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4.02.03 18:06 49' / 수정 : 2004.02.04 10:22 19'
이 보도가 나간 지 열흘 후 뒤늦게 오마이뉴스에서 위 기사를 반박하는 칼럼이 실렸습니다.
네팔의 민주화운동과 <조선>의 왜곡보도
왕권 강화와 부패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공산화'로 매도
김동민(wanju) 기자
걸출한 산악인들이 많은 우리에게 네팔이란 이름은 낯설지 않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에베레스트산을 비롯하여 험산준령들을 품고 있는 히말라야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밖에 우리는 네팔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아니다. 히말라야말고는 관심도 별로 없다. 그런 나라에서 3박4일을 지내고 왔다. 그래도 네팔의 정치상황에 관한 가장 정확한 첫 기록이 아닌가 싶다.
정작 히말라야 설산은 구경도 못하고 나가르코트(해발 2,175m)의 에베레스트 전망대에서 일출만 겨우 볼 수 있었다. 당초 나가르코트에서 1박을 하기로 돼 있었으나 하필 그 날 총파업을 해 이동을 하지 못하고 카트만두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파업 다음날 일정상 새벽에 버스로 전망대로 이동하여 일출만 보고 와서 귀국 길에 올랐다.
네팔로 가기 전 2월 4일자 <조선일보> A15(국제)면의 톱기사가 네팔의 민주화운동에 관한 내용이었다. ‘네팔左派 왕정타도 격렬 시위’라는 제목으로 홍콩 특파원이 쓴 기사였다. ‘反軍 8년째 대치... 목표는 공산화’라는 부제도 곁들였다.
<조선일보>는“네팔이 다시 큰 혼돈에 빠졌다"며 이는 "왕정 폐지와 공산화를 추구하는 좌파 정당들이 주도하는 민주화 시위와 총파업 사태로 인한 것"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어디까지 사실에 부합할까?
<조선일보> 기사의 기조는 이것이다. 좌파들이 주도하는 “민주화 요구는 표면적 이유”이며 “목표는 왕정타도와 공산화”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민주화운동의 주체는 합법 활동을 하는 좌파정당들 뿐 아니라 보수정당, 대학생 그리고 무엇보다 대다수 국민들이며, 왕정타도와 공산화를 목표로 무장투쟁을 하는 조직은 마오이스트들 뿐이다.
기사는 이것을 뒤섞어놓음으로써 마치 좌파정당들이 대학생 조직들까지 동원하여 민주화를 빙자한 공산정권 수립운동을 하는 것처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한 정황은 이렇다. 네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마침내 비렌드라 국왕으로 하여금 1990년 11월 신헌법을 공포하게 만들었다.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이다. 네팔 국민들은 그 이후 13년간을 ‘민주주의의 시기’라고 부른다. 이듬해(1991년) 5월 실시된 총선에서 네팔의회당이 하원의석 205석 가운데 110석을 획득하여 집권을 한다.
그러나 94년 11월의 총선에서는 어느 정당도 과반수 획득에 실패했다. 이 때 마르크스당과 레닌당이 마르크스레닌당으로 합당하여 과반수를 이룸으로써 집권을 한다. 99년 5월 총선에서는 다시 네팔의회당이 과반수를 획득한다. 그러나 최근 갸넨드라 국왕은 의회를 해산해버렸다. 12년 동안 총리가 12번 바뀌는 정정 불안을 틈타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다. 이게 이번 시위의 직접적 원인이다.
또 있다. <조선일보>는 애매하게 묘사했지만 2001년 비렌드라 전 국왕 일가 살해사건의 전말에 대한 국민들의 의혹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 해 6월1일 왕궁의 만찬석상에서 디펜드라 왕세자가 결혼에 반대하는 부모에게 앙심을 품고 총을 난사하여 모두 죽었다. 부상을 입은 왕세자가 왕위에 올랐으나 부상 후유증으로 3일 만에 사망하고, 사건 당일 우연히(?) 만찬에 참석하지 않았던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인 갸넨드라가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조사위원회의 발표였다. 그러나 이 발표를 그대로 믿는 국민들은 없다고 한다.
2월 11일자 <히말리얀 타임즈>에서 아난다 P. 스레스샤는 마오이스트의 봉기와 국왕의 권력 강화 시도의 원인을 지난 13년 간 민주주의와 인권의 이름으로 벌어진 만연한 부패와 실정, 그 결과에 따른 사회불안과 불확실성, 혼란 등에서 찾았다. 사실 이것은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에서 네팔 국민들이 겪어야 할 비용일 것이다.
스레스샤는 “입헌군주제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국왕의 거듭된 보장에도 불구하고 정당들은 여전히 국왕의 그런 제스처를 막후에서 절대군주제를 재구축하려는 책략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 한다. 그는 ‘흑묘백묘론’을 거론하면서 누가 되든지 간에 지금의 난관을 극복하여 평화와 발전, 진정한 민주주의의 규범과 가치 등을 국민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조선일보>의 기사는 제3세계 혹은 비동맹권 국가들을 다루는 국제뉴스의 맹점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직접 확인하지 않고 서방통신사들의 시각을 단순히 옮겨놓는 국제뉴스로 인하여 그 국가들 상호간의 몰이해와 편견을 심화하는 것이다.
사실 직접 겪은 네팔이라는 나라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희망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국민소득 200불 남짓에 국민들의 생활은 극도의 빈곤상태에 있었다. 집은 거의 폐가 수준이었으며, 굴러다니는 자동차는 거의 모두 고철 덩어리에 지독한 매연을 뿜어댔다. 거리를 걸을 때는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종교의 영향인지 만사태평으로 보였다. 그 배경에서 국왕과 정당들, 종교지도자들은 부와 권력의 세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네팔의 민주주의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으로나마 네팔의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성원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네팔 국민들의 노력을 무시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단순하게 좌파의 준동으로 매도한 것이다. 네팔의 민주화 운동에 주목하도록 하자.
