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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나본 사람들
제 1편 음악가
제 2편 철학자
제 3편 미술가
제 4편 문학가
제 5편 과학자
제 6편 정치가
제 7편 한국인
만든이 이 종 영
제1편
- 세계적인 음악가 -
작 곡 가
바로크 - 비발디 1678~1741 이탈리아 바흐 1685-1750 독일 헨델 1685~1759 독일(영국)
고 전 - 하이든 1732~1809 오스트리아 모차르트 1756~1791 오스트리아 베토벤 1770~1827 독일
낭 만 - 소팽 1810~1849 폴란드 바그너 1813~1883 독일 차이코프스키 1840~ 1893 러시아
현 대 - 드뷔시 1862~1918 프랑스 라벨 1875~1937 프랑스 스트라빈스키 1882~1971 러시아
성 악 가
테너 - 엘리코 카루소 1873~1921 이탈리아 루치아노 파바로티 1935~2007 이탈리아
소프라노 - 마리아 칼라스 1923~1977 미국(그리스人) 레나타 테발디 1922~2004 이탈리아
지 휘 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1908~1989 오스트리아
레너드 번스타인 1918~1990 미국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1867~1957 이탈리아
게오르그 솔티 1912~1997 헝가리(영국)
연 주 자
피아니스트 - 블라디미르 호로비치 1903~1989 우크라이나(미국)
바이올리니스트 - 니콜로 파가니니 1782~1840 이탈리아
첼리스트 - 로스트로포비치 1927~2007 아제르바이잔
첼리스트 - 미샤마이스키 1948~ 라트비아(미국)
범례 : 출생~사망 출생지(국적)
24인의 음악가
성 악 가
테 너 - 엔리코 카루소
Enrico Caruso 1873. 2. 25 ~ 1921. 8. 2 나폴리 출생
카루소는 7명 중 셋째였다.
그의 어머니는 18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11명이 일찍 죽고 7명만 남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노래를 좋아했던 카루소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악을 직업으로 선택하였다.
운 좋게 당시 최고의 성악교사였던
굴리엘모 베르지네(Gulielmo Vergine)를 알게 되어
체계적으로 성악발성을 배우고
또 지휘자이자 탁월한 성악코치였던
빈센초 롬바르디(Vincencho Rombardi)를 만나
벨리니의 오페라<청교도>에 출연하는 행운을 얻게 되고
지오다노의 신작오페라<페드라>에 출연하여 대성공을 거두면서
카루소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달린다
[라 보엠]의 미미 역으로 카루소와 열연했던
연상의 이탈리아 소프라노 지아케티는
1897년부터 1908년까지
카루소와 함께 두 아들을 낳았을 뿐 아니라 음악적 조언자였고
그의 정신적인 지주였으나 결국 카루소를 떠났다.
그 후 1918년 당시 25살인 도로시 파크 벤자민과
카루소는 결혼한다
이러한 천재도 병마를 이기지는 못했다.
그는 만성 늑막염과 폐렴을 앓고 있었다.
의사의 만류에도 늦둥이 딸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며
무대에 섰던 카루소는
1920년 12월 24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엘레비의 오페라 '유태여인'의 엘레아자르 역을 끝으로
공식적인 활동은 막을 내린다.
그 다음 해 여름 8월 2일 나폴리 Vesuvo 호텔에서
숨을 조용히 거두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48세였다.
