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太白)은 하얗더이
김 난 석
겨울의 태백을 보리란 마음에 새우잠으로 뒤척이다
아침 7시에 출발한다는 전세버스에 몸을 실었다.
예정보다 조금 늦은 7시 17분에 태백을 향한 시동이 걸리자
인솔자가 하얀 백설기 하나씩을 나눠주기에 받아들었다.
새벽바람을 쏘인 두 손이 따끈따끈한 게 마치
아랫목에 손을 집어넣은 듯하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건네주는 하얀 스프가
아랫배까지 훈훈하게 채워줬으니,
이렇게 해서 산행준비는 단단히 하게 된 셈이다.
“태백에 눈이 쌓여있을까요?”
“요즘 날씨가 푸근하고 더구나 비까지 내려서 아마 없을지도 몰라요.”
어느 일행의 걱정스런 질문에 인솔자는 여운도 남기지 않지만
겨울의 태백에 어찌 눈이 없으랴싶어 차창 밖을 내다보며 태백을 그려본다.
태백은 한반도 청량(脊梁)인 태백산맥의 주봉(해발 1,567미터)이다.
강원도 태백시 남부에 위치해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인 경계가 되기도 하고,
이곳에서 소백산맥이 갈라져 나와 남서쪽으로 발달하면서
함께 한반도 남부의 골간을 이루기도 한다.
산의 서쪽 사면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남한강의 지류인 옥동천으로 흘러들며,
동쪽 남쪽 북쪽 사면에서는 황지천의 지류가 발달하여
낙동강의 상류를 이루기도 한다.
태백은 흰 모래와 자갈이 쌓여 마치 눈이 덮인 것 같다하여
태백산이라 불렀다고도 하고
크고 맑은 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도 한다.
흰눈이 희끗희끗한 산야를 달리기 네 시간 만인 11시에
태백의 입구에 닿았다.
매표소 앞은 태백을 오르려는 사람들로 붐볐을 뿐 아니라
마치 마라톤 경주의 출발선처럼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다.
겨울산행이라서인지 모두들 등산화에
아이젠을 씌우고 오르기 시작했다.
높되 험하지 않아 등산이 쉽기도 하고
남성다운 웅장함과 후덕함을 지닌 산이라고 하니
나는 그냥 오르며 태백의 등줄기를 자박자박 밟아보기로 했다.
3부 능선쯤 오르니 가슴은 진양조의 숨결이 잔잔히 일기 시작했다.
숨을 고를 겸 옆으로 비켜서서 등산화에 아이젠을 씌우는 동안
하얀 눈을 소매에 걸친 총총한 겨울나무들이 둘러서서
의연한 자세로 오르라 이르는 듯 했다.
“기념사진 하나 찍으실래요?”
“그냥 오르시지요.”
산의 경사가 급해지면서 일행들의 가슴도 내 가슴도 차츰
중머리 중중머리 자진모리의 격랑이 차례로 올려치기 시작했다.
옆에서 오르고 있던 일행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지만
멈춰서고 싶지 않은 것은 관성 탓이기도 하고
태백의 정상에 대한 설렘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날씨가 오늘만 같으면 등산하기에 알맞지요?”
옆에 따라붙는 일행에게 다정함을 실어 이렇게 인사를 건네 봤다.
“웬걸요, 정상에 오르면 눈바람이 몰아칠 텐데요.”
그럴 테지.
정상에 오르는데 비바람이나 눈바람이 몰아치지 않았을 때가 언제 있었더냐.
산이 그렇고 삶이 그런 게 아니었던가.
조금 더 오르려니 북쪽하늘로부터 드문드문 가는눈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매섭게 휘몰아치는 북풍과 함께 눈보라가 앞을 가려
기어이 허리를 굽히고 가슴에 얼굴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의연하게 오르라던 겨울나무들의 몸짓만 의연할 뿐이었다.
휴-
휘몰이의 가슴을 달래가며 주목군락지로 들어서서 여기저기 둘러봤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들이 눈바람을 휘감으며
여기저기 버텨서있었다.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모를 가지에 하얀 눈이 곱게도 결빙되어
한없는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니,
아! 이것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하나?
말은 실용성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다.
따라서 일상의 자잘한 것들을 표현하는 데에는 유용하지만
일상을 초월하는 데에는 표현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지고지순한 모습과 마주하거나 생명의 신비와 맞닿게 되면
할 말을 잊게 된다.
이때 삶은 가슴 벅찬 희열에 빠져들게 된다.
삶은 신이 내려 준 벅찬 기쁨이며 한번만 허용된 기회다.
따라서 삶에 대한 사랑이나 삶의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모를 육신에
하얗게 눈꽃송이를 피워대고 있는 주목의 빈 가지를 바라보거나
예까지 올라와 이를 바라보는 내 자신을 돌아보노라니
그저 희열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가슴에 넘쳐흐르는 소망이야 서툰 말에라도 담아내고 싶다.
