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지도자(1)
이승만의 불운(不運)은 인물이 너무 컸다는 점이다.
그는1875년 3월 26일 북한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에서 양녕대군의 15대손인 몰락한 왕실 후예로 과거에 낙방한 후 전국을 유람하며 술과 친구를 가까히 하며 가산을 탕진했던 이강선과 김말란 사이에서 3남 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15세때 부모가 간택한 이웃
동갑내기 박승선과 첫결혼을
하여 친혈육인 아들 이봉수를 낳았으나 일찍 여의고 본처
박씨와는 이혼을 한다.
프란체스카여사는 그의 두번째부인이 되는것이다.
이승만 생전에 큰일을 논의한 미국의 대통령은 5명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우드로우 윌슨, 해리 트루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이다. 이들 중 네 사람은
역대 미국 대통령 랭킹에서
모두 10위안에 든다.
미국의 가장 큰 인물들이 아주 작은 나라의 대통령 이승만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특히 대전략가인 닉슨의 이야기는 최고의 찬사이다.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한 유엔군 사령관은 마크 W. 클라크 대장이었다.
그는 전역한 뒤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 라는 회고록에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하여 생생한 체험기를 남겼다.
유엔군, 특히 미국의 도움으로 전쟁을 치르면서도 자존심을 세우면서 고집스럽게 국익을 추구하는 노 투사의 모습을, 존경심을 깔고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휴전을 반대하는 李 대통령 때문에 수많은 곤욕을 치렀지만 그가 쓴 글에서는 이대통령에 대한 적대적인 표현은없었다.
李 대통령의 애국심과 교양, 그리고 용기에 감동하여
글을 쓴것이다.
<한국전을 통하여 이승만은 아시아에서 장개석, 네루와 버금가는 위상을 확보했으며 그는 아시아의 반공국가 및 비 공산국가에서의 큰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는 공산주의자와의 투쟁과 때로는 미국과 맞서기를 서슴지 않는 꼭두각시가 아닌 강력한 지도자였다.
한국뿐 아니라 많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이승만은 극동 지역에 존엄과 자존심을 가져다준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의 동맹국들이긴 하지만 크고 강력한 나라들의 의지에 끌려가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맞서 전쟁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평판과 자존심은 그가 다른 아시아 정부를 상대할때 정상급보다 낮은 직급자는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