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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염송] 중에서.. (97편)
20210202
반야다라존자가 동인도국왕의 공양 청장에 갔더니 왕이 묻되 "다른 대사들은 모두가 경을 읽는데 스님만은 어째서 경을 읽지 않습니까?" 하니 존자가 말하되 "빈도는 숨을 내쉴 때에 뭇 인연에 간섭 되지 않고, 숨을 들이쉴 때에 5음과 18계에 머물지 않나니 항상 이와 같은 백 천권의 경을 읽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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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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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뭣고]의 곁가지 김태현입니다. (방긋)
한 주일 잘 보내셨지요..(방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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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내용은 선/학(禪學)에 관계되는 내용이 나왔네요.
선학(禪學)이란
선(禪)은 본성(불성/성령/마음)을 깨닫고 증득하기 위해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말한답니다.
학(學)은 부처님 경전 말씀을 학문적으로 배우는 것을 말한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놓고 이야기해보면..
동인도국왕이 반야다라존자에게..
"당신은 왜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 거기서 그러고 있느냐?"
하니까
"나는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수행인 호흡관을 통해 모든 인연 즉 모든 망상과 번뇌에 간섭을 받지 않고, 숨을 들이쉴 때에는 육체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이와 같이 함으로 해서 백 천권의 경전들을 읽는다." (수행을 뜻함)
라는 뜻이랍니다.
쉽게 말해
나는 책 대신 직접 경전 속의 내용들을 수행을 통해 얻는다 라는 뜻이랍니다.
자신은 경전 대신 알아차림을 통해 수많은 내용들을 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자신은 남들이 보고 기록해 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면서 배운다는 것입니다.
(초보자분들은 불교에서 흔히 오온, 오음, 오근, 십팔계 같은 단어들이 나오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몸으로 느끼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된답니다.)
ㅡ
음..
흔히 불교계에서 선(禪)이 먼저냐 학(學)이 먼저냐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둘 다 중요하지요.
왜냐하면 방법을 배워야 할 수 있으니까요. (학/學)
매일 배우기만 하고 하지를 않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라 할 수도 있는데요.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근기(根氣)가 모두 다르거든요.
근기가 익으려면 몇십 생을 더 거쳐야 하는데요.
여러분들은 이에 비하면 수준이 상당히 높은 거랍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수십 생을 거쳐서 이 법과 인연이 있었을 거니까요.
안 그러면 이런 글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거든요. (진실)
그 이유는 이 법은 당대(禪脈)에 단 한 번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이를 악물고 이루는 분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런 분들은 드물거든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우리 모두는 그 길로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랍니다.
이 내용은 여러 경전들 속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는 내용인데요.
대표적으로 법화경의 방편품(方便品)과 약초유품(藥草喩品) 그리고 선불교의 십우도(十牛圖)의 탱화(幀畵)에도 잘 묘사되어 있는데요.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절 인연에 따라 수도 없는 생을 통해 이 법을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수행 시작서부터 깨닫고 증득하는 그 순간까지..
그리고 완전한 해탈을 이룬 후 부처가 되기까지..
우리는 각자의 시절 인연에 따라 수도 없는 생을 이어오면서 조금씩 그 자리로 올라서고 있답니다.
아직은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깨닫고 보면 선명히 알 수 있는 것들인데요.
여러분들 또한 수도 없는 생(生)을 반복하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보시면 된답니다.
이런 이야기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들이라 제 자신도 잘 하지 않는 내용인데요.
괜히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도 싫고 부처님 또한 사리불에게 당부한 내용도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잘 안 하는 이야기들이지만 여러분들이 믿거나 말거나 오늘 본문 내용과도 연관이 있어 잠깐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저 또한 사람으로 태어나기 훨씬 이전생(生) 부터의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답니다.
깨닫고 세상을 보면..
지금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축생으로부터 사람 몸을 받고 올라오는 사람들도 많고..
그 외에 것들로 있다가 올라오는 사람들도 많고
사람에서 사람으로 무수히 많은 억겁을 반복해서 있다가 다시 올라오는 사람들도 많답니다.
