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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과 니체, 그리고 토마스 만 변증법과 차라투스트라, 그리고 한스 카스토르프 ⁃ 발전적 삶에 대하여 ⁃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
존재들의 발전에 대한 단계적인 설명은 플라톤(Plato n) 시대부터 무수히 시도되었지만 헤겔(Georg Wihe Im Friedrich Hegel)만큼 파격적이면서 체계적으로 또 정확하게 설명한 사람은 없었다. 헤겔은 변증법(Di alektik, )이라는 논리를 통해 이 세계의 운동 원리를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헤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독일 관념 철학이 완성되었으며 전근대적 속박에서의 진정한 이성 해방 선언이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헤겔의 철학은 이성의 근대적 해방을 낳았는데 이러한 그의 철학을 관념론적 변증법이라고 지칭한다. 헤겔은 감정, 이성과 함께 신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존재까지 정신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을 통해 설명한다. 헤겔은 세계 현상과 변화에 대한 통일적 설명을 정신의 발전 과정으로 정리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관념론적 변증법을 통해 독일의 관념 철학을 완성한 헤겔
본래 변증법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dialektike'에 유래 한다. 이 단어는 대화술, 문답법, 또는 변증술이라는 뜻 으로 쓰이는데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 에서 변증 술]을 철학자가 배워야할 본곡(nomos)이라고 소개한다.
이처럼 그리스 철학의 대가인 플라톤도 언급한 바 있는 변증술은 제논(Zenon)이 창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제논은 변증술을 상대방의 입장에 어떤 자기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논의 변증술이 헤겔의 변증법과는 차이가 있지만, 제논이 지적한 상대방의 자기모순이 헤겔의 변증법에 그대로 수용된다는 점이다. 헤겔의 변증법을 이른바
존재의 자기모순 극복 과정이라고도 설명하는데 헤겔의 자기모순 개념이 변증법의 어원인 'dialektike'에 이미 포함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헤겔의 변증법은 세계의 운동 원리에 대한 해명이다. 헤겔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자기모순인 상태로 존재한다. 자기모순을 인식하지 못한 즉자존재는 어느 순간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는데 바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마주하는 이 존재가 대자존재다.대자존재로 이르러 자기를 대면함으로써 즉자존재일 때에는 인식하지 못한 자기모순이 비로소 발견되고 즉자존재는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정립된 것과 반대되는 것 사이의 모순은 둘 간의 대립을 창출하며 존재는 끊임없이 자기모순과의 화해를 시도한다. 헤겔은 정립된 것과 반대되는 것의 대립을 대립 그 자체로 보지 않고 발전으로의 단계적 과정으로 규정한다. 이는 대자존재에 이른 존재가 자기모순을 극복함으로써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자기 모순을 극복한 존재는 이제 대자존재에서 즉자-대자존재다. 자기모순과의 화해, 자기모순의 극복은 즉자존재에게 있어서 발전의 초석으로 작용함과 동시에 대립이 아닌 조화의 상태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이렇듯 자기모순을 극복하여 한 단계 발전하는 것을 지양(Aufheben, )이라고 부른다.
한국어에서 흔히 '지양'이라는 단어는 '지향'과 대조적으로 쓰여, 어떤 것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라는 부정적인 뜻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 지양이라는 단어는 부정의 의미만 내포한다기보다는 부정을 통한 발전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지'와 '양' 즉 자기모순을 그치고, 즉자-대자존재로 오르는' 과정을 지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양을 통해 즉자존재는 즉자-대자존재로의 발전적 회귀를 완성 한다.
