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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세계에로의 초대
* 철학이라는 말의 뜻이 뭘까요?
아마도 ‘철학’이라는 말을 안 들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철학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 사회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 사학, 법학, 경제학, 수학, 공학, 의학이라는 말 만큼 쉽게 다가오지 않는 말이 바로 철학이라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다른 학문 이름도 마찬가지이지만, ‘철학’이라는 말은 일본 학자들이 서양말을 번역하면서 한자로 조어(造語)한 말입니다. 다른 학문의 경우에는 한자의 뜻을 풀이하면 각 학문이 무엇을 연구대상으로 하는지가 어느 정도 와 닿지만, 철학의 경우는 ‘밝을 철(哲)’자를 풀이하더라도 그 탐구대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일본 학자들이 고심해서 번역했는데도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일본 학자들이 철학(哲學)이라고 번역한 서양말의 의미가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철학이라고 번역된 서양말은 바로 그리스어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 알파벳 음역으로는 philosophia)입니다. 중국에서는 처음에 필로소피아를 ‘비룡소비아’(飛龍少飛阿)라는 한자로 음역(音譯)하였다고 합니다. ‘飛龍少飛阿’를 중국어로 읽으면 그리스어 필로소피아와 거의 비슷하게 발음됩니다. 우리나라의 문헌에서도 중국식 음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북 고령 출신의 조선 말 유학자였던 성와(省窩) 이인재(李寅梓, 1870~1929)가 1912년에 집필한 문집 古代希臘哲學攷辨(고대희랍철학고변)을 보면 ‘飛龍少飛阿’라는 글자가 나옵니다. 이인재는 당시 중국에서 들어온 철학책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식 음역인 ‘飛龍少飛阿’라는 말도 사용하면서 고대희랍철학고변이라는 책 제목에서는 일본식 한자 번역인 ‘철학’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일본식 한자 번역어인 ‘哲學’이라는 말이 이미 중국으로도 흘러들어갔는데, 중국에서도 ‘飛龍少飛阿’라고 음역된 말보다 ‘철학’이라는 말이 훨씬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식 한자 번역인 ‘哲學’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그리스어 ‘필로소피아’에로 되돌아가겠습니다. 필로소피아는 ‘필리아’(φιλία, 알파벳 음역으로는 philia)라는 말과 ‘소피아’(σοφία, 알파벳 음역으로는 sophia)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어가 그렇듯이, ‘소피아’라는 말도 현대어로는 단순하게 번역되지 않는 말입니다. 소피아는 ‘앎’(知)과 관련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소피아는 어떤 종류의 앎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 따르면, 가장 고귀한 것들에 대한 앎(가령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불변적인 원인이나 우주의 필연적인 질서에 대해서 아는 것)을 소피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소피아를 추구하는 데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소피아 그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소피아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필로소피아’라는 것입니다.
방금 그리스어 필로소피아를 풀이했습니다만, 약간 어려울 것 같아서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소피아가 고귀한 것들에 대한 앎이라고 했는데, 고귀한 것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불변적인 원인이나 우주의 필연적인 질서 이외에도 보편타당한 도덕적 가치, 말과 글의 논리적 질서, 앎의 의미 및 가치, 거룩함, 아름다움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의 영역에는 형이상학, 윤리학, 논리학, 인식론, 종교철학, 미학 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귀한 것들에 대한 앎은 다른 말로 진리로서의 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지식으로서의 앎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진리로서의 앎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불변적인 데 반하여 인간은 가변적이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변적인 인간이 불변적 진리를 소유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 진리로서의 앎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진리로서의 앎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이때의 사랑이 바로 그리스어로 ‘필리아’입니다. 진리로서의 앎을 사랑한다는 말은 친구를 사랑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친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친구를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진리로서의 앎을 사랑하는 사람도 진리를 통해서 뭔가 이득을 얻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로서의 앎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 그 자체를 그리워하고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진리로서의 앎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없이 진리에 가까이 가고자 노력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어 필로소피아의 어원적 의미는 고귀한 것들에 대한 앎 즉 진리로서의 앎을 진리 그 자체 때문에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필로소피아의 탐구대상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원리, 우주의 필연적인 질서, 보편타당한 도덕적 가치, 말과 글의 논리적 질서, 앎의 의미 및 가치, 거룩함, 아름다움 등입니다. 둘째, 필로소피아의 정신은 그러한 것들에 대한 앎을 지식처럼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그리스어 필로소피아를 한자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학문들과는 달리 필로소피아의 탐구대상이 너무 포괄적일 뿐만 아니라 초경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 학자들도 고심 끝에 ‘哲學’이라는 한자를 조어해 낸 것입니다. ‘哲’이라는 한자는 도리나 사리에 밝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필로소피아의 포괄적이고 초경험적인 탐구대상을 ‘哲’이라는 한자에 담아 보고자 했던 일본 학자들의 노고를 인정해야 합니다.
한편 서양 영어권에서는 일찍부터 그리스어 ‘소피아’를 단순하게 ‘wisdom’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어 ‘필로소피아’를 어원적으로 ‘지혜 사랑’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이런 풀이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어원적 의미를 다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또 우리나라 철학의 1세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경북대학교 철학과에서 걸출한 후학들을 양성했던 하기락(1912~1997) 교수는 1970년대에 ‘철학’이라는 말 대신에 ‘애지학’(愛知學)이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약간의 논의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야무야되고 말았습니다. ‘애지학’이라는 말도 필로소피아의 어원적 의미에 대한 단순한 풀이에 불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본 학자들의 의역인 ‘철학’이라는 말을 따라가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기락 교수 자신은 일제강점기였던 1940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인물입니다.