물론 사람 보다 훨씬 높은 단계의 존재들도 무수히 많이 있지만
그래도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그야말로 큰 행운이랍니다.
왜냐하면
이 법을 배우고 익히는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수십 억겁 동안 이 법을 모르고 생활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지요.
어떤 사람은 좋은 시절 인연으로 금방 접하게 되는 경우도 있답니다.
,
사람으로 태어나
어떤 사람은 아직 이 법을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후 몇십 겁을 돌고 돌아 이법을 만나는 경우도 많고,
이 법을 만났다 하더라도 외면하다가 돌아가신 후 또 몇십 겁을 돌고 돌아 이 법을 다시 만나 처음으로 이 공부를 시작하시는 분들도 많고,
이 법을 다시 만나 처음으로 공부하신다 하더라도 경전 공부만 하다가 수행의 길로 못 들어서고 돌아가신 후 몇십 겁을 다시 돌고 돌아 이법을 다시 만나 겨우 수행에 취미를 느끼고 수행 길로 들어서는 경우도 많고,
이 법을 다시 만나 수행을 한다 하더라도 길 잃은 외 아들처럼 한참을 헤매다가 돌아가신 후 몇십 겁을 또 돌고 돌아 겨우 자기 집을 찾게 되는 사람들도 많고,
이 법을 다시 만나 다시 자기 집을 찾는다 해도 또 몇십 겁을 계속 수행을 하면서 돌고 돌아 종국에는 완전한 열반의 세계에 들어서는 경우인데요.
오늘 본문 내용처럼
경전을 열심히 읽고 배우는데 힘을 쓰는 단계만 해도 오랜 세월 이 공부를 해오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단계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을 대할 때에 어떤 사람을 대하든 이 사람은 앞으로 수십 억겁 후에는 반드시 부처님이 되실 거라는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대는 이미 부처이기 때문에 그렇답니다.
여러분들 또한 분명히 부처님들이시고요..
자기가 부처라는 것을 모르는 것뿐이지요.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랍니다.
예수님도 이 내용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어린 자식"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다만 아직은 육체의 허물을 덜 벗었기 때문에 그렇지..
분명한 사실은 누구나 먼 훗날에는 분명히 결단코 부처님들이 되실 거랍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어떻게 함부로 대할 수 있을까요.
물론 지금 막 축생의 몸을 벗고 사람의 몸으로 갈아입고 태어나신 분들도 많이 있지만
이러한 분들 또한 이 법을 접하기 전까지는 사람 몸만 입고 있을 뿐 아직은 축생의 습생을 못 버리고 주의 사람들을 괴롭히고, 욕하고, 때리고, 죽이고는 하지만..
이 또한 아주 먼 미래에는 반드시 부처님이 되실 분들이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답니다.
분명한 사실은 언제인가는 누구나 시절 인연이 도래(到來) 하면 이법을 꼭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인연이 안되어 이 법을 못 만나고
혹
만난다 하더라도 이해를 못 하고 외면을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분들도 이것이 씨앗이 되어 좋은 시절 인연을 만나면 연화 꽃을 피우게 되어 있답니다.
왜냐하면 모든 씨앗(마음)은 다르지 않거든요.
이러한 내용들은 깨닫고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들인데요.
지금은 비록 천도재나 제사나 무속인으로 밥을 먹고 살거나 이들을 추종하고 쫓아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이런 분들 또한 좋은 시절 인연을 만나면 분명히 발심을 하고 이법을 성취하고자 노력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시절 인연이란 꼭 지금 시대를 말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이 또한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것만 보아도 몇천억 겁의 시절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절에 불과하지요.
먼 훗날 지금 살고 있는 이 지구가 가루가 되어 분해가 되더라도 또 다른 환경이 다시 조성이 되고 그 새롭게 조성된 장소에서 다시 새로운 육신을 받아 이 법을 다시 만나게 된답니다.
왜냐하면
태초(太初) 이전부터 [본성]은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답니다.
여러분들은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깨닫고 보면 분명한 사실이랍니다.
ㅡ
오늘 본문 내용은 수행자들의 공부 형태를 나타내는 가르침이랍니다.