옆구리에 재떨이를 차고 다닐 정도로 지독한 애연가였던
엔리코 카루소… 48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다 갔지만
그의 위대한 목소리는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
그의 최고의 장점은 경쾌한 벨칸토 레퍼토리에서
무거운 바그너나 베리스모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오페라의 주역을 다 부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레온카발로 [팔리아치]에서 카니오 역
푸치니 [서부의 아가씨]에서 딕 존슨 역
베르디 [아이다]에서 라다메스 역
베르디 [리골레토]에서 만토바 공작 역 ('여자의 마음' 열창)
테 너 - 루치아노 파바로티
Luciano pavarotti 1935. 10. 12 ~ 2007. 9. 6 이탈리아 모데나 출생
'쓰리테너 콘서트' - 1990년 로마 월드컵 전야제에서
카레라스, 도밍고, 파바로티 순으로
무대에 등장한 이들은
<토스카> <아를르의 여인> 등 오페라의 세계로 안내했고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세 명이 함께 부른
‘로망스 메들리’, ‘세계민요 메들리’, ‘할리우드 메들리’ 등
메들리 시리즈였다
아버지 페르난도는 빵 굽는 일을 했지만
뛰어난 테너 가수였다.
직업적인 성악가의 길을 가지는 못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아버지 덕분에 베니아미노 질리, 티토 스키파,
조반니 마르티넬리, 엔리코 카루소 같은
성악가들의 음반도 매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담배 제조공장의 노동자이기에
어머니의 젖을 먹지 못하고 유모에게 의지했고
노래 솜씨는 아버지를 닮고 활달하고 대담한 성격은
어머니를 닮았으니 그야말로 성악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아이였다.
파바로티의 학력은 고등학교 졸업으로 끝났다
좋은 음악선생인 아리고 폴라, 에토레 캄포갈리아니와의
만남은 최고의 행운이었다.
이런 만남보다도 더 중요한 성공 비결은 언젠가는
꿈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항상 밝게 생활하는 낙천적인 성격과
꾸준한 노력으로 인해 1961년 이탈리아의
레조 에밀리아에서 열린
‘아킬레 페리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하여
오페라 출연 계약을 하게 되고
4월 29일 레조 에밀리아 극장에서 <라 보엠>을 공연하면서
음악 인생은 본격적인 출발을 한다.
서른 살까지 성악가로서 자리를 잡으리란 계획은 이렇게 하여
가까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961년 9월 30일 결혼한 아두아 베로니는 파바로티와
35년을 함께한 오랜 동반자였다.
2003년 12월 개인비서였던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서른 다섯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두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악보를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이건 더 짧게’ ‘이건 더 길게’ ‘이곳에서는
날카롭게’ 등 각 음표를 설명하는
자기만의 기호를 사용해서 아리아의
가사와 함께 노트에 필기해두곤 했다.
세계적인 성악가로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 볼 수 있으나,
엔리코 카루소도 악보를 읽을 줄 몰랐다 한다.
절대 음감의 소유자였던 카루소나 파바로티에게는
악보보다 자신들의 귀와 목소리가 더 정확했기 때문이었을까?
2006년 2월 10일 이탈리아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른 것이 마지막 공연
그해 7월 파바로티는 뉴욕에서 악성 췌장암 수술을 받았고
이듬해 9월 6일 모데나의 자택에서 별세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역 <연대의 아가씨>의 토니오 역
<청교도>의 아르투로 역 <아이다>의 라다메스 역
라 보엠(1961년)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몽유병의 아가씨 투란도트
소프라노 - 마리아 칼라스
Maria callas 1923. 12. 2 ~ 1977. 9. 16 미국 뉴욕 출생
그리스인 인데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난 것은 신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보려던 평범한 약사 아버지의 소망 때문
고지식하고 서민적인 칼라스 부친에게 고상한 예술 취향과
귀족적 허영심있는 아내 에반겔리아는 처음부터 벅찬 상대였다.
음악적 재능은 외가 쪽의 대물림, 유행가나 민요를 즐겨 불렀던
남편과 싸워가며 풍족하지 못한 살림 속에서도 애써
클래식 음악 교육을 시킨 것이 바로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남편과 이혼하고 딸들을 데리고 아테네로 돌아왔고,
인생을 결정해준 스승 엘비라 데 이달고를 만난다.
이달고는 칼라스에게 성악적 기교만 가르친 게 아니라
성악의 철학과 예술의 숭고함을 가르쳤고,
독특한 개성을 계발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
무대 위에서 여신처럼 걷는 법, 작은 손동작 하나로
기적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법도 역시 이 스승에게서 배운 것
스물여섯 살에 사업가 지오반니 파티스타 메네기니와
결혼하면서
본격적인 칼라스의 시대가 열렸다.