* 동굴의 비유를 아시나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B.C. 427~346)은 자신의 대화록 국가편 제7권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하여 이데아의 존재를 입증해 보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약간 각색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사지(四肢)와 목을 결박당하여 동굴 벽만 쳐다보도록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굴 입구에서 새가 날아가면, 동굴 벽에 새의 그림자가 생깁니다. 다른 동물이 동굴 입구를 지나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갇혀 있는 사람들은 한 번도 새의 실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새의 그림자를 진짜 새라고 인식합니다. 어느 날 갇혀 있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을 동굴 밖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처음에는 눈이 부시다는 핑계로 안 나오려고 떼를 씁니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데리고 나와서 새의 실물을 보게 합니다. 처음에는 새의 실물을 인정하지 않고 동굴 벽에서 보았던 그림자가 진짜 새라고 우깁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굴 벽에서 보았던 것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그 그림자를 생기게 했던 실물이 진짜 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사람은 너무나 감격하여 이 사실을 동굴 안에 갇혀 있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하여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동굴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 사람을 정신 나간 사람으로 간주하여 사정없이 마구 때려 죽였습니다.
이 동굴의 비유에는 중요한 몇 가지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우선 그림자와 실물의 관계입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태어나면서 곧 바로 동굴 안에 갇혔던 사람들이 한 번도 실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림자를 마치 실물인 것처럼 생각하듯이, 우리도 태어나면서 한 번도 이데아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데아의 그림자인 경험적 사물을 마치 진실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은 육체를 부여받기 전에는, 즉 우리가 탄생하기 전에는 이데아를 알고 있었는데, 육체라는 감옥에 갇히면서 알고 있었던 이데아의 세계를 완전히 망각하게 되었다고 플라톤은 말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이러한 정황을 우리의 정신이 레테 강을 건너 온 것에 비유합니다. 레테(Lethe) 강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강입니다. 누구라도 이 강의 물을 마시면 살아 있을 때의 모든 기억을 상실하게 된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진리’를 그리스어로 ‘알레테이아’(aletheia)라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스어에서 ‘α-’는 부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망각했던 것을 다시 상기(想起)해 내면 그것이 곧 진리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진리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에로의 여정(旅程)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굴 밖으로 나와 실물을 본 사람처럼, 우리도 경험적인 현상세계에서 벗어나 이데아의 세계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잠시 ‘이데아’라는 그리스어의 어원적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어 동사에 ‘~을 보다’를 의미하는 ‘horao’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horao의 과거형은 ‘eidon’(~을 보았다)입니다. 이 eidon의 부정사가 바로 ‘idein’(이미 보았던 것)입니다. 이 idein으로부터 ‘idea’(이데아)라는 명사가 생겨난 것입니다. 따라서 어원적으로 이데아는 ‘우리가 탄생하기 전에, 즉 우리의 정신이 육체를 부여받기 전에, 정신이 이미 보아서 알고 있었던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플라톤도 이러한 의미로 이데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데아는 감각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정신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데 육체가 끊임없이 방해합니다. 그래서 육체를 가지고 있는 현실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이데아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험난한 여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동굴의 비유는, 동굴 밖으로 나온 사람이 처음에는 눈이 부시다는 핑계로 안 나오려고 했듯이, 우리 인간에게도 경험적 현상 세계에 안주하려는 심리적 경향성이 있다는 것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리적 경향성 때문에 인간은 감각의 눈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이데아의 세계에로 나아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고 플라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굴의 비유는, 동굴 밖으로 나온 사람이 처음에는 새의 실물을 인정하지 않고 동굴 벽에서 보았던 그림자가 진짜 새라고 우겼듯이, 우리 인간도 이데아 세계의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적 경향성이 있다는 것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동굴 밖으로 나온 사람이 시간이 흐르면서 실물의 존재를 인정했듯이, 우리 인간도 교육을 통해서 서서히 이데아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고 플라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굴의 비유가 암시하고 있는 것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이데아 세계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데아 세계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데아의 세계는 경험의 세계를 넘어서 있는 형이상학적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와 경험적 세계의 관계를 실물과 그림자의 관계에 비유해서 간접적으로 이데아 세계가 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특히 실물이 없으면 그림자도 생기지 않듯이, 이데아의 세계가 없었다면 경험적 세계도 존재할 수 없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데아의 세계는 존재론적으로 경험적 세계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습니다.
동굴 벽에 비친 것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가 두들겨 맞아 죽은 사람은 소크라테스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스승으로서 젊은 제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함께 진리를 추구했으나, 당시 정부로부터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나서 독배를 마시고 죽었던 인물입니다. 실물을 보고 감격하여 동굴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고 했던 사람과, 다른 사람보다 한발 먼저 진리에 접근하고 제자들이 진리에 다가가도록 도와준 소크라테스의 운명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동굴의 비유는 비유 중에서도 너무나 절묘한 비유입니다.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입증하고자 했던 이데아의 세계는 오늘날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름이 ‘이상적(理想的) 세계’입니다. 현실주의자들에게는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이 바보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논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실물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듯이 이상이 없다면 현실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상의 세계는 현실 세계의 토대이자 현실 세계가 지향해야 할 목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심리학이나 사회학에서도 ‘이상형’(理想型)이라는 말을 씁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를 은연중에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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