특히 출가자 즉 스님들의 공부 형태를 나타내는 가르침이지요.
제가 주제넘게 스님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뭐 합니다만..
스님이 되는 목적을 단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번 생에 부처가 되고야 말겠다는..
즉
이번 생에 끝장을 보려고 스님이 되신 분들이랍니다.
그래서 젊음과 혹은 가족과 가정을 버리고 이번 생은 포기를 하다시피 출가를 하신 분들이랍니다.
어떤 사정으로 출가를 하셨든..
오늘 본문 내용의 반야다라존자 처럼 어떡해서든지 이번 생에는 결판을 보려고 출가를 하신 분들이랍니다.
모든 스님들은 이 아까운 기회를 허비하지 말아야 한답니다.
이번 생에 못 깨닫는다 하더라도 이번 기회에 수행의 기틀을 마련해 두지 않으시면 분명히 결단코 지금보다 더 큰 고통과 괴로움에 처하게 될 공산이 크답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본성(불성/성령/마음)은 한 곳으로 모두 집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답니다.
본성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거든요..
중생들의 마음은 마음에 비추어지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늘 불안정하답니다.
왜냐하면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잡생각들이 너무 맗고 그로 인해 늘 끌려다니거든요.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던가요.?
과거 생에는 또 어땠을까요.?
다음 생을 받는다 해도 또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의 과거 생은 지금의 나를 보면 잘 잘 알 수가 있답니다.
이 내용은 저의 말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이랍니다.
,
제자가 묻습니다.
"저의 과거를 알고 싶다." 고..
부처님이 답변을 해줍니다.
"지금의 너를 보면 과가 생을 알 수 있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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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스님으로 출가를 하신 거라면 이번 기회에 결판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세속에 물들지 마시고..
힘은 들겠지만..
오늘 본문 내용의 반야다라존자처럼 앉은 자리에서 백 천권의 경전을 보시길 기원드려 본답니다.
부처님의 1차 제자들은 스님들이랍니다.
스님들이 경전 공부를 멀리하고 수행을 멀리하고 딴 곳으로 눈이 가 있다면..
가정도 포기하고 청춘도 포기하고 출가를 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 내용처럼 스님들이 할 일은 [경전 공부]와 [수행] 외에는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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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공부와 수행을 열심히 하시는 스님들도 뒷방에만 있을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와서 보여주고 들려주어야 한답니다.
이것을 보고 젊은 재가자들도 스님들을 따르는 것이고요..
그 이유는 중생들의 근기(根氣)는 보고 듣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렇답니다.
오늘 본문 내용도 보십시오.
동인도국왕도 눈에 보이는 경전 공부가 전부인 줄 알고 있지요.
반야다라존자가 그런 왕에게 지금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계시지 않은가요.
어쩔 수 없어요.
중생들에게는 보여주고 들려줘야 그나마 흥미를 느끼고 해보니까요.
스님들이 재가자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주느냐에 따라 한국 불교의 판도도 달라진다는 뜻이랍니다.
스님들이 경전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면 재가자들도 경전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일 것이요.
스님들이 수행 정진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면 재가자들도 수행을 열심히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일 것이요.
스님들이 천도재나 제사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면 재가자들도 천도제나 제사를 열심히 받고자 하는 노인들만 모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인들은 죽을 날짜가 얼마 안 남았거든요.
불교가
노인들의 입맛에만 맞춰져 있다면 노인들만 모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이것은 비판의 목소리가 아니랍니다.
미래의 부처님들에게 제가 어찌 비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스님은 아니지만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인데요.
아무쪼록 스님들이 바로 서야 부처님의 말씀도 바로 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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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내용의 가르침은..
매일 경전을 읽고 외워서 경전에 관해서는 박사급이지만 실제로는 경전대로 해보지를 안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제로 수행을 하는 것인데 경전 공부만 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서는 경허선사를 예로 들 수 있는데요.
경허선사도 경전에 관해서는 박사급 이였지요.
그러나 그러면 뭐하겠습니까?
마음은 범부와 다를 바가 없는데요.
