이 들어 있는 곳,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입당하고 주문당하고 도취당하고 환각만을 일으키도록 되어 있는 곳이다. 이 상처로 숨쉬기 위해서는 -상처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상처를, 인간을 지배하는 객관적인 권력을 볼 줄 알아야 된다고 아도르노는 지적한다. 객관적 권력에 대해 성찰하지 않고 사회적인 상처에 민감하지 않으면서 내 상처를 치유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에는 민감할지라도 상처의 사회적 원인에는 둔감하다. 도리어 상처를 덮으려고 한다. 우리가 지향할 길은 내 상처를 치유받기보다 우선 타자의 상처에 대해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비판은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냉혹할 정도로 가차 없다. 비판적 지식인의 허위 의식도 아도르노 앞에서는 발가벗겨진다. 자선이나 고고한 척하는 은둔도 마찬가지다. 아도르노의 지적 태도는 철저한 부정에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난 뒤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그의 변증법이 아닌가 여겨진다. 우리 시대에 아도르노가 요청되는 연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는 아도르노의 작품인 <미니마 모랄리아> 원문이 짧게 소개된다. 개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는 너무 읽기가 힘들다. 다행히 지은이는 실생활의 예를 들며 쉽게 풀이해 주고 있다. 수박 겉핥기지만 아도르노 사상의 한 면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 지식인의 조건으로 수치심을 지적하는 부분도 인상 깊었다.
"남들은 다 질식하는데 자기는 그래도 이렇게 숨 쉴 수 있는 여건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뼈아픈 수치심은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를 고뇌하죠. 자기가 얼마나 자기와 타협하고, 이기적이고, 살아가기 위해서 차가움을 가동하고 있으며, 얼마나 약자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것들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질식하는데 자기는 숨 쉬고 있다, 이 숨 쉬는 게 부끄럽다, 이 수치심이 곧 고통이죠. 이 고통이 고통의 본질을 묻게 만들고, 고발 행위를 멈추고 통찰하고자 하는 지식인의 임무를 깨워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겸손한 지식인이 태어납니다. 이것이 지식인의 조건입니다."
산다는 건 숨을 쉰다는 것이다. 숨을 쉰다는 건 구멍으로 호흡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살만하지 못한 세상이란 무엇일까. 그건 구멍이 다 막혀버린 세상, 숨을 쉴 수 없는 세상이다. 살자면 그래도 숨을 쉬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어떤 구멍으로? E. 카네티는 말한다: '상처는 허파다 (Wunde ist Lunge)' ('함스테이드에서의 기록들') 구멍들이 다 막혀도 삶 안에는 마지막까지 남는 구멍이 있다. 그건 상처라는 이름의 구멍이다. 이 구멍으로 숨을 쉰다는 건 그러나 특별한 사유와 실천의 기술들이 필요하다.
목차
해제 - 상처받은 영혼의 철학적 자기고백
헌사
제1부 1944
1. 프루스트를 위하여
2. 잔디밭
3. 물 만난 고기 떼
4. 최후의 심판대에서 맑다는 것
5. 박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6. 안티테제
7. 그들, 그 사람들
8. 악한이 너를 유혹하면
9. 얘야, 이것만은 지켜다오
10. 분리와 결합
11. 책상과 침대
12. 비슷한 사람들끼리
13. 보호, 도움, 그리고 충고
14. 돌아온 시민
15. 새로운 수전노
16. 절도의 변증법
17. 잠정 관리
18. 노숙자 수용소
19. 노크하지 마시오
20. 더벅머리 페터
21. 물물교환은 허용되지 않는다
22. 목욕물과 함께 갓난아이를 버리는
23. 복수형으로만 쓰이는 명사
24. 터프 베이비
25. 그들을 기억해서는 안 된다
26. 영어로 말하기
27. 프랑스어로 말하기
28. 풍경
29. 쭉정이 과일
30. 우리 집을 위하여
31. 비밀 폭로
32. 비문명인들이 더 나은 인간은 아니다
33.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34. 한눈팔이 한스
35. 문화로 회귀
36. 죽음을 향한 건강성
37. 쾌락 원칙의 차안에서
38. 춤 권유
39. 자아는 무의식이다
40. 언제나 그것에 대해 말하지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41. 안과 밖
42. 생각의 자유
43. 부당한 협박
44. 소크라테스의 후예들을 위하여
45. 생성 변화하는 모든 것은 얼마나 병들어 보이는가
46. 사유의 도덕에 관하여
47. 시식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다
48. 아나톨 프랑스를 위하여
49. 도덕과 시간의 질서
50. 빈틈들
제2부 1945
51. 거울 뒤로
52. 황새는 어디서 어린애들을 물고 오는가
53. 과대망상
54. 군도
55. 감히 해도 될까요?
56. 계통 연구
57. 매장
58. 헤다 가블러에 대한 진실
59. 그이를 만난 이후
60. 도덕을 위한 한마디
61. 항소심
62. 좀더 간결한 서술
63. 불멸성의 죽음
64. 도덕과 문체
65. 허기
66. 용광로
67. 자로 잴 수 없는 것을 위한 잴 수 없는 자
68. 사람들이 너를 보고 있다
69. 소인배들
70. 아마추어의 의견
71. 거짓말쟁이
72. 두 번째 수확
73. 정통 노선 이탈
74. 매머드
75. 썰렁한 숙소
76. 푸짐한 만찬
77. 경매
78. 산 너머
79. 지성을 포기하는 지성
80. 진단
81. 큰 것과 작은 것
82. 육체로부터 세 걸음
83. 부회장
84. 시간표
85. 아래위로 훑어보기
86. 어린 한스
87. 싸움꾼 클럽
88. 어리석은 아우구스트
89. 공갈 협박
90. 농아 수용소
91. 파괴자들
92. 그림 없는 그림책
93. 의도와 모사
94. 국가 행위
95. 약음기와 북
96. 야누스의 궁전
97. 단자
98. 유산
99. 시금
100. 물 위에 누워
제3부 1946~47
101. 온실 식물
102. 언제나 천천히 앞으로
103. 황야의 소년
104. 골든 게이트
105. 십오 분만
106. 작은 꽃들
107. 더 이상 내 마음을 구하지 마오
108. 도마뱀 공주
109. 무익한 아름다움
110. 콘스탄체
111. 필로몬과 바우키스
112. 페렌테 부인
113. 흥 깨는 사람
114. 반사경
115. 터놓고 하는 말
116. 그가 얼마나 나빴는지 들어봐
117. 하인이 주인이다
118. 아래로 아래로
119. 덕의 모델
120. 장미의 기사
121. 오데트를 위한 진혼곡
122. 모노그램
123. 나쁜 동료
124. 퍼즐 그림
125. 올렛
126. 아이큐
127. 소망의 사우
128. 퇴행들
129. 고객에 대한 봉사
130. 점점 잿빛으로
131. 할머니로 변장한 늑대
132. 비싼 복제물
133. 정신사에 대한 기여
134. 유베날리스의 오류
135. 큰 독수리
136. 노출증 환자
137. 작은 고통, 큰 노래
138. 누가 누구
139. 수취인 불명
140. 시제의 연속
141. 뉘앙스 앙코르
142. 독일 노래는 이것을 준수해야 한다
143. 짧고 간결하게
144. 마술 피리
145. 예술 형상
146. 장난감 가게
147. 최고 신기관
148. 껍질 벗기는 일
149. 과장하지 마라
150. 호외
151. 심령술에 반대하는 명제들
152. 오용에 대한 경고
153.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