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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틀 간(12/18~19) 영주 순흥의 아름다운 문화여행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소백산자락길을 관리하는 영주문화연구회와 영주시의 후원으로 다녀왔습니다.
부석사와 소수서원으로 대변되는 유교와 불교의 명소 순흥을 1박2일 여행의 후기로 안내합니다.
*이번 여행은 한국걷기동호회연합의 회원단체인
(금수강산, 발도행, 산들걷기, 세상걷기, 유유자적 등 다섯 동호회가 함께 했습니다.)
영주문화연구회의 배용호 위원장님께서 1박2일간 직접 동행하시며
영주 순흥의 찬란하고, 장엄하고, 때론 가슴 아픈 역사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45년간 교직에 계시며 후학을 양성하셨으며, 지금은 고향을 위해 이렇게 봉사해주고 계십니다.
덕분에 이번 여행에 참가한 40명은 순흥의 진면목과 핵심들을 짧은 기간에 효율적으로
보고 체험하고 갈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처음 간 곳은 순흥 읍내리 고분벽화를 보러 가는 길입니다.
이 순흥 일대에는 이러한 고분이 약 2천기 정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만,
거의 대부분이 다 도굴되어서 아쉬움이 크다고 합니다.
좁은 문을 통해 고분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물론 이 고분은 모형입니다. 대개의 고분들은 보존을 위해 보존처리를 한 후 묻어두고,
이렇게 똑같은 모형을 만들어서 공개관람한다고 합니다.
고분 입구의 그림들은 수호신의 개념인 신장 그림인 듯합니다.
배 위원장님께서 자세하게 7~8명씩 들어오게 하여 설명해주십니다.
이런 고분 문화는 고구려 문화로써 당시 순흥이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이어서
각 나라의 세력이 커질 때마다 이곳 순흥은 고구려 땅이기도 했고, 신라땅이도 했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나라가 바뀌는 일을 자주 경험했던 당시 이곳 민초들의 삶이 그다지 순탄치는 않았을 것 같네요. T.T
기미년이라는 갑자를 통해 진평왕 연간인 599년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인데,
갑자라는 것이 60년마다 한번씩 돌아오기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글씨 하단 우측의 깃발 모양을 두고, 일본에서 남자어린이날(5월5일)에 집 밖에 아이의 장수와 발전을 기원하는
잉어깃발(고이노보리)의 시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윤곽은 엇비슷한 면이 있습니다만
디테일하게는 다른 것 같다고도 보여집니다.(개인견해) ^^;
실제 고분에는 이런 벽화가 남아 있지 않아 적외선 등의 특수 촬영을 통해 지워진 그림을 찾아내
복재하며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즉, 실제 고분에는 설령 들어가도 이런 그림을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는 뜻이지요.
연꽃 모양의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문화와 연관되어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역시 발빠른 네엔스님은 고분 원형이 있는 언덕을 오르십니다.
하지만 250M나 떨어져 있어서 곧 내려오셨답니다.
위에서 내려본 고분군
산들걷기에서 가장 많은 열 분이 오셨습니다. ^^
발견이의 도보여행은 아홉 명이 참가했습니다. 짱구삼춘님은 어디로?
발굴된 순흥지역의 고분 중에 가장 큰 태장리1호분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6세기 전후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걷기에서 다섯 분이 오셨습니다. ^^
맛나는 점심시간, 순흥에 오면 빼먹지 말고 먹어주어야 하는 순흥묵밥집입니다.
겨울이어서 따듯한 국물에 묵밥이 제공되더군요.
여러번 먹어봤는데, 역시 맛납니다. ^^
순흥 읍성의 흔적들.
옛 순흥도호부 시절 관청건물이 있던 곳에 읍사무소가 있고 여러 유물들이 있습니다.
배 위원장님께서 우리나라 문화마을 1호인 '읍내리 문화마을'에 대해 설명중이십니다.
순흥 읍내리가 문화마을 1호로 지정된 것에는 여러 마을전통민속행사가 있어서 그랬다고 합니다.
두례골 성황제, 읍내리 농악, 동서부줄다리기 등이 그런 것입니다.
이런 민속문화의 발달은 양반문화가 아닌 평민문화가 고도화 된 지역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답니다.
