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악마들의 함성이 한풀 수그러들었지만 3·4위전에 설레이며 한국의 마지막 경기를 뜨겁게 달굴듯한 기세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해상에서 북측 해군이 "선제발포"를 하여 교전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월드컵 3·4위전 응원을 앞둔 시민들이 큰 "충격"을 입었다고 언론들은 앞다투어 보도하였다. 심지어 붉은 악마 간부의 말을 인용하여 "월드컵이라는 세계인의 축제 중에 교전이 발생해 상당히 유감스럽다"며 마치 북측이 월드컵 분위기를 훼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발"한 듯한 분위기의 기사를 썼다.(주1)
과연 남측 언론의 보도처럼 북측의 "선제공격"에 대응한 사건이였을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북측은 도대체 어떤 의도로 이런 행동을 하였는가? 우리는 남측 언론의 보도처럼 북측이 "선제공격"했다는 것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만 하는 것일까?
2. 이번 사건을 둘러싼 정황은 어떠한가?
1) 북측의 군대가 벌이는 행위들은 철저히 정치적 행위들이다.
- 긴장을 고조시킬만한 정치적 행위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북측의 군대는 철저하게 정치적인 군대이다. 정치적 군대라는 말의 여러 측면 중에서 여기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군사행동은 하나하나가 모두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북측의 선제공격이 사실이라면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한 것일까?
먼저, 동국대학교 고유환 교수는 99년 6월 15일 발생했던 "연평해전"의 명예회복 차원에서 사건을 의도적으로 저질렀다고 분석했으며(주2),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류길재 교수는 이와 비슷하게 99년 사건에 대한 보복차원에서 북측이 의도적으로 공격했다는 것이다.(주3) 참으로 일면적인 분석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북측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기 때문이다. 작년 9·11사건 이후 이른바 대테러전쟁차원에서 고조되어오던 미국의 대북압박은 이제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는 단계로 치달았다. 물론 조만간 미국의 특사가 북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긴 하지만 아직 이북과 미국이 "휴전"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공고한 평화체제가 정착되기 전까지 얼마든지 전쟁은 재발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북측에서 선제공격을 하여 전쟁이 조금이라도 더 확대되었다면 이것이야말로 미국에게 결정적으로 선제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현재 남북관계는 미국의 대북강경정책에 동조하는 남측의 외교통상부 장관의 망언과 같은 불미스러운 사건, 미국의 대북강경정책 및 전쟁계획 등으로 일시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민간교류는 계속되고 있고 고유환 교수의 말대로 북측은 남북관계 개선에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볼 때 북측 군부의 한 집단이 의도적으로 긴장을 고조시킨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다.
한편, 언론들에서는 남측의 월드컵 분위기가 훼손될까봐 우려하는 목소리, 남측의 월드컵 분위기를 해치려는 의도에서 벌인 행동이라고 분노하는 모습들을 기사화하고 있다. 그러나 북측에서는 남측 대표선수들이 월드컵에서 활약하고 있는 경기를 녹화해서 방영하고 있으며, 8강에 들어간 아시아나라는 우리민족밖에 없다고 남측 선수들의 선전을 칭찬하고 있다. 이러한 북측이 남측의 월드컵 분위기를 훼손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질 않는다. 월드컵 분위기에 재를 뿌릴 의도였다면 개막 초기에 이런 일이 있어야 말이 되는 것 아닌가?
요약하자면 북측의 입장에서 "선제공격"이란, 미국에게는 전쟁의 빌미를 주는 것이며, 남북관계 개선과 남측 국민들의 대북인식에 악영향만 끼치는 행동으로서 정치적으로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남북관계를 긴장시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북한군부의 강경파의 소행이라고 분석하는 것은 케케묵은 반공영화 쉬리에서나 나올법한 분석이다.
2) 북방한계선(NLL)은 사실상 미군인 유엔군 사령관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경계선이다.
- 남측의 해군은 그동안 북방한계선을 내려와서 하는 북측의 꽃게잡이를 인정해왔다
이른바 북방한계선이라는 것의 개념부터 되짚어보자.
