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전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가?
에크노모스 해전의 기본적인 전황과 규모 문제는 지난 글(http://cafe.daum.net/Europa/3L0P/2202)에서 다루었는데, 여기서는 다소간의 논의를 부연한다. 폴리비오스는 이 전투가 전함 330척대 350척(그 대부분은 5단선)으로 치러진 것으로 보았으나 실제로는 각기 200척 내외로 싸웠을 것이다. 이와 함께 전함에 탑승한 인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폴리비오스는 로마 전함에 한척당 120명의 병사가 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5단선에 보통 탑승하던 수병 4~50명에 비해 무척 많지만, 이 경우에는 상황상 자연스럽다. 기원전 256년 로마의 작전은 아프리카를 침공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함대는 지상군을 태우고 있었을 것이다. 어째서 수송함대를 따로 대동하는 대신 전함에 병사를 태웠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기란 어렵지만, 도중에 카르타고 함대와 만나게 될 것을 우려했던 정황은 분명하다.(Polyb.1.26.10-16) 따라서 혹시 표적이 될지도 모르는 수송함대는 최소화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폴리비오스는 카르타고 함대에도 역시 한척에 120명의 병사가 타고 있었다고 본 것 같다. 어째서 카르타고 함대도 이런 이례적인 체제를 취했는가? 만약 폴리비오스의 계산을 불신한다면, 전황 설명이 오히려 쉬울수도 있다. 즉, 카르타고 전함에는 120명의 병사가 아닌 40명 내외의 병사만 타고 있었다. 따라서 승선 인원 자체가 훨씬 적었기에 더 "빨랐다". 하지만 기동력으로 승부를 보지 못한채 배가 붙자, 병력에서 너무나 열세했던 나머지 패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게 설명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 편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만 할 수도 없다. 어쩌면 카르타고 함대는 원래부터 시칠리아에 증원군을 전달해 주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마 이 경우에는 따로 병력 수송 함대도 대동했을 것 같지만, 시칠리아에 도착해서 로마군의 움직임을 파악한 후 아프리카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였다면 해상에서 결전을 벌일때 밀리지 않기 위해 역시 전함에 병사를 늘렸을 것이다. 이는 설령 시칠리아 증원군을 원래 데려오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일어났음직한 일이다.
따라서 카르타고 함대 역시 인원이 증강되어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 이제 매척 420명을 할당할 때, 두 함대로 움직인 인원은 각기 대략 8만~10만명 가량이었을 것이다. 로마쪽에는 군마 수송대가 있었지만, 그 수가 특별히 많았는지 확인하기란 어렵다. 레굴루스의 아프리카 원정군에는 단 500명의 기병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아테나이 해군에서 쓰던 말 수송선은 30마리의 말을 태울 수 있었다.(6.43) 이것은 3단선의 한층에서만 노를 젓는 배(~선원 60명)였을 것이다.[카슨, p124] 로마의 수송선이 5단선을 베이스로 했다면 격납 공간은 더 컸을 것이다. 기원전 256년 당시의 함대에 20척 이상의 말 수송선이 필요했을 것 같지 않다. 만약 말 외에 보급품도 실어나르려 했다면 더 많은 배가 필요했겠지만, 설령 총 100척이 더 붙었다 해도 위 추정치를 심각하게 흔들것 같지 않다.(예컨대, 100척X100명/척=10,000명) 물론, 카르타고 전함의 승선 인원을 340명 수준으로 낮추어 본다면 그들의 수는 훨씬 적었을 테지만 말이다.
2. 카르타고군은 "까마귀"대응법을 알아냈는가?
하이켈하임의 유명한 개설서에서는 에크노모스 해전시, 작전대로 잘 되지는 않았지만 카르타고 사령관이 "까마귀"의 대비책을 이미 발견해서 갖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하이켈하임, p181-182] 생각컨대 이것은 아마도 에크노모스에서의 "양익 포위 의도설"을 말하고 있는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소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카르타고인들은 기원전 260년에 처음 "까마귀"를 목격하고 대패한 이래 기원전 258년에 사르디니아에서 또 패했고, 기원전 257년에 틴다리스에서도 다수의 배를 잃었다. 그만하면 어떻게 "까마귀"를 처리할 수 있을까 궁리하고 토론도 해 볼 시간은 넘칠만큼 있었을 것이므로, 에크노모스에서 나름대로 해법을 들고 나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런데 그 해법이 정말 적절한 것이었는가?
본격적인 충돌 전단계에서 카르타고 함대의 대부분은 일자로 넓게 퍼져 있었다. 그러다가 로마 함대가 공격해 오자, 중앙을 "후퇴시켰다." 그리하여 로마 전열은 길게 늘어선 카르타고 함대에 파고든 형태가 되는 바, 만일 여기에서 카르타고측의 좌, 우익이 호를 그리며 회전한다면 "까마귀"가 설치되지 않은 적함의 선미로 접근하여 충각 돌파를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장소와 원리는 좀 다르지만, 우리는 이것과 매우 비슷한 전술적 상황을 알고 있다. 바로 칸나이다.[Walbank, p87] 시칠리아 남해에서도 카르타고인들은 절묘한 전술로 로마군을 둘러싸려 했을까?