서민문화가 커지게 된 이유는 2차 단종복위운동이었던 정축지변(1457, 세조3년) 당시 이곳으로
위리안치된 금성대군과 뜻을 같이한 부사 이보흠, 그리고 이 지역의 토호였던 순흥 안 씨 등등의
양반 가문을 완전히 발본색원하고, 도호부를 폐쇄한 일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이때 양반 가문들이 완전히 몰락하여 서민문화가 발달되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후에 소수서원을 통해 다시 유교문화가 순흥에 뿌리를 내리지만 정축지변의 영향은 이리도 컸던 모양입니다.
※위리안치는 유배의 한 종류로 자신의 연고가 있는 지역으로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가시덤불을 친
담벼락 안의 집에 갇히는 벌입니다. 지금도 소백산자락길 1코스를 걷다보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 된 집을 복원해 놓은 곳을 볼 수 있습니다.
※금성대군이 이곳으로 위리안치된 이유는 외조모, 즉 세종의 장모 되는 분의 고향이라는 이유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은 왜 금성대군을 이쪽으로 귀양보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곳은 단종이
유배된 청룡포와 불과 80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거든요.
당시 걸음으로 밤을 새워 다녀올 수 있는 거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백산자락길 12코스의 길은 금성대군 내통길이라는 별칭이 있다고 합니다.
오랜 역사가 서린 지역의 읍, 면, 동, 군, 시 사무소 앞에 보면
늘 이런 늠름한 노거수들이 위엄을 세워줍니다. 오른쪽의 소나무는 연리지입니다. ^^
면사무소 한쪽에 남아 있는 옛 순흥도호보 시적의 관아건물 주초석과 비석좌대 등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도에 해당되는 도호부였으니 순흥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을 지 짐작해봅니다.
옛 도호부 자리 옆에는 멋진 한국식 정원이 자리합니다.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원칙에 따라 둥글고 네모난 연못을 이어 만든 이곳 너머로
지금의 경로당 같은 역할을 했던 조선시대의 경로소 건물이 보입니다.
인공인 듯 인공이지 않은 듯한 한국식 원림입니다.
팔작지붕에 간결한 공포로 단정한 느낌을 주는 건물입니다.
긴 부연을 통해 노인들이 쉴만한 그늘과 겨울의 채광을 돕는 구조입니다.
안에서 어느분이 전화통화를 하고 계시네요.
지금도 실제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역시 집은 사람이 살면서 관리해야... ^^;
함께 하신 분들 단체사진 찰칵! ^^
차를 잠시 타고 이동하여 소수서원에 도착합니다.
소수서원은 진입로의 솔숲이 아주 근사하지요.
소수서원에 들기 전에 만나는 숙수사지 당간지주 입니다.
당간지주란 절 입구에서 절의 영역을 알려주는 높은 깃발(당)을 세우던 깃대를 고정하는 역할을
한 석조물입니다.
당간지주의 크기를 갖고도 가람의 크기와 위세를 짐작하곤 하는데요.
숙수사지 당간지주의 크기나 위용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크기로 치면 강릉의 굴산사터 당간지주가 가장 크지만 조형미로 보자면
미끈한 멋을 간직한 숙수사지 당간지주의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소수서원과 소백산 초암사 계곡을 잇는 물줄기인 죽계천을 두고 죽계구곡이라고 합니다.
고려 때 문장가인 안축이 지은 '죽계별곡'의 배경이 된 곳이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퇴계 이황 선생은 이곳부터 1곡을 쳐서 상류로 향했으나, 순흥 부사 신필하가 상류부터 바위에
1곡을 새겨 놓은 탓에 그것이 굳어져서 지금에 이른다고 합니다.
죽계천 앞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다른 서원에 비해 매우 개성적인 건물배치를 하고 있는 소수서원으로 입장합니다.
1543년 지어져 강당으로 쓰이는 명륜당은 대규모 공사중이네요.
선생님들이 기거하시던 직방제 건물의 처마선이 참 곱습니다.
직방제 마루에 난간이 있는 것은 선생님 방에서 뒷걸음질로 나오는 학생들이
마당으로 자칫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의 뜻도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으셨습니다. ^^
영정각의 고운 처마선을 배경으로 소수서원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소수서원은 중종37년인 1542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고려 때 주자학을 조선에 받아들인
안향을 기리면서 세운 백운동서원이 그 시초라고 합니다.
