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道峯)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人跡)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도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은,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시집 『해』, 1949)
[어휘풀이]
-어스름 : 조금 어둑한 상태
[작품해설]
시작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박두진은 자연을 시의 유일한 대상으로 삼아 왔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다른 시인들처럼 현실 도피의 수단이나 단순한 서경의 대상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 이입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현실 참여의 한 방편으로서 ‘삶을 위한 자연’이었다.
박두진의 시가 대부분 희망에 찬 열띤 목소리로 긍정적인 신념을 노래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이 시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외로운 심경을 감미롭고 애조(哀調) 띤 서정성으로 표출함으로써 짙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본원적 고독과 적막한 정서를 시간의 흐름의 변모 과정과 대응시켜 절제된 율감(律感)의 시어로 형상화한 이 시는 내용에 따라 1~3연, 4~8연, 9~10연의 3단락으로 나누어 진다.
첫째 단락은 가을 산의 고적한 모습과 화자의 외로운 정황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점차 어두워져 가는 어스름 때에 산새도 구름도 없는 가을 산에 화자 홀로 앉아 있다. 따라서 가을 산은 벗할 존재가 없는 화자의 외로움을 한층 심화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둘째 단락은 화자의 내면세계를 관조적으로 보여 주는 부분이다. 인적 끊인 가을 산에 외로이 앉아 있는 화자는 대답할 사람이 없는데도 소리 높여 불러 본다. 그러나 그것이 헛된 메아리로 돌아옴으로써 자신의 허전하고 적막한 내면의 고통을 더욱 심화 확대시킬 뿐이다. 화자는, 황혼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이 오면 별이 뜨는 자연의 원리처럼, 삶의 고독과 사랑의 고통은 인간이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절대적 원리이자 숙명으로 인식한다. 점점 어두워져 가는 시간적 흐름에 따라 화자의 심경도 점차 우울해지는 정서의 변화가 드러나는 한편, 그에 따라 화자가 겪는 사랑의 고통 역시 점점 더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단락은 ‘그대’을 향한 그리움을 나타낸 부분이다. 그리움의 대상인 ‘그대’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화자는 그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화자의 이 같은 외로움이 ‘그대’에 대한 그리움을 심화시키지만, 결국 그 그리움은 자기 위안과 같은 애잔한 슬픔을 낳는다. 어둠과 괴로움을 인내하는 것은 떠나간 ‘그대’를 염려하는 사랑의 표현이지만, 현실적 고통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그를 괴롭힌다. ‘이제도’라는 시어는 ‘그대’를 향한 화자의 영원한 사랑을 함축하고 있으나, 바로 이 사랑 때문에 그는 끝내 슬픔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화자가 갖는 슬픔은 오히려 자신의 삶과 현실에 대한 진솔한 인식과 긴장의 원천이 됨으로써 ‘그대’를 향한 한층 심화된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작가소개]
박두진(朴斗鎭)
혜산(兮山)
1916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40년 『문장』에서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낙엽송(落葉頌)」, 「의(蟻)」, 「들국화」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
1956년 제4회 아세아 자유문학상 수상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1970년 3.1문화상 수상
1976년 예술원상 수상
1981년 연세대학교 교수로 정년 퇴임
1984년 박두진 전집 간행
1989년 제1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1998년 사망
시집 : 『청록집』(1946), 『해』(1949), 『오도(午禱』(1953), 『거미와 성좌』(1962), 『인간밀림』 (1963), 『하얀날개』(1967), 『고산식물』(1973), 『사도행전』(1973), 『수석열전』(1973),
『속 수석열전』(1976), 『야생대(野生代)』(1981), 『에레미야의 노래』(1981), 『포옹무한』 (1981), 『박두진시집』(1983), 『박두진=한국현대시문학대계 20』(1983), 『박두진전집』 (1984), 『별들의 여름』(1986), 『그래도 해는 뜬다』(1986), 『돌과 사랑』(1987), 『일어 나는 바다』(1987), 『성고독』(1987), 『불사조의 노래』(1987), 『서한체(書翰體)』(1989), 『가시 면류관』(1989), 『빙벽을 깬다』(1990), 『폭양에 무릎 꿇고』(1995), 『숲에는 새 소리가』(1996), 『고향에 다시 갔더니』(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