2004/02/15 오후 1:17
ⓒ 2004 OhmyNews
하지만 김동민 기자의 말대로 조선일보는 네팔사태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 편하게 외신 베끼기'로 기사화했을까요?
그리고 지난 2001년 왕가의 비극을 '애매'하게만 표현했을까요?
무엇보다도 네팔의 민주화 목적을 '공산화'라고만 보도했을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은 지난 2002년부터 지금까지 주간조선에 실린 네팔관련 기사들을 검색해보면 됩니다.
크게 3건을 찾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1) 네팔 현지르포; 마오이스트 대공격으로 내전 상태 ;
네팔=변성우 국민일보 통신원
네팔 국민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 마오이스트 반군의 공격으로 대규모 사상자가 나는 사태가 연일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8일 네팔 동부 신둘리(Sindhuli) 지역에서 마오이스트 반군이 브히마드 경찰서를 습격, 경찰관 49명이 숨지고 19명이 부상당했으며 20여명이 실종됐다. 당시 경찰서에는 경찰관 70명이 배치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날인 9일 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남서쪽으로 215km 떨어진 아르가칸치(Argha khanchi) 지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터졌다. 마오이스트 반군 4000여명이 일제히 치안본부에 공격을 가해 4시간 동안 경찰과 군인 등 최소 65명을 사살한 것이다. 또 카트만두에서는 최근 3~4일 동안 시내 5~6곳에서 마오이스트들이 설치해 놓은 것으로 보이는 폭탄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 마오이스트들이 정부와 평화협상을 깨고 솔루(Solu) 지역의 살레리 경찰서와 도청 건물을 공격해 도지사를 포함한 3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에 쉘 바하둘 데우바(Sher Bahadur Deuba) 수상은 “정부는 폭력배들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현 다당제 입헌군주주의와 폭력배와는 절대적으로 타협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발표하고 가넨드라 국왕의 동의를 얻어 네팔에 비상사태를 선포한 뒤 마오이스트들의 은거지를 공격하는 본격적인 ‘마오이스트 소탕 작전’을 펼쳐왔다.
네팔 정부는 오는 11월 총선을 앞두고 지난 8월 28일 비상사태를 해제했다. “비상령 발동 이후 마오이스트들과의 전쟁으로 약 3500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발표와 함께였다. 그러나 비상사태가 해제된 뒤 반군의 공격이 다시 잇따르자 정부가 다시 비상사태를 선포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16일 총파업… 동참하지 않으면 보복”
지난 9월 16일 마오이스트들은 네팔 정부를 향해서 반다(Bandhaㆍ파업)를 선언했다. 전국적으로 이날 모든 네팔 가게들은 문을 닫고 교통이 마비된다. 관공서도 근무하지 않으며 학교도 휴교령을 선포했다. 파업에 동참하지 않으면 마오이스트들로부터 보복을 당한다.
마오이스트들 때문에 가장 불편을 겪는 사람들은 카트만두 시민들이다. 있을지도 모르는 폭탄 테러와 마오이스트들의 카트만두 공격을 막기 위해 네팔군은 카트만두로 들어오는 고속도로와 지방도로의 검색을 강화하고 카트만두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신상을 조사하고 있다. 거리 검문검색을 통하여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은 사람은 이유를 불문하고 연행해 간다. 타 지역 신분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역시 조사의 대상이 된다.
카트만두의 한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는 라젠드라 반다리(Rajendra Bhandhari)씨도 희생자다. 그가 최근 일주일 동안 행방불명 됐다가 나타나는 바람에 가족들 역시 걱정이 대단했다. 그는 일주일 동안 군부대에 끌려가 취조를 당해야 했다. 그의 주민등록증에는 카트만두가 아닌 고르카 지역의 주소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고르카 주민이 왜 카트만두에 와서 있냐’는 것이 거리 검문에서 걸린 이유였다. 지방 출신의 사람이 카트만두에 살 경우 지역 경찰에 자신의 신상과 카트만두에서 머무는 이유를 신고하고 경찰이 발행하는 증명서를 받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네팔 시민들은 마오이스트들의 테러 표적이 될까봐 두려워하고 또 마오이스트로 오인될까봐 두려워하는 이중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카트만두에 살려면 누구나 경찰에 자신의 신분과 신상을 신고하고 카트만두 체류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소지해야만 한다. 월세를 살고 있는 사람들도 집주인의 증명 하에 지역 경찰서에 체류 신고를 하고 늘 신고서를 소지해야 한다. 심지어 가게나 레스토랑, 공장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경찰에 신고를 한 뒤, 개인 주민등록증 외에 사업주의 사인이 첨부된 재직증명서까지 가지고 다녀야 한다.
‘증명서’ 없으면 무조건 연행
트리브반 국제공항 역시 전시 상황을 방불케 한다. 출입이 엄격해진 것은 물론이고 입구부터 장갑차와 군인들이 배치돼 있다. 일반인과 택시의 출입은 아예 금지되어 있다. 일반 승합차 역시 공항 출입증명서가 없으면 출입을 못 한다. 단 외국인의 경우에는 아직까지 편의를 봐주어 얼마간의 검사와 승강이를 거치면 공항으로 출입이 허락된다. 그러나 내국인들은 공항 입구서부터 10분 이상을 걸어서 가야만 한다. 네팔을 찾는 관광객들 역시 공항에서 나와서 택시를 잡기 위해 공항 입구까지 걸어나와야 하는 불편을 겪고 있다.
불편은 이 뿐만이 아니다. 여행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카트만두 근교는 오후 8시 이후 통행이 어렵다. 지방 여행은 군인들의 검문과 검색으로 극도로 통제되고 있다.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여서 대표적인 관광지나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랑탕 등의 트레킹 지역을 제외하고는 지방 여행을 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여행을 꼭 해야 한다면 군인들이 요구하는 각종 서류 등의 정부 허락서를 반드시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락없이 잡혀가기 때문이다.