백운동서원을 처음 세울 당시 기근이 심했음에도 서원 건립을 추진했다는 말을 보면 서민을 위한 정책에는
무관심한 관리이지 않나 싶다가도 당시 중국으로 보내던 산삼공출의 어려움을 줄이기 위해 인삼 재배를
통해 서민의 고통을 줄인 공로도 있다니 판단은 유배해야 할 듯 합니다.
인삼재배를 통해 서민고통이 진짜로 줄었는지 아니면 그로 인해 공납 과정에서 이득을 챙기던
상인과 관료의 배만 더 불러졌는지는 알수 없으나, 아무튼 기록에 의한 것은 그렇다고 합니다.
백운동서원 건립 이후 이곳에 부임한 퇴계 이황 군수가 명종 때 상소를 올려 소수서원이라는
명종 친필의 편액을 받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됩니다.
'사액서원'이란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을 나라에서 공식 인정한다는 뜻으로 보통 임금의 친필 편액이
하사되곤 했답니다.
소수서원은 고종8년인 1871년 붕당정치의 온상이자 온갖 폐해의 온상으로 지목된 서원들을 없애기
위해 대원군이 실시한 서원 철폐령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이름이 높습니다.
당시 훼철되어 문을 닫은 서원이 600여곳 정도 된다고 하니, 소수서원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직방재 뒤쪽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자연스럽게 놓인 듯한 추춧돌 위에 올라선 기둥과 단순하지만 단단함이 느껴지는
공포부의 짜임에서 단아한 선비의 기품이 보입니다.
학생들이 기거했던 곳인가 봅니다. 지락재입니다.
소수서원 박물관 가는 길
소수서원을 있게 한 다섯 분의 흉상입니다. 이 다섯 분을 아는 것은 소수서원의 맥을 짚는 일이기도 합니다.
왼쪽부터 공자입니다.
기원전 6세기 경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정치사상가로 유교를 처음 연 개조입니다.
두번째가 주자로 역시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12세기 경 유교의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창시합니다. 그의 우주론은 정신정인 이와 현실적인 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고려말, 조선의 유교정신에 근간을 이룹니다.
세번째, 즉 중앙에 계신 안양 선생은 고려말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성리학(주자학)을 배워 고려에 전파하여 크게 유행을 시킵니다.
그 결과 주자학(성리학)은 조선 개국의 사상적 기반이 되게 됩니다.
네번째 주세붕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소수서원의 전신인 백운동서원을 세워 안향 선생을
기리는 교육기관으로 세웁니다.
마지막 이황 선생은 백운동서원이 사액을 받아 공식적인 서원으로 자리하도록 만든 분입니다.
관람을 모두 마치고 다시 주차장으로 가는 일행을 아름다운 수형의 소나무 한그루가 배웅해줍니다.
주차장의 기이하게 잘 생긴 소나무 한그루
저 쉽지 않는 휨새의 시작은 아픈 상처가 아니었을지...
이곳은 봉화군 물아면의 문수산 축서사입니다.
순흥도호부 시절에는 이곳도 도호부 관할이어서 순흥문화권 안에 있는 곳이지요.
부석사 개창 3년 전인 673년 의상대사에 의해 세워진 절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폐사되다 시피 한 것을
1988년부터 이곳에 머무시던 금곡 무여 큰스님께서 중창불사를 하시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영주 부석사의 느낌을 일부 받을 수 있습니다.
배 위원장님의 설명처럼 의상대사께서 부석사를 세우기 전 연습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축서사란 이름은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법하셨다고 하는 고대 인도 영축산의 '취(鷲)'자를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 글자는 축 혹은 취로도 읽는다고 하네요.
서는 깃들 서(棲)를 씁니다. 즉, 부처님의 화엄경 설법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겠네요.
멀리 사리탑을 향해 기도를 하는 기도처인 보탑성전이 보입니다.
보탑성전 계단을 등지고 바라본 모습 멀리 소백산맥의 연봉들이 줄지어 갑니다.
여기서도 찰칵!
첫댓글 소백산자락길 이어걷기 1구간 걷기 시작에서 소수서원을 관람하기 못해 서운했었는데 여기 후기에서 세세히 관람 하고 갑니다
설명 감사드립니다^^
상세한설명에 멋진후기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