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海戰史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명량대첩(鳴梁大捷) 대치도] 사진 클릭 ▶ 창 확대 ▶ 사진우측하단 클릭 ▶ 대형사진!!
먼저 公의 함자를 함부로 부른 後孫의 무례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래는 "불멸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많은 일인 줄 잘 알면서도, 公을 잘 알지도 못하는 후손들이 제목만 보고 식상하여 클릭을 안 할까 걱정해서이기도 합니다.
외람되지만 公의 탄신 460주년을 맞이하여 먼저 公의 정신세계부터 살펴보기 시작하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정신세계]
- 하나,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
나라는 곧 현대적 의미로서 국토와 국민, 주권의 3요소를 내포한 국가이다.
애국, 즉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이란 주권을 가진 주체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국토와 국민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이 나라를 사랑하고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의 충정은 《난중일기》와 《장계》뿐 아니라, 사사롭게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은 말과 글로써만 나라를 사랑한 것이 아닌, 진정으로 마음과 행동을 일치하여 실천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깊다.
조선개국 초기의 숭무(崇武)사상과는 달리 당시에는 문신에 비해 천시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신의 안락을 저버리고 무인의 길을 택한 이유는, 끊임없이 침범하는 오랑캐들에게 국토와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국토에 대한 확고한 의식은 임진왜란 중의 일기와 장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1594년 3월, 당황포해전 이후 명(明)나라 장수였던 선유도사 담종인(譚宗仁)이 일본과 화친하는 일로 일본군이 머무르고 있던 웅천에서 3월 6일에 이순신에게 ‘왜군을 치지 말라’는 공문을 보내 왔다.
그 때 이순신은 심한 열병을 앓아 19일간이나 움직이기조차 힘든 상황이었으나, 놀라고 분한 마음에 즉시 답문을 지어 보냈다.
이렇듯 강경하고 단호한 항의 아래 ‘우리 땅’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국토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 고장이란 어느 쪽을 가리키는 것인가’라고 지적한 것 또한 자주사상에 근거하여 주권국가로서 수군의 진영이 있는 여수나 한산섬만이 본 고장이 아니라, 왜군이 머무르고 있는 부산과 웅천, 나아가 조선의 모든 강토가 ‘우리 땅’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국토와 백성들을 유린한 왜군을 이 땅에서 온전히 물러가게 할 수 없다는 자세를 보인 것이었다.
당시에 명나라는 상국(上國)으로서 명의 장수들 역시 지원군의 명분으로 조선의 백성들을 업신여기며, 대국의 위세를 빙자하여 갖은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조선의 장수로서 주인의식을 보여주고 단 ‘한 치의 땅’도 소홀히 하지 않음을 스스로 보여준 것이다.
한산도 곳간 속에 따로 쌀 500섬을 모아 둔 것이 있었다. 군량 이외에 따로 마련해 두는 것을 보고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었다.
“지금 임금이 의주에까지 피난을 가 계신다. 들으니 조정의 대신들은 일이 불행하게 되면, 강을 건너자고 한다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이 곡식을 배에다 싣고 서해로 거슬러 올라가 임금을 마중해 태우고, 죽음을 다해 적과 싸울 것이요 설사 불행하게 될지라도 임금과 신하가 같이 안고, 내 국토 안에서 죽는 것이 옳다.”
이순신의 국토의식은 주인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내 나라 안에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주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다하여 스스로 등을 진다는 것은 자신의 국토 안에서 의롭게 죽느니만 못하다는 의식의 반영이다. 즉 나와 국토는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정신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은 곧 내 국토를 사랑하는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같이 내 국토에서 죽는 것이 옳다.”는 결론 또한 국토와 국민을 하나로 보는 정신이다.
이순신이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은 다만 국토를 사랑하는 정신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다. 임무를 수행하면서 다른 무엇보다도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을 가장 우선으로 했다. 이순신이 해전에 임하면서 백성을 걱정하는 대목을 장계에서 찾을 수 있다.