지난 9월 초 마오이스트로 추정되는 사람이 자신이 살고 있던 월세 방에서 폭탄을 제작하다가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3명이 죽은 일이 있었다. 그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부터 카트만두 시내에서는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폭탄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폭탄 처리반이 폭탄을 제거하는 소리가 매일 한두 차례씩 들려오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제 사람들은 골목에 놓여 있는 검은 비닐봉지만 보아도 경찰과 군대에 신고를 한다. 시내 곳곳에서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폭탄 제거를 실시하기 위해 통행이 금지된다. 온갖 소문들까지 떠돌아 주민들은 더욱 불안해하고 있다. 마오이스트들이 인형 안에 폭탄을 장치하여 인형을 집어드는 순간 폭탄이 터진다든가 집으로 배달오는 채소나 식품을 담은 봉지에도 폭탄이 들어 있다든가 하는 소문들이다. 거리에서는 군인들이 실탄을 장전한 총을 가지고 다니며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을 잡아가거나 발포한다고 하여 함부로 거리를 배회하지도 않는다.
관광객 끊기고 여행사 문 닫아
처음부터 마오이스트들이 경계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한때 네팔의 서민들과 농민들 그리고 여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카트만두에서 차량으로 5시간 거리에 위치한 신두팔촉(Sindupalchok) 지역의 많은 여성들은 자신들도 왕과 지주들이 다스리는 봉건사회를 뒤집을 수 있다며 인민공화국을 창설하는 데 나서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순일이라는 한 여교사는 “내가 이 지역에 처음 왔을 때 식수가 없었는데 마오이스트들이 제공해 주었다”며 “그들은 백성들의 문제를 보면 어떤 식으로든 해결책을 강구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마오이스트들이 국민 생활의 질을 높여주었다고 믿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오이스트들은 정부군과의 전쟁을 위해 필요한 군자금과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액수의 금품을 요구했다. 그들의 뜻에 부응하지 않으면 살상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마오이스트들이 주로 활동하는 솔루, 신둘리, 롤파(Rolpa) 등의 지역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14세 이상의 청년들을 강제로 징집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재물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들은 거듭되는 테러와 정부군과의 전쟁으로 민심을 잃어가고 있다.
마오이스트들로 인해 가장 심각하게 타격을 받는 것은 네팔의 경제 상황이다. 네팔의 주 수입원은 히말라야를 찾는 관광객들이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뚝 끊겨 관광 가이드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문을 닫는 여행사들도 많아져 네팔의 경제는 극도로 힘들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마오이스트들의 테러를 질타하며 하루빨리 네팔에 안정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네팔 마오이스트들
마오쩌둥주의 추종하는 공산 반군
마오이스트(Maoist)란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이 주장한 공산주의 즉 마오이즘(Maoism)의 추종자들을 일컫는다. 마오이스트들이 준동한 것은 1966년이었다. 이들은 1996년부터 네팔의 입헌군주제의 종식을 주장하며 본격적인 ‘인민전쟁(People’s War)’을 선포했다. 처음에 6개 지역에서 시작된 인민전쟁은 점진적으로 확장돼 지금은 50개 이상의 지역으로 퍼진 상태다. 마오이스트 반군들은 끊임없이 정부군과 전쟁을 벌이고 무력 항쟁을 하면서 지금까지 5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가운데는 무고한 2000여명의 시민들도 포함돼 있다.
♠ 발행일 : 2002.09.26
♠ 기고자 : 변성우
2) 르포 / 내전의 현장 네팔을 가다;
96년부터 시작된 네팔 내전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카트만두를 제외한 전역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반군은 지난 10월 28일 수도 복판에서 공공연히 파업을 일으켰다. 그들은 상점을 폐쇄하고 차량통행을 금지시켰다. 호응하지 않는 사람에겐 무자비한 보복이 가해진다. 사람들은 팔이 잘리고, 집이 불태워지며, 식량과 금전을 빼앗긴다. 정부는 통제력을 잃은 상태다. 반군을 제압하기는커녕 시민들을 통제하기에 바쁘다.(작은 사진) 정부군은 양민과 게릴라를 구별하지 않는다. 반군과 관련된 사진이나 자료를 들고 다니는 민간인은 그 자리에서 사살된다. 왕은 전횡을 일삼고, 정부는 부패했으며, 신분제 ‘카스트’는 고압적으로 국민을 억누르고 있다. 네팔 국민들은 정부의 폭압과 반군의 테러 사이에서 신음하고 있다.
벼락 같은 소리가 천지를 흔들었다. 비명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도로는 곧 봉쇄됐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그것도 한복판인 테쿠(Teku)거리의 자동차 부품 대리점서 폭탄이 터진 것이다. 테쿠는 왕궁이 있는 시내 복판으로 향하는 길목. 우리로 치면 퇴계로나 을지로쯤 되는 카트만두의 심장부다.
네팔 경찰은 빨랐다. 신속하게 사람들을 통제하고 길목을 막았다. 테러가 일어난 시각은 10월 23일 오후 6시. 카트만두는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식당을 찾아 테쿠 거리를 지나던 참이었다. “한국에서 온 기자다. 사진을 찍어야겠다.” 폭발 현장으로 달려가려 하자 경찰이 막았다. “또 다른 폭탄이 있을지 모른다. 위험하다.” 무장한 경찰이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흥분한 표정은 아니었다. 시민들의 얼굴도 그랬다. 자지러질 법한 사건인데도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꺅’ 소리 한번 지르고는 그만이었다.
네팔 사람들에게 ‘폭탄’은 이제 일상사다. 지난 8월 28일 비상사태가 해제된 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겪는 일이다. 이번 폭발로 8명이 중경상을 입고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요즘 네팔에선 매일같이 수십 명의 사람들이 시체로 변한다. 카트만두 테쿠에서 폭탄이 터진 바로 그날(10월 23일), 롤파(Rolpa)와 바르디야(Bardiya) 지역에선 정부군과 마오이스트 반군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21명이 시체로 변했다. 다음날인 24일에도 바르디야(Bardiya)와 가장코트(Garjyangkot) 지역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은 버스 한 대가 불타고 32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다음날인 25일엔 자자코트(Jarjarkot)와 보즈푸르(Bhojpur) 지역에서 마오이스트 반군 3명이 사살되고 2명이 체포됐으며 26일엔 라우타트(Rautahat) 지역 민가 17곳이 반군에게 약탈당했다.