즉자존재였던 존재는 대자존재로 나아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마주한 다음, 발견한 자기모순을 극복하면서 다시 즉자존재로 되돌아온다. 말하자면 즉자-대자존재는 한 단계 발전한 즉자존재와 같다. 그러나 이때의 즉자존재는 이전의 즉자존재와는 다르다. 대자존재를 한 번 거쳐 지양한 즉자존재는 전보다 한 단계 성장한 즉자존재이며 대자존재였을 때 발견한 자기모순을 극복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즉자 존재는 한 단계 성장한 상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자존재라는 점에서 또다시 자기모순을 내포한다는 데에 있다. 한 단계 발전한 즉자존재도 다시 대자존재로 나아가 자기모순을 발견하며 그것을 극복하면서 또 다시 즉자-대자존재가 된다. 또 즉자-대자존재는 한 단계
발전한 즉자존재로서 다시 또 다른 자기모순을 내포한다. 이처럼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은 한 단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단계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지양할 수 있는 초석으로 작용한 자기모순의 부정은 생산적인 성격을 띤다. 자기모순은 극복되어야 할
부정적인 요소지만 자기모순을 발견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전한다는 점이 부정의 생산적인 성격을 나타
내는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설명이 전문적인 용어로 전개되었지만 이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현존재인 인간 또한 존재의 하나이기 때문에 발전에 있어서 변증법적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가령 우리는
운동선수들이 끊임없이 연습을 하는 것을 흔한 예로 접할 수 있다. 운동선수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연습 장면을 녹화하여 다시 보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운동할
때 자기도 모르는 잘못된 습관을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막상 운동할 때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좋지 않은 습관들이 자신을 녹화한 영상을 보면 객관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영상을 통한 반성은
필수적인 과정이다. 영상으로 자신의 습관을 확인한 운동선수는 다음 연습 때에는 그 습관을 고치고 바른 자세로, 좀 더 효과적인 자세로 운동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버릇을 고치면 한 단계 더 나
은 운동선수가 된다.
운동선수에 변증법적 과정을 적용할 수 있다. 헤겔식으로 다시 표현하자면 운동선수는 즉자존재인 상태에서
연습을 꾸준히 한다. 즉자존재는 연습이 끝나고 자신의
모습을 녹화한 영상을 시청하게 되는데 이로써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이 가능해진다. 이 때 대자존재로
나아간 운동선수는 습관, 즉 자기모순을 발견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마침내 자기모순을 극복한 운동선수는 즉자-대자존재로 지양하여 더 나은 운동선수
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되풀이되며 운동선수는
시간이 갈수록 기량이 향상된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변증법적 발전 과정은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확장시키면 역사의 발전과정과도 연결된다. 헤겔은 역사를 진리의 생성 과정이라고 정의했는데 헤겔에 의하면 진리를 생성하는 이러한 역사 속에서 정신이 실현된다. 역사 속에서 정신은 주관 정신, 객관정신, 절대정신으로 실현되는데 역사는 이러한 정신의 변천 과정의 기술이라는 것이 헤겔의 주장이다.
1) 주관정신은 개인적 감정, 이성으로 발현되는 반면
2) 객관정신은 법이나 제도 등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장한다.
3) 마지막으로 절대정신은 흔히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로 발현한다. 헤겔은 이 세 가지 정신 중에서 궁극적인 지향점을 절대정신이라고 말한다. 헤겔에 따르면 절대 정신은 최종적인 철학, 절대적 진리의 표명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담이지만, 헤겔의 변증법을 정반합)이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적절치 않다. 정반합은 헤겔의 변증법을 논의할 때 개념 정의를 위해 간헐적으로라도 등장하는 용어지만, 실제로 헤겔은 변증법에 대해 정반합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정반합 도식은 난해한 헤겔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하인리히 모리츠 살리베우스(Heinrich Moritz Chalybaus)가 처음으로 도입한 개념이다. 그러나 이는 변증법을 단순히 도식화한 것에 불과하므로 헤겔의 변증법에 내포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즉자존재, 대자존재, 즉자-대자존재로 치환하여 이해해야 한다.
헤겔을 살해하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관념론적 변증법으로 대표되는 헤겔의 철학으로 독일의 관념 철학은 완성됐다. 그러나 서양철학사의 중요한
한 획을 그은 헤겔도 이후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의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헤겔을 비판한 철학자로는 대표적으로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가 있다. 두 사람은 각각 반변증법, 부정변증법으로 헤겔의 전통적인 관념론적 변증법을 비판했는데 주목할 점은 둘 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철학을 활용해 헤겔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특히 들뢰즈의 경우에는 니체로 헤겔을 살해했다는 평가까지 받으며 헤겔 철학을 난도질했다.
