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그리고 또 비행기를 타고, 우리는 경기장에 가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행로를 보면 더웠다, 추웠다, 그리고 따뜻했다, 선선했다, 하는 곳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우리 선수들이 이러한 악조건을 능히 극복하느냐 못하느냐가 우리들의 승리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 여하튼 사력을 다하여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싸우고 돌아오겠다." | |
48년 올림픽 대표팀, 스무날 걸려 런던입성
올림픽 필승의 결의 1948. 6. 20 [동아일보] 2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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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6월 제14회 하계올림픽 '조선'선수단의 수행원 손기정 씨가 런던 행에 앞서 다짐한 말이다. 그건 그냥 엄살이 아니었다. 6월21일 오전 8시 기차로 서울역을 떠난 조선선수단의 런던 행 여정은 근 20일간 그야말로 각종 교통수단을 총망라해, 지구 주요도시를 두루 거쳐 현지에 가는 것이었다. 경유지는 대충 부산- 후쿠오카- 요코하마- 상해- 홍콩- 방콕- 캘커타- 봄베이-카이로- 로마- 암스테르담이었다.
물론 여기저기 유람을 하고 런던에 가자는 건 아니었다. 한마디로 돈이 없어 그 많은 도시를 둘러가는 거였다. 그러니까 부산에서 일본, 중국 상해와 홍콩까지 배로 가고 이후 비행기로 런던에 가는데 도시마다 들르는 '완행'이어서 공로(空路)만도 닷새가 걸렸다. 70명 선수단이 런던에 가는데 1인당 여비는 2000달러. 여기에 양복비와 유니폼 값 15만원이 별도로 드니 아직 독립도 못한, 미군정 치하 조선에게 그건 절대 적은 돈이 아니었다. 올림픽후원 복권을 발행해 마련한 돈으로 겨우 런던에 가는데 "싼 게 비지떡"이지 완행 대신 '급행' '직행'을 타고 갈 처지가 못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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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에 가까웠던 1948년 런던올림픽 참가
사실 48년 8월15일, 완전독립국이 되기도 전에 단일국가로 런던올림픽에 참가하는 자체가 기적에 가까웠다. 해방된 그해, 45년에 조선체육회가 생기고 46년부터 올림픽대책위가 생겨 참가교섭을 벌였지만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회원국이 되려고 신청서를 들고 가던 조선체육회 부회장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지지를 않나, 선수선발을 둘러싼 알력으로 체육회 간부들이 총 사표를 내지 않나, 경비 부족분을 런던으로 전송하자는 국회 발의가 나오지 않나, 정말 참가 자체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뛰어 금메달을 딴 1936년 베를린올림픽 이후 40년, 44년 두 차례 올림픽은 제2차 세계대전 탓에 무산됐다. 그렇게 해서 결국 12년을 건너뛴 올림픽이 48년 런던에서 개최키로 확정되자 신생독립국 '조선'도 바쁘게 움직였다. (48년 7월 제헌국회에서 국호 ‘대한민국’을 명시했지만 8월15일 건국 이전까지 조선이란 명칭이 통용됐다. 50년 1월 국무원이 북한과의 확연한 구분을 위해 조선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뒤에야 지명을 포함해 거의 모든 명칭에서 조선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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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태극마크…감동의 런던 오륜행 1983. 12. 03 [경향신문] 5면 | |
재미교포 전경무, 조선올림픽대책위 부위원장에 선임
스포츠 30년…올림픽 참가 1975. 8. 5 [동아일보] 8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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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 여름, 조선올림픽대책위 부위원장에 재미교포 출신 전경무(1901년 평북 곽산 출생)씨가 취임했다. 다섯 살 때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민 가 미시간대학 정치과를 졸업하고 동양인 최초의 전 미국대학 웅변협회장을 지낸 전 씨는 재주가 남다른 인물이었다. "해방 후 조선에서 미국인으로 조선말을 제일 잘하는 이는 언더우드(연세대 설립자)요, 미국말을 제일 잘하는 조선인은 전경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는 32년 LA올림픽 때 일본선수로 참가한 마라톤의 김은배 권태하 등 조선의 3선수를 미국에 소개함으로서 은연 중 조선 독립을 강조한 미주 ‘신한민보’의 운동부기자였다.
