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됨: 2016년 05월 26일 15시 27분 KST 업데이트됨: 2016년 05월 26일 15시 37분 KST
1962년 8월 15일 정오.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하고 있던 주한미군 일병 제임스 드레스녹은 동료들이 점심을 먹는 틈을 타 북한으로 도망갔다.
근무지 무단이탈로 군법재판을 앞두고 있었던 그는 지뢰밭을 넘어간 후 북한군에게 체포되었으며 우여곡절 끝에 북한에 정착했다.
드레스녹의 이야기는 2006년 '푸른 눈의 평양 시민'과 같은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소개되었지만 그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한 북한 전문 매체가 평양에서 드레스녹의 두 아들과 인터뷰한 영상을 공개했다.
재미 통일운동가 노길남씨가 운영하는 '민족통신'은 21일 첫째 아들인 테드 드레스녹(북한명 홍순철)과 둘째 아들인 제임스 드레스녹 2세(북한명 홍철)와 1시간 가량 나눈 대담 영상을 공개했다.
2014년 중위로 인민군에 입대한 제임스는 현재 미군의 대위에 준하는 상위 계급이라 한다. 자원해서 입대하는 인원의 경우 대학 졸업자는 바로 군관(장교)로 복무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장남인 테드는 계속 군사교육기관에서 일하면서 가끔씩 북한에서 제작되는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한다고 한다.
노길남씨는 대담 중간에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미국사람의 얼굴을 갖고 있어서 좋은 경험도 있었겠지만 다른 경험도 있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드레스녹 형제의 답변은 어느 정도는 솔직해서 재미있다.
제임스: 소학교를 다닐 적에, 일부 편협하달까... 민족적 자부심이랄까... 어떤 학생들은 한마디로 내 듣기에 거북한 말도 하곤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랬던 동무들이 더 가까워졌다. 같이 생활하면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로구나... (하고 느낀 것이다)
테드: (동생의 답변과) 별로 크게 차이는 없다. 어렸을 때는 아이들에게 놀림도 많이 받았고 싸우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여느 동무들보다 더 친숙해지고 더 가까워졌다. (민족통신 대담 영상 5월21일)
제임스: 그후로 나이 먹고 대학교에 갔을 때는 전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이 지적 수준이 높아서...라기 보다는 우리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이랄까. 우리 사회주의 사회에는 인종차별이 없다. 또 우리 장군님께서 인덕정치로 우리 모두를 품어주어서 대학에도 보내주시고...
테드: 학교에서는 그 어떤 차별이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다. 차별이라는 단어를 잊어먹은지 오래되었다. (인터뷰어가) '차별'이라는 단어를 이야기하니 이제 생각이 난다 (웃음). (민족통신 대담 영상 5월21일)
@정론직필북한은 한국전쟁도 훨씬전에 루마니아와 수교 를 맺었으니 이해가 가는군요 자본주의국가에서 극심한 고생을한 드레스녹은 그 루마니아여인과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물질적 이념적 사회적으로 큰 스트레스가 없었 을테니 이혼도 안했을테구요 더구나 그는 참 정이많고 자상한 사람이었다니 금슬도 좋았겠지요 여자들은 그런 남자를 좋아 하거든요 ^^
첫댓글 "남한 군인들을 보면 가련합니다 우리민족을
영구히 갈라놓으려는 미군들편을 들고있으니"
근데 끝까지 드레스녹의 와이프에 관해선
설명이 없네요 단신으로 철조망 지뢰밭을 지나
월북했다는데 두아들은 분명 튀기모습은
아니거든요 자신들은 북한여성들과 결혼해서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고있다는데 ᆢ
정말 감동스럽게 잘 보았습니다
드레스녹의 부인은 루마니아 여성이라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북한인들의 외국인들과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는 그런 규정이 풀린 모양이죠?
드레스녹 두 아들 모두 북한여성과 결혼한 것을 보면...
@정론직필 북한은 한국전쟁도 훨씬전에 루마니아와 수교
를 맺었으니 이해가 가는군요
자본주의국가에서 극심한 고생을한 드레스녹은
그 루마니아여인과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물질적 이념적 사회적으로 큰 스트레스가 없었
을테니 이혼도 안했을테구요
더구나 그는 참 정이많고 자상한 사람이었다니
금슬도 좋았겠지요 여자들은 그런 남자를 좋아
하거든요 ^^
튀기라서 놀림과 차별의 대상이 되는 것도 사회환경과 시대상황에 따라 달라지는가 봅니다. 남한에서야 연상되는게 양공주였는데 요즈음엔 전혀 다른 현상도 많이 보이네요. 드레스녹 이분은 당시 월북미군중에서도 매우 드물게 냉철하고 합리적인 언변을 지닌 분으로 기억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