6일새 총격전·테러 11건
하루 뒤인 28일 월요일엔 2000~3000명의 반군이 총공세를 펴, 오칼둥가(Okhaldunga) 지역의 공항과 경찰서를 습격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군과 교전이 벌어져 52명이 숨지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반군들은 같은 날 둠키바스(Dumkibas) 지역의 경찰서를 습격, 4명의 경찰을 사살하고 무기를 빼앗아 도망쳤다.
28일 월요일은 수도 카트만두에서 반군이 파업을 일으킨 날이다. 반군은 시민들에게 모든 상점의 문을 닫고 교통을 통제할 것을 명령했다. 그들의 요구를 듣지 않고 차량을 운행할 경우 반군들은 운전자를 잡아 차에서 끌어내린 뒤 팔을 자른다. 운전자가 도망칠 경우엔 차량번호를 적어 주소를 추적, 집을 부수고 차량을 불태운다. 네팔 언론사의 한 기자는 “작년 파업 때 반군의 요구를 무시하고 운행을 강행한 버스 회사가 있었다. 반군들은 1년 뒤 그 회사의 버스 5대에 불을 질렀다. 1년 뒤에 보복을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회사에 차량이 모두 몇 대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5대였다”고 말했다.
네팔 정부는 통제력을 잃은 상태다. 반군들이 수도 한복판에서 파업을 강행해도 속수무책이다. 네팔에서 12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임근화씨는 “파업이 있는 날 차를 몰고 나가면 반군보다 경찰이 먼저 통행을 막는다”고 말했다. 경찰이 반군을 쫓아내기는커녕 오히려 시민들을 통제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사살된 반군 수만 2850명”
1996년 2월 반군측에서 인민전쟁(people’s war)을 선포한 이후 네팔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네팔의 행정 구역은 모두 75개 지구(district)로 나뉜다. 네팔 정부는 그 중 32~35곳이 반군의 손아귀로 넘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반군은 지난 1월 롤파, 루쿰(Rukum), 자자코트, 살리얀 (Salyan), 당(Dang) 등 5곳을 ‘혁명지구’로 선언하기도 했다. 실제 반군의 영향력은 이보다 훨씬 크다. 네팔 국민들은 전체 205개 선거구 중 165개 선거구를 ‘반군의 지배권’으로 보고 있다. 네팔 심층취재기자단(CIJ; Centre for Investigative Journalism)의 한 기자는 “단순히 반군에게서 영향을 받고 있는 지역을 따진다면 수도 카트만두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 거의 모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일로로 치달은 데에는 정치적 혼란 탓이 크다. 2001년 6월 1일 네팔 왕실에선 소위 ‘왕자의 난’이란 참극이 벌어졌다. “만취한 왕세자가 국왕(아버지)과 왕비(어머니), 남동생(왕자) 등 일가족을 총으로 쏴 몰살시킨 뒤 자살했다”는 것이 사건의 개요다. 네팔 정부는 “애인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왕실에 불만을 품은 왕세자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고 조사 결과를 밝혔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 네팔 국민들은 ▲만취해 방으로 갔다는 왕세자가 어떻게 10분 뒤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 총을 쐈으며 ▲전왕 일가는 몰살됐는데 왜 같은 곳에 있던 현왕 측근들은 멀쩡한지 ▲오른손잡이였던 왕세자가 어떻게 왼쪽 머리를 쏴 자살했는지 등의 의문을 들이대며 해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시위대는 카트만두 일원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졌고 네팔 정부는 진압 경찰에 발포를 명령했다. 그 결과 시위대 2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왕자의 난’을 계기로 왕권은 전왕의 동생인 갸넨드라(Gyanendra)에게 넘어갔다. 새 국왕은 2001년 7월 26일 부패로 물의를 빚던 전 총리를 해임하고 데우바(Deuba)를 신임 총리로 임명했다. 데우바 정부는 마오이스트 문제 해결을 최우선 당면 과제로 추진했다. 신정부는 반군측과 휴전을 체결하고 3회에 걸친 평화협상을 실시하는 등 마오이스트와의 평화적 관계 성립에 주력했다.
반군측의 요구는 말 그대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할 것 ▲이를 위해 새 헌법을 만들 것 ▲새 헌법 제정을 위한 과도내각을 구성할 것 등을 요구했다.
절대군주제 국가였던 네팔이 입헌군주제로 전환한 것은 1990년. 민주화를 원하던 시위대의 요구를 전왕이 수용한 결과였다. 지금의 왕 갸넨드라는 당시 왕의 노선에 강력 반대했던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군주제를 포기할 리가 없었다. 협상은 결렬됐고 반군은 2001년 11월 23일 총공세에 돌입, 당·샹자(Syangja) 등 중서부 지역을 장악했다. 이곳 언론들은 3일간의 공습을 통해 최소 3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보도했다.
3일 뒤인 11월 26일 국왕은 비상사태를 선포한 뒤 마오이스트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병력동원을 승인했다. 초강세를 취한 것이다. 하지만 반군측 공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2002년 2월 17일엔 1000여명의 반군이 아참(Acham) 지역 군부대·경찰서를 습격, 군·경 140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후 롤파, 자자코트 등 중서부 지역에서 600여명이 사망하는 등 교전이 계속돼 왔다. 네팔 정부는 지금까지 목숨을 잃은 반군의 수가 2850명이라고 발표했다.
