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살이 다 되어서야 철이 들어가는 나의 파란 만장한 인생 길을 뒤돌아 보면서
나의 어리석었던 자난 일들을 하나 하나 생각해 본다.
대전 신탄진(중학교 당시는 충남 대덕군 미호리)에서 태어나 대청땜 건설로 지금은 없어진
이름 삼호국민학교(당시 6학년 40명)에서 당당하게 대전중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 났다고들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꽤는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배를 두번 타고 건너야 읍내인 신탄진에 나올 수 있었던,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깡촌에서 걸어서 1시간은 가야 하는 시골 국민 학교 출신이 당당히 대전중학교에
입학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중학교 첫번째 학기말 시험에서 10등부터 불러주는 성적순에서 2등을 부를 때까지도
내 이름이 호명되지 않아 10등에도 못 들었구나 하고 있는데 마지막에 내 이름이 불렸을 때
그 기쁨이란 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호화로운(?) 중학교 시절은 시작 되었다.
그러나 나의 사치(?)는 거기까지였다고 여겼던 시절이 다가 오고 있음을 전혀 예상치 못하고
중학교 시절은 지나가고 있었다.
대전고등학교 진학을 외면한 채 서울 유학을 꿈꾸며 서울 진출을 꿈꾸었던 나의 꿈은
고등학교 전기 시험 결과를 기점으로 인생 자체가 바뀌기 시작했다.
재수를 하느냐 후기 고등학교를 가느냐 하는 시점에서 큰 매형이 추천한 곳이 성동고등학교였다.
그 당시 큰 매형 친구가 성동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고 계셨던 김종호 선생님이셨고,
우리 큰 매형이 알기로는 황길수 선배,황용하 선배들이 다니던 시절의 성동고등학교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 성동 16회 동기생들에게는 심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의 일생중 가장 불행하다고 여기며
살던 시절이 고등 학교 시절이었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내가 생각하기에도 공부도 뒤지게(?) 안 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 법대 폼으로 응시했다가 떨어지고, 형님의 권유에 못 이겨 성균관대 법학과
설렁 설렁 보다가 떨어지고 하다 보니 인생이 엉망으로 꼬였다.
고등하교 졸업하고 1년 동안은 재수할 생각보다는 사법고시 공부하겠다고 씨름하며 1년을
허송 세월(?) 하며 지냈다.
그 당시 작고하신 어머님께서는 아들 뒷바라지 하신다고 공장을 다니고 계셧지만 어머니의 그 은혜도
모른 채 무감각하게 지내던 시절이기도 했다.
1년이 지나 후 얼마나 무모한 가를 깨닫고 그 당시 유명하던 대성학원, 양영학원은 꿈도 못 꾸고,
그 당시 재정난으로 문을 닫기 직전이었던 SPC 학원이라는 곳을 성적 좋다는 이유로 무료로 다니면서
독어 선생님과 영어선생님의 귀여움을 받아서 강 트레이닝을 받은 결과 독어 경시 대회에서 1등을
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그 당시 서울 문리대 독문과를 입학하면 독일 유학의 길도 열어 주겠다는 독어 선생님의 성화(?)가
있었지만 부득불 서울 법대에 지원 했다.
무식이 재산이라고 서울 법대는 법학과, 행정과(한 때는 사법학과,공법학과로 나뉘었다가 지금은
법학과로 통일) 구분 없이 올 컷트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행정과를 지원하는 우(?)를 범했다.
서울 법대에 입학하자 마자 교학과로 불려 갔다.
이유인즉슨 성동고등학교에서 9년만에 서울법대에 입학했다는 것과 행정과 수석일 뿐 아니라
총 정원 160명중에 최상위권인 성적이 어떻게 행정과를 지원했는지 궁금하였었던 것이다.
그 해 처음으로 서울대 시험에서 독일어가 주관식으로 출제되었는데, 거의 만점 근처에다가
영어 성적 때문이었 던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 후 1년간 무모한 도전 덕분이었는지 몰라도 서울법대 졸업후 가족들의 바램과
주위의 기대를 뒤로 한채 고시공부는 팽개치고 은행,대우,롯데를 전전하다 1983년에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과 현재 전자저울업계의 독보적인 존재인 (주)카스를 공동 설립하여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그것 또한 잠시였을 뿐 산지를 개척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1986년에 기세 좋게
회사를 창업하였다.
파란만장한 나의 인생에 관해 사설을 늘어 놓은 것은 다름 아닌 나의 현재의 심정을 밝히기 위해서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고등학교 시절 K고, S고만 보면 괜히 주눅들어 했고,
서울 법대 동기생들중에 오히려 소수 민족(?)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많이 깨닫기도 했다.
여기서 소수 민족이란 몇년에 한명씩 서울법대에 들어 오는 학교들을 말한다.
나의 파란만장한 인생길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잊어서도 안되는 몇몇 친구들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긴 사설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업 파트너라고 끌어 들여 금전적인 피해를 준 박인환,김인수,최병훈(준혁)의 도움을 잊을 수 없다.
물론 그 당시에는 100% 사업 성공을 확신하였었지만......
비록 그 당시 사업은 어려움에 봉착해서 그들의 도움에 대하여 보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아직 나의 사업은 끝난 것이 아니기에 훗날을 기약하면서 늘 이 친구들의 은혜를 되새기며 살고 있다.
어려울 때마다 손 벌리면 마다 않고 늘 도와 주었던 김승기,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금전적으로 나의 큰 도움이 되었던 전인구,
우리 가족들의 치과 치료를 책임 져 준 손창인
사랑하는 친구들아
너희들의 도움은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 가던 나를 건져낸 그저 단순히 금전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너희들의 사랑이고 너희들의 희생이었음을 나는 늘 기억하고 고마와 하고 있단다.
언젠가는 너희들의 그 사랑에 보답할 수 있을 날이 오리라고 기대하며 아직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달려 가고 있단다.
어쩌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그 어려운 시기를 너희들의 도움으로 넘기고,아직까지도
40대밖에 안 된 줄 알고 착각하고 일을 저질러가며(?) 살아가는 너희들의 어리석은 친구는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단다.
뒤에서 응원들 많이 해다오.
가장 불행했었던 시절이라고 여겼던 고등학교 시절이 있었기에, 겸손할 수도 있고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 성동 16회 동기생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들인가를
이제야 깨달아 알았기에.....
성동 16회 동기생 친구들아
사랑한다.
오래 오래 건강하게들 살아 다오.
2017년 3월 9일
3학년 4반 송석원
첫댓글 이 글에서 고마웠던 친구들로 거명이 된 친구들은, 자기 인생에서 진정한 성공을 거둔 친구들일쎄 그려, 그 넉넉했고 지금도 넉넉하고 앞으로도 넉넉할 마음들이 참으로 부럽구먼,
친구같은 괴짜는 고시 합격하고 틀에 박힌 생활을 하였더라면 참 갑갑했을 것 같네. 그래도 마음껏 일도 저질러 보고 사고도 쳐 보았으니 나름대로 멋진 인생이었네. 게다가 좋은 친구 여럿, 문경지우라고 해도 괜찮은 친구 여럿을 두엇으니 그것만 해도 성공한 인생일세. 나같은 골샌님은 꿈도 못 꿀 멋진 인생을 살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