결국은 그것을 깨닫고 모든 책들을 버리고 수행을 통해 크게 깨닫습니다.
그 후로
오늘날 한국불교에 끊켰던 선맥(禪脈)을 다시 이어 놓는 큰일을 하셨는데요.
경허선사처럼 부처님 말씀들(경전들)은 직접 해보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답니다.
ㅡ
학(學)은 부처님이 알려주는 방법과 결과들을 기록해둔 내용들이랍니다.
선(禪)은 직접 자신이 해 봄으로 해서 결과를 증득하는 것이고요..
ㅡ
끝으로 오늘 내용을 가지고 [자동차 운전수]를 비유로 예를 들어 설명하고 끝을 내겠습니다..
참고로 이 자동차는 혼자밖에 못 타는 자동차랍니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가 생겼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먼저 운전을 배워야겠지요.
(이것이 '학/學'입니다.)
운전을 배웠으면 자동차를 몰고서 가고 싶은 곳으로 가야겠지요.
강원도도 가고, 경상도도 가보고, 전라도, 충청도, 제주도 등을 차를 몰고서 여행을 하면서 구경도 하고 경험을 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선/禪'에 해당합니다. 마음자리로 과거도 비추어 보고, 미래도 비추어 보고, 우주 밖으로도 비추어 보고, 몸도 비추어 보고, 이렇게 "삼천 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ㅡ
이렇게 여러 곳을 가보고 경험한 내용들을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셨고 그 이야기들을 기록에 남긴 것이 경전 속 내용들이고 이것이 학(學)에 해당한답니다.
이렇게 적어놓은 글들을 후대 사람들이 그 글을 보고 공부하는 것이 학(學) 이지요..
ㅡ
쉽게 말해
학(學)은 본인이 자동차도 없고 직접 자동차를 몰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보고 경험한 내용들을 간접적으로 배우는 것을 말한답니다.
그리고
선(禪)은 자신이 직접 차를 몰고 가서 직접 보고 경험한 것들을 체험하고 증득하는 것을 말한답니다.
ㅡ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學)을 모르면..
즉 운전 방법을 안 배우면 자동차를 몰수 없겠지요.
그래서 학(學)도 중요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일 자동차 학원 안에서만 좌회전 우회전하면서 폼만 잡고 있다면..
이것을 소승(小乘)이라 할 수 있답니다..
원효대사처럼 자동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 크게 보여주는 것을 대승(大乘)이라 할 수 있답니다.
여기서 소승(小乘)이란 작을 마음을 쓰는 것을 뜻하는 것이요.
여기서 대승(大乘)이란 큰마음을 쓰는 것을 뜻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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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자분들은..
운전 방법을 알았으면 직접 해봐야 자기 것이 되겠지요.
열심히 연습해서 운전 방법을 깨닫고 내가 밖으로 나가서도 사고 없이 운전을 잘 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
그래서 학(學)과 선(禪)은 둘 다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ㅡ
그리고 또
깨닫고 자동차를 운전을 해서 여러 곳을 가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길도 모르고 어느 곳을 가야 할지 감이 안 잡힐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럴 때 이미 앞서가본 사람이 있다면 아주 좋겠지요?
이럴 때 부처님이 이미 가보고 기록해 두신 경전 속 내용들을 참고하시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학(學)에 해당한다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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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모는 방법을 모르시는 분들은 자동차 모든 법을 경전을 통해 배우고
이미 깨닫고 배우신 분들은 어디를 비추어보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경전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지요.
이렇게 이미 앞서 자동차를 몰고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한 사람들의 정보들을 참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길을 잘 가고 있는지? 등을
부처님이나 유마거사 같은 분들의 기록과 맞추어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보들이 그대로 부처님 경전들 속에 기록되어 있답니다.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 한다 해도 무작정 길을 나서는 것보다 미리 가본 사람들의 내용들을 참고해서 가 본다면 시간과 노력을 대폭 줄일 수 있겠지요.
제 경우도 항상 경전과 비교를 해 보면서 저의 공부를 해나가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것이 아주 재미가 있답니다..