1952년 9월 1일 이순신은 부산포해전에서 적선 470여 척을 맞아 128척을 격침시켰는데, 나머지는 따 쫓아가 부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왜적들이 육지에서 나오지 않고 싸우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여세를 몰아 계속 몰아세운다면 육지로 올라온 왜적들에게 부산성 밖에 있는 백성들이 공격을 받을 것이므로, 적선들에게 한 가닥 활로를 내어주어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하였다.
당시 전장에서는 외형상의 전과를 중요시 여겨 적의 수급을 베는 것이 전공을 세우는 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전이 끝날 때마다 상황을 보아 적선을 몇 척 남겨 적들이 도주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줌으로써 육지의 백성들이 받는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이순신 장군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은 스스로의 안위와 만족을 위해 말로써만 나타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을 아끼고 국토를 지키고자 하는 명확한 국가관 아래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 두울, ‘정의를 실천하는 정신’
이순신은 일생을 ‘정의(正義)를 실천하는 정신’으로 살았으며, 그 정신의 불꽃은 꺼지지 않고 전해져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교훈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정의란 ‘바른 도리’, ‘바른 행동’을 말한다. 또 지혜와 용기, 절제가 각각 법도를 지켜 조화를 이룩하는 일을 일컫는다. 그 정의는 공(共)과 사(私)를 구분하는 대의명분이 되며, 나라의 안위(安危)가 앞서는 진리 속에서의 올바른 길임을 뜻한다.
충무공은 일생을 통하여 바르고 옳은 일이면 역경이 따르더라도 반드시 행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로운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릇되고 잘못된 경우라면 절대로 탐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자신의 정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파면되거나 구속되기도 하는 등, 많은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이순신이 발포 만호로 있을 때, 직속상관이 되는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성박(成?)이 군관을 시켜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같은 지시가 정도(正道)에 어긋남을 지적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 땅은 나라 땅이요, 이 땅 위에 있는 이 나무는 나라의 물건입니다. 여러 해 동안 길러 온 것을 하루아침에 벨 수 없으며, 더욱이 공용이 아닌 사용으로는 벨 수 없습니다.”
이순신은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함부로 공물(公物)을 사용하는 것을 옳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이를 함부로 어기지 않아야 한다는 의연한 태도를 보여 준 것이었다.
이순신이 훈련원 봉사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병조판서 유정이 이순신에게 좋은 전통(箭筒 : 화살을 넣은 통)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자기에게 줄 것을 부탁한 일이 있다.
“이 화살통을 드리기는 어렵지 않으나, 대감과 소인이 함께 더러운 누명을 받게 되니 미안합니다.”
유정 역시 그의 지적을 옳게 받아들였다.
이순신은 윗사람에게 아첨하거나 뇌물을 바치는 행동을 스스로 엄히 단속하는 청렴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나라를 위해 언제나 작은 정의라도 그것을 지키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으며, 그에 따른 자신의 의견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 물론 그로인한 어떤 불리한 처분과 누명에도 절대 굴하지 않고 항상 바른 자세로 생활했다.
또한 자신이 진중에 있을 때 아내의 병세가 위급함을 들었을 때에도 이순신은 걱정하는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국사와 업무를 수행하는 데 조금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홀로 애타는 심정을 달래며 아내의 병이 완쾌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난중일기》에 드러나 있다.
이처럼 이순신은 자신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결코 요행을 바라거나 옳지 않은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또한 위선과 허식으로 공명을 다투지도 않았다.
오직 자신의 소신과 능력으로 모든 난관을 뚫고 나갔다. 이순신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정의를 실천하는 정신’은 나라를 위해 먼저 가치관을 확립하고 그에 따른 올바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몸소 실천하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 세엣, ‘책임을 완수하는 정신’
책임이란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를 말한다.
사회생활 혹은 조직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내부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직책에 따른 책임이 있다. 그 책임에 대한 부담은 타인에게 전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결과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이 미친다. 즉 상부의 지시사항이나 조직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끝까지 처리하는 자세야말로 책임을 완수하는 정신이라 할 수 있다.
