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파수도(內波水島)
조약돌이 만든 환상의 천연 방파제를 가진 섬
요약 : 섬의 면적 0.14km2, 섬둘레 2.2km, 안면읍 소재지에서 9.7Km 떨어져 있다. 2021년 기준 인구는 2가구 4명이다. 내파수도는 충남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314번지에 위치한 섬으로, 조선시대 중국의 상선과 어선들이 폭풍을 피하거나 식수를 얻기 위해 정박한 곳이기도 하다. 200m에 이르는 방파제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구석(球石)으로 축조된 것이 특징이다. 천연기념물 안종훈 선생 공적비가 있다.
위치 :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314번지
내파수도 개요
섬의 면적 0.14km2, 섬둘레 2.2km, 안면읍 소재지에서 9.7Km 떨어져 있다. 내파수도는 충남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314번지에 위치한 섬으로, 조선시대 중국의 상선과 어선들이 폭풍을 피하거나 식수를 얻기 위해 정박한 곳이기도 하다.
내파수도 바깥쪽(서쪽)으로 3km 지점에는 외파수도가 있는데, 마치 내파수도의 지아비처럼 당당하게 서 있다. 섬의 연안에는 기암괴석과 정상의 동백나무 숲이 장관이며, 특히 200m에 이르는 방파제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구석(球石)으로 축조된 것이 특징이다.
현재 2가구 4명이 살고 있다.
내파수도 둘러보기
서해안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안면도에는 수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그런데 안면도에서 지척인 내파수도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섬이 워낙 작으며, '별 볼 일 없는 섬'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 섬은 해양환경을 가장 잘 보존한 '보물섬'이기도 하다. 천연방파제의 길이 300여 미터, 높이 3~4m, 너비 20~40m의 좁고 긴 자갈밭이다.
둥근 자갈로 만들어졌다 하여 '구식(球式)방파제'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중국의 상선 및 어선들이 우리나라와 왕래할 때 폭풍을 피하거나 식수공급을 위해 정박했던 곳으로 알려진 섬이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에 파손된 선착장 시설이 있다. 이 곳에 탐사선 등대호를 대고 빠져나오면 바로 갯바위지대. 오른쪽으로 난 갯바위지대를 걸어 10여 분 가면 언덕 아래에 건물 한 채가 보인다.
이번 서해안 섬 여행에서 전에 두 번이나 지나친 내파수도를 반드시 상륙하는 것이 하나의 목적이었지만, 방파제 시설이 없는 이곳에 배를 대고 내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같이 간 일행 중에 '회포'라는 닉네임을 가진 분이 마침 낚시를 하면서 배를 다룰 줄 알아서 그 분에게 등대호를 맡기고 5명의 일행들이 한꺼번에 내파수도에 상륙하였다. 목표는 몽돌밭이었다. 마침 물이 빠진 관계로 얼마든지 몽돌 방파제 끝까지 걸어가 볼 수 있었고 감격하여 사진을 촬영하였다. 얼마 후에는 물이 빠르게 차오르면서 금세 몽돌밭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 좀 신기할 따름이었다. 무인도로 알려진 내파수도에 사람이 살고 있는데 두 가구이다. 여기에 남자들이 두 명인데 둘 다 중국 사람들이다. 전기는 태양열발전이고, 식수는 빗물이 고인 산의 바위물을 받아서 호스로 내려 탱크에 저장해서 해결한다.
집 앞으로 자갈밭이 길게 이어진다. 형형색색의 때깔 고운 구석들이 길이 3백50m, 높이 6m, 폭 30m로 쌓여 방파제를 만든 모습은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자연의 조각품이다. 남북으로 향하던 조류가 들물에 빙빙 돌며 자갈을 움직인다. 적어도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자연제방은 섬의 전 해안에서 생성된 자갈들이 겨울철 북서풍에 의해 일어나는 파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섬의 동쪽에 모여서 형성됐다.
내파수도의 천연 방파제는 안면도를 바라보는 쪽, 즉 섬의 동남쪽에 있다. 방파제 안쪽에는 자디잔 조약돌 해변이 펼쳐져 있어 물놀이하기에도 좋다. 특히 내파수도에서 서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의 외파수도가 내파수도에 닥쳐오는 파도까지 막아주고 있다.