정말이랍니다..^^
저도 아직은 많은 것들이 부족하지만 지금까지는 재미있게 해왔는데요..
솔직히 앞으로 이 재미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말씀과 척" 척" 맞아들어가거든요.
이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점은..
세상 속에서 공부할 것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인데요.
그 이유는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이 세상 속에는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
이 공부는..
모르면 방법을 배울 수밖에 없답니다.
(※)
그런데 문제는 매일 배우고만 있어서는 안 된답니다.
맨날 자동차 학원 안에서만 좌회전 우회전하면서 폼 잡아봐야 뭐 하겠습니까?
어느 정도 배웠으면 사고가 나더라도 자동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야겠지요.
선방이나 정해진 장소에서만 좌선이나 수행을 해서는 발전이 없답니다.
유마거사가 사리불에게 충고를 하는 대목이 나중에 (부록 2편)에도 나올 건데요..
유마거사 말씀처럼 진짜 공부는 세상밖에 있답니다.
유마거사 말씀처럼 행주좌와(行住坐臥)를 행하십시오.
세상살이를 하다 보면 별의별 일들이 많잖아요.
여러 사람들도 만날 것이고..
여러 일들도 하게 될 것이고..
여러 일들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자동차를 타고 여러 곳을 다니다 보면 빵꾸가 날 때도 있고, 기름이 떨어질 때도 있고, 심하면 큰 사고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수행도 마찬가지랍니다.
세상 속에서 이리저리 부닥치고 휩쓸리다 보면
별의별 일들로 내 마음에서 일어나고 살아지는 것들이 모두 공부 거리랍니다.
운전을 하면서 모르는 길이 나오면 지도를 보거나 네비를 켜야 하듯이..
경전을 통해 내 마음을 비교해 보면서 지금 내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등이 모두 공부거리랍니다.
부처님이 가봤던 먼 길들을 떠나기 전에 미리 지도를 보고 방향을 잡을 수 있는 나침판 등이 있으면 매우 편하겠지요.
그 지도와 나침판이 바로 부처님의 말씀과 여러분들의 마음(불성/성령/본성)이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나침판이 깨끗이 잘 닦여 있어야 제대로 작동을 하는 것이 문제랍니다.
나침판 주의에 자석(생각) 등이 있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길 안내를 하거든요.
사람들은 생각을 하고 집착을 하게 되면 자석처럼 그쪽으로 확"~ 끌려 들어가거든요.
이것이 큰 문제랍니다.
생각으로 인해 눈덩이처럼 집착이 커지고 그 집착으로 인해 자석처럼 끈적거리면서 본성의 알아차림을 방해한답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보셔야 한다는 것이고요.
마음만 제대로 비우고 버릴 수만 있다면 생각은 자동적으로 힘을 못 쓰거든요..
왜냐하면 생각도 현상에 불과하거든요.
사념처에 나오는 그 현상을 말한답니다.
쉽게 말해
투수가 공을 던지는데 받아줄 포수가 없다면 어찌 되겠어요.^^~
ㅡ
여기서 부처님 말씀이 지도라 한다면,
나침판은 여러분들의 마음이랍니다.
여기서 나침판을 방해하는 자석이 여러분들의 생각과 집착이라면..
여기서 여러분들의 생각과 집착이 지도를 보고도 갈 길을 흐리게 하는 요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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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갈까? 저리 갈까? 생각할 필요가 없답니다.
생각은 자석과 같아서 집착에도 붙으려 하고, 욕심에도 붙으려 한답니다.
왜냐하면 자석(생각)은 자기와 맞는 성질을 만나면 자꾸 소매를 붙들려고 한답니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지요.
반대로 자기와 조금만 안 맞으면 상대를 극과 극으로 밀어내는 성질이 있지요.
그 외에도 생각은 욕심이 많아서 오만가지를 다 자석처럼 불러들이지요.
그러면서 그것을 자꾸 눈덩이처럼 키웁니다.
이러한 것들이 여러분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종국에는 끝에 가보면 저팔계처럼 손발이 모두 묶이어 괴로움과 고통 속에 빠지게 되지요.
그냥 네비(마음)를 보면서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방향으로 가기만 하면 된답니다.