1593년 웅포해전 때, 적선을 퇴치하고 돌아오던 중, 군사들이 방심하여 통선 1척이 전복된 일이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곧바로 장계를 올려 조정에 보고하였다.
아군의 전선이 손실된 이 사건은 7년간의 해전을 치르는 동안에도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일이 자신이 직접 저지른 잘못이 아닌 부하들의 실수임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잘못된 직무와 그에 따른 책임으로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인력과 재산을 잃은 것에 대하여 추궁과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를 보여준 것이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 중 통제사로 다시 임명되어 12척의 전선만을 수습하자, 조정에서는 그 전력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수군을 폐하고 육전에 임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육지에 왜군들이 위세를 자랑하고 국토를 유린하는 이유를, 수군으로서 최초에 적들이 조선에 상륙하는 것을 막아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바다를 지키는 수군의 장수로서 자신의 형세가 불리하거나, 적들의 세력이 약하거나 강하던 간에 반드시 무찔러바다를 지키고야 말겠다는 결의, 즉 수군이 맡은 책임을 적을 굴복시킴으로서 완수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던 것이다.
이순신은 또한 백의종군하면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송나라의 역사를 읽고’라는 독후감을 초서체 《난중일기》에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송나라가 금나라의 침입을 받았을 때 재상 이강(李綱)이 온갖 모략에 못 이겨 재상으로서의 책임을 망각하고 도피해 버리려는 말을 했다는 내용에 대하여 비판한 것이다.
이 말은 나라가 어려움을 당한 때 재상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스스로 피하려는 생각을 품은 것에 대해 비판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이순신은 자신이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밝혔다.
다시 말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책임 있는 자, 또는 중책을 맡고 있는 자는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도피하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일기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충무공의 책임완수 정신은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운명을 다하는 순간까지도 찾아볼 수 있다.
“싸움이 한창이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군사들을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
이 같은 유언을 남겨 장수로서의 책임을 다하였던 것이었다. 충무공이 보여준 ‘책임을 완수하는 정신’은 죽음까지도 초월하여 자신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우리들에게 자신의 소임을 끝까지 책임지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르쳐 준 것이었다.
- 네엣, '創意로 개척하는 정신'
창의(創意)란 새 환경을 만들려는 의견을 생각하는 것이며, 이에 따른 개척(開拓)은 그러한 의견을 새로운 방법과 발전적 태도로서 성취하는 것이다.
즉 종래에 만들어졌거나 제도에 대해 보다 낫거나 편리하게, 혹은 손길이 닿지 않은 분야를 새롭게 열어 만들어가는 정신이 창조로서 개척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나라에 있어서도 창의와 개척이 제도에 반영된 국가는 번영과 문화적 융성함을 누렸지만, 그 반대로 창의와 개척이 박약하였을 때에는 그것이 국력에 미치고 몰락하는 과정을 밟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예는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충무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과, 전쟁 중에도 지속적인 전비태세를 유지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가는 면모를 보였다. 영국의 G. A. Ballard가 “이순신 제독이 넬슨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 기계발명은 곧 거북선과 총통을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후에 임진왜란에서도 뛰어난 성능으로 많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왔을 때에는 전장에 대한 방비와 보수가 매우 소홀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충무공은 이 모두를 둘러보며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의견과 방법을 찾아내어 군사들의 훈련과 무기의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현재 여수 진남관에 보존되어 있는 석인(石人) 역시 전선이나 배를 매어 두는 돌마저 옛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해전에서 뛰어난 화력을 자랑했던 거북선의 건조도 왜적의 침입을 미리 예견하여 대비한 것임을 미루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안보에 대한 인식과 전쟁에 대한 준비가 해이해져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새로운 전선을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전선과 다른 점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전선건조에 들어가는 수많은 자재와 인력이 동원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충무공은 한산도 진영에 있는 동안 수차례의 해전에서 얻은 문제점을 시정하고 보완하여 발전시켰으며 새로운 화기 제작에도 정성을 기울였는데, 왜군의 조총을 보고 그 성능과 화력을 높여 정철조총을 개발했다.
