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9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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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가타리나(Catherine)
축일 3월 9일
법률가이자 외교관의 딸인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의
어릴 때 이름은 카테리네 데 비그니
(Catherine de Vigni)이다. 그녀는 데스테(d'Este)의
니콜라우스 3세의 궁중 시녀로 일하였으며,
그곳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부친이 사망하자 그녀는 궁중을 떠나
준수도생활을 하려는 일단의 부인들과 함께
페라라(Ferrara)의 작은 형제회 제3회에 가입하여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그들은 후일에
모두 클라라회 수녀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그리스도와 사탄의 환시를
보기 시작했으며, 어느 성탄절 때 일어난 자신의
체험을 글로 썼다. 그것은 아기 예수를 팔에 안은
마리아의 환시였는데, 이 환시는 그 후부터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그림이 되었다.
그녀는 유능한 수련장이자 원장이었다.
그녀는 서도와 회화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으며,
뛰어난 성덕으로 인하여 그녀의 수도원은
곧 유명하게 되었고 천상 은총으로 충만하였다.
그녀가 손수 장정하고 장식한 성무일도서는
지금도 볼로냐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
성녀 카타리나는 여러 책의 시와 산문을 남겼으나
간행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1712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예술가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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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그레고리오(Gregory)
축일 3월 9일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성 바실리우스(Basilius, 5월 30일)와
성녀 엠밀리아(Emmilia, 5월 30일)의 아들로서,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Caesarea)
에서 태어나 그의 형인
성 대 바실리우스(1월 2일)와
누나인 성녀 마크리나(Macrina, 7월 19일)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기에 수사학자가 되어
테오세베이아(Theosebeia)와 결혼하였다.
그는 수사학 교수가 되었으나 나지안주스
(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1월 2일)의
영향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한 후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아르메니아(Armenia)의 니사 교구의
주교가 되었으나, 아리우스파(Arianism)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폰투스(Pontus)의 집정관으로부터 교회 재산을
남용했다는 무고를 받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도망쳤는데, 그라티아누스(Gratianus)
황제가 그를 다시 복직시켰다.
379년 그는 멜레티우스(Meletius) 이단을 단죄한
안티오키아(Antiochia)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이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팔레스티나(Palestina)와
아라비아의 이단들을 척결하도록 파견되었다.
또한 그는 381년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도 참석하여 아리우스(Arius) 이단을
공격하고, 니케아(Nicaea) 선언문을 재확인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래서 그는 정통교회의
수호자로 칭송을 받았다.
그는 오리게네스(Origenes)와 플라톤(Platon)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신학자로서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680-681년)는 그를
'교부들 중의 교부'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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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미니코 사비오(Dominic Savio)
축일 3월 9일
성 도미니코 사비오(Dominicus Savio)는
1842년 4월 2일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지방
토리노(Torino) 근처의 산 조반니 디 리바
(San Giovanni di Riva)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인
아버지 카를로 사비오(Carlo Savio)와
재봉사인 어머니 비르지타(Birgitta) 사이의
10남매 가운데 하나로 태어났다.
그는 5살 때부터 매일미사의 복사를 하였으며,
7살 때에 예외적으로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려는 소망을
불태워왔다.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 1월 31일)가
청소년 교육을 위하여 준비를 시작할 때
토리노의 성직자들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한
자신의 사업을 도와주도록 의뢰하였는데,
성 도미니코 사비오의 본당 신부가 그를 추천하였다
면담에서 돈보스코 성인은 이 소년의 영혼 속에
은총이 충만한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12살 때에 토리노의 종합기숙학교인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의
오라토리오에 입학하였다.
성 도미니코 사비오는 성인이 되려는 열망으로
여러 가지 특이한 고행을 원하였으나 요한 보스코의
지도에 따라 특이한 고행보다는 매일 매순간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하나 충실히 하는 데서
성화의 길을 찾았다.
그리고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회"를 결성하여
친구들과 더불어 성덕을 닦았다.