네팔 헌법은 1회에 걸쳐 비상사태 연장을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국왕은 이미 한 번 연장한 비상사태를 다시 한 번 연장하려 했다. 의회는 이런 왕의 의도에 반대를 표했다. 그러자 왕은 지난 5월 22일 의회해산이라는 강수를 또 택했다. 대신 그는 “오는 11월 13일 총선을 실시할 것”을 국민에게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약속한 총선일자가 다가오자 왕은 10월 4일 데우바 총리를 해임하고 내각을 해산, 총선을 무기한 연기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일 주일 뒤인 10월 11일, 찬드(Chand)를 새 총리에 앉히고 8명의 장관을 새로 임명해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 나라 돈인 20루피짜리 지폐에는 전왕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권좌에 오른 갸넨드라 왕은 취임 후 전왕 얼굴을 지우고 자신의 얼굴을 새긴 20루피짜리 지폐를 새로 발행했다. 새로 나온 이 돈을 카트만두 시민에게 건네면 그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옛날 돈 없냐”고 묻는다.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새 돈은 취급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주차장에서 일하는 한 종업원에게 새 지폐를 건네자 “꺼뜨로(위험하다)”라고 말하며 지폐 속의 새 왕 얼굴을 가리키기도 했다. 장사를 하는 한 여인에게 “전 왕과 새 왕 중 누가 더 좋냐”고 묻자 그녀는 “무엇이든 오래된 것이 더 낫지 않냐”고 대답했다. ‘마이찬드라’라고 이름을 밝힌 한 택시 운전사도 “새 왕은 골칫거리” 라면서 “사람들은 자비로웠던 전 왕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네팔 국민들은 새 왕의 전횡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왕이 건재할 수 있는 것은 군부와 경찰 그리고 공무원 조직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이 이들을 장악할 수 있는 배경에는 이 나라 관리들의 만성적 부패가 자리잡고 있다. 취임 전 정보기관을 총괄해 왔던 왕은 권력남용조사위원회(CIAA; Commission for Investigation of Abuse of Authority)란 조직을 구성, 관리들의 비리를 수집해 왔다. 이것이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물론이다. 지난 10월 30일 전직 장관이자 야당 사무총장인 카드카를 건설공사 관련 수뢰혐의로 구속한 것도 한 예다. 카드카는 전직 총리 데우바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데우바는 현재 ‘의회민주당’이란 새 당을 창당, 왕의 전횡을 견제한다는 명분을 걸고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여자들, 남편 발 씻긴 후 물 마셔야
관리가 부패하면 국민이 굶주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커미션을 노린’ 네팔 관리들이 외국(주로 인도)에 곡물을 싸게 팔았다가 비싸게 되사온다는 루머는 이제 쉬쉬할 일도 못 된다. 네팔은 매년 4억8000만~5억달러 가량의 곡물을 외국으로 판매하는 농업수출국이다. 하지만 네팔곡물협회(NFC; Nepal Food Corp)의 랄 바하두르 사무장은 “서쪽 산간 지역의 기근은 심각한 상태”라며 “이 지역에서 굶주림은 이미 오래된 일”이라고 말했다. 이곳 언론의 한 기자는 “먹을 것이 없다며 주민들이 하소연하자 한 정부 관리가 ‘그러면 먹는 습관을 바꾸라’면서 ‘쌀 대신 풀을 먹으면 될 것’이라고 말해 주민들의 분노를 산 적도 있다”고 말했다.
네팔의 전통적 신분제도인 카스트도 반군의 활동을 부추기는 원인의 하나다. 이 나라에서 천민과 여성의 지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곳 여성이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의 하나는 남편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다. 발을 씻기고 나면 여자는 그 물을 마셔야 한다. 보수색이 강한 상류계급일수록 더하다. 귀족들은 천민이 해준 음식을 절대 먹지 않는다. 여성과 겸상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혹시라도 ‘자비로운’ 귀족이 자신이 먹던 음식을 땅에 던져주면 천민은 감지덕지 그 음식을 주워 먹어야 한다.
‘현실의 행·불행은 전생의 결과’라는 힌두교의 가르침이 아무리 강력하게 삶을 지배한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라면 ‘해방’을 외치는 마오이스트들의 목소리는 달콤한 유혹이 될 수밖에 없다.
◈현장 / 반군 마을 표정
겉으론 평화로운 농촌… 공격 끝나면 흩어져
은행털이·해외송금이 자금줄… ‘반군’ 한국에도 상당수 유입
10월 25일 오후 2시. 카트만두 외곽 북쪽으로 90km쯤 떨어진 까부레 지구 둘리켈 지역. 평화로워 보이는 농촌이다. 이곳이 반군지역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농가는 대부분 비어 있었다. 그나마 집에 있는 사람들은 여자 아니면 노인이다. 밖에 나와 노는 아이들이 이따금씩 눈에 띈다. 여기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밤이면 빛 없는 암흑천지로 변한다.
네팔의 반군은 전형적인 게릴라 조직이다. “낮에는 반군들이 없다.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목표가 생기면 이곳 저곳에서 정해진 장소로 모인다. 공격이 끝나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모두 샅샅이 흩어진다. 그래서 정부군이 잡을 수 없다.”
반군 수뇌부가 위치한 롤파나 자자코트 지역 모습도 겉보기에 평화롭기는 마찬가지다. 이 지역으로 가는 교통편은 없다. 차를 타고 12시간쯤 달린 뒤 다시 꼬박 하루 동안 산길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 반군 본부를 여덟 번 방문했다는 이곳 기자는 “현장 곳곳에 현란한 플래카드가 걸려 있고 총을 든 반군이 지키고 있다는 외신 르포는 모두 소설”이라며 웃었다. 그는 “반군들은 대부분 숨어서 경비를 서고 있다”며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외부인은 어디서 누가 자기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이 먼저 나타나지 않으면 만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자진해 나타나지 않으면 만날 수 없어”
네팔 정부는 반군의 규모를 무장병력 3000~4000명, 동조자 1만~1만5000명 선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비공식 통계는 반군 규모를 무장병력 1만~1만2000명, 동조자 5만명 선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규모가 급증한 이유는 반군의 행태 때문이다. 일단 마을을 장악하면 이들은 주민들에게 ▲가구당 1명씩의 젊은이를 병사로 내놓을 것 ▲아니면 일정 금액의 헌금을 내놓을 것 ▲그것도 안되면 보유식량의 일부분(보통 30~50%)을 제공할 것 등의 세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한다. 거부하면 대가는 죽음이다. 하지만 이런 ‘룰’은 최근 들어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마오이스트들은 한 집안의 재산을 싹쓸이 하기도 하고 주민들을 위협해 총알받이로 사용하기도 한다. 부자의 재산을 털어 빈민들에게 나눠주던 ‘로빈 훗’ 같은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다.