이 내용은 요즘의 포술장교의 분석보다도 뛰어난 화기분석능력이다.
또한 모든 업무의 평가에 있어서 자신의 공적을 앞세워 수군만의 공훈을 세우기보다 서둘러 대량생산을 하여 전 군이 적을 무찌르는데 도움이 되도록 노력했다.
명량대첩에서 13척의 전선으로 333척의 왜선을 맞아 31척을 격침시킨 후, 수군은 목포 앞바다 고하도로 통제영을 정했다.
하지만 다가오는 겨울을 날 방도가 막막한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재건사업에 노력하여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 즉 선박운행증과 같은 새 제도를 구상하고 시행하여 큰 배는 3섬, 중간 배는 2섬, 작은 1섬씩을 바치고 증명서를 보유해야만 바다를 통행할 수 있게 했다.
이 제도의 시행 후 수영에는 1만여 섬의 군량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더욱이 이 해로통행첩 제도는 군량을 확보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남해와 서해를 드나드는 적의 간첩선 따위를 색출하거나 봉쇄하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충무공은 여러 불리한 악조건 속에서도 창의적인 정신으로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환경을 개척해 나갔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창의로 개척하는 정신’은 나라를 위해 지혜와 용기, 그리고 신념으로써 새 것을 찾아내는 자세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 다섯, '희생을 감내하는 정신'
희생이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거나 타인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몸과 마음을 헌신하는 자세를 말한다.
어느 나라의 조직을 막론하고 전체적인 단결과 화합에 의한 발전을 이룩하려면 보다 큰 가치를 위해 그보다 작은 가치를 지불하게 마련인데 이것이 바로 희생이란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순신이 승리로 이끌었던 여러 해전 중에서도 13척의 전함으로 왜선 300여척을 맞아 눈부신 승리로 이끌었던 명량해전은 전략과 전술이라는 승리요인 외에도, 전투 직전 지휘관으로서 부하들에게 이른 말이 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1000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적이 비록 1000척이라도 감히 우리에게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조금도 마음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
부하들을 독려한 이 같은 말에서 나라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희생정신을 바탕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육전에서는 전장에서 아군이 많은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지만, 충무공이 지휘하는 해전에서는 연정연승과 더불어 미미한 피해만을 낳은 것도 수군들이 희생을 감내하는 정신으로 싸움에 임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는 도중 어머니를 잃는 슬픔과 함께 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후에는 아들을 잃게 되는 고통을 겪어 그 괴로움을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가슴 아픈 시련에도 불굴의 용기와 인내로 오직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구하는 데에만 온 정성을 다하였다.
사천해전을 보고한 장계에는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부하들의 포상을 건의하면서도 자긴 자신에 대해서는 어떠한 공적도 내세우지 않았다.
이후에도 자신은 잠시도 휴식을 취하거나 상처를 돌보지 않고 다음날부터 이어진 당포, 당황포해전 등을 지휘하였다.
더욱이 전장에서도 밤이면 군사들을 휴식시키고, 자신은 화살을 다듬으며 고생스러운 일에는 먼저 나서서 행하였다.
이렇듯 충무공은 자신의 어려움이 부하들의 고통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부하를 사랑하는 참다운 희생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충무공의 나라를 위한 책임감과 자신을 희생하여 국가를 지키겠다는 숭고한 의무감이 여러 해전에서 전승의 기록을 낳고, 나아가 바다를 통하여 조국과 민족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순신이 관직에 오르고 전사하기까지 보여준 충의(忠義)의 모습은 어느 하나를 꼽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행적들 곳곳에 남아있다. 그것은 전쟁전후의 모든 시기를 통틀어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일관되었던, 또 평범한 개인이 갖는 단순한 관념을 뛰어넘는 초인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호(諡號)였던 충무(忠武)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인으로서의 국가에 충성하고자 하는 기개와 사명감을 뚜렷이 하고 있다.
