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첫눈은 아무런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오곤 했다. 올해도 그럴 성싶다. 나의 문학도 첫눈처럼 찾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대통령이나 장군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어린 시절에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꾼 적이 전혀 없다. 초등학교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문학과 관계된 모임이나 단체에 가입한 적도 없다. 물론 백일장에 나가서 그 흔한 장려상을 받았던 적도 없다. 또 등용문을 통과하여 작가라는 이름을 얻을 때까지 시인이나 소설가를 직접 만나본 적도 없다.
나는 광양시 진상면이라는 궁벽한 산촌에서 태어났다. 그 마을에 전문서점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나무 유리창으로 된 미닫이문을 밀 때마다 철제 레일 위로 굴러가는 롤러 소리가 자갈자갈 끓던 문방구에 ‘동아전과’니 ‘표준전과’니 하는 참고서 몇 권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 시절, 나는 개구쟁이 동무들과 산과 들을 쏘다니며 메뚜기 여치 땅강아지를 잡으며 놀았다. 수어천이라고 하는 강가로 나가서 멱을 감고 쉬리와 붕어를 잡았으며, 겨울에는 썰매를 타고 놀았다. 그건 나에게 소중한 ‘문학고향’이었다.
나는 책에 관해서는 그 마을의 다른 아이들보다 인연이 훨씬 깊었던 것 같다. 그건 교직에 몸담고 있었던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의 도시락 보따리 속에는 학교에서 빌려온 책이 들어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책제목은 ‘플루타크 영웅전’과 ‘소공녀’ 등이다.
조금 큰 도시로 나가 중학생이 되었다. 그 학교에는 천여 권쯤의 책을 소장한 도서실이 있었다. 그런데 그 도서실의 책은 전시용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서 대출은 학교 안에서만 가능했고, 집으로 빌려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초등학교 친구들을 두고 도시로 홀로 나왔던 나는 상당히 외로웠던 것 같다. 그래서 책과 자연스럽게 친해지기 시작했다. 학교 도서실에서 틈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 도서실 정리를 도와주는 학생은 집으로 책을 빌려갈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들었다.
그 후 노동의 대가로 빌린 책을 집으로 가져가서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고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그때 즐겨 읽었던 책은 거의 대부분 ‘정협지’, ‘비호’, ‘비호지’ 등등의 무협소설이었다. 하지만 그런 책을 읽었다고 해서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독서는 습관이고 또 인내가 필요한 법인데, 그때 그런 훈련을 충실히 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더 큰 도시로 나와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토록 좋아했던 책을 읽을 기회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치열한 대학입시 공부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시간을 쪼개 틈틈이 책을 읽었다. 그 즈음 대학에 다녔던 누님이 갖고 있던 세계문학전집도 몰래 훔쳐보았고(공부에 지장이 있다고 보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서점에 들려 박경리 선생의 ‘김약국의 딸’이나 ‘파시’ 같은 소설책도 구입해서 읽었다.
사춘기가 되자 우리는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며, 조숙한 친구들은 여학생을 사귀려고 안달했다. 그 당시 여학생과 끈을 이어주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연애편지였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런 소문이 나돌았는지 모르지만, 내가 글짓기를 잘한다고 해서 연애편지 대필 주문이 종종 쏟아졌다. 그런 주문을 소화해내면 제과점 빵을 얻어먹을 수 있는 특별한 소득이 뒤따랐다.
나는 그때까지 읽었던 모든 책의 내용을 되새김질하며 대필 연애편지를 썼고, 좀더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서점을 기웃거리며 시집과 소설책을 들췄다. 그 시절이 내가 문학서적과 본격적으로 만난 시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의과대학의 진학 실패와 일명 ‘재수로’라고 했던 서울 인사동 거리의 재수 시절 그리고 또 한 번의 의과대학 낙방은 내 인생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하늘 높은 줄 몰랐던 기개가 일순간에 꺾이면서 나는 한없이 움츠러들고 말았다.
고통과 외로움이 나를 문학 속으로 서서히 몰아넣기 시작했다. 골방에 처박혀서 하루 종일 책을 읽곤 했다. 나는 원하지 않았던 공과대학을 억지로 다니면서 전공 서적보다 시집이나 문학잡지를 읽는데 더 열성을 보였다.
글이란 쓰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모양이다. 깨나 많은 책을 접하고 난 뒤부터 뭔가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노트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문학이라기보다 남에게 터놓고 말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고통을 낙서처럼 은밀하게 휘갈기는 것에 불과했다.