현재 네팔 군부엔 사살권이 주어져 있다. 반군과 관련된 사진이나 자료를 갖고 다니다 걸리면 그 자리에서 사살된다. 네팔의 유력 시사지 ‘히말’의 카낙 마니 딕싯(Kanak Mani Dixit) 편집장은 “피살된 사람 중 누가 마오이스트고 누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네팔 심층취재기자단의 모한 마이날리(Mohan Mainali) 기자는 “교전이 일어나면 총을 쏘느라 정신없다. 그들은 일단 쏘고 난 뒤 신원을 묻는다”고 말한 바 있다.
반군의 주요 자금줄은 은행이다. 10월 24일자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는 반군이 점령지 은행을 털어 마련한 자금 규모가 6400만~1억2000만달러인 것으로 보도했다. 이들의 또 다른 자금줄은 해외송금이다. 반군 조직원들은 구미와 중동·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이들이 보내오는 돈은 조직을 유지하고 무기를 공급하는 데 긴요하게 쓰인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네팔 한국대사관의 유시야 대사는 “현재 한국에 진출한 네팔 노동자 수는 약 5000명 선”이라면서 “이 중 상당수는 마오이스트 반군과 연계돼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인터뷰
‘네팔 무장경찰’ 슈레스타 대장
“총 들고 있으면 게릴라, 총 없으면 민간인”
네팔 무장경찰(Armed Police)의 크리슈나 모한 슈레스타(Krishna Mohan Shresta) 대장은 외국 기자를 쉽게 만나려 하지 않았다. 민감한 시기에 미묘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편치 않았는지 계속 자리를 피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설득, 어렵게 만난 그는 대화 내내 말을 아꼈다.
무장경찰이 생긴 이유는.
“마오이스트 문제는 최근 6~7년간 네팔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최근엔 그들 세력이 커져서 경찰만으로는 통제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2001년 8월 22일 ‘무장경찰’ 조직을 새로 만든 것이다. 우리 목표는 마오이스트 반군의 테러로부터 국민들과 외국 관광객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게릴라와 민간인을 구별하는 방법은.
“우리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갖고 있다. 그가 총을 들고 있으면 반군이고 아니면 민간인이다.”
게릴라가 총을 들지 않을 수도 있고 민간인이 강요에 의해 총을 들 수도 있을 텐데.
“물론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은 무기의 소지 여부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인도와의 국경이 열려 있기 때문에(open border) 인도로 도주한 반군 수뇌부를 검거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부에선 인도가 암묵적으로 반군을 지원한다고 말한다.
“인도와 네팔을 오가는 데 비자가 필요없는 것은 사실이다. 누구나 쉽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범죄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인도가 반군을 지원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 사태를 어떻게 보나. 반군 진압이 가능하다고 보나?
“반군들의 행위는 옳지 않다.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든 간에 다른 사람이 땀흘려 얻은 결과를 공짜로 얻으려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자기들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현재 상황은 점차 좋아지고 있다. 지금 우리 병력이 1만5000명이지만 내년엔 2만5000명으로 규모를 늘릴 계획이다. 이제 관광객들은 안심하고 카트만두를 찾아도 된다.”
◈인터뷰
‘네팔 인민전선’ 릴라 마니 부총재
“반군, 정권 잡기 어려워… 내전 지속될 듯”
네팔 인민전선(People’s Front Nepal)의 릴라 마니 포크렐(Lila Mani Pokhrel) 부총재는 마오이스트가 분리되기 전의 통합 공산당 ‘연합 인민전선(United People’s Front)’의 서기장을 지낸 대표적 좌익인사다. 그의 사상을 말해주듯 거실엔 마르크스·마오쩌둥·레닌·스탈린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말하자 그의 측근은 “북한에서 왔냐?”고 묻기도 했다.
네팔 인민전선과 마오이스트 반군과의 관계는.
“반군 지도자 바타라이 박사와 저는 같은 위원회에서 활동했었다. 우리의 차이점은 이데올로기였다. 박사는 무력이 즉각적으로 개입돼야 한다고 보았고 나는 정부와의 대화, 교육·제도의 개선이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결국 1982년에 갈라섰다.
지금 반군측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
“바타라이 박사가 새로운 조직을 만든 것이 1996년이다. 이후 가끔씩 서로 의견교환은 해 왔다. 하지만 요즘엔 그 사람들이 워낙 깊숙이 숨어 있어서 연락을 못하고 있다.
마오이스트 문제가 이렇게 불거진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나?
“현 정부는 시민을 보호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사람들은 부패한 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다. 특히 기성세대들이 그렇다. 그리고 왕은 불법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왕에게는 총리를 멋대로 쫓아낼 권리가 없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영국의 왕과 같은 상징적 존재였지 독재자가 아니다. 지금 왕은 갈등만 양산하고 있다. 마오이스트 문제도 그 중 하나다.”
반군들이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어렵다고 본다. 반군들은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테러를 두려워할 뿐이다. 반군측은 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도 못했고 조직을 제대로 정비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국제정세도 그들의 뜻과는 다르다. 인도 미국 파키스탄 중국 어느 나라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
정부가 시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반군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없다면 앞으로 상황은 어떻게 될 것이라고 보는가?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다. 왕이 자신의 권리를 일부 포기하고, 마오이스트들은 대화테이블로 나와야 한다. 그렇게 못한다면 내전상태가 지속될 것이다.”