이순신이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군관(軍官)으로 근무하던 시절, 그가 근무하는 동안 숙소에는 옷과 이부자리만을 두어 청렴하게 생활하였으며 남은 양식은 반드시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뿐만 아니라 술에 취한 병마절도사가 이순신에게 다른 군관의 집을 사사롭게 찾아보자고 했을 때에도 이순신은 그의 잘못을 지적하며 거절했고 병마절도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검소하고 청렴한 삶을 살며 상관이라 하더라도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지적하는 모습은,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충사상(忠思想)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이 전라도 고흥의 발포 수군만호(水軍萬戶)로 근무하던 때, 그의 직속상관이 되는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성박(成博)이 군관을 시켜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나무를 벨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했다.
“저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는 나라의 물건입니다. 나라의 물건은 사사롭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저 나무는 오래된 것으로 하루아침에 베어 버릴 잡목이 아닙니다.”
이러한 공사에 대한 구분이 분명한 태도는 성박을 감복시켰다. 이순신의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은 두 번의 백의종군(白衣從軍)을 겪는 고행을 통해 더욱더 두드러진다.
첫 번째 백의종군은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와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하던 43세 때이다.
당시의 녹둔도는 오랑캐들이 끊임없이 침입하여 변방을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때문에 이순신은 녹둔도를 방비하는 병력이 적은 것을 염려하여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에게 군사를 증원시켜줄 것을 거듭 요청했지만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 후 오랑캐들은 병력을 이끌고 둔전의 울타리를 포위하고 공격을 해왔으며, 이순신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악전고투하여 그들을 격퇴시켰고, 뒤를 추격하여 포로로 잡힌 백성 60여 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에서 수호장인 오형(吳亨)과 감독관이었던 임경번(林景藩) 등이 전사를 하고 이순신도 오른쪽 다리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었지만, 아군도 오랑캐 두목과 적군의 목을 3개를 베었다.
그러나 이 싸움으로 인한 아군의 피해가 자신의 책임과 관련돼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한 이일은 아군 측의 피해만을 거론하며 이순신을 처벌하고자 했다. 이일의 거짓보고를 받은 조정은 이순신의 처벌을 논의하였고 지난 날 그의 공적을 고려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 : 일체의 관직과 벼슬 없이 평복으로 참전하는 처벌)을 명하였으니 억울하고 불공정한 판결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정의 판결이었기에 이를 준수하였고 그것을 묵묵히 감수했었다.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으로 인해 삼도수군통제사의 관직에서 박탈당하고 두 번째의 백의종군을 겪는다.
종전의 해전을 연전연승으로 이끌며 전세를 역전시킨 공적에도 불구하고 중앙으로 압송돼 투옥된 채 모진 고문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도 이순신은 항변으로 다른 사람을 연관시키거나 조정을 원망하지 않는다. 정탁(鄭琢)의 상소로 인해 죽음 직전에 풀려나온 이순신은 다시 백의종군으로 도원수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승전의 포상은 고사하고 조정과 임금을 업신여기고 전쟁에 태만한 죄로 모진 백의종군의 치욕과 고행을 수행해야 했던 이순신은 그것들을 묵묵히 감내해 나갔다. 이성적으로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부당한 처벌을 인내와 침묵으로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전란에서 백성을 구하고자하는 애국의 일념 때문이었다. 이는 그가 보여준 충사상의 절정이자, 인간적인 수준을 넘어선 충성심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검소하고 청렴한 삶을 살며 상관이라 하더라도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지적하는 모습은, 진정 나라를 사랑이순신은 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명장이자 영웅이기 전에 지극한 효심을 지닌 아들이었다. 그에게 있어 부모는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때문에 부양의 의무를 해야 할 대상이기 전에 삶의 본질이자 이유가 되었다.