영어 잘하고 미국에 인맥이 두터운 그를 조선체육계에 들인 건 민정장관 안재홍, 조선체육회장 여운형이었다. 전 씨는 45년 11월 해방조국에서 뜻을 펴보려 귀국했으나 재미시절 이승만과 노선이 달랐던 탓에 "변방만 돌았지 번듯한 자리에 가지 못했다." 그래 안 장관 등이 "체육을 통해 청년운동을 펼쳐보라"며 체육회에 합류시킨 것. 특히 그가 미국올림픽위원장이자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인 에브리 브런디지와 미시간대 동창인 점도 고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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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 불가능 소식에 발칵 뒤집힌 조선
그해 가을, 그는 "조선의 런던올림픽 참가를 간절히 희망하는" 여운형 회장의 친서, 손기정 권태하 씨 등 마라토너들이 미국 마라톤지도자들에게 보내는 협조문을 지참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12월 브런디지는 "조선은 독립국가가 될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을 전해왔다. 일본의 식민지는 벗어났지만 신탁통치를 받고 있으므로 독립국가가 아니며, 자연 IOC가맹국도 아니고 그런 이유로 참가가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조선은 발칵 뒤집혔다. 울분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당시 조선인의 스포츠 열풍은 대단했다. 국민들은 "조선이 자랑할 건 그나마 운동실력"이라고 믿었고 특히 마라톤 역도 농구 축구 등은 '세계적 수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제 때 여러 종목에서 '최강' 일본을 누른 '조선의 저력'을 독립 운동하듯 믿었으며 사실 손기정 남승용 서윤복(이상 마라톤) 김성집(역도) 등은 이미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래 올림픽이 열리면 거기 "'태극 가슴'으로 '용약'해 조선인의 기개를 만방에 떨치리라"고 생각했는데 참가 불가능이라니!!
신문은 울분을 토하고 체육지도자들은 "그래도 우리는 출전하리라 믿고 연습을 계속하겠다."며 눈물을 머금었다. "개최국 영국도 아닌 미국의 위원장 말을 믿을 필요가 있느냐"는 얘기도 나오고 "어쨌든 자주독립을 하루빨리 이루어야 한다."는 공감대도 빠르게 확산돼 갔다. 47년 들어 조선체육기자회는 미국에 "조선의 올림픽참가를 위해 더 애써 달라"는 건의문도 전했다. 조선내부가 이렇게 끌탕을 하며 울분을 삭이고 있을 때 전경무 씨도 미국서 혼자 스포츠외교를 벌이느라 분주했다. 브런디지는 물론 지그프리드 에드스트롬 IOC위원장을 만나 꾸준히 로비활동을 했다. | |
한가닥 희망을 가졌던 전경무, 비운의 '비행기 추락사'
그리고 47년 3월. 놀랍게도 이 국제체육계 거물들이 희망의 말을 꺼냈다. "유럽에 있는 각 경기단체에 가입하고 6월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총회에서 직접 조선의 참가 희망 의향을 전하면 런던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는 거였다. 신이 난 전 씨는 4월 조선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알리고 5월 IOC가입신청서를 들고 스톡홀름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전 씨의 운은 거기까지였다. 5월29일 밤 그가 탄 미군용 C-54수송기가 김포를 떠나 일본 후지 산 근처를 비행 중 추락해 승객 승무원 41명 전원이 몰사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조선체육회엔 비상이 걸렸다. 오죽하면 체육계 인사들이 "런던올림픽 참가, 그 모든 게 다 전 씨 머릿속에 있는데…창졸간에 일을 당했으니 아무 할 말이 없다"며 울음을 터트렸겠는가. 조선체육회는 급한 대로 미국에 있던 교포 이원순 씨를 스톡홀름에 보내 IOC가입의향서를 냈다. 하늘에 있는 전 씨의 영혼이 도운 탓일까, 아니면 런던대회가 끝나는 바로 다음날 조선이 신생독립국이 되는 걸 감안해서 일까, 혹은 그 해 보스턴마라톤에서 조선이 또 우승하는 등 스포츠강세를 보인 게 작용해서 일까. 조선은 IOC가입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90%는 전 씨가 벌여온 스포츠외교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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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무씨, 올림픽 위원회 참가도중 절명으로 판정 1947. 6. 1 [경향신문] 3면 | |
전씨를 추모하기 위해 '복권 발행' 하기도..