그렇다면 니체의 철학이 도대체 어떻길래 헤겔의 철학을 난도질할 수 있었을까. 니체는 수많은 문제작을 남긴 철학자이지만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 꼽히는 것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흔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니체 철학의 입문서라고 보기도 하는데 사실상 이 책은 니체의 철학을 총망라해놓은 최종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니체의 [차 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는 니체의 철학이 비유와 상징을 통해 문학적으로 드러나는데 니체의 철학을 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접한다면 단지 한 사람의 넋두리처럼 들릴 뿐이다. 니체의 철학이 압축된 [차 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통해 니체를 알아보자.
니체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위버멘쉬(Ub ermensch)'다. 위버멘쉬는 한국어로 달리 번역할 수가 없다. 영미권에서 간혹 'overman'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또한 위버멘쉬와 비슷할 뿐 완전한 위버멘쉬의 뜻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혹자는 위버멘쉬를 초인으로 변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오류이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인간의 존재를 뛰어넘은 이상상이긴 하지만 이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인 초인은 초자연적이고 형이상학 적인 존재로 나아갔다는 뜻을 내포하는데 위버멘쉬는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위버멘쉬는 인간이 살아가는 이 대지, 현실에서 충분히 실현이 가능한 존재이다. 위버멘쉬는 대지에서 완성되는 가능태이기 때문에 니체의 위버멘쉬를 형이상학적인 존재로 일컬어지는 초인으로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니체의 위버멘쉬에 대한 특징
진정한 자유를 체득한 존재
창조력은 육체의 활발한 생명에서 파생.
육체의 향락-디오니소스적인 향락, 즉 무언가를 생산하고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창출할 수 있는 활발한 향락
위의 설명에서 니체의 위버멘쉬에 대한 특징을 알아볼
수 있다. 니체의 위버멘쉬를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존재에서 발전해 진정한 자유를
체득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인간은 나약하고
연약하며 불완전하다. 이는 힘에 복종하는 그들의 노예
근성에서 연유하는데 니체는 나약함을 선으로 여기는
기독교적인 노예 도덕을 부정하며 로마 시대의 귀족들이 중시한 힘에의 의지, 즉 주인 도덕을 추구했다. 위버멘쉬는 나약한 노예 도덕으로 살아가는 인간과 대조적으로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무언가를 창조하는 능력을 함양한다. 그리고 그의 힘은 정신보다는 육체, 즉 생명력에 원천을 두어 위버멘쉬의 창조력은 육체의 활발한 생명에서 파생된다. 즉 니체는 정신보다는 육체를 중시하여 육체의 향락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니체가 말하는 향락은 쾌락주의적이고 맹목적이며 동물적인 쾌락이 아닌 이른바 디오니소스적인 향락, 즉 무언가를 생산하고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창출할 수 있는 활발한 향락을 가리킨다
정리하자면 위버멘쉬는 생명력과 힘에의 의지를 통해 무언가를 창조하고, 진정 자유로운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서는 충분히 몰락해야 한다.