물론 네비를 보고 가더라도 산길도 만나고, 물길도 만나고, 진흙탕 길도 만나겠지요.
이러한 것들은 그저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흩어지는 것들이랍니다.
부처님도 생전에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답니다.
우리와 똑같이 세상 살이를 살다가 가셨거든요.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흩어지는 것들에게 끌려다니지 마시고 그냥 흘려버리십시오..
왜냐하면
네비는 이미 가야 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네비(마음)만 잘 보고 가면 된답니다.
ㅡ
오늘 본문 내용인 반야다라존자의 이야기도 이와 같답니다.
반야다라존자는 지금 자신의 내비게이션인 마음(불성/성령/본성)을 보면서
부처님이 이미 가보고 기록해 두셨던 백 천권의 경전 속 길들을 지금 가보고 있는 중이랍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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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
이 글은 수행을 처음 하시는 분들을 위한 내용이랍니다.♡
오늘도 알아차림에 대한 부처님 수행 방법인 [대념처경]에 나오는 내용 중 일곱 번째 내용을 같이 해보겠습니다..
한 번 읽어 보시면서 힌트를 얻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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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부처님이 직접 수행하셨던 방법을 전하는 내용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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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몸의 요소(四大)에 대한 관찰의 장
F 백골관에 대한 장
F 묘지에서의 아홉가지 관찰에 대한 장
(백골관 그러면 우리에겐 신라의 자장율사가 생각나지요. 바로 그분이 하셨던 수행 방법이랍니다. 한번같이 보시죠.^^)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묘지에 버려져 죽은지 하루, 혹은 이 삼일이 지나 부풀어 오르고 검푸르며 부패되는 시체를 볼 때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실로 이 몸도 (저 시체와) 똑같은 성질의 것이다. 이 몸도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고.
이와 같이 그는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지내고,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지내며,
또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지낸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며 지내고,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지내며,
또한 몸에서 동시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지낸다.
이것이 몸이다.라는 알아차림은 그에게 확립된다.
이렇게 그는 그의 알아차림을 오르지 지혜와 바른 알아차림 만이 있는 단계까지 개발한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마음과 물질의 세계에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초연하게 지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지내는 방법이다.
(내용이 길어서 집중도가 떨어질 염려가 있어서 2:02~ 은 다음 주에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ㅡ
(해설)
오늘 내용은 시체를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라(반조/反照)는 내용인데요.
예전에는 인도는 물론 여러 나라들이 사람이 죽으면 산이나 들에 두었답니다.
중국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삼일 정도 집안 마당에 두었다가 매장을 했다고 현지인들에게 들었는데요.
간혹 다시 살아나는 시체들도 있었다고 하네요.^^
매장문화가 발달한 중국에서도 그랬을 정도니 그 외의 나라들은 더 했을 겁니다.
더러는 까마귀밥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독수리 밥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짐승들 밥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물고기 밥이 되기도 하지요.
부처님이 이렇게 더럽고, 추하고, 역겨운 이야기들을 하는 이유는 전편에도 잠깐 말씀드렸는데요.
지금 시대에는 시체들을 쉽게 볼 수는 없지만
시체들을 본다면 아마 모르긴 해도 온몸이 오싹" 하실 건데요.^^
이때 사람들의 마음은 많이 숙연해진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많은 무상(無常)과 허무(虛無)를 느끼게 되지요.
이때 부처님 말씀처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살아지는 것들을 바라 보기도(관찰) 좋고 알아차리기도 좋겠지요..
또 내려놓고 버리기도 좋답니다.
왜냐하면 몸에 때가 불어 터져 있듯이 마음도 흐물흐물할 때에 때를 밀듯이 이때가 밖으로 밀어내고 버리기가 좋을 것입니다.
내용들을 간추려보면 죽은 시체를 보고 내 마음에서 일어나고 살아지는 것들을 잘 관찰해보고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무상하고 허무한 것들이니 집착하지 말고 초연하게 지내라.
라는 내용이랍니다.