공적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모래가 길게 길을 만들고 있었다. 방파제처럼 보인다. 100미터는 족히 넘을 자연제방이다. 맨들맨들하고 동그랗게 생긴 구석들이 한데 모여 천연의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마치 노두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 멀리 보이는 곳이 바로 안면도다.
내파수도의 자갈밭은 학명으로 해빈(海濱 · beach)이다. 본디 해빈은 모래 같은 느슨한 입자들이 해변의 일부, 혹은 전부를 덮고 있는 해변을 의미한다. 해빈은 암괴로부터 큰자갈, 잔자갈 등의 자갈류, 극세립 모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개껍데기나 부스러기, 혹은 제주도 우도처럼 산호부스러기 해빈도 있고, 심지어 인간이 버린 유리나 플라스틱으로 범벅이 된 해빈도 있다.
내파수도 같은 자갈해빈은 일반적으로 경사가 급하며, 반면에 모래해빈은 마치 주차장처럼 편평하여 해수욕장으로 많이 이용된다. 내파수도의 해빈도 외형적으로 볼 때는 평평하지만 상층부가 높고 물속으로 가파르게 경사각을 이룬다. 고운 모래는 멀리서 이동해 오지만 자갈 같은 퇴적물은 비교적 근거리를 이동한다.
한쪽으로 자갈이 쏠리면 반대쪽에서 밀어붙여 허물어 내린다. 누적된 조류운동과 파도의 힘으로 오늘의 자갈밭이 완성되었다. 지금도 자갈밭은 들물에 잠기고 썰물이면 모습을 드러낸다. '숨 쉬는 방파제'인 셈인데, 실제로 파도에 단련된 자갈에는 해맑은 녹색의 파래가 번창하고 있다. 구석(球石)은 억겁의 세월 동안 파도에 씻겨 닳고 닳아 만들어진 조약돌인데, 배들에게는 양탄자 노릇도 한다.
구석들 위로 배가 스르르 미끄러지면서 머리를 댈 수 있는데, 둥근 돌들이 밑창을 굴려주므로 배가 상하지도 않는다. 또 구석에는 희귀한 규석 원료가 들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쓰는 질 좋은 규석 원료는 프랑스 등 유럽산으로, 일본이 수입해서 우리나라에 비싸게 재수출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내파수도 천연 몽돌 그리고 안종훈 선생 공적비
집을 돌아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는데 이 언덕배기에 '파수도의 파수꾼 안종훈 선생 공적비'란 비석이 서 있다. 충남 도지정기념물로 지정된 일명 '구석(球石)방파제'를 지켜낸 안옹을 기리는 것이다.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구석방파제는 전국적으로 유일무이하며 생태적으로도 각별하다. 내파수도에만 있던 것은 아니나 대개의 자갈밭이 업자들 손으로 넘어가면서 살아남은 곳이 드물다.
안종훈, 선동규 두 분의 할아버지는 이 섬에 들어와 30년 동안 살면서 이 섬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였다.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은 지난 1967년도에 뭍으로부터 9.7km 떨어진 외딴 섬 내파수도에 정착한 것이다. 미역 양식을 하면서 돈을 벌면 이 섬을 개발해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들어왔다. 당시 내파수도에 10가구 정도 살았지만 객선이 없고 사람들이 살기에 부적합한 곳이어서 대부분 섬을 등지게 된 것이다.
기대에 부풀었던 미역은 가격이 폭락하면서 섬 개발의 꿈도 무너지고 말았다. 그때부터 고기를 잡으면서 두 분에게 운명적으로 들이닥친 것은 뭍사람들이 마구 가져가는 몽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두 사람은 업자들로부터 유혹이 많았지만 고집스럽게 투쟁을 벌여서 몽돌밭을 지켜냈다.
그때 구석방파제에 깔려 있는 조약돌을 노리고 찾아오는 외지인들이 많았다. 구석방파제를 이루는 조약돌은 정원석으로 포장되어 일본에 비싼 가격으로 수출이 되는가 하면, 규석 원료로서 상당한 경제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광업권 허가를 낸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무차별적으로 실어내 가는 상황이었다.
내파수도 구석방파제는 전국적으로 희귀한 곳으로 생태적으로도 각별하다. 이런 자갈이 내파수도에만 있던 것은 아니지만 건설업자들에 의해 대개의 몽돌밭이 넘어가면서 살아남은 곳이 드물다. 그러나 내파수도는 이런 지킴이들의 피나는 투쟁 덕분에 이렇듯 멀쩡하다.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이라 환경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때였다. 그런 시절에 장사꾼들이 마구 실어가는 이 천연방파제 몽돌을 지키기 위하여 두 분은 밤낮으로 눈을 부릅뜨고 보초를 서면서 태안군청에 수십 차례 진정서를 냈다.