인간을 지탱하는 도덕, 법, 종교를 무너뜨려 하늘로 향하던 시선을 대지로 내려 오게 하는 것. 그것이 몰락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나는 몰락하는 자들을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몰락은 언뜻 이해하기에 인간에서 더 하등한 존재로의
몰락이란 뜻으로 다가오지만 니체가 말하는 몰락은 그와는 다르다. 당시에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립할 수 있게 하는 존재 근거는 도덕과 법, 그리고 종교였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도덕을 아는 존재였고 법을 준수할
능력이 있었으며 신이라는 존재를 섬길 수 있었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인간을 구속하고 노예 상태로 빠뜨리는 요소였다. 인간이 추구하는
도덕은 위에서 지적한 나약함이 선으로 여겨지는 노예
도덕이라는 것이다. 법 또한 인간을 구속시키는 제도로
여겨졌고 기독교의 신은 모든 것의 원죄였다. 나약함이
선으로 여겨지는 노예 도덕 또한 신의 전언인 "가난한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다."에서 피어올랐고 신을 추앙하는 인간의 모습은 가히 주인을 섬기는 노예의 그것과
같았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니체는 인간을 지탱하는 도덕, 법, 종교를 무너뜨리는 한 가지 말을 외친다
"신은 죽었다!" 이 선언은 단순히 신의 존재의 부정의
의미가 아니다. 당시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해주는
도덕과 법, 종교를 모두 와해시키는 파격적인 말이며
이는 곧 인간 존재의 존립 위기를 의미했다. 니체는 하늘로 향하던 당시의 시선을 대지로 끌어내려와 인간이 인간 본연에 집중하기를 원했다. 하늘에서 대지로 내려 오는 것. 그것이 바로 몰락이다. 도덕, 법, 종교를 부정 하면서 인간은 존립 위기를 맞이했다. 니체가 말하는 몰락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그들을 밑받침하던 초석을 잃어버렸지만 이것은 오히려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 로움을 선사한다. 도덕과 법과 종교를 잃어버린 인간은 인간으로서 몰락했지만 위버멘쉬로서 발전할 수 있다 도덕과 법과 종교는 인간을 속박하는 목줄인 것을 인식 해야 한다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향락은 일차적 쾌락과 구분되는 창조적인 힘의 원천이다
영원회귀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과 더불어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영원회귀 사상이다. 영원회귀는 문자 그대로 세계가 영원히 회귀한다는 개념이다. A란 상태가 지금 이 시점에 나타난다면 이는 언젠가 그대로 A란 상태로 나타나고 또 A란 상태가 사라진 이후에 다시 A란 상태로 나타난다. 이렇게 영원히 반복되는 수레바퀴처럼 세계가 운동한다는 생각이 니체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영원 회귀 사상이다. 영원회귀 사상은 자칫 잘못하면 극단적인 허무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모든 것은 반복되니 지금 이 상태에서 발전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그래서 허무주의자들은 의외로 쾌락주의자로 변질 되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생각에 감각적이고 일차원적인 쾌락에 집중하는 경우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대처 방법을 소극적이라고 지적하며 영원 회귀 속에서 위버멘쉬를 실현하는 것이 옳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영원회귀라는 영원한 수레바퀴 속에서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행위이고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과 정에서 소극적 쾌락과는 다른 적극적인 향락을 느낄 수 있다.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향락은 일차원적 쾌락과 확 실히 구분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니체가 말하는 니힐 리즘(nihilism) 또한 무력한 허무주의와 구분해야할 것이다. 니체의 니힐리즘은 단순히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능동적 허무를 가리킨다. 존재 가치를 발현시키는 위버멘쉬로
대략적으로 살펴본 니체의 철학에서 헤겔과 반대되는
입장이 나타난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이 정신 중심의 헤겔 철학과 육체 중심의 니체 철학이다. 헤겔은 세계를 정신의 발현으로 생각하여 물질보다는 정신을 우위에 두었지만 니체는 정신을 신체보다 하위의 요소로
격하시켰다. 물질과 정신에 대한 전제에서부터 헤겔과
차이점을 보이는 니체의 철학은 [차라투스트라는 이
렇게 말했다] 의 문체에도 반영되었다. 니체의 [차라
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는 이론적인 설명이나 논증 과정 없이 비유와 상징을 통해 전개된다. 문체 또한
잠언 식의 문체로 읽는 이로 하여금 이해보다는 느낌을
주는 성격이 짙다. 그래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읽으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는 되지 않지만 니체의 사상이 독자에게 내면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니체는 독자가 자신의 사상을 정신적으로 이해하길 바라지 않았다. 신체보다 하위에 있는 정신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철학을 진정 느끼고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길 원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느끼면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확실히 헤겔의 전개 방식과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정신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은 그들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헤겔은 세계의 역사를 진리의 생성 과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정신이 진리로 나아가는 발전 과정과 같다는 말인데, 말하자면 헤겔에게 있어서 세계는 정신을 중심으로 점점 발전하는 존재다. 헤겔의 세계관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통해 비판받는다. 확실히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헤겔의 발전적 세계관에 맞지 않는다. 영원히 같은 상태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세계관은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을 완전히 부정한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이를 통해 헤겔이 절대정신의 발현으로 상정한 신의 존재까지 부정된다. 니체의 세기적인 선언인 "신은 죽었다!"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헤겔이 살리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들뢰즈가 니체를 끌어들여 헤겔을 비판한 것은 니체의 철학을 비약한 결과라고 되레 비판한다. 들뢰즈가 니체의 위버멘쉬, 영원회귀 사상을 통해 헤겔의 변증법 자체를 부정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재고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확실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위버멘쉬에도 변증법적 발전 과정이 발견된다. 니체의 사상을 통해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을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변증법 그 자체의 메커니즘은 니체의 사상에 고스란히 수용되었다. 니체가 위버멘쉬를 설명하기 위해 차용한 비유가 바로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비유다.