또한 몸에서 동시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몸이다."라는 알아차림은 이렇게 확립된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 보고 있는 이 시체는 그저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라는 알아차림이 이렇게 확립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렇게 죽은 시체와 같은 것이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물질(시체)에 왜 그렇게 집착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보고 있는 시체가 곧 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너의 알아차림을 오르지 지혜와 바른 알아차림 만이 있는 단계까지 개발하라는 뜻이랍니다.
이런 방법으로 너는 마음과 물질(시체를 말함.)의 세계에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초연하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시체가 곧 물질이므로..
즉
너의 몸도 곧 물질이므로 집착함이 없이 초연하게 지내라는 뜻이랍니다.
쉽게 말해 버리라는 뜻입니다.
버리고 너의 마음과 물질(시체를 말함.)의 세계에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초연하게 지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지내는 백골관에 대한 방법이랍니다.
(아래의 링크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dI9V6YYR96JCtEaMZJYfcrU6eEYW3ub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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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2)
이 글은 연꽃이 활짝 피신 분들의 글이랍니다. ♡
오늘도 [유마경] 내용을 들어보시면서 각자가 내가 무엇을 더 노력해야 하는지 가늠해 보시지요..♡
아직은 유마거사의 내용은 안 나오고 서품(서론)에 해당하는 부처님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답니다.
[유마경]은 [법화경]과 아울러 보살들을 가르치는 경전이랍니다.
이 말의 뜻은 깨닫고 증득한 사람들은 유마경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면서 부족한 점들을 보충해 나가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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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네가지 무량함이 보살의 불국토이다. 그곳에는 자비와 동정심과 환희와 평등한 마음을 가진 중생이 태어난다.
(무량/無量 이란 뜻은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라는 뜻인데요. 보살들의 마음은 참으로 이러합니다. 여기서 '보살'이란 깨다고 증득한 사람들을 이르는 말인데요. 보살들의 마음은 퍼주고 또 퍼주어도 그 마음은 마르지를 않는답니다. 그야말로 無量 하지요. 깨닫고 증득하신 분들이라면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하고, 보여야 한답니다.)
20:24~ 다음 주에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아래의 사이트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https://youtu.be/vtL4VwXhp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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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에 보내드릴 선문염송 98편인데요.♡
뜻을 아시는 분들은 요점만 간단히 답을 주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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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염송] 중에서.. (98편)
20210209
달마대사에게 양무제가 묻되 "어떤 것이 거룩한 진리의 제 1의 입니까?" 하니 달마가 대답하되 "확연히 거룩한 진리가 없습니다." 하였다. 무제가 다시 묻되 "짐을 대하고 있는 자는 누구시오?" 하니, 조사가 대답하되 "모르겠소" 하였다. 무제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니 조사께서 강을 건너 위나라로 가셨다.
[분주소가 무제를 대신에 말하되 "제자의 지혜가 얕았소이다." 했다.]
무제가 이 일을 지공에게 물으니 지공이 대답하되 "폐하는 그 분을 아십니까?" 하였다. 무죄가 대답하되 "모릅니다." 하니, 지공이 말 하되 "그는 관음 대사로서 부처님의 심인을 전합니다." 하였다. 무제가 후회하여 칙사를 보내어 불렀더니 지공이 말하되 "폐하의 칙사가 문제가 아니라 온 천하의 사람이 가더라도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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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유튜브 동영상 내용은 서암스님의 대화 내용인데요.
오늘 전체 내용과도 잘 어울릴 수 있는 진솔한 서안스님의 이야기라 올려보았습니다.♡
서암스님은 1914년 생으로 한국불교의 잘못된 관행들을 개혁하시려다가 오히려 반개혁 인사로 내몰린 비운의 선승이시라 한국 불교계에서 왕따를 당하는 바람에 널리 알러지진 못했지만 한 번같이 이 분의 말씀을 들어보시지요.
오늘 본문 내용에 해당하는 경전 공부와 마음 관찰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같이 연관 지어..
대화 내용에서 힌트를 얻어보시죠.
제목 : 서암스님 설법_생활속의 의문과 그 대답
(아래의 사이트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https://youtu.be/qbPgofHRU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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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