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릅 나무
정금자
속리산 법주사의 상징인 미륵 대불은 황금 옷으로 갈아입었다. 금박 물을 덧씌우는 개금 불사를 마무리한 것이었다. 남편이 금동 대불이 보고 싶다고 해서 우리 내외와 막내딸은 속리산 법주사로 향했다. 속리산은 주위가 수려해서 발길이 저절로 움직인다. 구경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가까이 가서 올려다보니 맑은 하늘에 대불은 거룩해 보였고 너그럽고 인자한 모습은 온 천하를 품어 안은 듯 보였다. 하지만 가족 나들이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들이 얼마 전부터 소화가 안 된다며 식사를 거르며 힘들어했지만, 젊은 사람이 별일이야 있겠느냐며 병원에 가보라고만 했다. 병원에서 갑자기 위암 소식을 듣고 너무 큰 충격에 놀라 몸과 마음이 수렁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이런 상황을 사면초가라 하지 않던가. 아들은 서울 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나는 다리에 깁스해 병상에서 눈물로 기도만 할 수밖에 없었던 못난 어머니가 되었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해서 10일 후 퇴원했다. 그런데 3일 후부터 항문 부근에 작은 물집이 생기더니 점점 수가 늘어나고 작은 포도송이만큼이나 커졌다. 병원에서 퇴원할 때 절대로 다른 병원에 가지 말 것이며, 어떤 약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니 어찌할 바를 몰라 난감했다.
신약 책을 보니 유근피가 여러 가지 병을 다스린다고 적혀있었다. 느릅나무 껍질을 ‘유근피’라 하고 유근피를 끓인 물이 여러 가지로 건강에 좋다고 쓰여있었다. 유근피는 뿌리껍질이 약효가 많다고 알려져 있고, 껍질이 두꺼우면 효능이 더좋다고 한다. 집안 시숙이 느릅나무 뿌리껍질을 구해다 주셨다. 오래전부터 입소문으로 유근피 껍질 달인 물이 위암에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유근피로 차를 끓여 마시기도 하고 그 물로 밥도 지어 먹기도 했지만, 자세한 사용법은 몰랐다. 유근피의 효능에는 각종 궤양 치료, 암 예방, 면역력 증진, 이뇨 작용, 부종 개선, 불면 치료에 효과가 좋다고 한다.
유근피 차 끓이는 법은 느릅나무 껍질을 깨끗이 씻어서 물 2ℓ에 유근피 50g을 넣고 끓여서 마시는데, 연분홍색으로 냄새도 없고 물맛도 좋다. 유근피를 장시간 끓여주면 끈끈한 젤리와 같은 점액성이 나오는데 이 안에 팬틴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암 예방에 효과 있다고 한다. 유근피가 피부질환에 발생하는 피부 상재균을 억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씌어있어 내심 반가웠다.
유근피 뿌리를 채취할 때는 나무가 성장하는데 무리가 가지 않도록 적당량을 채취하는 것이 상식이다. 유근피의 부작용은 차가운 성질을 가지고 있어 평소 몸이 차가운 사람, 몸이 많이 마른 사람들은 점액질 때문에 소화불량이 나타날 수도 있어 조심해야 한다.
들통에 물을 받아 유근피를 넉넉히 넣고 처음에 센 불로 끓인 다음 약 불로 다시 끓이고 유근피 뿌리는 건져내고 물만 끓이고 졸여서 고약처럼 만들었다. 아들은 엄마가 약을 발라 주는 것이 민망했든지 아버지에게 약을 발라 달라고했다. 고약을 환부에 바르면 체온에 쉽게 말라 하루에도 다시 바르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야 하므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 과정은 인내를 필요로 했고 사랑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바쁘고 바람 같던 사람도 집에 들어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자식을 위하여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치우는 외로운 사람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보고 자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아들들은 아버지의 뜻을 크게 또는 작거나 소소하게 거스르고 반항하며 자라던 미숙하고 어렸던 시절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장년이 되고 몸이 아프다 보니 아버지의 진한 사랑을 몸소 느끼며 아버지의 외로움도 조금은 아는 듯했다. 탈지면에 약을 발라서 환부에 올려놓아 주면서 일주일 정도 되니 차도가 생겼다. 한 달 정도 되니 신기하게도 흉터도 없이 깨끗이 나았다. 자연에서 얻어진 식물의 뿌리가 이렇게 효능이 좋을 줄은 미처 몰랐다. 요즈음 초록 자연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조물주께서는 자연을 통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큰 선물을 주셨음에 감사하게 되었고, 고단하고 힘든 치유의 시간을 보내면서 이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의 손길이 느껴지고 돌멩이가 들어찬 듯 무겁던 머리가 이제야 한결 거풋한 느낌이 들었다. 내 몸이 마구 쓰시고 조이던 아픔도 저절로 숨을 죽이는 듯 가라앉는다,
느릅나무의 생김새는 쌍떡잎식물로 낙엽 고목으로 봄의 정취를 즐기는 놈이라고 한다. 높이는 20m까지 자라고 지름은 60㎝ 정도 되는 큰 나무다. 종일 하늘을 향해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누굴 위해 도움을 줄 수 없을까?’ 두리번거린다. 여름이면 자기 머리 위에 노래할 새들의 둥지를 마련해주는 너그러운 가슴을 가진 나무다. 겨울에는 눈이 내려앉고 빗방울과도 친하게 지낸다.
누구나 건너가야 할 ‘인생’이라는 큰 강을 만난다. 자신의 인생을 사랑한다면 없던 용기도 생기는 법이다. 인생의 길목 속 추억은 누구도 훔쳐 갈 수 없는 우리들의 보물이다. 큰 강을 두려워하여 못 건너는 것은 용기가 부족함이 아니라 제 인생을 사랑한다면 없던 용기도 생기는 법이요. ‘추억 속에 아름다운 인연이 깃들어 있다면 유복한 사람이고, 추억이 빈곤하다면 짧고 가난한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가 날마다 소소하고 작지만 착한 일을 행하며 살아온 자기 과거를 반성하며 다듬고 살아가야겠다.
고맙다! 느릅나무야. 나도 너처럼 무엇이든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