원래 북방한계선이라는 것은 6·25전쟁 도중, 유엔군의 옷을 빌려입은 미군이 북측과 중국에 대한 해상봉쇄를 위해 설정한 "클라크 라인"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 클라크 라인은 휴전협정 과정에서 철폐되고 만다. 왜냐하면 미국은 유엔의 권위를 등에 업고 클라크 라인을 합법화하려 했으나 유엔총회에서 부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한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과 남측 군부는 북진통일을 외치며 빈번하게 북측에 대해 1955년까지 계속 도발을 감행하여 휴전체제를 유지하고자했던 당시 미국의 커다란 우려를 사게 된다. 이러한 사태는 미국 대통령이 이승만 정권에 대해 자제를 당부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자, 노골적인 협박이 담긴 최후통첩까지 보내어 잠시 무마되었다.(주4) 그러나 이승만의 북침계획과 대북 도발은 계속되었으며, 미국은 이를 자제시키다가 안될 경우 이승만에 대한 쿠데타와 체포, 한국정부의 해체, 한국 임시정부 수립, 미군 철수 등의 여러 단계의 협박 내지는 이승만 제거 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남측 정권과 군부의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대북도발행위, 특히 서해상에서의 그러한 행위를 막기 위해 "유엔군 사령부"가 선포한 것이 바로 "북방한계선"인 것이다. 그것은 북방한계선이란 명칭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만약 북측 해군의 도발을 막기 위해 설정한 것이라면 명칭이 "남방한계선"이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남측 군사력의 행동범위의 북쪽 한계를 뜻하는 것이 북방한계선이며, 이는 북측과 어떤 합의 아래에서 선포된 것이 아니라 미군이 남측을 자제시키기 위해 일방적으로 선포한 것이다.(주5) 그렇기 때문에 북측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 북방한계선이라는 것을 인정한 적이 없으며(인정했다고 하는 정황들은 모두 남측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한 경우였다.) 서해안에서 꽃게잡이를 어제, 그저께까지 해왔다. 또한 남측 역시 북측이 꽃게잡이를 위해 북방한계선을 일시적으로 넘어오는 경우에 대해서 대체로 묵인해왔다.
이렇게 보았을 때 꽃게잡이 어선을 보호하기 위해 동행했던 북측 경비정이 남측을 향해 아무런 이유없이 총격을 가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만약 북측 경비정이 선제총격을 가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필시 남측 해군이 평소와 다르게 북측 경비정을 위협했을 가능성 밖에 없다.(99년처럼 거대한 남측 구축함이 북측의 소형 경비정을 향해 충돌을 감행한다든지 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6월29일이라는 시점에 남측 해군은 평소와 다르게 북측에 대해 위협을 가했을까? 남측 군부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3)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유엔군의 이름으로 이땅에 와 있는 미군에게 있다. 광주항쟁의 책임을 미국에게 물으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이유도 당시 진압에 동원되었던 한국군의 이동을 미군이 묵인내지는 적극적으로 동조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평시작전권은 남측 군부에게 넘겼다고 하나 여전히 실질적인 권한은 미군에게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서해 북방한계선 부근은, 앞서 북방한계선이 어떻게 선포되었는가를 통해서도 보았듯이 한국군의 무모한 행동을 막기 위해 설정한 것인 만큼 미군의 통제와 주시를 받는 곳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북측이 "도발행위"를 할 정치적 명분과 이득이 없다면, 남측 해군이 도발을 유도했거나 더 나아가 미군의 의도가 깊게 반영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심각한 긴장사태를 만들어야만 하는 남측 군부와 나아가 미국의 의도는 무엇일까?
3. 누가 어떤 의도로 일으켰을까?
1) 남측에서는 IMF사건 이후 침울해있던 국민들의 분위기가 승리감으로 고조되었으며,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높아진 남측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축구에서도 반영되어가고 있었다.
붉은 색의 물결이 거리를 휩쓸었던 한 달이였다. 붉은 악마 회원이건 아니건 모두 붉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과 "오! 필승 꼬레아"를 외치며 하나가 되었다. 1997년 IMF사태로 고난을 겪었던 한국의 국민들이 승리감과 일체감을 만끽하는 한 달이였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체감에는 우려할만한 요소들도 있다. 왜냐하면 미국과 극우보수세력들의 전통적인 우민화정책 중 하나였던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단순한 축구 응원이 아니라 미국과 보수세력들의 심각한 우려를 살만한 행동으로 단계를 옮겨가고 있었다.
단적으로 이탈리아 전에 등장한 카드섹션 "AGAIN 1966"은 비록 월드컵은 남측에서만 열리고 있지만, 북측의 우리 민족이 이탈리아를 꺾었던 1966년 월드컵을 상기시키며 북측 동포들을 월드컵의 주역으로 등장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또한 독일전에서는 통일연대에서 제안하고 붉은 악마가 그 제안을 받아들여 거대한 태극기 대신 하늘색 한반도가 그려진 단일기를 등장시키려고 했었다.(FIFA에서 반대하여 무산되긴 했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 국민들의 축구 열기가 9월에 있을 남북친선축구대회를 앞두고 통일열기로 승화될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반통일세력들에게 이러한 열기에 찬물을 끼얹을 사건이 하나쯤 필요하지 않았을까?
2) 반면, 남측 국민들의 반미감정을 격화시킬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었다.
