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세례 축일
제1독서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2,1-4.6-7<또는 이사 40,1-5.9-1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34-38<또는 티토 2,11-14; 3,4-7>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36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만민의 주님을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을 37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렸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5-16.21-22
그때에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21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요르단 강가에서 ”
우리는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라고 생각하면 다
‘물’로 씻는 예식이 생각 납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 들어가셔서 세례자
요한에게 침례로 세례를 받으셨다면 우리는 약식으로 이마에 물을 씻어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또 교회에 반기를 들도 나온 것이 “우리는 ‘침례’로 세례를 받는다.”라고
주장하는 교파가 있는데 사실 초대 교회부터 들어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단순히 물로 씻는 예식이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세례자 요한도 했던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불의 세례,’ ‘성령의 세례’가 사실은 핵심인 것입니다.
더 쉽게 풀어보자면 ‘물로 씻는 형식을 통하여 성령을 받는 것.’ 또는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얼핏 보면 물로 씻는 예식으로 보면 얼마나
간단하고 싱겁습니까? 세례자 요한의 세례에도 회개를 전제로 했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각개계층의 사람들에게 사회정의를 세우라고 세례자 요한은
역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통한 세례는 바로 성령의 세례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나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께 내려 오셨습니다.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가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의 명령대로 이 ‘삼위일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원죄의 사함을 받는다고 배워 왔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원조의 불순명으로 받은 죄는 그리스도의 순명으로, 그리스도의
세례로 원죄는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악의 세력에서 저지른 죄는 늘 우리를 어렵히고 있습니다.
때로 유혹으로 신앙의 약함으로 죄의 세력으로 떨어질 때가 있지요.
그러나 세례를 통하여 받은 성령께서는 우리가 다시 죄를 벗어버리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세례자 요한에게 머리를 숙이고 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복음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머리를 숙이고 겸손한 자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세례도 하나이고 성령도 하나이시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고
내 이웃 앞에서 먼저 세례자 요한,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삶,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바탕 위에 우리는 주님의 삶, 사랑의 삶을 지치지 않고
실천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레를 받으시고 유혹을 받으신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아가 마귀에게 세 가지의 심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느님 사랑, 하느님 말씀으로 그 모든 것을 물리치셨고 복음 선포의
소명을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세례를 받았지만 세상에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재물의 유혹, 누리려고 하는 유혹, 세상이 좋다고 하는 가치관에 취해 보고 싶은 유혹,
그래서 때로는 성의 유혹, 방종의 유혹, 어느 제약도 받지 않는 멋대로 뻗치며 휘두르고 싶은
유혹, 그 유혹들이 수를 셀 수 없이 기회마다 광야에서 주님을 유혹하듯 우리를 괴롭히고
어지럽게 합니다.
거기다닥 우리의 이웃이 항상 좋은 대상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배신으로, 때로는 무고하게,
때로는 은혜를 원수로 변해버리는 이웃입니다. 가득이나 유혹도 힘든데 이웃도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면 이 모든 것이 없는 그야말로 지상 낙원, 천사들만 있는 곳에 내가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느님 사랑, 주님 말씀에 대한 그리움, 주님과의 끊임없는
사랑의 만남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다면 주님의 말씀, 주님께 대한 기도가 있다면
우리는 광야에서의 주님처럼 이 세상을 굿굿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세상의 마귀, 세상의 가면, 폭력을 이기고 정의와 사랑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의 불을 보호하며 소외된 이웃을 위해 세례성사의 참된
의미를 실천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이사야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잠시 그 말씀에 다시 귀기우려 봅시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이사 42,1-3)
출처: 구름 흘러가는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