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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요한 3,13-17
이것이 빠진 희생은 오염된 피만 배출한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구약에서 십자가의 상징은 물론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매달기 위해 만든 장대입니다.
뱀에 물린 사람들은 구리뱀을 보면 나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리뱀이 상징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만 보면 낫게 된다는 뜻일까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우리도 같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누군가를 낫게 하려고 나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닮을 수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맙니다.
하늘로 들어가는 문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누군가의 죄를 씻어주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십자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노고가 누군가의 죄를 씻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십자가가 되려면 하나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디디 블랜차드와 집시 로즈 블랜차드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엄마 디디는 딸 집시를 포함해 모든 사람에게 백혈병, 근이영양증, 정신 장애 등 다양한 건강 문제와 장애가 있다고 믿도록 속였습니다.
디디는 딸의 질병과 장애를 홍보하여 기부, 여행 및 기타 혜택을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짓말에 버티다 못한 집시는 온라인에서 만난 남자친구 니콜라스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 살해를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상황은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렀습니다.
집시는 어머니의 속임수와 자신이 겪었던 학대의 정도를 깨닫게 되었고, 어머니를 죽이는 것만이
그녀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꼈습니다.
어쩌면 디디는 집시를 키우기 위해 자신은 최선을 다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집시를 자신의 십자가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피 흘림은 깨끗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기의 의지로 피를 흘렸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영국에서는 리사 헤이든과 존슨의 사례가 있습니다.
리사도 존슨이 음식 알레르기, 뇌성마비, 낭포성 섬유증 등 다양한 건강 문제를 앓고 있으며 휠체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헤이든은 자기 아들이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부터 수년에 걸쳐 약 325번의 불필요한 치료와 시술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의료 전문가들을 속여 아들이 중병에 걸렸다고 믿게 했고, 이에 따라 영양 공급 튜브 장착을 포함한 일련의 불필요한 개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녀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아들을 대신하여 수많은 상과 선물, 재정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왕족과 다른 고위 인사들을 만났고, 기부금으로 휠체어 이용 가능 차량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거짓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어머니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초콜릿 바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한 보건 방문자가 알아차리면서
이러한 속임수가 드러났습니다.
이 관찰에 따라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리사는 다른 많은 형태의 의학적 학대와 속임수 중에서도 알레르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음식 공급 튜브를 통해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그녀는 집에서 의료기기를 조작해 결과를 위조하고 의사들에게 아들이 중병에 걸렸다고
설득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사건은 사회와 의료인의 동정과 지원을 가장하여 아동에게 가할 수 있는 심각한 학대의 극명한 예입니다.
디디나 리사 모두 아이를 키우는 일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나름대로 노력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피 흘림은 오히려 아이들을 안 좋게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을 씻어줄 수 없는 더러운 피였습니다.
그 이유는 엄마들 자신이 아이들을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 지심의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아버지 때문에 흘리는 피가 아니면 자녀를 위해 흘리는 어머니의 피는 오염됩니다.
자아가 죽어서 흘리는 피가 아니라 자아가 커지기 위해 나를 고생시켜 흘리는 피입니다.
자아를 죽이는 창은 오로지 ‘순종’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를 잘 키워낸 부모는 분명 소명을 가지고 키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피 만이 자녀를 깨끗이 씻어줄 수 있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생각해 봅시다. 많은 군인이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라이언에게 가치 있게 살라며 죽어갑니다.
라이언은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평생 열심히 삽니다.
만약 그들이 나라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라이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적진 깊숙이 뛰어들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나의 피가 누군가를 변화시키려면 나의 피는 그를 사랑하는 이에게 순종하여 내어주는 피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스스로 흘리는 피가 됩니다. 사실 그것은 자아의 피가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뱀이 매달려야 합니다.
자아가 매달려야 합니다.
자아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흘리는 피는 반드시 보상을 요구합니다.
상대를 이용하기 위해 흘리는 피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피 흘림은 누군가의 죄를 사해줄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명령에 순종하여 흘리는 피만이 깨끗하여 그 사람의 죄를 씻어줄 수
있습니다.