더욱 우려스러운 일은 올해들어 거듭 높아지고 있는 우리 국민들의 반미감정이다. 부시의 악의 축 발언, 동계올림픽 금메달 강탈 사건으로 급격히 고조되다가 누그러진 듯 보이던 반미 감정은 축구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한-미전에서 비기자 수많은 시민들이 미국을 이기지 못한 것에 안타까워하고 분노하였으며, 포르투갈전을 감상하던 시민들은 너나 없이 포르투갈과 비겨서 미국이 16강에 못 올라가게 해야한다고 입을 모았다. 포르투갈 전이 끝난 후에도 곳곳에서 포르투갈에 이긴 것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한편, 불씨는 또 다른 곳에서도 번지고 있었다. 훈련 중인 미군 장갑차가 여중생 2명을 깔아 죽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이 있자 축구 응원의 주축을 이루던 젊은 층들이 거세게 분노하였고 시위에 동참하였다. 심지어 중고생들까지도 이 사건에 분노하며 미국을 규탄하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미군부대앞 시위를 취재하던 기자 두 명이 미군에 의해 쇠사슬로 묶이고 수갑이 채워진채 끌려가는 만행을 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으며, 우리 검찰은 이 두 기자를 구속할 방침이라고 하였다.
축구를 통해서 하나가 된 우리 국민들의 승리감, 일체감은 불만 붙여주면 쉽게 반미감정으로 번져갈 수 있었던 상황이였으며, 혈기왕성한 젊은 응원단들은 반미 시위를 할 수도 있었다. 미국과 극수보수세력에게는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고 통치수단 중 하나였던 전통적인 반북의식을 자극하여 반미감정을 무마시키고 싶지 않았을까?
3) 일본의 노골적인 군국주의화! 미국은 선제공격 선포!
이처럼 남측에서 고조되고 있는 통일과 반미 분위기를 무마시키려는 의도와 함께 더욱 심각한 것은 이번 사건이 오래전부터 예상되어오던 월드컵 이후 한반도 전쟁위기의 서막이 아니냐는 점이다.
최근 핵무기를 보유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군국주의화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일본은 이번 사건을 호재로 삼는 듯 보인다. 일본 방위청은 자위대의 한반도 방면 경계태세를 강화하면서 정보수집에 전력을 기울이겠다고 했다. 동해도 아니고 서해상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다. 가장 우려스런 징후는 주한 유엔군 사령부에 의해 교전수칙의 수정이 검토될 것이라는 점이다.
기존의 교전수칙이 경고, 경고 사격, 위협 사격, 격파 사격의 순서였다면, 상대방의 선제공격 위협이 감지되면 곧바로 이쪽에서 선제 격파 사격 단계로 넘어가는 방향으로 수정하겠다는 것이다.(주6)
최근 부시가 발언한 "선제공격 독트린"을 마련하겠다는 것과 어쩌면 이다지도 궤를 같이하는가? 부시가 말한 선제공격 독트린의 일차적 대상이 이라크로 지목되고 있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서해상에서 새로운 군사교리를 테스트하고 확립하려는 의도가 아니였을까?
4.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리 연구소에서는 한반도 전쟁위기 고조의 가능성을 월드컵이 끝난 이후로 예상하였다.(주7) 그 근거로 제시했던 것이 전쟁방지책이 될 수 있는 남북대화일정이 월드컵 이후에는 없고, 미국의 대북 핵사찰 압력이 늦어도 8월부터 시작될 예정이며, 만약 미국이 미리 긴장을 고조시키려한다고 해도 월드컵 기간에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였다.
그런데 월드컵 폐막을 하루 앞두고 바로 사건이 터져버린 이 상황은 이번 사건을 미국의 대북전쟁계획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만 그 전모를 이해하고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지금 일각에서는 조-미 대화가 7월 중 한급 높은 차원에서 재개되리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지난 역사적 경험이 잘 말해주고 있듯이 조-미 대화의 시작은 곧 전쟁위기를 동반한다는 사실에 경각성을 가지고 사태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또한 이번 사건이 마치 북의 의도적 혹은 우발적 선제공격으로 발생한 것인 양 일방적으로 보도, 선전되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번 사건의 정황과 배경을 잘 알려내는 것이 필요하다.
한편, 8월 15일까지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나가는 운동기간 동안 민족대단결의 분위기를 고조시켜나가는 것과 함께 올해 끊임없이 높아져왔고, 게다가 최근 여중생 장갑차 살해 사건 등으로 촉발된 반미감정을 반미반전운동으로 한차원 높여내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월드컵 4강 진출에 넋을 잃고 있었다면 다시 정신을 차리자. 미국에 의한 전쟁참화냐, 전쟁을 막고 조국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열어내느냐 하는 기로에 민족의 운명이 놓여 있는 현실을 직시하자.<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