전경무, 독립 조국 IOC 가입 성사 '체육계 밀알' 1990. 12. 7 [한겨례] 7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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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씨의 장례는 서울운동장에서 조선체육회장으로 치러졌다. 런던올림픽 참가 확정을 기념해 7월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체육대회의 성화도 그의 묘소에서 채화 봉송했다. 체육인들은 전 씨 묘소에 절한 뒤 "조선이 이제 태극 가슴도 당당히 세계무대에 용약하게 되었다. 조선의 올림픽 정식 참가는 모두 전 선생의 덕"이라고 엄숙히 선언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비록 올림픽 참가는 확정이 되었지만 거금의 비용을 충당할 길은 막연하기만 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올림픽복권을 팔아 비용을 대며 복권에 전 씨의 유영을 넣기로 결정했다. 1947년 12월 조선올림픽후원회(회장 안재홍)명의로 발행한 후원권은 액면가 100원 짜리로 모두 140만 장이 발행됐다. 해방 후 처음 발행한 복권으로 1등 1명 100만원, 2등 2명 50만원, 5등 10명 1만원 등 당첨금을 걸었다. | |
당시 최고급 공작 담배 한 갑이 30원이었으니 복권 값이 싼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복권 전면에 올림픽참가를 위해 거의 홀로 뛰다시피 하다 끝내 산화한 전 씨 사진을 실은 것과 '조선 대표단의 올림픽 경비 충당을 위해 발행'한 것을 명기한 덕에 복권은 거의 다 팔려나갔다. | |
올림픽 참가 확정 후에도 '끊이지 않은 잡음'
47년 말부터 마라톤 농구 순으로 선수단의 합숙훈련이 실시됐다. 체육회와 올림픽 대책위는 48년 6월 선수단을 확정하기까지 60여 차례나 회의를 열었다. 체육계에서는 70-80명 선의 가급적 많은 인원을 파견하고 싶어 했으나 미군정 당국은 경비 등을 이유로 50명으로 줄일 것을 요구해 알력을 빚었다. 조선에선 원로 이상백 씨가 미 태평양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맥아더는 하지 중장 딘 소장 등 군정청 간부들에게 "경비야 군정청에서 대지만 선수 임원 선발까지 군정청이 도맡아선 안 된다"는 경고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결국 6월16일 조선체육회는 런던올림픽에 출전할 임원 선수 67명을 확정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후유증이 도져 체육회 간부들이 총 사직 성명을 발표하는 등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정실 선발이란 얘기도 나왔고 특히 임원의 출장을 놓고 말썽도 많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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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의 명수 이상백 박사 1979. 11. 15 [경향신문] 5면 | |
어쨌거나 33명의 대표단은 6월18일 국회를 찾아 출발인사를 했다. 신익희 부의장은 그날 본회의를 중단시킨 후 선수들을 일일이 의원들에게 소개하고 “제군들이 월계관을 쓸 때쯤이면 우리가 고대하던 정부가 수립돼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신문들은 선수명단뿐 아니라 전원의 사진도 싣고 "어느 경기종목에서나 우리 선수들은 우승 제1 후보"라고 특필했다. 마라톤 등 기록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상당수 세계기록을 갖고 있다고 전하면서 "우리가 올림픽과 인연 맺기는 15년 전(LA올림픽)부터지만 이것은 모두 원수스런 '일군(日軍) 마크'였던 것이 이제 본연으로 돌아와 한(韓)나라, 태극기, 우리 이름으로 가슴 펴고 맘껏 백두산 정기를 뿜어 용맹 약진하게 될 것"이라고 특필했다. 일장기 한에 맺힌 가슴에 이제 태극무늬가 선명한 것을 감격스레 전하기도 했다.
6월21일 선수단이 서울역에서 '해방자호' 특별열차 편으로 부산으로 갈 때, 또 중간 중간의 역을 지날 때, 그리고 부산 제1부두에서 선편으로 일본으로 출발할 때 수많은 군중이 몰려나와 오색테이프를 던지고 생화를 뿌리며 승리를 기원했다. 해방은 되었고 이제 곧 독립국이 된다는 감격에다 드디어 태극 마크를 달고 국제무대에서 선수들이 겨뤄 태극기를 높이 올릴 것이란 기대가 한껏 부푼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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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에 미치지 못한 성적에 '책임론 후폭풍'

올림픽 패인의 구명 1948. 8. 20 [경향신문] 2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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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런던올림픽에서 역도 김성집과 권투 한수안이 동메달을 땄다. 기대를 모았던 마라톤에서는 홍종오가 25위, 서윤복이 27위를 했고 35km지점까지 선두를 달리던 최윤칠은 기권했다. 농구는 8위, 축구는 24위를 했다. 신생국으로서는 깜짝 놀랄만한 기록이었지만 조선 분위기는 참담했다. "기대는 어긋났다"는 제목이 나오더니 당연히 책임론이 뒤따랐다. 그리고 대회가 끝난 뒤 끝내 "뛰고 차고 치는 것이 체육 아니다"는 글도 등장했다. 경비사용처를 밝히라는 얘기에 선수선발의 불공정, 훈련과정의 문제점까지 파헤쳐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체육회에서는 끝내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세계 수준은 보지도 않은 채 기대만 한껏 부풀렸다 실망이 큰 탓이었다. 비록 메달은 못 따도 최선을 다하면 아름답다는 스포츠 정신이 착근되지 않았던 때라 그렇기도 하다. 비록 당시는 아쉬웠지만 지금 48년 런던은 한국인에게 뿌듯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 조국의 국기를 단, '태극 가슴'이 처음 국제무대에 나섰으며 거기 전경무 같은 출중한 체육인의 희생과 전 국민적 성원이 있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오늘의 우리에겐 감격스럽고 보람찬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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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민병욱 /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 197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 사회1부장, 정치부장, 부국장, 논설위원을 거쳤다.
2009년 7월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들꽃 길 달빛에 젖어> <민초통신 33>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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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캐스트 자주보는데 독립후 최초로 올림픽 참가에 대해서, 그리고 숨은 공로자 가 자세히 적힌거 같아서 올려 ㅠㅠ
칼럼이라서 말멀 뉴스데스크 말고 흥미돋으로 함!
문제시 빨랑빨랑 달아줭^^
첫댓글 가슴아픈 역사다 ㅠㅠ 지금 우리선수들 잘하고 있는거 보면 정말 대단..
이런게 정밀 의지지 ㅠㅠㅠ 이렇게 힘들게 출전한 나라가 또 있었을까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