남편 때문에 자녀를 사랑해야 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며, 사제도 주님께서 파견하셨기 때문에 신자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피조물의 한계상 온전한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4일 [십자가 현양 축일]
민수기 21,4ㄴ-9
요한 3,13-17
인생의 십자가가 다가올 때 마다 즉시 예수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십자가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십자가라는 것, 생각할수록 묘하고 신비스런 그 무엇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존재 자체가 무거운 십자가의 연속인 분들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삶 자체가 힘겨운 십자가인 분들도 계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성냥개비 두개를 교차시켜 만든 듯한 가벼운 십자가, 잠자리 날개처럼 초경량급 십자가가 살짝 주어졌음에도, 세상 끝난 것처럼 난리를 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감당하기 벅찬 천근만근 무게의 십자가를 매일 지고가면서도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쁘게 살아갑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십자가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산고를 겪고 있는 엄마는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하늘을 찌르는 것처럼 극심하지만, 잠시 후 태어날 새 생명을 생각하며 기꺼이 견뎌냅니다.
선두에서 단독 질주 중인 마라톤 대회 우승 후보자는 40킬로미터 지점 쯤에서 느끼는 육체적인 고통이 엄청납니다.
그러나 잠시 후 결승선에서 누리게 될 영예와 성취감을 생각하며 기쁘게 달려갑니다.
우리 모두 불완전한 인간 존재로서 불완전한 이 세상 안에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이런 저런 다양한 무게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십자가 하나를 잘 극복했다 생각하면, 어느새 또 다른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의 어깨 위에는 별의별 유형의 십자가가 셀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얹혀 있어서
제대로 걸어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평생의 과제는 숙명과도 같은 십자가를 평생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겁다, 괴롭다, 여기며 도피하지 말고, 이왕 지고갈 십자가 큰 마음으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 한 가지!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인간적인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결국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지속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부단히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하는 일입니다.
세상 울적하고 괴로운 얼굴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한 두명도 아니고 7명이나 되는 어린 자녀들을 지극정성으로 양육하는 한 젊은 어머니를 뵙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로 인해 어머니의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무럭무럭 성장하는 아이들의 교육과 의식주 해결을 위해 하루 온종일 동분서주하노라면 하루가 후딱 지나갑니다.
하루 온종일 지지고 볶고, 세탁기를 돌리고 또 돌립니다.
청소기를 돌리고 또 돌립니다.
쉴틈 없이 돌아가는 힘겨운 일상에 지쳐 짜증 낼법도 한데, 절대 그런 법이 없습니다.
환한 얼굴에 콧노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대체 비결은 무엇일까요?
매일의 작은 십자가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가톨릭에서는 십자가를 절대로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성당에 오면 십자가를 말끔히 없애준다고 외치지도 않습니다.
대신 십자가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라고 강조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있는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를 지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바로 그 십자가에서 위로받게 하고 힘을 얻게 합니다.
오늘 우리의 작은 십자가들에 반드시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 마다 즉시 예수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십자가를 잘 지고 갈 때, 십자가 그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부활의 영광을 끝까지 희망하며 그렇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강론>
(2023. 9. 14. 목)(요한 3,13-17)
<십자가는 이론이 아니라 삶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3-17).”
1) 십자가는 이론이 아니라 ‘삶’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말로’ 아주 잘 설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십자가를 생각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살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부터 우리의 ‘십자가의 길’은 시작되었습니다.
충실한 신앙인의 신앙생활 자체가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렵고 힘들 때도 있고,
편하고 쉬울 때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간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생활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2) 십자가는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을 받으셨습니다(루카 23,26).
신앙생활은 공동체와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십자가의 길도 혼자서 고독하게 걸어가야 하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수호천사가, 성모님이, 주보성인이,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3) 십자가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부활로 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도 생명을 얻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방법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부활, 구원, 생명입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십자가를 만날 수 있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정은 과정일 뿐입니다.
과정이 힘들다고 걸어가기를 포기해버리면,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1베드 5,7.10).”
<신앙인으로서 사는 것이 힘들더라도, 그것은 ‘잠시’ 겪는 고난일 뿐이며,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라는 말씀은, 14장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구리 뱀’을 언급하신 것은, 모세가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백성들을 구하려고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이(민수 21,9) 당신의 십자가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들어 올려져야 한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은 악한 일이고 범죄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악에서도 선을 이루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라고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신 말씀입니다.
<십자가 수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라는 말씀은, 요한 1서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요한 4,9-10).”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오직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만을 바라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곧 그 ‘응답’입니다.
무슨 거창한 신심 행위나 예물 봉헌 같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큰 기쁨이 되는 일이고, 하느님께도 큰 기쁨을 드리는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