60-70년대 환경 인식 개념이 부족한 시절에 이 작은 자갈밭의 가치를 알아차린 것일까? 환경애호가도 아닌 두 노인이 초가삼간에 살면서 이 구석방파제를 지켜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공적비의 이름값을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이 두 분의 피나는 노력과 외롭고 긴 투쟁은 결국 지난 1987년 충청남도가 구석방파제를 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 다음부터 몽돌이 법적으로 보호를 받게 되면서 한 시름 놓았지만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몰래 배를 대고 몽돌을 가져 갈 수 있었다. 그 뒤에도 계속 애정을 가지고 지킨 결과 오늘날 후손들에게 자연의 소중함과 아름다운 몽돌을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안옹은 작고했고, 선옹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이다.
공적비 뒤로 산으로 가는 길이 있다. 비포장도로로 말 그대로 산길이다. 옆에 밧줄로 연결해 두어 잡고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산길을 오르면 동백나무숲이 있고, 오래된 해송도 만난다. 자갈해빈이 굽어보이는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좁고 길게 북고남저의 산자락이 엎드려 있다.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 아닐까 싶다. 갈림길이 나타난다. 가운데에는 나무를 기둥삼아 그물로 하늘평상을 만들어 두었다. 얼마를 가면 숲에서 벗어난다. 풍광이 뛰어나다. 양측의 해변에 형성된 만에도 자갈이 수북하다.
주변에 통신시설이 몇 개 있다. 앞으로 내리막 능선이 나타난다. 능선을 따라 어느 정도 내려가니 주변에 몇 개의 돌담 흔적이 나타난다. 안부지점, 섬의 남쪽 중턱이다. 이곳에 마을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끝까지 가면 움막 한 채가 있다. 측량기준점인 움막 안을 들여다보니 이불이 깔린 침상이 있다. 살아가는데 최소한 필수품만이 있다. 이 옆으로 지적삼각점이 심어져 있다. 여기서 확 트인 바다를 바라보면 바로 앞에 내파수도에 딸린 무인 바위섬이 있다. 그리고 눈을 왼쪽으로 돌리면 내파수도가 있다.
내파수도 섬 서쪽에는 억새풀이 많이 자란다. 가을에 하얗게 만발한 억새꽃이 바람에 날리는 장관은 수많은 양떼가 풀을 뜯고 있는 것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내파수도 인근은 우럭, 놀래미, 광어, 도다리, 대하, 꽃게, 민어 등의 텃밭이었으나 지금은 예전 같지 못하단다. 그리고 내파수도 앞에 해안 양식장이 있다. 물이 맑고 수심이 깊어서 전복과 가리비 종패를 뿌려 양식을 하며 살고 있다.
내파수도를 떠나면서
마을 앞에 길게 형성된 만에도 양옆으로 자갈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내파수도의 바다밑 지형은 모래와 펄, 자갈밭이 존재하는데 이 자갈은 서해안의 높은 겨울파도에 따라 내파수도 해안에 밀려온 것이다. 이 섬의 자갈 전체량은 일정 수준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업자들이 손만 대지 않으면 천연방파제가 앞으로도 계속 존재하리라 믿는다.
전국의 수많은 숨을 누비고 다녔지만 이렇게 살아 숨쉬는 방파제를 본 적이 없다. 내파수도의 자갈 방파제는 오늘도 파도에 씻겨 소리가 나며 윤기 나는 돌들의 모습에서 생명력을 볼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모래나 자갈, 바위를 폭파하여 무참하게 파냈다.
그러나 자연이 사라진 만큼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방파제도 여기저기 곳곳에 습관처럼 많이 만들어 놓고 시멘트로 도배를 해 놓았다. 세수증대를 위해서 바다에서 모래 채취를 허가하여 고기의 산란장을 파괴했다. 그 때문에 고기잡이가 잘 되지 아니하여 섬과 바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숨을 내쉰다. 그러한즉 이렇게 소박하고 단순한 자갈이지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옹기가 '숨쉬는 항아리'가 라면, 내파수도의 몽돌해변은 자연이 숨쉬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나치도&외파수도&내파수도]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