≪난중일기≫에는 가족관련 기사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전체 일수의 1/5을 차지하는 327일분 중에서도, 특히 어머니와 관련된 기사가 100여 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내용이 전시 상황으로 인해 효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데 대한 아픔과 깊은 그리움, 불효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죄의식의 표현이다.
이순신의 건원보의 권관으로 근무하던 39세 때, 그의 아버지인 정(貞)이 73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하지만 그의 임지가 멀고 험했던 까닭에 50일이 지난 다음에야 부음을 듣게 된다.
평소 이순신을 아끼던 우찬성(右贊成) 정언신(鄭彦信)이 상중의 고통으로 인해 그가 몸을 사리지 않을까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 위로하였다. 또한 서두르지 않고 성복(成服 : 초상이 났을 때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일)을 하고 상주의 차림으로 갈 것을 권했지만, 이순신은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간 연후에야 성복을 하고 3년 상을 치렀다.
일찍이 부친과 두 형을 여위었던 이순신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효성은 각별함을 넘었다. 그는 전란 중에도 정기적으로 어머니에게 안부를 전하였으며 노환으로 인한 병세를 걱정하였다. 이순신이 어머니를 만나기 위하여 당시 진주 등지에 있었던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 1547~1634)에게 올린 보고서는 그의 지극한 효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실로 이 글은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아들의 지극한 심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그의 심정은 1596년 10월 7일에 수연(壽宴)을 베풀어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고, 나아가서는 그도 일시적이나마 가슴에 사무쳤던 애타는 정곡을 풀기도 했다.
이순신이 어머니를 향한 효성과 그로 인한 죄책감은 두 번째 백의종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서울로 압송되어 28일간 옥중에서 모진 고초를 겪은 뒤, 정탁의 상소 등으로 인하여 석방되었고 다시 백의종군의 명을 받았다. 그가 백의(白衣)의 몸이 되어 합천(陜川) 초계(草溪)에 있는 권율의 휘하로 가는 도중 어머니 변씨(卞氏)의 부음을 듣게 된다.
당시 변씨는 여수에서 아들이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배를 타고 아산(牙山) 고향으로 올라가던 도중, 서해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83세의 일기로 배위에서 세상을 떠났던 것이었다 .
이순신은 어머니가 별세한 날인 11일, 비보를 접하기 전의 어머니를 향한 걱정의 마음을 일기에 옮겼다.
이순신은 곧 종을 바닷가로 보내 어머니의 안부를 알아오게 했다.
이튿날에는 안흥에서 어머니가 불편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아들 울을 먼저 바닷가로 나가 마중해 오도록 보냈다.
그러나 그가 어머니의 부음을 듣게 된 것은 이틀 뒤인 13일이었다. 이러한 슬픔을 그의 일기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명받은 죄인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룰 수 없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금부도사는 길을 가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때문에 어머니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전란 속에서 억울한 누명으로 죄인의 신분이 되는 고된 상황에서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그를 깊은 상심에 빠지게 했다. 더욱이 장례식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이 전장으로 떠나야 하는 자신의 심정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통하며 그로 인한 죄책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잃은 상황에서도 전란에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처럼 그의 효성은 충과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지극한 효도와 더불어 국가에 충성하는 것 역시 하나로 보았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이 조국을 향한 사랑과 전장에서 자신까지도 희생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으로 승화된 것이었다.
"외국에서의 평가"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이었던 G. A. 발라드는 이순신에 대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한 이순신(李舜臣)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 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 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 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
같은 시대 사람인 해군중장 사토 데쓰타로오는 대좌였던 1908년에 해군대학에서 강의한 적이 있다. 그가 지은《제국국방사론(帝國國防史論)》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예부터 장군으로서 기정분합의 묘법을 다한 자는 한둘에 지나지 않는다.
나폴레옹이 “全 으로써 그 分을 쳤다.”고 하는 것도 이 뜻에 틀림없다.