성인이 조직한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회는
신심적인 목적 외에도 요한 보스코를 여러 가지
구체적인 면에서 도와주었으므로, 성 요한 보스코가
살레시오회의 모체가 되는 모임을 결성했을 때
그 모임의 회원 22명이 주요 회원이 되었다.
한 번은 학교 내에서 두 학생이 돌을 들고 싸울 때,
도미니코는 그들 사이에 작은 십자가를 들고
끼어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싸우기 전에 이 십자가를 먼저 보아라.
예수 그리스도는 무죄한 분이셨지만,
당신의 박해자들을 용서하시고 운명하셨다.
나는 죄인이다. 그리고 나는 앙심을 갖게 됨으로써
그분을 욕되게 한다. 자, 이제 싸워도 된다.
그러나 그 돌을 먼저 나에게 던져라.”
나이 어린 소년의 이 한 마디 말은 그의 인품과
성덕을 밝히는 중요한 말이다.
그는 학교의 규칙을 지키는데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였고, 그의 기도 정신은 당대의 어느
큰 성인 못지않았다. 가끔 돈보스코는 그의
과도한 열성을 탓하고 중지시킬 정도였다.
이럴 때마다 그는 “저는 큰일은 하지 못 합니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작은
일이라도 그것을 하렵니다.” 하며 대답하였다.
또 돈보스코가 그가 고행에 몰두하는 것을
다소 저지하였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신심은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밤
도미니코가 얇은 시트 한 장을 덮고 떨고 있는 것을
돈보스코가 발견하고, “왜, 이런 짓을 하느냐,
폐렴에 걸릴려고?” 하자, 그는
“우리 주님께서는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워계셔도
폐렴에 걸리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여
돈보스코를 놀라게 하였다.
또한 도미니코는 아침 미사 때부터 몇 시간 동안
기도에 빠져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는 이런 내밀한 기도 시간을 ‘나의 기분 전환’
이라고 불렀는데, 이때 그에게는 마치 하늘이
열리는 광경을 보는 듯 하다고 말하였다.
한 번은 그가 이런 기도 중에서 일종의 환시를
보았다. 황량한 들판에 수많은 군중들이 있고,
그곳으로 횃불을 들고 가는 어떤 사람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돈보스코에게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횃불은 영국 국민들에게 전해야할
가톨릭 신앙입니다.” 돈보스코는 이 사실을
당시의 교황 비오 9세(Pius IX)께 알렸고,
교황은 이 말을 듣고 영국에 대한 큰 배려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고 폐렴까지 겹치자
건강 회복을 위해 1857년 3월 1일 집으로 보내졌다.
그는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하며 수술의 고통을
견디어 냈지만, 3월 9일 아스티(Asti)의
만도니오(Mandonio)에서 1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하느님, 당신께 영원한 찬미를 드리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아! 나는 정말로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습니다"였다. 그의 시복은 1914년에
로마(Rome)에서 거행할 예정이었으나, 몇 가지
반대에 부딪혀서 돈보스코의 시성 후인
1950년 3월 5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54년 6월 12일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는데, 교회 역사상
가장 나이 어린 성인 가운데 한 명으로서
소년 성가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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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보사(Bosa)
축일 3월 9일
영국의 휘트비(Whitby)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자인 성 보사는 678년에 데이라
(Deira, 오늘날의 요크셔)의 주교가 되었다.
성 발프리두스(Walfridus, 10월 12일)가
국왕 에그프리드에 의해 축출될 때 그는
요크 교구의 분할을 반대하면서 국왕에게 항거하였다.
성 발프리두스가 686년에 다시 돌아왔으나
성 보사는 691년까지 교구를 관장하였다.