신이여!
여린 내 인연의 심신을 평안케 하옵고
내 품에 고이 사랑으로 머물다가
고운 사랑을 찾아 훨훨 날게 하소서.
눈꽃결빙 하나를 따내어 손바닥에 얹어놓고
마치 주문이라도 외듯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중얼거리다가
빈손일 뿐인 언 손을 비비며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민족을 흔히 백의민족이라 한다.
천팔백 년 중반 경 대원군이 군림하던 시절에
불란서의 로즈함대가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집적거릴 적에
백성들이 하도 신기해 강변에 늘어서서 쳐다보기만 했다 한다.
이를 본 함대의 제독은
조선에는 하얀 군복을 입은 조직된 군사들이 저렇게 많으냐면서
스스로 물러났다 한다.
하얀 무명옷을 즐겨 입는다 해서 백의민족이란 이름이
유래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민족은 두루두루 하얀색을 숭상하는 것 같다.
민족의 영산이라는 백두산은 하얀 머리를 떠올리게 하고
한라산의 백록담은 하얀 가슴을 떠올리게 하며
겨울의 태백은 하얀 눈꽃송이로 장식한 채
하늘 아래 장엄한 몸통을 모두 들어 내놓고 있으니,
하얀색을 숭상하는 마음이 자연에 하얀 옷을 입힌 것이기도 하고
하얀 자연이 민족의 심성에 하얀 옷을 입힌 것이기도 할 것이다.
산은 왜 오르는가.
결국 내려오기 위해 오르는 것이 아니던가.
겨울의 태백은 하얀 모습일 뿐이었으니,
그곳을 거쳐 내려온 나그네도 어깨 위로는 하얀 눈이 내려앉아있었다.
운해(雲海)에 휘말려 오르내리는 준봉(峻峰)
절벽
절벽
절벽
솟구치다 떨어짐은 천태만상(千態萬象)이라 했다
인연이란 묘한 것이
밤사이 이 봉 저 봉에 하늘이 내려와
문득 하얀 너울로 나타나고 말았으니
오를 것도 없이 하얗게 사로잡힐
이런 만남이 시작되었구나
서늘한 빙정(氷晶)은 혼미한 가슴팍에 꽂히고
아!
이 요망할 마음 어찌할 바 없음을
고스란히 너의 하얀 치마폭에
엎질러 버리고 말았으니
그 모습 들여다보노라면
하늘의 정녀(貞女)라도 만난 듯
두 눈은 부셔 살며시 떠 감기매
천지신명이 점지하실 때
순결한 목숨만 불어 넣었을 게다
그걸 알지 못하는 이들이야 봉마다
이런 저런 이름들을 붙여 보더라만
아서라
하얀 하늘과 합장하는
숙연한 네 모습이 네 이름인 것을
인연이란 묘한 것이
아!
이렇게 부르는 것만으로도 환희는 이느니
높을 것도 낮을 것도 없이
하얗게만 치켜 설지라.
(2007년 2월에, 계간 문학시대 봄호에 기고)
첫댓글 초미세먼지 자욱한 주말하늘이네요.
16년전 태백등반 하셨던 글 보며 한번도 못가본 산 이지만
마치 제가 방금 태백산에 올라갔다온것같은~~ 설산의 모습이 하얀모자 푹 눌러쓴것모양으로 상쾌한 공기를 한아름 호흡한듯 합니다.
뿌연 주말아침 이지만 좋은주말 보내시고
좋은글 감사합니다.
댓글이 본문보다 더 정겹습니다.
한번 올라보세요.
눈보라만 피하면 오를만 해요.
난석님~
글 잘 읽고 갑니다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네에 연초 날씨도 참 좋습니다.
깜놀 요즘 가신줄 알고 ㅎ
건강할때 경험하고 즐기는 삶에
한표입니다~~^^
ㅎㅎ
지금은 일자산 정도로만 ~
제가 다시태백산에 올라간거 처럼 생생하게 표현하셨습니다. 지금쯤 당골광장에 눈조각이 눈부실것 같습니다^^
그렇겠네요.
봄에는 살살 오를 수도 있겠지만
이젠 안전이 제일이 되었습니다. ㅎ
상동골짜기 냇가를 사이두고 강원도와 경상도로 나뉘는곳
5월달에도 산속에는 얼음속으로 물이 좔좔 흐르는곳
석탄박물관이 지어지기전에 잠시 살던곳입니다.
그때 그곳에살때 구경 많이할걸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래도 기억이 생생하시겠지요..
태백산 글속에 빠져서 열심정독 하였읍니다.
날이 풀리고 따뜻한 봄햇살이 내릴때
태백산엘 가보고 싶어 집니다.
계곡의 얼음장 밑으로 흐는 물소리
성급하게 피어오르는 태백산맥의 양지꽃
들을 상상하여 봅니다.
다리가 건각일 때 많이 답사하세요.
저는 지난 추억이나 뒤적거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