니체는 도덕, 법, 종교에 구속받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낙타에 비유했다
낙타
사막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그것이 당연한 일인 양 살아가는 낙타처럼, 인간도 도덕, 법, 종교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간은 노예나 다름 없다.
사자
인간이 낙타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도덕, 법, 종교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바로 사자 상태로 살아가는 인간이다. 낙타로 살아가던 즉자존재가 자기모순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대자존재인 사자로 발전하는 것이다. 사자가 된 인간은 도덕과 법, 종교 등 자신을 속박하는 요소들을 파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마침내 도덕과 법, 종교를 제압한 인간은 위버멘쉬로 발전할 준비를 끝마친다.
어린아이
여기서 주의할 점은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에 적대적으로 대했던 도덕과 법과 종교를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과 법, 종교를 의식하는 사자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즉 도덕과 법과 종교에서 완전히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자신을 구속했던 요소들에 대한 의식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을 의식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그것들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다. 진정 자유로운 존재인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도덕과 법, 종교라는
존재마저 잊어버려야 한다. 이는 어린아이와 같다. 어린아이는 주변의 것들에 적대적인 감정을 품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단지 자기 자신의 성장에만 집중하는 순진
무구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어린아이는 자유로우며 이는 위버멘쉬의 자유와 같다. 사자 상태에서 어린아이로 한 단계 발전하면서 그 존재는 즉자-대자존재인 위버멘쉬로 완성된다
니체의 비유를 살펴보면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나아
가는 그 과정은 지극히 변증법적이다. 즉자존재인 낙타, 대자존재인 사자, 즉자-대자존재인 어린아이의 발전 과정은 헤겔이 설명한 그것과 일치한다. 니체의 철학이 비록 전제부터 헤겔과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지만,
니체의 위버멘쉬로 이르는 과정은 헤겔이 내세운 변증
법적 발전 과정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사상은 당시는 물론 이후에 등장하는 예술, 철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흔히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고
불리는 사조 아닌 사조가 니체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확실히 다니엘 디포(Daniel Defoe)의
유명한 소설 로빈슨 크루소] 를 패러디한 프랑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니체의 철학을 고스란히 반영한 탈식민주의 작품이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영원회귀 사상,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은 니체가 제시한 개념과 일맥 상통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중하나가 탈중심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니체의 사상은 포스트모더니즘과도 의미가 통한다. 탈중심의 사회학적 해석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에 이르러 구체화된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학교와 감옥은 모두 제도적으로 확립된 도덕과 양심을 구성원에게 내면화시키는 기관이라고 지적하며 니체가 말한 도덕과 제도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공유한다. 실제로 푸코의 연구는
니체의 철학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많다. 이외에도
현대 대중음악에서도 'Nietzsche'라는 이름을 제목으로 한 노래가 나오기도 하고 한국 힙합 가수 버벌진트
(VerbalJint)는 <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라는 노래를 발표할 정도로 동서양 문화권을 막론하고 니체의 철학은 다양하게 수용되고 활용된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말하면 현대의 다양한 문화적 산물은 니체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고 이는
니체의 위버멘쉬 발전 과정의 방법론을 제시한 헤겔의
변증법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즉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현대의 결과물은 헤겔의
변증법이 살려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질 들되즈는 헤겔에 대한 비판에 목적을 두고 니체를 극단적으로 이용했지만 우리는 니체의 위버멘쉬 사상이 헤겔의 볁.ㅇ법적 과정을 차용했다는 실상을 알 수 있다.그러나 핵심은 헤겔의 철학에 대한 진위 여부, 니체의 철학의 헤겔 비판 여부, 들뢰즈와 아도르노의 반변증법과 부정변증법이 아니다. 이런 것들보다 중요한 점은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닫는 것이다.
