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Holy Spirit)이시니라.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10장 16-22절)
위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열 두 제자들에게 당부한 것으로 오늘날처럼 혼탁하고 사악한 사회형편 속에서 살아야하는 우리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으로 생각되어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진리의 말씀 안에서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찾고 견득사의(見得思義)하면서 끝까지 견디는 길이 진실로 영원히 사는 길임을 다시금 이 말씀 속에서 깨닫게 된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도 이와 같은 사례들이 있으니 한포재 이건명 선생의 경우는 매우 간절하고 참혹하였다. 한포재 선생을 위시한 네 분 충신(노론 4대신: 몽와 김창집, 소재 이이명, 한포재 이건명, 이우당 조태채)의 생명을 던진 공로가 없었다면 조선의 중흥기인 영조·정조시기는 도래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은 좌의정 이건명 선생의 졸기(卒記)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최석항(崔錫恒)이 입대(入對)하여 이건명(李健命)을 죽일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건명의 자(字)는 중강(仲剛)으로, 문간공(文簡公) 이민서(李敏敍)의 아들이다. 숙종 12년에 급제하였고 43년에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숙종이 승하(昇遐)하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군간(群奸)들이 곁에서 엿보면서 유언비어를 마구 퍼뜨렸지만, 이건명이 김창집과 함께 국정(國政)을 다스리면서 군간들의 불온한 마음을 꺾어버렸으므로, 우뚝이 강물 가운데 버티고 섰는 지주(砥柱)와도 같았다. 그때 마침 저사(儲嗣)를 세우는 데 대한 건의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건명에게 묻기를, ‘아들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이건명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아드님이 아직도 있는데, 만일 이의(異議)가 있다면 나는 머리를 풀고 산으로 들어 가겠다.’ 하였다. 그리고 나서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가 저사를 세울 것을 청하니, 대신(大臣)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건명이 군료(群僚)들을 거느리고 들어가 전중(殿中)에서 입대하게 되었는데, 범촉공(范蜀公)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극력 진달하기를, ‘어찌 말이 간신(諫臣)에게서 나왔다는 것으로 망설일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리하여 영종(英宗)을 왕세제(王世弟)로 세우도록 정책(定策)하였다. 이건명이 이에 삼대신(三大臣)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왕세제에게 국정을 대리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태구(趙泰耉)가 선인문(宣仁門)으로 몰래 들어가 입대하여 저지하였기 때문에 시행되지 못하였다. 처음 김창집이 주청사(奏請使)가 되었을 적에 이건명이 말하기를, ‘원보(元輔)가 사명(使命)을 받드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고, 이에 차자를 올려 대신 가게 해줄 것을 청하니, 경종(景宗)이 허락하였다. 3월에 이건명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적신(賊臣)이 이에 목호룡(睦虎龍)을 시켜 변서(變書)를 올리게 했고, 4월에는 이건명이 의주(義州)에서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로 안치(安置)되었다. 