우리는 결국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가지고 이 문제를 공략할 수 밖에 없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에크노모스 전투에서 카르타고 좌, 우익은 로마 1, 2전대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나아가서 후방의 3, 4전대를 공격했다. 즉, 양익 포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포위 의도설의 관점에서 이 상황이 여전히 설명될 수는 있다. 하나는, 포위를 하려고 했지만 못했다는 것이다. 에크노모스에서 로마 함대는 델타(△)형의 진형을 펼쳐, 상당한 군세가 후방에 위치해 있었다. 만약 카르타고의 양익이 전위를 포위한다면 로마 함대의 후위가 여기에 달려들어, 카르타고 배들은 역으로 포위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로마 함대의 후위를 공격했던 것이다. 이 해석이 옳다면, 로마인들은 거의 "어쩌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카르타고군의 필살 전술을 회피한 셈이 된다.
또 다른 방법은, 카르타고 함대의 양익 지휘관이 전략을 잘 이해하지 못했거나, 혹은 동의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경우 카르타고측의 원래 의도는 1, 2전대 포위가 된다. 하지만 그 방법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크게 위험할 수 있으며, 두명이 모두 뭔가를 오해하거나 중앙부의 사령관과 대립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다소 어색해 보인다. 따라서 앞의 방식보다는 약한것 같다.
그런데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즉, 카르타고 함대의 양익이 포위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처음부터 그럴 의도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기실, 폴리비오스는 카르타고 함대의 중앙이 반격을 개시한 것은 로마의 1, 2전대를 후위로부터 충분히 떨어뜨려 놓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1.27.10) 이는 카르타고측의 기본적인 계획이 포위가 아니라 적을 분리하는데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물론 폴리비오스가 잘못 분석했는지도 모르지만, 딱히 그렇게 보아야 할만한 이유는 없다. 다음에서 생각해 보겠지만 이는 충분히 카르타고 함대가 사용했을법한 작전이다.
충각 돌진은 대단히 기술적인 전투 방법이다. 적함을 목표로 다가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고대 갤리선의 선수는 매우 단단했으며, 이를 피해 측면이나 선미를 노리기 위해서는 적선의 주위를 돌아야 한다. 또한 충돌 순간까지 빠른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거리도 확보되어야 한다. 따라서 좁은 장소에 수많은 전함이 모여있어서는 충각 돌진을 구사하기에 대단히 부적합한 환경이 조성된다. 에크노모스에서 양측은 각기 전함 200척 가량의 대함대를 끌고 왔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어쩔 수 없다. 일단 숫적으로 밀려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력을 끌어올린 결과 가장 믿고 의지할만한 전술을 쓰기 곤란해졌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논리적이면서도 가장 그럴듯한 해결책은, 적과 아군의 함대를 나누는 것이다. 즉, 카르타고인들이 전장의 분리를 희망했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폴리비오스의 전황 묘사는, 최소한 카르타고 함대의 중앙은 기동력을 살린 충각 돌진 전술을 써서 싸우려 했음을 시사하고 있다.(1.27.11) 중앙이 그랬다면, 왜 양익은 아니었겠는가? 만약 카르타고인들이 포위를 노렸다면, 그것은 아군의 전술적 장점을 포기하고 적이 특기로 삼는 선상 백병전의 농후한 가능성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어가는 격이 된다.[이 문제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Lazenby, Ch.6을 참조] 이런 이유에서, 나는 양익 포위가 당시로서는 로마 함대를 상대하기 위한 탁월한 해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실현되지 않았을 뿐더러, 정말 실현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실현되었다 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전국 분리는 카르타고측이 유리하게 전투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교묘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패배라는 결과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것도 별로 괜찮은 작전이라고는 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나는 하이켈하임 선생의 서술과는 달리 에크노모스에서도 끝내 카르타고군은 "까마귀"로 대표되는 로마 해군의 백병전 위주 전술에 제대로 대응할 방법을 갖고 있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해 헤르마이아에서 카르타고 함대는 간단히 패배당해 버렸다. 로마인들이 결국 두번의 해난 사고 때문에 "까마귀"가 배의 균형을 위태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장비를 포기했다면, 사실상 카르타고인들은 영영 "까마귀"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3. 카르타고 함대의 사령관은 누구였는가?
폴리비오스의 카르타고 함대 배치 설명에서는 표현상의 애매한 점이 있다. 그는 여기에서 카르타고 함대의 3/4은 한줄로 늘어서고, 나머지 1/4은 그 좌측면에 배치되었다고 썼다. 그리고 "우익의 지휘관은 한노", "좌익의 지휘관은 하밀카르"라고 소개했다.(1.27) 이것만 보면 마치 카르타고 함대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하밀카르와 한노가 각각 좌우를 지휘한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로마 함대와 충돌했을때, 카르타고 함대의 중앙은 하밀카르가 명령했던대로 후퇴를 시작했으며 또 하밀카르의 신호에 따라 반격으로 전환했다. 패배를 당했을 때도 중앙 함대는 하밀카르의 담당이었던 것으로 나온다.(1.27-28)
이러한 정황을 종합해 볼 때, 하밀카르가 지휘한 좌익이란 바로 일렬로 늘어선 카르타고 함대 3/4 가운데서의 좌익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Walbank, loc.cit.] 그렇다면 나머지 1/4을 담당했던 최좌익의 지휘관 이름은 누락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글에서는 폴리비오스의 설명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하밀카르의 파트를 계속 "중앙"으로 표기했다. 그러나 혹『역사』를 직접 찾아본다면 의아하게 여길 분도 계실것 같으므로 이렇게 짧막하게나마 설명을 붙인다.
라이오넬 카슨, 『고대의 배와 항해 이야기』, 김훈 역 (2001)
프리츠 하이켈하임, 『로마사』, 김덕수 역(1999)
J. F. Lazenby, 『The First Punic War』 (1996)
F. W. Walbank, 『A Historical Commentary on Polybius』I (1970)