2002년 7월 10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는 장쩌민(江澤民) 당시 국가주석의 흥미로운 동정 기사 하나가 실렸다. “장쩌민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는 중국을 방문 중인 갸넨드라 네팔 국왕에게 반군(叛軍) 소탕전 지원을 약속했다.”
장 주석이 소탕전 지원을 약속한 ‘무장반군’은 ‘마오쩌둥(毛澤東)주의’를 추구하는 네팔 내 공산반군들. 마오주의 반군들은 마오쩌둥이 현직 때 전파했던 과격 정치철학과 노동자·농민 중심의 혁명이념을 100% 수용한 좌파들이다. 세월은 흘렀어도 마오쩌둥의 잔재는 중국이 아닌 이웃 네팔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오쩌둥은 생전엔 물론 1976년 사후(死後) 27년여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 마오주의자들을 ‘반군’이라 칭하고, 소탕전까지 지원하겠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현 중국 지도자들은 이들을 ‘마오 주석 교시에서 벗어난 반(反)혁명분자’ ‘1949년 중국 공산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홍군(紅軍)과는 아무 연계가 없는 테러리스트일 뿐’이라며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또 다른 네팔 모습 한 가지를 추가해 보자. 네팔은 전세계 최다 인구 국가인 중국과 인도 사이 히말라야 산록에 위치해 있다. 국왕이 국가원수 임명과 군 통수권을 행사하는 입헌군주제 국가다.
14년 간 단 하루도 조용할 날 없어
네팔인들은 2001년 6월 1일 나라얀히티 왕궁에서 들려온 ‘밤의 총성’을 잊지 못한다. 밤 10시쯤 디펜드라(당시 30세) 왕세자가 총격을 가해 부친 비렌드라 국왕과 아이스와랴 왕비 등 일가 13명을 살해했다. 왕세자가 왕비와 혼사문제를 논의 중 무차별 총기를 난사한 것이 사건의 전모. 국민들은 왕가, 왕정의 문제점을 확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중국조차 거부하는 마오주의 반군, 자신들끼리 죽고 죽이는 무능한 왕정(王政)…. 네팔인들은 ‘무능한 왕정? 아니면 극단의 마오주의자들?’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어느 쪽 하나 모범답안이 될 수 없다. 차선책마저도 마땅치 않은 혼란 속에서 네팔은 병들어가고 있다.
경제는 20년 이래 최악이다. 인구 2400만명의 1인당 소득은 210달러밖에 안된다.
네팔은 1769년 그르카왕조의 나라얀왕이 네와르족을 정복하면서 통일국가를 수립했다. 1814년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영토를 할양했다가 1923년 환수했고, 184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라나가문이 재상(宰相)을 세습하며 전제정치를 계속했다. 이어 1851년 트루부반왕이 인도의 지원을 받아 왕정을 복고했다.
왕정 국가로 출발했지만 20세기 들어 민주화 요구는 줄기찼다. 비렌드라 국왕은 1990년 민주화세력 요구에 굴복, 입헌군주제와 다당제를 도입했다. 1991년 5월에는 32년 만에 다당제 총선을 실시했다. 절대 군주제는 종식됐지만 민주화 여정이 불과 14년인 네팔은 왕정과 좌파들 간 헤게모니 다툼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마오이스트 좌파들은 민주화시위를 내세우며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지난 2월 2일 수도 카트만두 시내에서 민주개혁을 요구하며 시위가 벌어졌다. 네팔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 곤봉을 사용하며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려 했다. 이날 참여한 시위대 규모만 1만5000여명선. 네팔 정부는 올 들어 거의 매일 발생하는 시위를 차단하기 위해 지난달 말 집회금지 조치를 내렸다.
계급차별·다양한 인종으로 혼란 심화
네팔공산당 등은 2002년 10월 현 갸넨드라 국왕이 총선서 승리한 세르 바하두르 데우바 총리를 해임한 데, 불만을 품고 총파업과 시위를 주도해 왔다. 네팔 내각은 국왕 충성파 수르야 바하두르 타파 총리가 장악 중이다.
시위대들은 2002년 합법적인 선거결과를 무시하고, 총리 해임과 의회 해산조치를 번복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2002년 6월 총선 결과 네팔공산당은 최대 야당이었다. 당시 세르 바하두르 데우바 총리 역시 공산당이 지원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국왕은 ‘무능하다’는 이유로 총리를 해임했고, 총선도 무기한 연기시켰다.
네팔인들은 ‘좌파들의 민주화 시위’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민주화 시위 종착점이 ‘네팔의 공산화’일지 모르기 때문. 민주화 시위를 주도하는 네팔공산당 수바위 넴왕 총재는 열렬한 마르크스·레닌 신봉자. 당의 공식명칭도 ‘네팔공산당·연합마르크스레닌주의자당(黨)’이다.
시위 세력의 배후에 반군이 있다. 네팔인들이 반군 공격에 항의시위를 벌이는 것도 일종의 공산화 움직임에 대한 항의 표현이다. 네팔인들은 1996년 마오주의 실현을 위해 왕정타도를 선언한 반군과 정부군의 끝없는 살상전에 지쳐 있다. 마오주의 반군들이 출범한 1996년 이후 양측 충돌 과정에서 8000~9000여명이 숨졌다. 억울한 민간인 희생자들도 포함돼 있다. 충돌은 최근 더 격렬해져 작년 8월 7개월간 유지됐던 양측 휴전이 깨진 후 무려 10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네팔의 비극은 독특한 계급차별, 다양한 인종적 구성 때문에 더 심화되고 있다. 네팔에도 인도 카스트제도와 비슷한 계층차별 악습이 남아 있다. 공산당 지도부 역시 인도 브라민(Brarmins)과 같은 상층부 바훈(Bahun) 또는 체트리스(Chhetris) 계층. 이들은 하급계층인 몽골족 혈통 마가르(Magars)족, 전통적 반정부 기질의 람푸르·시말타라 지역 타루스(Tharus)인들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신분상승 욕구를 부채질하며 반정부 세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어 미래는 더 어둡다. 반군들은 “정치적 결정을 전제하지 않는 협상은 의미 없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마오쩌둥의 3단계 전략, 즉 ‘전략적 수비, 현상유지, 전략적 공격’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최근에는 ‘전략적 공세단계’로 옮길 움직임이다. 반군은 1996년 출범 이후 네팔(14만5000㎢)의 4분의 1을 장악, 공산당 깃발을 꽂았다.