행운은 명지휘자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과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와의 만남이었다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와의
열애와 파경 등 삶의 광휘와 굴곡으로
끊임없이 매스컴의 표적이 되었다.
1958년에 칼라스의 파리 입성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파리 시민들은 그로부터 20년 만인 1977년,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약물중독과 우울증으로
53세에 쓸쓸히 세상을 떠난 세기의 프리마 돈나를
꽃으로 뒤덮어 떠나보냈다.
사인은 심장마비. 그러나 자살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한줌 재로 변한 칼라스는 그리도 좋아하던
고향 바다 에게 해에 뿌려졌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영원히 남아
지금도 온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특별한 감동으로 적신다.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Vissi d'arte)
1953년 사바타 지휘,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조르다노의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 – 돌아가신 어머니(La mamma morta)
1955년 툴리오 세라핀 지휘, 필하모니아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 사라의 장밋빛 날개(D'amor sull'ali rosee)
1957년 카라얀 지휘,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 방금 들린 그 목소리(Una voce poco fa)
1958년 알체오 갈리에라 지휘, 필하모니아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 – 정결한 여신(Casta Diva)
1961년 툴리오 세라핀 지휘,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 사랑은 제멋대로인 새(L'amour est un oiseau rebelle(Habanera))
조르주 프레트르 지휘
소프라노 - 레나타 테발디
Renata Tebaldi 1922.2.1 ~ 2004.12.19. 이탈리아 마르케주 페자로 출생
세 살때에 소아마비에 걸려 밖에서
뛰어 놀지 못하고 집안에만 있어야 했다.
행동이 불편했던 테발디는 대신 음악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음악적 소질을 발견한 그의 부모는
10대의 테발디를 파르마 콘서바토리에 입학시켰다.
테발디는 이곳에서 전설적인
에토레 캄포갈리아니(Ettore Capmpogagliani)로부터
3년 동안 성악 수업을 받았고
다시 3년동안 소프라노 카르멘 멜리스(Carmen Melis)에게서
본격 성악 공부를 했다.
테발디는 1944년 22세 때에 로비고에서
보이토의 메피스토렐레(Mefistofele)에서
주역인 엘레나(트로이의 헬렌)역을 맡음으로서
오페라에 첫 데뷔하였다.
1945년 스칼라극장에서 조아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의
《라보엠 La Bohè me》의 미미 역을 불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46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에게
미성을 인정받아
스칼라극장의 전후 재개관 기념으로 열린 콘서트에서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레퀴엠 Requiem》 독창자로 발탁되었다.
이후 1954년까지 스칼라극장과
계약하고 수많은 곡을 노래했다.
1954년 이후에는 나폴리의 산카를로극장, 런던 코번트가든왕립오페라극장,
샌프란시스코와 시카고의 극장,
메트로폴리탄오페라단 등 일류 극장의 오페라 멤버로 활약했다.
30년 동안 대표적인 이탈리아 리릭 소프라노로 이름을 날렸으며,
가장 극찬을 받은 것은 특유의 유연함과
호소력 있는 감정 표현이었다.
칼라스와 테발디의 팬 층이 유난히
라이벌 의식이 강한데 이 라이벌 구도는
칼라스나 테발디라는
한 명의 가수에 대한 호오나 우열이 아니라,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공연을 선호하느냐, 아니면 파격적으로
재해석한 공연을 선호하느냐에 따라.....
1973년 무대에서 은퇴한 이후 대중 앞에
서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다가
2004년 12월 19일 이탈리아 산 마리노 자택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55년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초청되어 〈오텔로〉의 디즈데모나 역
대표적인 배역으로 라 보엠의 '미미'
나비 부인의 '나비부인(쵸쵸상)'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종영 (joyolee) 드림
첫댓글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