그런데 해군장군으로서 이를 살피면 먼저 동양에 있어서는 한국의 장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장수 넬슨을 들지 않으면 안된다.
이순신은 실로 개세(蓋世)의 해장(海將)이다. 불행히도 생을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용명(勇名)도 지명(智名)도 서양에 전하지 않고 있지만, 불완전하긴 해도 임진왜란에 관한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장군이다.
서양에 있어서 이에 필적할 자를 찾는다면 네델란드의 장수 드 롸이테르(Michiel de Ruyter : 1607~1678) 이상이라야 한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 없다. 이 이순신 장군은 장갑함(거북함)을 창조한 사람이며, 300년 이전에 이미 훌륭한 해군전술로써 싸운 전쟁지휘관이었다. "
이 말은 영국의 명장 넬슨도 그 업적에서는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수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일본의 작가 시바 료타로오(司馬遼太郞)는 ‘세계에서 가장 으뜸가는 바다의 영웅’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 이순신은 풍신수길의 군대가 조선에 침입하였을 적에, 해전에서 몽땅 무찔러 깨뜨렸다는 조선의 이름난 장수이다.
이순신은 당시의 조선의 관리들 가운데서 유일하리만치 청렴한 인물로서, 그 지휘통솔력에서나 전술능력에 있어서도, 저렇게도 충성심과 용기에 있어서도, 실제로 기적과도 같은 이상적인 군인이었다.
영국의 넬슨 이전에 있어서의 이름난 장수이기도 하거니와 세계 역사상 이순신만한 사람이 없으며,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 있어서까지도 잊혀지지 않겠지만, 도리어 일본사람의 편에서 그에게 존경심이 계승되어 명치유신기간에 해군이 창설되기까지 하였으니, 그 업적과 전술이 연구되어져야 한다. "
‘Military and Naval Affairs'의 종신 연구가이자, <Asia Magazine>의 군사관계 해설자인 알렉산더(Alexander Kiralfy)는《일본해군전략(日本海軍戰略)》이라는 글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 원래 육상의 인간이었던 히데요시는 이 재액이 육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함대의 실패에 의한 것이라 하여 육상과 해상의 그의 병력이 서로 지원하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일본전략의 육.해 양용의 성격을 밝혔다 .
이 쓰디쓴 교훈이 일본인에게 가르친 것은 그들의 해군이론을 개정한 것이 아니고, 육상전투의 성공을 얻기 위해 시간의 낭비를 피하려는 어떤 수단을 빠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첫 침략 때에 한국에서 만약 거북함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황해의 북해안에 무적의 한국과 중국의 군함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 작전은 성공했을 것이 틀림없다. "
해군의 중요성과, 인진왜란 당시 거북선이 해전에서 보여주었던 활약에 대하여 밝히는 글이다.
이 글은 http://www.e-sunshin.com/e-sunshin/ 싸이트 등에서 발췌 편집을 하였음을 밝힙니다.
★ 저는 항상 글이 늦는군요...
이 글도 벌써 일주일 전에 구상을 했지만, 어제 이전에 올려야하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충무공 탄신일이 하루 지난 오늘에야 올리게 됐습니다. 핑계야 많죠! 우선은 먹고 사느라 바빠서가 제일 그럴듯 하지만, 그보다는 제가 성의가 없어서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저런 이유로 글을 쓰다 타이밍을 놓쳐서 미처 못 올리고 창고에 쌓아둔 미완성 글이 수십 편이나 됩니다. 최근의 것으로만 예를 들면 ' 아~! 우리 시대의 화객 고우영 화백...!!', '오일게이트의 진실', '우리 시대의 배우 김무생의 죽음', '이은주양의 죽음의 진실...', '요즘 눈 뒤집힌 것만 보면 속이 다 뒤집힌다~!!' 등등...
괜히 쓰고도 올리지도 못한 글이 너무 많고, 또 그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 이렇게 푸념을 한 번 해 봅니다. 너무 글을 안 올려 회원님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요...(꾸우~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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