토마스 만의 한스 카스토르프
헤겔과 니체의 영향을 받은 소설가 중 유명한 소설가가 또 명 있다. 바로 토마스 만(Thomas Mann)이다. 토마스 만의 작품 중에서도 [마의 산] 은 특히 니체와 더불어 다양한 철학, 그 외에도 사회학, 지리학, 역사학, 공학, 생물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적 지식을 통틀어 소설 속에 융화시킨 대작이다. [마의산] 은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변증법적 성장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은 사촌이 입원해 있는 '베르크호프'라는 요양원으로 병문안을 간다. 그러나 베르크호프는 요양원 임에도 불구하고 치료되는 사람은 없고 죽어가는 사람 들만 속출할 뿐이다. 베르크호프의 이러한 기묘한 기운
은 소설 제목인 [마의 산] 에서도 느낄 수 있다. '마의
산'의 원제는 'Der Zauberberg'이다. 여기서 'Zaube
r'는 악마적인, 마력적인, 즉 위험하면서도 매력적인 의미를 지니고, 'berg'는 명사로서 산이라는 의미이다. 즉
두 가지 의미가 합성된 합성어인 'Zauberberg'는 마력적인 기운을 지닌 산이라는 뜻인데 이는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가 머무는 요양원의 공간적 특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공간 속에서 머물던 한스 카스토르프는 병문안을 갔다가 오히려 병을 얻어 사촌과 함께 입원하게 된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요양원으로 가기 전에는 풍족한 집안 환경 덕택에 향락과 사치를 일삼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요양원에서 만난 이탈리아인 환자 세템브리니와
폴란드인 환자 나프타의 지적이고 현학적인 토론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한다. 향락만을 즐기던
한스 카스토르프는 인문주의자인 세템브리니의 충고와 예수회 교도인 나프타의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는
동시에 그들의 상반된 의견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마저 보인다. 향락을 즐기던 자신과는 다르게 철학적이고 학문적으로 고뇌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한스 카스토르프는 자신만의 가치관을 정립해나간다.
그러던 중 한스 카스토르프는 스키를 타다가 눈 속에서 조난을 당하는데 그 때 꾼 꿈으로 인해 확실하게 자신만의 가치관이 완성된다. 꿈속에서 한스의 눈앞에는 아름다운 해변과 건강한 청년들과 소녀들, 그리고 동물들의 광경이
펼쳐졌다. 이러한 생명력 넘치는 풍경을 즐기던 한스는
언뜻 뒤를 돌아봤는데 그곳에는 해변과 대조적으로 낡고 이끼가 잔뜩 낀, 그로테스크한 신전이 있었다. 신전
안으로 들어간 한스는 갓난아기의 살을 뜯어먹는 노파의 끔찍한 모습을 보고 놀라 꿈에서 깬다
[마의 산 의 제6장 <눈> 에 등장한 이 장면은 여태까지 향락을 즐기던 한스의 태도를 전환시키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언변에 휘둘리던 자신에게서 벗어나 그들의 모순을
발견한다. 세템브리니의 경우 인간의 생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인문주의자인데 그는 시종일관 요양원에서 한스에게 도망가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요양원에 무력하게 머물러 있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세템브리니는 줄곧 세계평화를 주창했는데 역설적이 게도 이탈리아의 국경을 넓히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 한다는 의견을 내세운다. 반면 나프타는 예수회 교도답게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을 제어해야 영혼이 구원 받는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신앙과는 달리, 나프타는 예수회의 지원을 받아 물질적으로 풍족 하게 살아간다. 더불어 국가라는 집단은 부정하면서 신의 국가를 지지하는 역설적인 입장도 나타낸다. 이러한 그들의 모순을 통해 한스 카스토르프는 자기모순을 극복한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그들의 모순과 눈 속에서 꾼 꿈을 통해 도출한 결론은 "죽음의 엄숙함을 인정하고 삶의 생명력을 즐겨야 한다."이다.