성 보사는 죽을 때까지 위대한 성덕으로 이름이
높았고, 재능 또한 뛰어나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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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토니오(Anthony)
축일 3월 9일
성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뤽세이유(Luxeuil)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었고, 프랑스 동부 프랑슈콩테(Franche-Comte)의
프로와드몽에서 은수자가 되어 높은 성덕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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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치리온(Cyrion)
성 칸디두스(Candidus)
축일 3월 9일
성 키리온(또는 치리온)과
성 칸디두스(Candidus)는 군인 순교자로
3월 10일에 기념하는 40명의 아르메니아(Armenia)
순교자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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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파치아노 또는 빠시안 (Pacian)
축일 3월 9일
성 파키아누스(Pacianus, 또는 파치아노)는
한때 결혼생활을 했던 사제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고위 시종이었던 덱스테르(Dexter)의
아버지이다. 그는 에스파냐 바르셀로나의 주교가
되었고, 장수하면서 많은 책을 저술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 대부분은 회개에 대한 권고,
세례 때의 강론 그리고 심프로니아누스
(Sympronianus)라는 귀족에게 보낸 편지인데,
특히 후자의 편지들은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이단을 반대하는 내용이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내 이름은 그리스도인이고,
나의 별명은 가톨릭이다.” 이 말은 이단이
판을 치던 시대에서 쉽게 나올 수 없었던 분위기를
참작하여 알아들어야 한다.
또 교회의 일치와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주님은 베드로에게만
‘너는 베드로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분에게서 일치가 나온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는 그의
성덕과 애덕 그리고 학문에 대해 칭송하는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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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프란치스카(Frances)
축일 3월 9일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
(Francisca Romana, 또는 프란체스카)는
부유한 귀족인 부시(Bussi)의 파올로(Paolo)와
자코벨라(Giacobella)의 딸로서 이탈리아
로마의 중심부인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13세 때에 폰치아노
(Ponziano)의 라우렌티우스(Laurentius)와
결혼하여 40여 년 동안 이상적인 결혼생활의
모범처럼 살았다. 그들은 자녀 일곱을 두었으나
둘은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금욕적인 기질이 강하였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표현하곤 하였다. 그래서 흑사병과 내란으로
인하여 사회가 혼란할 때, 그녀는 자선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녀는 시누이인 반노차(Vannozza)와 함께
로마의 걸인들을 위하여 조직적인 봉사활동을
전개하여 높은 성덕을 쌓아 나갔다.
그녀는 성 알렉시우스(Alexius)의 환시를
본 뒤로 앓고 있던 중병에서 회복되었고,
1400년 그녀의 아들인 요한 바티스타
(Giovanni Battista)가 태어날 때까지
산토 스피리투(Sancto Spiritu)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또다시 흑사병과 기근이 로마에 들이닥쳤을 때,
그녀는 이 재앙의 희생자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돕기 위하여 자신의 보석까지 팔았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에 재앙이 닥쳐왔다.
대립교황의 세력인 나폴리(Napoli)의
라디슬라스(Ladislas)가 로마를 점령했을 때,
여자들은 남아 있었으나 남편인 라우렌티우스는
피신해야 했다. 게다가 폰치아니(Ponziani) 성이
약탈당하고 캄파니아(Campania)의 집도 불타버렸다.
그리고 1413년의 또 다른 흑사병 때문에
아들 에반젤리스타(Evangelista)가 희생되자
그녀는 자기 집을 아예 병원으로 개조하였다.
불행은 계속 이어져 2년 후에는
그녀의 딸 아녜스(Agnes)마저 사망하였다.
1414년경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고,
남편의 추방령도 해제되어 돌아오고 재산도
되찾았지만 남편의 건강은 아주 나빴다.
프란치스카는 남편을 간호하는 한편 자선활동을
계속하면서 ‘마리아의 봉헌회’를 조직하였다.
이 회원들은 세속에서 살고 수도서원을 발하지
않으면서도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헌신하는
사람들로서 몬테 올리베토(Monte Oliveto)의
베네딕토회의 자매회로 성장하였다.
1436년에 남편이 죽자 그녀는 본격적으로
이 회에 뛰어들었고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로마에서 최후를 마칠 때까지 엄격한
생활과 더불어 자선활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녀는 수차례나 환시를 보았고,
탈혼에 빠졌으며, 치유의 기적을 행하였고,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그녀는 대이교의 종말을
예언하였다. 그녀는 1608년 교황 바오로 5세
(Paulus V)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이탈리아
가정주부들과 미망인들의 모범이며 자동차
운전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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