고학년이 된 어느 날이었다. 어떤 문학잡지를 읽다가 이런 것이 시고 소설이라면 나도 흉내쯤은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나는 그때부터 ‘흉내 내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랍시고 썼던 글이 수십 편에 이를 즈음, 아주 건방지게도 문학이라는 것이 너무나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신문에 시를 투고했고, 산문 원고를 청탁 받았다. 내 작품이 실리면서 주위 사람들은 글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평가해주었다. 그 당시, 문학 동아리에서 다방 같은 곳을 빌려 시화전을 여는 게 유행이었다. 나는 문학 동아리의 시화전을 비웃기라도 하듯 개인시화전을 보란 듯이 열었다. 학교 행사의 축시도 썼다. 정말 겁이 없던 문학청년 시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입대했다. 삼팔선을 코앞에 둔 최전방 부대에서는 독서나 글을 쓸 시간이 전혀 없었다. 나는 문학이라는 단어를 책상 서랍 속 깊은 곳에 처박아버렸다. 어차피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제대한 뒤 대한석탄공사에 들어갔다. 지금은 태백시지만, 그 당시는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에 있는 장성광업소였다. 물도, 땅도, 사람도 검은 탄광마을의 생활이 펼쳐졌다. 램프 불빛에 의지하여 칠흑 같은 지하 갱도 수천 미터를 오갔고, 사고 당한 광부들의 시체를 셀 수 없이 목격하곤 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나는 어둠과 죽음의 현장에서 허우적댔으며, ‘막장인생’이라고 말하는 광부들의 비참한 삶을 질리도록 지켜보았다.
고통과 외로움에 빠졌을 때마다 그러했듯이 나는 다시금 책을 찾아 나섰다. 탄광마을에서 문학잡지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다. 내가 살았던 광산촌에는 두 군데의 서점이 있었지만 참고서나 이상야릇한 주간지와 삼류 소설들만 널려있었다. 서점 주인에게 문학잡지를 특별히 주문해서 읽었다.
나는 광산지대의 열악한 실정과 광부들의 서글픈 삶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그때부터 ‘광부일기’라는 연작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 작업은 예전의 ‘개인적인 고통’에서 ‘우리의 고통’이라는 차원으로 발전된 양상이었다.
3년 후에 석탄공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직장 때문에 중단했던 대학원 공부를 계속하고 문학공부도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다. 그런데 대학원 공부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학공부에만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까짓 것, 시인이나 작가가 별것인가. 서너 달쯤 노력하면 등단할 수 있겠지. 이런 생각을 했던 나는 문단의 높은 벽을 전혀 실감하지 못했던 백면서생(白面書生)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책을 읽고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길 정도로 글을 썼지만 문예작품 공모에서 본선 탈락이라는 아픔을 번번이 맛보았다.
등용문의 통과의례는 가혹했다. 절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이었고, 고통은 탱자나무 가시처럼 예리했다. 밤새 쓴 원고를 새벽녘에 불태워버리면서 이런 바보짓은 그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적이 한 두어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림 그리는 친구가 소설 쓰기를 권유했다. 나는 그동안 매달렸던 시를 잠시 접어두고 광산촌 이야기를 한 편의 중편소설로 완성해서 친구에게 건넸다. 몇 달이 지난 후 문예잡지로부터 느닷없는 연락을 받았다. 나를 신인으로 등단시킨다는 거였다. 작가가 된다는 게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던 순간이었다.
습작과정의 고통이 너무나 컸기에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두문불출하면서 소설에 매달렸다. 일년 후였다. 문학 계간지 ‘실천문학’의 편집장으로부터 첫눈 같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축하합니다! 박혜강 씨의 장편소설 ‘검은노을’이 제 1회 실천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박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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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띠르, 라는 책을 받아서 읽어보았습니다. 회장님의 옥고도 읽어 보았고요. 전도 양양을 기원하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저도 책으로 읽었습니다. 곰낭자 것도요. 엄청 두둘겨 맞는 정이가 나온~ 어이-쇠 님, 살아 있었네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상띠르? 불어같긴 한데... 무슨 뜻이지요? 네이버한테 물어볼까요.
네이버한테 물어봤더니 '느끼다'란 뜻이라네요. 느끼다...느끼다...느끼다!
방장님 뭣땜시 그렇게 뜸하다요! 시방. 방 빼라고 하기전에 정신차리시는게 좋을 것이오. 정이야 발목은 그렇게 삐는게 아니여. 깁스? 있잖야. 그래도 그거 두르고 다녀야 삐었다고 하는거야 밥오야. 석장승님 ! 뭘 자꾸 느꼈다는 거요?
느끼다가 반복되니 느끼하다로 느껴지네~ 전요, 깁스 함부로 안합니다. 잘난척 할 때 목에다나 할까~
회장 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어찌 지내시는지요. 우수도 경칩도 다 지나고... 이제 꽃필 날만을 기다려야 할 모양입니다.
뭣헐라고 꽃필 때를 기둘러!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디...안그래도 봄이라고 허니께 맴이 싱숭상숭한디 버디! 꼭 이렇게 속을 뒤집어 놓을 판이여...(가만, 아! 매화꽃이 피었다는 소문이 자자허든디...버디가 안들었것제)
죄송합니다만 잘 읽고 펌합니다. 용서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