세템브리니처럼 삶의 생명력을 존중하되 죽음의 엄숙함을 경시하지 않고, 나프타처럼 죽음의 엄숙함을 인정하되 삶의 생명력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한스 카스토르프가 도출해낸 결론이다.
마치 앞에 펼쳐진 생명력 넘치는 광경을 즐기는 동시에 뒤에는 죽음의 신전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듯이 삶의 방식 또한 죽음에서 삶을 창출해내는 연금술적 재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스는 한 단계 변증법적 성장을 이루어낸다.
자신만의 가치관을 확립한 한스에게 페페르코른이라는 환자가 나타난다. 페페르코른은 요양원에 입원하자
마자 연예인과 같은 매력을 발산하여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사람들은 언제나 페페르코른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그가 있는 곳에서는 항상 파티가 열렸다. 한스 또한 페페르코른의 매력에 이끌려 그와 가까이 지내기 시작하면서 페페르코른의 사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한스에게 삶의 유쾌함을 즐겨야 한다고 역설하는 페페
르코른의 모습에서 그는 자신의 가치관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페페르코른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는
페페르코른을 술의 신 바커스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바커스는 디오니소스를 로마식으로 읽은 것으로 결국엔
디오니소스를 가리킨다. 한스는 디오니소스적인 페페
르코른의 모습을 본받아 다시 향락을 즐기게 되는데 문
제는 페페르코른이 말하는 삶의 유쾌함이란 그저 쾌락
에만 머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매력에 도취된 한스 카스토르프는 요양원에 입원하기 전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다시 즉자존재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만의 가치관을 정립해 즉자-대자존
재로 한 단계 발전했던 그의 모습은 다시 즉자존재가
되어 가치관은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향락을 즐기며 살아가던 중 한스는 페페르코른의 모순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페페르코른은 증세가 악화되어 괴로워하다가 결국 자살을 택하는데 이는 한스 카스토르프에게다시한 번 자기모순을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 페페르코른이 말하는 삶의 유쾌함은 쾌락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결국 페페르코른은 삶의 생명력보다 죽음의 쾌락을 선택하는 쾌락주의자였던 것이다. 바커스로 비유된 그는 사실 디오니소스적인 향락이 아닌 동물적 쾌락에 방점을 찍은 사람이었다. 페페르코른의 쾌락은 니체가 말하는 생명력 넘치는 디오니소스적인 향락이 아니다. 한스는 이러한 모순을 자각함과 동시에 자신의 가치관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신도, 이성도 없어지고 오직 실존
만이 중요시되었다
대자존재에서 다시 한 번 지양할 준비를 하는 한스에게
지양의 기회가 주어진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한 것. 이 시기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는데 세템 브리니와 나프타의 감정적인 충돌이다. 세템브리니와 나프타는 여태껏 논리적이고 냉철한 토론만을 펼쳐왔고 비록 대립하는 부분이 있어도 두 사람 간에는 우정 이라는 감정까지 존재했다. 그런데 전쟁의 충격으로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토론은 감정적 설전으로 번져 결국 둘이 권총 대결을 하기에 이른다. 이 권총대결에서 세템브리니는 나프타가 아닌 하늘을 쏜다. 그 모습을 본 나프타는 세템브리니가 아닌 자신의 머리를 쏘며 자살한다. 이는 일종의 사건적 상징인데 토마스 만은 세템브리니와 나프타가 각각 하늘과 머리를, 즉 신과 이성을 쏘면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신도, 이성도 없는 혼란 상태가 발생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전쟁으로 인해 혼란하게 된 상황 속에서 인간 실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며 허무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당장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생명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인간은 존재하는 그 상태 자체에 공허함을 품을 수밖에 없다. 삶에 대한 이러한 허무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은 물론 유럽 사회를 중심으로 만연한 사회 문제였다. 충격과 불안, 허무 속에서 한스 카스토르프가 선택한 것은 도피도, 체념도 아니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참전하는 행보를 택한다. "죽음의 엄숙함을 인정하고 삶의 생명력을 즐겨야 한다."