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에 구름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리도다”
어떤 이는 동방의 예토에서 껄껄대고 웃는데
어떤 이는 서방의 정토에서 땅 치고 우는구나
괴로움과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라
괴로움 가운데 즐거움, 즐거움 가운데 괴로움!
누라서 황금이 똥과 같다고 말했는가
라다크 레의 밤풍경. 하늘과 별과 산과 도시는 얼마나 친할까!
본칙 원문
擧 雲門示衆云 古佛與露柱相交 是第幾機 自代云 南山起雲北山下雨
고불(古佛) 오래된 불상
노주(露柱) 벽에 있는 기둥이 아닌 법당 안에 드러나 있는 둥근 기둥.
제기(第幾) 몇 번째.
기(機) 기교, 계기, 작용, 단계.
본칙 번역
이런 얘기가 있다.
운문선사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법당 안의)오래된 불상과 드러나 있는 기둥이 서로 어울리는데 이것이 몇 번째의 단계일까?”
(아무도 말이 없자) 스스로 (대중을) 대신하여 말씀하셨다.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리도다.”
강설
법당에 들어가면 불상도 있고 기둥도 있고 대들보도 있고 신중단도 있다. 참 잘 어울린다. 이 어울림이 어느 정도의 경지란 말인가?
운문스님은 참 자비롭다. 아니다. 참으로 무자비하다. 석가세존 꽃 드시고 가섭존자 미소 지음에 어떤 내통이 있었을까? 달마조사와 혜가스님 사이에는 또 어떤 밀약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사람들은 오늘도 여전히 석가세존이 어떻고 가섭존자가 어떠하며 달마조사가 어땠으며 혜가가 어쨌는지를 힘주어 말하고 주장한다. 그 모든 주장들이 한편의 코미디임을 알겠는가?
운문선사의 이 뜬금없는 질문에 모두 머리를 굴리느라고 바쁘고, 손가락 꼽아보느라고 분주하다. 그 찰나 간에 운문선사의 무자비한 보검이 목을 지나고 있음을 누가 알리요.
하지만 운문선사는 참 자비롭다. 오매불망 무명(無明)을 깨뜨려주시려고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다.
“남산에 구름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리네.”
이 자비로운 베풂을 아직도 분별하고 있다면 참으로 둔하고 둔하다. 궁금한가? 무슨 뜻인지를 구름과 비에게 물어보라.
송 원문
南山雲北山雨 四七二三面相覩
新羅國裏曾上堂 大唐國裏未打鼓
苦中樂樂中苦 誰道黃金如糞土
사칠(四七) 인도의 28대 조사님들.
이삼(二三) 중국의 여섯 조사님.
상당(上堂) 사찰의 최고 어른 스님이 법당에 올라 법문을 하거나 선문답을 하는 것.
타고(打鼓) 큰 절에서 대중을 운집시키는 방법으로 상황에 따라 목탁, 종, 북을 치게 된다. 여기서는 법회를 알리는 신호.
수도황금여분토(誰道黃金如糞土) 원오 극근선사의 ‘평창(評唱)’에 따르면 선월(禪月)스님의 ‘행로난(行路難: 길을 가는 어려움)’이라는 시에서 인용한 것. ‘행로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고해심인불측(山高海深人不測)이며 고왕금래전청벽(古往今來轉靑碧)이로다
산 높고 바다 깊어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데
예로부터 지금까지 푸름을 더해 가네.
천근경부막여교(淺近輕浮莫與交)하라 지비지해생형극(地卑只解生荊棘)이니라
천박하고 경솔한 자와는 사귀지 말게,
땅이 거칠면 가시덤불만 나는 것이라네.
수도황금여분토(誰道黃金如糞土)오 장이진여단소식(張耳陳餘斷消息)이로다
누가 황금이 똥과 같다고 말했는가,
장이와 진여는 소식이 끊겼다네.
행로난(行路難) 행로난(行路難)이여 군자간(君自看)하라
가는 길 어려움이여, 가는 길 어려움이여! 그대 스스로 살펴보라!
송 번역
남산의 구름, 북산의 비여!
인도 중국 모든 조사가 만나서 서로 보네.
신라 땅에서는 이미 법회를 하고 있는데,
당나라에서는 북도 치지 않았구나.
괴로움 가운데 즐거움, 즐거움 가운데 괴로움!
누라서 황금이 똥과 같다고 말했는가.
강설
운문선사의 고불(古佛)과 노주(露柱)의 관계에 대해 ‘남산의 구름 북산의 비’라고 하신 부분을 두고 설두선사는 “남산의 구름, 북산의 비여! 인도 중국 모든 조사가 만나서 서로 보네”라고 평하셨다.
남산에 구름 일고 북산에서 비오는 도리를 뭐라고 다시 덧붙여 표현하랴. 이보다 더 멋진 답을 누가 할 수 있으리오. 이는 오직 운문선사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이다. 모든 조사님들이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까? 궁금하다면 조사님들을 만나보라. 그러나 괜스레 남산 북산을 오가며 힘 빼는 일은 하지 말 것.
이어 설두노인네는 “신라 나라에서는 이미 법회중인데, 당나라에서는 북도 치지 않았구나”라고 하여 은근히 들어갈 곳을 열어 주셨다.
신라에서 행하는 법회와 당나라에서 대중을 모으는 것이 무슨 상관이람. 달마영감도 부질없이 먼 길을 오셨고, 혜가스님은 괜스레 팔을 잘랐구나. 비록 그것이 거룩하기는 하나 집안의 전통으로 삼을 필요 있겠는가. 그 모양새 따라 한다고 괴이한 모습으로 뒤뚱거리며 싸돌아다니지 말라.
설두노인네의 노파심으로 결국 이렇게 실토하고 말았다. “괴로움 가운데 즐거움, 즐거움 가운데 괴로움!”
어떤 이는 동방의 예토(穢土)에서 껄껄대고 웃는데, 어떤 이는 서방의 정토(淨土)에서 땅을 치고 우는구나. 괴로움과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라. 둘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설두선사는 끝으로 “누가 황금이 똥과 같다고 말했는가”라고 결론지었다.
이 구절은 주석에서 살폈듯이 장이(張耳)와 진여(陳餘)에 대한 얘기와 관계가 있다.
둘은 전국시대 조(趙)나라 사람이었다. 둘은 목이 달아나도 변치 않을 것 같은 친구지간이었다. 사람들은 둘의 관계에 비하면 황금도 오히려 똥과 같다고 말하곤 했다. 뒷날 정치적 격변 속에서 둘은 적이 되고 말았다. 장이는 유방을 섬겼고, 진여는 조왕을 옹립하여 대립하게 되었다. 진여는 장이를 무너뜨리고 조나라의 대왕(代王)이 되었다. 후에 장이가 한나라에 투항하여 조나라를 멸망시켰고, 진여를 죽이고 조나라의 왕에 봉해졌다. 둘의 관계는 결국 똥보다도 못한 관계로 끝나버린 것이다.
진리를 논함에는 범부의 정이나 의리나 관념 따위가 붙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떠나서 보면 구름과 비와 오래된 불상과 법당의 기둥이 제대로 보일 것이다. 선지식이 정을 베풀면 둘 다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