성산(城山)을 지날 적에 빈객(賓客)과 고구(故舊)들이 찾아와 보고 서로 눈물을 흘렸으나, 이건명은 언소(言笑)가 태연자약하였으며, 다만 종국(宗國)에 대한 걱정만 간절히 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마다 기꺼운 안색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더라도 세제(世弟)만 편안하다면 다시 무슨 한스러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소(遺疏)를 초(草)하기를,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대비(大妃)를 받들고 아래로 세제(世弟)를 보호하여 원대한 왕업(王業)을 공고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드디어 살해(殺害)당하니, 그때 나이 60세였다. 덕산현(德山縣) 나연(蘿淵) 위에다 장사지냈는데, 밤마다 흰 운기(雲氣)가 분묘에서 나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보았다고 한다. 영종(英宗) 원년에 이건명의 관작(官爵)을 충민(忠愍)이라고 했으며, 강가에 묘우(廟宇)를 세우고 제사지내게 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네 충신이 연차(聯箚)를 올려 대리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태구(趙泰耉)와 최석항(崔錫恒)에게 저지당하였고, 세 충신은 사사(賜死)되었는데, 유독 이건명만이 화(禍)를 당한 것이 제일 참혹했던 것은 무슨 까닭이었는가? 처음 조정에서 저사(儲嗣)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을 적에 이건명이 말하기를, ‘왕제(王弟)를 세우지 않으면 나는 머리를 풀고 산으로 들어가겠다.’ 하였다. 경종(景宗)이 왕세제(王世弟)를 세우기에 미쳐 이건명을 파견하여 고명(誥命)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예부(禮部)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건명이 이에 청(淸)의 각신(閣臣) 마제(馬齊)에게 가서 매우 간절하게 봉하여 줄 것을 청하니, 마제가 내용을 갖추어 주문(奏聞)하였으므로 드디어 고명을 허락하게 되었다. 최석항이 이때문에 크게 분노하여 마치 개인의 원수를 갚듯이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건명이 화를 당한 것이 가장 참혹했던 이유인 것이니, 어찌 딱한 일이 아니겠는가?” <경종수정실록 3권, 경종 2년 (1722년) 8월19일 기사>
[註1]범촉공(范蜀公)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범진(范鎭)을 이름. 인종(仁宗) 때 지간원(知諫院)이 되어 저사(儲嗣) 세울 것을 청하여 장소(章疏)를 19차례나 올린 일이 있었음. 뒤에 촉군공(蜀郡公)에 봉해지고 시호(諡號)는 충문(忠文)임.
[註2]원보(元輔) : 영의정(領議政).
2022.12.30. 素淡
<경종수정실록 3권, 경종 2년 (1722년) 8월19일 기사 원문>
○壬申/崔錫恒入對, 請殺李健命, 上從之。 健命字仲剛, 文簡公 敏叙之子也。 擧肅宗十二年第, 四十三年, 擢右議政。 肅宗昇遐, 與領議政金昌集, 俱爲院相。 當是時, 群奸傍伺, 蜚言雜進, 而健命能與昌集, 共理國政, 逆折奸萠, 屹然如中流砥柱。 會有建儲之議, 或問健命曰: "立子何如?" 健命正色曰: "先王介子尙存, 如有異議, 則健命當被髮而入山矣。" 已而, 正言李廷熽請建儲嗣, 下大臣議。 於是, 命率群僚, 入對殿中, 引范蜀公故事而力陳之曰: "豈可以言出諫臣, 有所持難乎?" 於是, 定策立英宗爲王世弟。 健命乃與三大臣, 上箚, 請令王世弟代理國政, 趙泰耉, 自宣仁門潛入對, 沮遏不行。 初, 昌集爲奏請使, 健命曰: "元輔不當奉使。" 乃上箚自請代行, 景宗許之。 三月, 健命竣事歸, 賊臣乃使睦虎龍上蜚變, 四月, 健命自義州, 安置興陽 羅老島。 過城山, 賓客、故舊來見者, 相與流涕, 而健命言笑自若, 惟眷眷爲宗國憂。 與人言輒怡然曰: "健命雖死, 世弟安, 則健命復何所恨?" 草遺疏曰: "伏願殿下, 上奉大妃, 下護世弟, 以鞏固遠大之業。" 遂見殺, 時年六十。 葬德山縣 蘿淵上, 每夜, 里人見白氣出於塚中。 英宗元年, 健命追復, 健命官爵, 諡曰忠愍, 立廟江上以祀之。 臣謹按四忠聯箚, 請代理, 爲趙泰耉、崔錫恒所沮抑, 三忠賜死, 獨健命罹禍最酷, 何哉? 始, 朝廷議建儲嗣, 健命曰: "不立王弟, 則健命當被髮入山矣。" 及景宗立, 王世弟遣健命, 請許誥命, 禮部不許。 健命乃從淸閣臣馬齊, 請封甚懇, 齊具奏, 遂許誥命。 錫恒由是乃大恚, 如報私讎。 此健命之罹禍最酷者也, 豈不愍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