갸넨드라 국왕이 수르야 바하두르 타파 총리가 이끄는 현 내각을 교체하고 총선을 다시 치를 것 같지도 않다. 타파 총리는 친군 주제 정당 라스트리아 프라자탄트라당을 이끌고 있고, 국왕 충성파이기 때문이다. 정부군과 반군간 살상전, 반군의 요인 암살, 끊임없는 파업과 좌파 민주화 시위…. 승자는 알 수 없지만 패자는 분명하다. 그들은 정부군과 반군의 십자포화 속에 이유없이 죽어가는 평범한 네팔 국민들이다.
♠ 발행일 : 2004.02.19
♠ 기고자 : 이광회
특히 마지막 기사는 김동민 기자가 문제삼았던 이광회 홍콩특파원의 기사입니다.
과연 김동민 기자의 주장대로 이들 기사가 네팔문제를 왜곡보도한 것인가요?
오히려 조선일보는 국내 다른 언론사들보다도 네팔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직접 네팔로 날아가서 사실확인을 한 것은 물론 네팔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통받고 있는 네팔 국민들의 실상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저 데스크에 앉아 다른 외신보도들을 취합해서 자기들 구미에 맞게 포장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죠.
그런 의미에서 김동민 기자는 다른 기사들은 찾아보지도 않은 채 단지 2월 4일자 조선일보 보도만을 열흘이 지난 다음에야 새삼 끄집어내어 문제삼는, 뒷북을 치고 있습니다.
더구나 겨우 3박 4일간 네팔을 다녀온 짧은 경험만을 자신하고 위의 기사를 논박하는 무모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민주화라는 명분, 민주세력이란 보호막 뒤에서 암약하는 폭력혁명세력의 실체를 조선일보가 정확히 지적한 것이 뜨끔하면서도 지적에 대한 반감에서 그런 기사를 낸 것은 아닐까요?
오마이뉴스의 논조 중 하나가 조선일보 꼬투리잡기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이번 기사 역시 그러한 취지에서 올렸다고 보여집니다.
그렇지만 기사화하려면 방정맞게 촐랑거리지 말고 보다 신중한 자세로 꼼꼼히 살펴봐야 하는 게 정석 아닐까요?
첫댓글꼬투리 잡기식이건 뭐건 오마이가 추구하는 세계는 진정 무엇인지 국민이 빨리 알게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민중의 소리같은 빨갱이 소리가 버젓이 다음의 신문및 사이버뉴스 세계에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보며, 우리 사회의 좌경화가 얼마나 많이 진행되었는지 더욱 보게 됩니다. 오마이를 등에 업고 노무현
정권이 출현했고, 노무현이 죽일 듯이 싫어하는 <조선일보>, 그래서 조선일보의 보도는 무조건 <딴지걸기>로 일관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오마이의 모든 논조와 색깔을 그야말로 노동자, 농민을 이용한 프로레타리아 혁명의 완성이라며, 무산자를 그야말로 속이고, 선동하고, 이용하는 전술전략에 충실하고 있
는 모습으로 밖엔 비춰지지 않는군요. 2002년 초인 걸로 기억되는데, 아느 후배가 오마이뉴스의 기자라며, 글을 올려 '병풍 사건'을 힐날하게 비판하고, 햇볕정책을 극찬하던 글을 쓴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과거의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나온 참 민주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배는 크리스찬이거든요. 그런데 단 2년 밖에 지나지 않는 지금 오마이가 진정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로 모여진 언로인가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아니다>는 걸 알 수 있는 현실이 되었지만, 한국의 젊은 네티즌들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이 새롭고, 희망한 미래를 향한 새로운 추구
첫댓글 꼬투리 잡기식이건 뭐건 오마이가 추구하는 세계는 진정 무엇인지 국민이 빨리 알게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민중의 소리같은 빨갱이 소리가 버젓이 다음의 신문및 사이버뉴스 세계에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보며, 우리 사회의 좌경화가 얼마나 많이 진행되었는지 더욱 보게 됩니다. 오마이를 등에 업고 노무현
정권이 출현했고, 노무현이 죽일 듯이 싫어하는 <조선일보>, 그래서 조선일보의 보도는 무조건 <딴지걸기>로 일관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오마이의 모든 논조와 색깔을 그야말로 노동자, 농민을 이용한 프로레타리아 혁명의 완성이라며, 무산자를 그야말로 속이고, 선동하고, 이용하는 전술전략에 충실하고 있
는 모습으로 밖엔 비춰지지 않는군요. 2002년 초인 걸로 기억되는데, 아느 후배가 오마이뉴스의 기자라며, 글을 올려 '병풍 사건'을 힐날하게 비판하고, 햇볕정책을 극찬하던 글을 쓴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과거의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나온 참 민주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배는 크리스찬이거든요. 그런데 단 2년 밖에 지나지 않는 지금 오마이가 진정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로 모여진 언로인가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아니다>는 걸 알 수 있는 현실이 되었지만, 한국의 젊은 네티즌들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이 새롭고, 희망한 미래를 향한 새로운 추구
로 착각하고 있고, 착각해 가고 있다는 현실이 너무 숨이 막힙니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 혁명전술의 주요 전략이겠죠. 공산당의 인터넷 전술은 너무 잘 먹혀 버렸네요. 자유 네티즌이 더욱 힘을 규합해서 이를 분쇄해 나가야 할텐데,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