라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가치관은 한스가 전쟁에 참여하면서 비로소 실현된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죽음이 항상 도사리는 전쟁터 속에 머물면서 죽음의 엄숙함을 인식 하려고 한다. 한스의 생각에 삶의 생명력을 즐기기 위해선 죽음이라는 것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공간 속으로 적극적으로 파고들 필요가 있다. 이는 충격과 불안, 허무라는 무력감 속에 숨어있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전하는 토마스 만의 메시지이다. 그는 장편소설 [마의 산] 의 긴 내용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죽음의 엄숙함을 인정하고 삶의 생명력을 즐기길 바랐다. 이것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존립 근거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스 카스토르프는 참전을 선택함과 동시에 즉자-대자존재로 두 번째 변증법적 성장을 이룩해냈다.
토마스 만의 결론과 니체의 결론은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결론이 도출되는 기본적인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니체는 영원회귀로 인한 허무주의를 경계 하며 위버멘쉬의 생명력과 창조력을 강조한다. 토마스 만 또한 전쟁으로 인한 허무주의를 경계하며 죽음의 엄숙함을 인정함과 동시에 삶의 생명력을 즐기라고 충고 한다. 비록 그 최종 존재의 이상상에서는 니체의 위버 멘쉬와 성장을 마친 한스 카스토르프의 모습은 괴리가 있지만 두 존재 모두 생명력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위버멘쉬로.발전하는 과정과 한스 카스토르프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헤겔의 변증법을 그대로 따른다.
모든 존재는 변증법적 발전 과정을 겪으며 성장하는 것
이다.
과정의 중요성
흔히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을 한다. 단편적
으로 들으면 머릿속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마음으로 느껴지지는 않는 말이다. 목표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심각한 오류를
내재한 발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적 성장 과정을 니체의 [차라투
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연결시킨다면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은 진정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모든 존재는 발전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자기모순을 발견해야 한다. 헤겔이 말하는 발전적 회귀를 통한 생산적 부정, 그것이 바로 자기모순의 필요성을 한 마디로 압축한 표현이다. 운동 선수가 더 나은 선수가 되기 위해 습관을 발견하여 교정하듯, 인간이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 자신을 옭아매는
도덕, 법, 종교의 부정성을 발견하여 대항하듯, 한스 카스토르프가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가치관을 확립하고
실천하듯 모든 존재의 성장 이면에는 변증법적 메커니즘이 전제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성장의 초석으로 작용하는 자기모순의 발견은 부정적이고 극복해야할 대상이 그저 극복의 대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장
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삶에 있어서 자기모순, 부정으로 인한 고난은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자기모순을 발견하면 무시하거나 의식
속에 머물지 않도록 단호히 잊어버리지만 이러한 태도는 자신을 즉자존재에 머물게 할 뿐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즉자-대자존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대자존재라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아무리 자기모순으로 괴로움을
느껴도 그것은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극복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지 무조건적인 무시는
성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우리가 삶에 적용시켜야 하는 것은 바로 과정의 중요성
이다. 삶의 모든 부분은 나의 존재를 위해 필수적이다.
내 삶에서 쓸모없는 부분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